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Jan 13. 2019

라면을 끓이(...ㄹ까 고민하)며

위로받은 자로서의 미안함

첫째 녀석이 배고프다고 난리다.

그러면서 바로 라면이 먹고 싶단다. 마침 그때. 거짓말같이 나는 '내가 라면을 먹지 않는 이유'라는 글을 휴대폰으로 읽고 있을 때였다. 글의 요지는, 라면에 들어간 성분을 하나하나 다 따져보니 것은 사람이 먹을 것이 못된다는 내용이었다. 라면을 끓여 주겠다는 대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첫째와, 라면을 먹지 않는 이유를 가지런하게 그러나 삭막하게 정리해 놓은 글 사이에서 나는 고뇌했다.


잠시 기다려보라며 그 글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는데, 의외였다. 좋은 정보를 줘서 고맙다는 사람들보다는 라면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떤 사람은 과격하게 글쓴이를 공격했다. 혼자만 안 먹으면 되지, 이렇게 까탈스러울 거 있냐면서 같이 있는 사람이 참 힘들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써놨다. 나는 또 고뇌했다. 나는 어느 쪽인가. 몸에 좋지 않다는 걸(과학적으로 분명하게 증명된 것은 없다. 과하면 문제겠지만.) 알고 이제부터라도 먹지 말아야 하나, 아니 우리 '라면님'에게 이런 신성모독과 같은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냐고 오히려 댓글을 달아야 하는 것인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나가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한 건 나는 라면에게 위로를 받았던 적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헛헛할 때, 한 밤에 적적한 외롭고도 가련한 나라는 존재에게, 한창의 나이에 춥고 배고픈 군대에서 나는 분명 라면에게 위로받다. 그리고는 라면을 만든 사람에게 노벨상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고. 그러니 그러한 고뇌를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퉁퉁 부은 얼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나는 그것의 '위로'를 택한 때가 훨씬 많았다. 다음 날의 후회도, 그 순간의 따뜻하고도 시원한 위로를 막을 수 없던 것이다. 아, 갑자기 위로받은 자로서 고뇌를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앞선다.


소설가 김훈 선생님은 우리의 정서에는 라면이라는 인이 박여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신봉한다. 내가 신봉하고 말고의 것이 아니고, 내 입이 그렇고 몸이 그렇다. 심지어는 '영혼'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다. 추운 겨울날, 스트레스가 가득할 때, 배는 고프고, 뭔가 매콤한 것과 국물이 떠오를 때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먹고 싶은 게 라면이니까. 그리고 그 위로는 몸과 마음 영혼을 관통하고도 남는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첫째 녀석이 다시 한번 아빠를 외친다.

잠시 주춤했던 나를 반성하며, 나는 라면을 집어 들고는 그것을 끓였다.


팔팔 끓는 물속에 수프를 넣으니 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이 새삼 반가웠다.

친히 그 속으로 들어가 몸을 풀어헤치는 면발은 입을 설레게 했다.


글을 읽고 나서 슬쩍 본, 봉지 뒷면에 쓰여 있는 이름 모를 성분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라면을 끓여냈다.


라면은 맛있었고, 또다시 위로였다.

그것은 첫째 녀석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은 성분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것보단, 그렇게 즐겁게 함께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그걸로 된 거란 생각과 함께.




'직장내공' 소장하며 자세히 읽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소장하며 자세히 읽기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소장하며 자세히 읽기

매거진의 이전글 그 바다의 목소리 슬로베니아 '피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