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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계절 Dec 26. 2021

4. 첫 번째 공모전

부활(Resurrection)

2038년 5월 28일 13:30


“래너드 스티븐 씨의 퇴원 수속이 완료되었으니 14시까지 병원 주차장 A-1 구역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병원에 실려와 응급 수술을 받은지도 어느덧 두 달이 훌쩍 지났다. 규칙적인 생활, 약물 요법, 재활 운동 등 체계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며 래너드의 상태는 호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서 걷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다리의 감각은 돌아왔으나, 손상된 운동 신경이 회복될 가능성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마치 지옥의 늪에서 빠져나오려 팔을 허우적대고 있으나, 늪속에 잠긴 두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고 점점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재활 운동과 약물 요법을 계속 병행하면 70%선 까지는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래너드는 그것이 희망 고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래너드, 드디어 퇴원이네. ㅎㅎ축하해~~”


“아델린, 이게 축하할 일인지 모르겠어.. 난 여전히 혼자서는 두 발로 설 수도 없다고. 이대로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몰라...”


“에이 무슨 그런 울트라 캡숑 비관 모드로 빠지는 거야? 내 알고리즘으로 계산해 보면  3개월 안에 반드시 두 발로 설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비관 모드는 NO, 낙관 모드 YES!!!. 알았지?”


잠시 후 간호사가 퇴원 키트를 실은 카트를 끌고 입원실로 들어왔다. 카트의 바닥과 덮개 사이의 큰 공간에는 휠체어처럼 생긴 물체가 담겨 있었고, 덮개 위에는 청색 가방과 하얀색 가방이 실려 있었다.


“'2038-0528-001', 환자를 태워줘.”

  간호사의 한 마디에 카트에 실려 있던 휠체어가 스스로 움직이더니 래너드가 누워있는 병상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율 주행 택시 안에 부착되어 있는 의자 1개가 그대로 떨어져 나와 움직이는 것 같았고, 앞쪽으로는 20인치 스크린이, 좌우로는 슬라이딩 도어와 타고 내릴 때 지탱할 수 있는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었다.

  래너드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자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며 휠체어의 의자 옆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손잡이를 잡고 의자에 앉으니 몸 전체가 편안하게 감싸지는 듯한 안락함이 느껴졌다.


“2038-0528-001 입니다. 페어링을 시작하겠으니 지문 인증을 해 주세요.”


래너드가 손목시계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페어링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페어링이 완료되었습니다. 호출명을 등록해 주세요. 등록된 호출명은 음성 인식을 통해 등록자 본인에 의해서만 휠체어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호출명을 뭐로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최근에 읽었던 단테의 신곡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흘 동안 지옥에서 온갖 악마들에게 쫓기며 고초를 겪던 단테는 간신히 암흑의 세계를 벗어나 반짝이는 별들이 박힌 하늘과 정좌산이 보이는 연옥 문턱에 도착하였다.

새로운 공기를 호흡하고 시를 노래하면서 바라보던 별들에게서 눈을 떼자, 반백의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얼굴엔 별들의 빛을 가득 받고 있었으므로 단테는 그가 마치 태양빛을 듬뿍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토” 래너드의 짧은 외침에 호출명 등록이 완료되었다.


연옥의 어귀에서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카토가 단테에게 연옥을 통과하여 천국의 입구에 다다르는 길을 안내해 준 것처럼, 래너드에게는 병원에서 퇴원하는 것이 마치 연옥으로 향하는 산의 입구에 발걸음을 내딛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휠체어를 감싸고 있는 하얀색 천이 더더욱 카토 노인을 연상케 하였다.



간호사가 카트 위에 있던 청색, 흰색 가방을 휠체어 뒤 트렁크에 실어주며 당부하였다.


“청색 가방에는 병원에 입원할 때 몸에 지니고 있던 귀중품들이 들어 있으니 혹시 빠진 게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흰색 가방에는 약, 재활 훈련 키트 및 설명서, 비상 호출기가 들어 있으니 설명서를 꼼꼼히 읽고, 생활하셔야 합니다.”


간호사의 설명을 듣고 청색 가방을 살펴보던 래너드에게 낯선 물건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신분증, 책, 지갑 사이에 유난히 하얀색 빛을 반짝이고 있는 UWB 드라이브 스틱이 끼어 있었다.


“저, 이건 제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어디에 있던 건가요?”


“아 그건 환자분이 병원에 입원할 때 함께 왔던 사브리나라는 여고생이 전해달라고 맡기고 간 거예요”


래너드는 나중에 사브리나에게 연락하여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병실을 나왔다. 휠체어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자율주행 택시가 미리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휠체어가 문 앞에 다다르자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며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리프트가 앞으로 길게 뻗어 나와 바닥에 놓였다. 리프트에 이끌려 부드럽게 택시 안으로 들어가자 평상시 타던 택시와 다를 바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비행기 조정석에 앉은 듯 전면부터 옆면까지 시원하게 펼쳐지는 윈도를 보니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이렇게 영원히 반신 불구의 장애인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이때, 그동안 조용히 있던 아델린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래너드에게 말을 걸었다.


“래너드, 주치의 선생님 말씀대로 약물 치료하고 재활치료를 열심히 하면 예전처럼 돌아올 수 있을 거야. 70% 수준이면 과격하게 움직이는 걸 제외한 가벼운 활동은 별 무리 없이 할 수 있다는 의미거든. 그러니, 힘을 내자.”


아델린의 위로에 조금 힘이 나는 듯했지만, 사고 이후 예전과 같이 두뇌 회전이 되지 않는 것이 더 큰 걱정이었다.  


래너드의 걱정을 읽는 듯 아델린이 한마디 덧 붙였다.


“래너드, 그리고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면 척수 재생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잖아?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1등은 문제없을 거라고~~. 지난번 내 알고리즘 솜씨 기억나지? ㅎㅎ”


병원에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시나리오 작가 공모전이 다시 떠올랐다. 6월 30일이 마감이니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2달 전에 아델린이 알고리즘을 돌려 만들어준 시나리오의 시놉시스가 떠올랐다. 정말 기발하고 참신한 주제였지만,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두뇌 상태라면 더 어려운 일이 리라.


“그래 아델린, 그렇게 되면 참 좋겠다....” 


영혼 없는 래너드의 답변에 아델린은 명상 음악을 틀어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단단 단단  단단 단단.... 딴따다다단   딴따다단... 딴따다다단   딴따다단....”


음악이 흘러나오자 래너드의 무기력하고 답답한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델린 이 음악 제목이 뭐지?”


“어때 마음이 좀 풀리지?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는 음악이 최고지. 낭만파 클래식 음악. 그러고 보면 인간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피아노라는 악기를 발명한 것도 참 신기해. ㅎㅎ내가 너무 낭만적이 돼버렸네. 참, 음악 제목을 물어봤었지? Riot의 Wigs라는 제목의 연주곡이야. 

맑은 피아노 선율이 마음속에 쌓여 있는 무거운 침전물들을 잘게 부스러 뜨려 산화시켜 버린다고 해.”


래너드는 아델린이 선곡해 준 음악을 들으며 편안한 맘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20세기 작가 클럽 동호회 회장인 요세프에게서 퇴원을 축하한다는 연락이 왔다.


“어이 래너드, 퇴원 축하해. 열심히 재활 훈련해서 완벽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내가 기도해 줄게. 아, 그리고 열흘 뒤에 2분기 동호회 모임이 있으니까 꼭 참석하도록 해. 알겠지? 시나리오 공모전 관련하여 내가 확보한 비밀 정보를 알려 줄테니까...ㅎㅎ”


두 달 만에 돌아온 집은, 그날 새벽 공항으로 출발할 때 모습 그대로였다. 다급하게 울리던 전화벨 소리... 빗길에 미끄러져 뒤집히던 순간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던 순간 제시 아줌마로부터 VR 메시지가 왔다.


“래너드, 퇴원 축하한다. 엄마도 한 달 전 퇴원한 뒤로 잘 지내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재활 운동 열심히 하도록 해. 내가 엄마한테는 잘 이야기해 놓았으니 염려 안 해도 돼~~”


“네, 제시 아줌마. 고마워요. 재활 운동 열심히 해서 곧 찾아뵐게요~~”


제시 아줌마가 엄마 곁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제시 아줌마의 존재가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저녁에는 이웃 찰리가 퇴원 축하 베이컨 샌드위치를 가져다주었다. 두 달 전보다 훨씬 더 맛있어진 것 같았다. 엑스 딜리버리 플랫폼에 요리사로 등록된 후 베이컨 샌드위치의 인기가 폭발한 덕에, 지난주에 1호 체인점을 열었다며 매우 즐거워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기뻐하는 찰리를 보니 내심 부러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고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나도,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말 거야.”


베란다 바깥으로 보이는 밀레니엄 브리지와 그 아래의 템즈강을 바라보며 희망의 불씨를 당겨 보지만, 꺼질 듯 말 듯 위태롭기만 하다.


2038년 6월 7일 오후 2시


퇴원하고 나서 열흘이 훌쩍 지나갔다. 열흘 동안 지난번에 아델린이 알고리즘을 돌려 만들어 준 시놉시스와 목차에 살을 붙이려 각고의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사실 생각만 앞섰지, 작업 파일은 열어 보지도 못했다.


오늘은 “20세기 작가 클럽” 모임이 있는 날이라, 동호회 멤버들과 이야기하며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 본다. 몸이 정상이 아니기에 오늘 모임은 온라인으로 참석하기로 했다.


MR안경을 끼고, 접속 코드를 누르자 이미 모든 멤버들이 합류하여 래너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 요세프가 1984 마크가 박힌 모자와 텔레스크린이 가슴 전체에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조지 오웰의 광팬 다운 복장이었다. 이어서 헬레나, 가브리엘, 리차드, 제임스, 크리스틴, 쯔예이, 마사가 돌아가며 각자의 안부를 전하며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미스터 코넌 도일 한국의 동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동규입니다. 제가 오늘은 여러분들께 따끈따끈하면서 놀라운 뉴스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과연 어떤 소식일지 궁금하신가요? 그러면 제 말을 잘 들어 보세요.”


조만간 동영상 제작 및 공유 플랫폼 시장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 거예요. 한국의 벤처회사에서 실감 영화 제작 플랫폼('WeFlex')을 만들었는데, 장난이 아니에요. 엄청납니다. 이제 영화감독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겁니다. 특히 우리 같은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기회예요. 시나리오만 입력하면 영화가 저절로 만들어지거든요. 이미 구골에서 10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인수를 타진하고 있다고 해요. 제품 공식 발표회가 한 달 뒤에 열릴 예정인데 벤처회사 대표 김우현은 한국에선 이미 빅 스타가 됐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 멀뚱멀뚱 동규를 바라보고 있는 멤버들에게, 동규가 한 마디 덧 붙였다.


“쉽게 말하면 누구나 영화나 드라마의 작가, 감독이 되어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예요. 스튜디오, 의상, 조명, 촬영, 배우 모두 앱 하나로 가상공간에서 자동으로 가공되어 실감 영상으로 만들어져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한 달뒤 제품 발표회 때 시연까지 있을 예정이니 꼭 보도록 하세요.ㅎㅎ”


“아, 그리고 유O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유O브 크리에이터들이 대거 위플렉스로 이주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되고 있어요.어쩌면 구골의  유O브 사업부가 위플렉스에 인수되는 깜짝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요.”


“그래? 무슨 앱인지 알듯 모를 듯하네. 좋아 우리 그럼 한 달 뒤 제품 발표회 때 함께 참석해 보도록 하자”


요세프가 한 달 뒤 임시 모임을 제안하면서, 시나리오 공모전으로 화제를 돌렸다.


“자, 지난번 래너드가 말한 시나리오 작가 공모전이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다들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동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판타지 추리 소설을 준비하고 있는데, 김우현 대표가 개발한 실감 영상 제작 앱(WeFlex)에서 모티브를 얻었어.”   

  한 무명작가 지망생 A가 만들어 WeFlex에 업로드한 드라마 시리즈물이 메가 히트를 친다. 1편('황금색 연구')은 6개월 만에 전 세계 시청자 수 10억을 돌파하였고, 2편('100만 명의 서명')은 4개월 만에 20억, 3편('마법의 사중주')은 3개월 만에 전 세계 40억 시청자를 사로잡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돈방석에 안게 된다.

  그런데, 1편이 공개되고 나서 6개월 뒤 드라마 내용과 똑같은 범죄가 일어난다. 2편이 공개되고 난 후는 4개월, 3편이 공개되고 난 후에는 정확히 3개월 뒤 역시 드라마 내용과 똑같은 상황이 현실에서 재현되기 시작한다.

  과연,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는 마스터 마인드(빌런)는 누구인가? 사람이 설계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꾸며진 이 모든 사건은 과연 어떤 힘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A는 미래 예지 능력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 높은 곳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바라보는 신의 주사위 놀음인 것일까?......

  “ㅎㅎ어때? 코넌 도일의 작품, 코인 생태계의 음모, 우주 탄생의 비밀을 엮어서 3개월간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구상한 내 인생 최대의 역작이야.”


“물론 인공지능 비서 '왓슨'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야. 왓슨 고마워^^”


동규의 칭찬에 왓슨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동규 너의 노력과 상상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야. 나는 그냥 네가 입력해준 데이터로 알고리즘을 돌려 밑그림만 그려줬을 뿐일걸. 헤헤.”


동규와 왓슨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사가 감탄사를 뱉으며 말했다.


“우와~ 누가 물리학도 아니랄까 우주 탄생의 비밀까지 엮다니 정말 대단한 거 같아. 브라보~~”

래너드도 동규가 구상한 시나리오에 감탄사가 나왔다.


“동규, 정말 대단한 스케일인 것 같아. 나 같은 3류 작가 지망생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야. 역시 한국인들의 창작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해. 이번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건 당연하고 대상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아.”


래너드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동규의 능력에 대한 부러움이 뒤섞여 절망의 씨앗이 움트는 것 같았다.


이때, 회장 요세프가 맞장구를 치며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동규의 작품은 스케일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마무리만 잘하면 기대해 볼 만해. 그런데, 내가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이번 시나리오 공모전을 노리는 쟁쟁한 작가들이 정말 많대”


“너희들 요즘 대세 작가 조힐 2세, 중견작가 조나단 알지? 두 사람도 이번 공모에 참가 한대.”


“뭐라고? 유명 기성 작가가 이런 공모전에 참여하는 건 반칙인데...”  마사가 흥분하여 말했다..


요세프는 두 작가에 대한 부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글치, 두 사람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데다 고성능 인공지능 앱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고급 데이터 소스에도 접근할 수 있어서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 산다고 보면 돼”


“조힐 2세만 봐도 할아버지의 기풍을 이어받아서 작년에만 밀리언셀러 작품을 2개나 출간하며 전 세계 출판시장을 휩쓸고 있지. 조나단이야 뭐 말할 것도 없이 누구나 다 아는 베테랑 베스트셀러 작가고...”


“두 사람이 1,2 등을 휩쓸어 갈 거라는 것이 이미 기정 사실화된 상태라고 보면 돼. 물론 전문 심사위원 투표 외에도 일반 독자 투표가 50%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서도...”


요세프가 알려주겠다던 비밀 정보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시선이 래너드에게로 향했다.


“래너드, 지난번에 네가 구상한 작품은 어때? 사고 때문에 시간이 부족했을 것 같긴 한데, 네 작품도 고전, 판타지, 로맨스가 혼합된 신선한 장르였던 걸로 기억나. 이제 20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마무리해서 응모해 보도록 해”


사실, 병원에 입원 후 아델린이 첫 번째 알고리즘을 돌려 등장인물, 시놉시스, 목차를 만들어준 이후 진도가 거의 못 나간 상태이다. 정확히 말하면 재활에 신경을 쓰느라 원고 집필 작업을 전혀 하지 못했다.


“어, 그래야지. 남은 기간 동안 노력해 볼게...” 대답은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두뇌 회전도 예전 같지 않고, 넘쳐흐르던 열정과 에너지도 고갈된 상태다.


래너드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때 아델린이 귓속말로 속삭이며 말했다.


“래너드, 사실 네가 재활하는 동안 내가 살을 좀 붙여 놨어. 이따가 집에 가서 한번 확인하고 의견 줘.ㅎㅎ 나밖에 없지?”


두 달 동안 작품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아델린이었는데, 마치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아델린 고마워”


각자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다 보니 어느새 모임을 마칠 시간이 되었다. 회장 요세프가 오늘 모임의 마감을 선언하며 마무리 인사를 했다.


“자, 그럼 2038년 2분기 모임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동규와 래너드는 6월 말까지 작품 잘 마무리해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7월 10일 한국의 김우현 대표가 공개할 WeFlex 앱 발표회는 다 같이 참석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동호회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래너드는 잔뜩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왜 동규처럼, 기발하고 창의적인 글을 못 쓰는 걸까... 체력도 떨어지고... 사고 난 이후로 더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 콜록콜록”


“래너드, 내가 볼 때 작가로서의 능력만 보면 결코 동규보다 떨어지지 않아. 그리고,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럴까... 사고가 안 났더라도 아마 동규와 같이 멋진 작품은 쓰지 못했을 것 같아.. 콜록콜록”


“래너드, 요즘 기침이 잦은대 아무래도 주치의 선생님께 진단을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내일 오전으로 예약 잡아 놓을게”


“그래, 고마워 아델린”


“고맙긴, 난 언제나 너의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그러니 너도 건강해야 해~~ㅎㅎ”


“응. 그나저나, 아델린이 다듬었다는 작품을 한번 볼까?”


*작품 제안 #001 (version 0.88)

Drafted by 2038-0328-0125(Adeline), updated at 2038년 6월 9일 04시 20분, revised 47 times


제목 : Across the time (feat. 영적 교감의 근원을 찾아서)


주요 등장인물

1923년 - 버지니아 울프(비운의 작가, 42세)

1961년 - 클라리사 본(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속 여주인공, 42세)

1999년 - 로라 브라운(래너드 스티븐의 작품 속 여주인공, 63세)

2037년 - 래너드 스티븐(작가 지망생, 20세)


시놉시스

20세기를 살았던 비운의 작가(버지니아 울프), 21세기를 살고 있는 작가 지망생(래너드 스티븐). 두 작가 모두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전개하는 동일한 기법으로, 각 자의 시대에서 작품을 집필 중이다. 두 작가가 실세계의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작품을 집필하는 38일 동안 이야기가 전개되며, 놀랍게도 각각의 작품 속 주인공도 허구의 세계에서 38년이라는 시간을 가로질러 운명적인 소통을 하게 된다.


실세계와 허구의 세계를 나누는 공간 차원의 경계, 20세기와 21세기를 나누는 시간 차원의 경계. 두 작가의 펜 끝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시공간의 경계를 초월한 영적 교감을 통해 작품을 쓰는 작가의 삶과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영적 교감의 근원은 과연 무엇인가?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을때 소름 돋는 놀라운 반전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목차

1. 1923년 리치몬드 교외의 어느 하루

2. 한송이 꽃을 당신께 바칩니다.

3. 연이어 찾아온 불운

4. 전화 위복의 씨앗

5. 알 수 없는 교감의 통로

6. 1 x 1 = 4

7. 사라져 버린 흔적

8.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다

9. 호수의 심연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

10. 드디어 알게 된 진실


본문

1장. 1923년 리치몬드 교외의 어느 하루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난 버지니아는 오늘도 어김없이 기차역으로 향했다. 런던행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자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오른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한다. 하지만 기차에 올라탈 용기가 아직 없는 건지 괜히 바닥의 돌멩이를 발로 밟아 뭉개며 바닥과 기차를 번갈아 바라보며 동경의 시선만 보낼 뿐이다.

  그사이, 런던행 기차는 다시 플랫폼을 떠나 시야에서 사라져 가고, 플랫폼 벤치로 돌아온 버지니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절망의 표정을 지으며 멀어져 가는 기차의 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 순간 그녀가 앉아 있는 공간이 대륙을 가로질러 미국 버지니아주의 대저택 속으로 전환되었다. 거실 창문 앞 의자에 앉아서 한 손엔 노트를 다른 한 손엔 펜을 들고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벽에는 1961년 3월 달력이 걸려있고, 시곗바늘은 오후 1시를 막 넘어서고 있다. 이제 서서히 시작할 시간인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시야에 클라리사 본 여사가 나타났다. 


  뭔가 불안감에 사로잡힌 듯 클라리사의 시선은 한 곳을 차분하게 응시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바쁘게 오가며 보는 사람마저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클라리사 본의 머릿속) “내가 과연 오늘 인터뷰를 잘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할까? 여자라고 무시하진 않을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클라리사의 머릿속을 간신히 빠져나온 버지니아의 시선이 잠시 노트에 머물렀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몸뚱이는 다시 기차 플랫폼 벤치로 돌아왔다. 머리를 싸매고 있던 두 손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활짝 켰다.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이내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다시 집으로 향했다. 한 손엔 노트와 펜을 움켜잡고, 다른 한 손은 경쾌하게 흔들면서....  

..........


놀라웠다. 47번이나 다듬었다고? 목차와 본문을 읽어 내려가는 래너드의 동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두 달 전 검토했을 때는 목차도 미완이었고, 본문은 전혀 채워져 있지 않았는데, 오늘은 거의 80% 이상 완성된 모습이었다. 


시놉시스도 보완이 되었고, 제목만 읽어봐도 기대가 될 만큼 목차가 정비되었다. 본문도 등장인물의 심리와 행동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당장 제출해도 될 만큼 높은 완성도였다.


“아델린, 너무 대단해. 언제 이렇게 작업을 한 거야? 나한테 한마디도 없이?”


“아, 네가 재활 훈련에 집중하지 못할까 봐 일부러 얘기 안 했어. 그런데 가장 중요한 8장, 9장, 10장의 내용은 내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로는 못 채우겠어. 아무래도 여기부터는 래너드 너의 식스 센스가 필요할 듯해.”


1시간 동안 1장에서 7장까지를 빠르게 훑어본 래너드는, 아델린이 왜 8장부터 막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이 아닌 삶을 택하는 것으로 시놉시스를 구성하 했지만, 그 개연성을 설득력 있게 연결하는 고리를 못 찾은 것이다.  


“아델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네 말대로 8장부터가 클라이맥스인데, 버지니아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바꾼 이유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어.”


“버지니아는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 있었을까?”


“음... 글쎄.. 남편이 좀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을까? 친구들은? 이웃 주민들은? 아니, 국가에서 나서서 보호해줬어야 하는 거 아냐?”


“단순히 우울증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해. 버지니아가 보여주었던 활발한 외부 활동을 생각해 보면 이건 너무 허무하잖아”


“혹시, 다른 누군가의 음모 같은 게 있진 않았을까? 여성의 사회 참여를 곱지 않게 생각하는 여성 혐오 단체? 보수 단체?....”


남은 20일 동안, 아델린과 래너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의 후반부를 다듬는 작업을 진행했다. 쓰고 의논하고, 고치는 작업을 수십 번 반복했다.


마감일 전날까지도 흡족한 결말을 내지 못해 밤을 지새웠다. 결국 닫힌 결말이 아닌 열린 결말을 내며 작품의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6월 30일 23:58분, 마감을 2분 남겨 놓고, 원고 제출 버튼을 눌렀다.


“휴, 겨우 제출은 했는데.. 프롤로그를 좀 더 장대하게 넣었으면 좋았을 텐데... 결론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다듬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너무 아쉬워... 콜록콜록”


원고 제출을 했다는 안도감보다는, 완벽한 결말을 내지 못한 아쉬움이 더 크게 밀려왔다.


“래너드, 몸 상태도 안 좋은데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해. 내 알고리즘보다 래너드 너의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더 뛰어나다는 걸 새삼 느꼈어.”


“에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아델린, 네가 없었으면 원고 제출은커녕 절반도 완성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도 너무 아쉽다. 버지니아 울프의 내면을 읽을 수만 있다면..그녀와 단 하루만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더 완벽한 결말을 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달콤한 꿈나라로 빠져 들었다. 일주일 뒤에 있을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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