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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계절 Dec 13. 2021

3. 잃어버린 UWB 드라이브

부활(Resurrection)

2038년 1월 25일 04:00


“빠바밤 빠바밤 빠바밤 빠바바바바 밤 빠바밤 빠바바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그의 아침의 기분' 연주곡이 새벽의 적막을 깨며 울려 퍼지고 있다. 사실 아들러는 4시 1분 전에 이미 잠에서 깨어 곧이어 연주될 음악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초되어 홀로 남겨진 무인도 해변에서 깨어나, 밝아오는 아침 태양을 맞으며 희망의 에너지를 온몸 구석구석 충전하는 듯한 환희를 느끼는 순간이다. 게다가 오늘은 10년 동안 연구한 결실을 보게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 아닌가. 지난밤 잠자리에 들기 전 품었던 설렘이 아직도 따끈따끈한 온기를 뿜으며 아들러의 심장을 펌프질하고 있다.

3분 43초 간의 연주가 끝나자 온몸의 혈관에 침전되어 있던 묵은 찌꺼기가 모두 깨끗하게 정화된 듯한 상쾌함이 밀려왔다. 이어서 혈관을 둘러싼 근육과 인대를 스트레칭으로 풀어주고, 샤워까지 마치자 4시 25분이 되었다. 왁스로 깔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가 오늘따라 더 윤기를 내며 각진 얼굴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4시 30분에 맞춰 도착한 모닝캄 택시에 올라타 연구소를 향해 출발하였다.


연구소까지 가는 15분은 하루의 일과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의 머릿속은 오늘부터 시작할 비밀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10년 동안 뇌정신 분석에 거의 모든 시간을 투자해왔지만, 사람의 뇌에서 직접 데이터를 뽑아 실험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극비 프로젝트라 연구소 내에서도 실체를 알고 있는 이는 단 두 명뿐이다.


오늘 진행할 실험의 프로시저를 처음부터 끝까지 점검하는 동안 어느새 연구소의 정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 간판이 선분홍 빛을 내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건물 현관 출입구를 통과하고, 그의 연구소 방에 들어가니 벽시계가 4시 48분을 가리키고 있다. 97년 동안 굳게 봉인되어 있던 빗장이 해제되기까지 이제 겨우 12분 밖에 남지 않았다.


몇 걸음 걸어 책상 앞에 다다르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벽시계 밑에 걸린 모나리자 액자가 또렷하게 나타났다. 아들러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두 눈과 입가에 번진 알 수 없는 의미의 미소는 잠시 후 시작될 의식을 모두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였다.


문득 따뜻한 에스프레소 한잔이 생각났다. 이때 조용히 미끄러져오는 바뀌 소리가 들리더니 로봇 어시스턴트 알프레도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에스프레소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에스프레소의 황금빛 크레마가 은 색 머그컵에 반사되어 오묘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고마워 알프레도” 머그컵의 차가운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에스프레소의 뜨거운 물줄기가 입술을 타고 목구멍을 태우며 가슴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커피 분자들이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을 퍼져나가며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지난 10년 동안 연구소에서 밤을 지새우며 쏟아부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원숭이 실험에 성공했던 순간은 바로 엊그제 일인 것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디지털 정보로 변환되어 컴퓨터 속에 저장된 원숭이의 뇌가 그를 알아보고 평상시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를 재생해 내던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어느새 벽시계의 분침이 59분으로 변경되었다.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듯 아들러는 모나리자 액자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영국 비밀정보부 SIS에서 지시한 대로 모나리자의 오른손 중지 손톱에 그의 중지 지문을 가져다 대자 모나리자의 두 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두 눈으로 시선을 옮기자 빨간색 광선이 그의 두 눈을 훑고 지나가더니 딸깍하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러고 아무런 반응도 없이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시침과 분침이 동시에 바뀌며 5시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모나리자 액자 오른쪽 벽틈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더니 정적을 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이 90도로 회전하며 순식간에 돌아가 버렸다. 눈부신 조명에 눈이 적응을 마치자 벽 너머 공간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0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공간에, 큰 책상 3개와 1개의 커다란 랙(Rack) 그리고 은빛 캐비닛이 기역자 모양으로 두 개의 벽면을 온통 에워싸며 배치되어 있었다. 잠시 후 낮은 중저음의 보이스로 추가 지시 사항이 안내되었다.

(1) 가장 왼쪽 캐비닛 손잡이에 검지 손가락을 대고 두 눈을 한 번 깜빡이시오.
(2) 서랍이 앞으로 미끄러져 나오면 왼쪽 파티션에 큰 철제 상자 1개와 작은 담뱃값 크기 상자 1개가 나타납니다. 먼저 큰 철제 상자 1개를 바로 뒤에 있는 책상 위로 가져다 놓으시오.
(3) 그리고 작은 상자 1개도 책상 위에 올려놓으시오.”

지시에 따라 두 개의 상자를 책상 위로 가져다 올려놓았다. 상자의 밑바닥 크기와 꼭 맞는 네모 라인이 책상 위에 그려져 있고 숫자까지 표시되어 있어 상자를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또 다른 지시 사항이 안내되었다.

(4) 큰 상자 우측면에 있는 “ON” 버튼을 클릭하고 5분간 대기하시오.
(5) 기다리는 동안 작은 상자 우측면에 검지 손가락을 대고, 상자 속에 담긴 '트라이젝터'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시오.

지시한 대로 수행하고, 트라이젝터라는 물건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주사기처럼 생겼는데, 주사 바늘이 한 개가 아니라 부챗살 모양처럼 3개였다. 왼쪽 바늘에 1, 오른쪽 바늘에 2, 가운데 바늘에 3이라는 숫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제야 왜 트라이젝터라고 명명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잠시 후 큰 상자 속에서 환하게 빛이 나더니 상자 윗면이 투명하게 변하며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물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누가 보더라도 사람의 뇌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크기가 크고, 호두껍질 같은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다. 놀라운 건 방금 전 꺼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표면의 혈관에 붉은색 피가 감돌고, 윤기가 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상자 표면에 붙어 있는 라벨이 눈에 들어왔다.


A. Vanesa Winsley. 1882.1.25-1941.3.28, TBU on 2038.1.25, Requested by L. Sebastian Winsley”


바네사 윈슬리라는 이름이 보이는 순간, 다시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20세기의 유명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바네사 윈슬리의 뇌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3년 전 니콜라스 요원을 따라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번 본 적이 있지만, 반신반의하지 않았던가. 놀라움과 기대가 뒤범벅이 되어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순간 중저음의 보이스가 귓전을 때리며 다음에 해야 할 프로시저를 알려 주었다.


작은 상자 옆에 놓인 트라이젝터를 들어 큰 상자위에 뚫린 3개의 구멍에 끼우고, 주사기의 누름대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동안 동물 실험에 사용하던 바늘은 1개였는데, 이번에는 3개의 바늘에서 나노 로봇이 뇌 속으로 주입되었다. 특수 물질 처리가 되어 있어 어디로 향하는지 바깥에서도 볼 수 있었다. 1번은 좌뇌로, 2번은 우뇌로, 3번은 소뇌로 향하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동물보다 큰 사람의 뇌를 해동된 후 5분 내에 스캐닝 완료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 이리라. 나노봇이 주입되는 순간 작은 상자가 놓인 책상 우측 표면에서 모니터 스크린이 올라오고, 그 앞에 홀로그램 키보드가 드러났다.


모니터 스크린에는 상자 속 뇌를 디지털화한 이미지가 디스플레이되었다. 나노봇이 어디까지 스캐닝했고 몇 %가 남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1분 30초 만에 소뇌의 스캐닝이 완료되었고, 3분 45초가 지나자 좌뇌의 스캐닝도 완료되었다. 우뇌의 스캐닝이 생각보다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상태바의 진행이 더디게 진행되나 싶더니 4분 20초가 되자 우뇌의 스캐닝도 결국 완료되었다. 글감에 대한 창의적 아이디어가 넘치는 그녀였기에 우뇌의 스캐닝이 오래 걸렸으리라.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수집된 데이터의 정합성 점검이 수행되었고, 4분 50초가 되자 “Validation completed”라는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5분이 되자 녹색불빛이 깜빡이며 “All the planned tasks are successfully completed”라는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사람의 뇌에 저장된 모든 정보를 디지털화시키는 데 성공한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아들러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약혼녀 베아트리체의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의 뇌를 부활시켜 다시 만날 거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 뇌정신 분석가의 길로 들어선 지 어느덧 10년. 그동안, 여러 동물 보호 단체들의 협박과 위협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정말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죽은 반려견의 뇌를 복원하여 주입한 로봇 강아지를 끌어은 사진과 함께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들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아직까지 사람의 뇌를 대상으로 상업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은 상태라 이렇게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합법화될 날이 꼭 도래하리라. 그때가 되면 베아트리체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다.


지시에 따라 박스 우측의 “OFF” 버튼을 누르려고 다가가니 이미 상자 속 뇌는 냉동 모드로 전환되고 있었다. 뇌 속에 채워진 인공 혈액은 이미 제거되었고, 박스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영하 60도를 지나 184도까지 순식간에 급속 냉각이 되었다. 그리고, 박스에 붙어 있던 레벨이 다음과 같이 업데이트되었다. (업데이트 내용: 1차 스캔 수행 일자, 스캔 자료 분석 완료 예정일자)


“A. Vanesa Winsley. 1882.1.25-1941.3.28, 1st Scan:2038.1.25 (TBC by 2038.4.25), Requested by L. Sebastian Winsley”


OFF 버튼을 누르자 박스 밑면과 책상 표면을 연결하는 전자회로의 연결이 차단되었고, 박스를 책상에 고정시키고 있던 Lock이 해제되었다. 박스를 다시 캐비닛 서랍에 집어넣고 나니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 풀리면서 방안의 물체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스를 꺼냈던 캐비닛 서랍도 자세히 보니 좌우 두 개의 파티션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좌측 파티션에서 시선을 옮겨 우측 파티션을 보니 똑같이 큰 상자 1개와 작은 상자 1개가 놓여 있었다. 큰 상자 위의 라벨에 쓰인 문구가 바로 눈에 띄었다.


L. Sebastian Winsley. 1880.11.25-1969.8.14, TBU at the completion of A. Vanesa Winsley, Requested by L. Sebastian Winsley”


바네사 윈슬리의 남편 세바스찬 윈슬리의 뇌도 본인의 요청에 의해 나란히 냉동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해동 예정 날짜는 바네사의 뇌 복원 작업이 완료된 이후로 설정되어 있었다. 부부의 뇌가 남편의 요청에 의해 나란히 냉동 보관되어 있다니. 부인의 뇌가 복원되면 자신의 뇌도 복원시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절절함이 라벨의 문구에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듯하였다. 이번 미션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들러의 두 어깨를 더욱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런데, 부담감의 무게가 순간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척수를 타고 올라가 두 어깨에 헤라클레스의 힘을 불어넣은 것일까? 예정된 수순에 따라 전개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다음번 진행할 프로시저를 잠시 잊고 있던 아들러에게 중저음의 보이스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시에 따라 책상 위로 다시 돌아와 홀로그램 키보드의 “Ctrl-C”키를 눌렀다.

그러자 엄지손가락만 한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키보드 옆 책상 위에 나타났다. 안을 들여다보니 UWB 무선 드라이브 스틱이 백옥 같은 하얀색 광채를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UWB 드라이브의 한가운데 새겨진 동그란 이미지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니, 자료 전송이 시작되었다. 3분이 지나자 자료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2600 TB(테라바이트) 자료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UWB 드라이브의 남은 용량은 48%(2400 TB / 5000 TB)입니다.

프라이빗 클라우드에 저장된 기존 데이터는 백업 모드로 전환됩니다.

이제 뇌 복원을 위한 5단계 중 1단계가 완료된 셈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비밀 공간을 빠져나와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왔다. 90도로 회전되었던 벽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함이 방 안 공기를 가득 채웠다. 모나리자의 두 눈과 미소는 아들러의 어깨를 다독이며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5시 40분을 알리고 있었다.


“4시간은 족히 흘러간 것 같았는데 겨우 40분밖에 지나지 않았네.”


연구소 직원들이 출근하려면 아직 1시간 넘게 남은 시간이다. 연구소 주위를 산책하고, 아침식사를 하면 딱 맞을 듯싶다. 연구소 둘레를 따라 이어져 있는 2km 길이의 산책로는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산책로 입구로 향하는 아들러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이제 남아 있는 4단계를 진행할 생각을 하니 아드레날린이 마구 샘솟았다. 기필코 성공하리라.....



2038년 3월 28일 04:00


바네사 윈슬리의 뇌를 복원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벌써 2달이 지났다. 1단계 스캐닝 작업 이후 4단계 통합 테스트까지 비교적 큰 이슈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아들러는 오늘도 비밀 작업실에 앉아 마지막 통합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키보드의 버튼을 누르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심호흡을 깊게 시작했다.

두 눈을 감고 첫 번째 들숨을 코로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2단계 작업이었던 모델링 & 시뮬레이션 과정이 10배속으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빠르게 머릿속을 흘러 지나갔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최적화하기 위해 2500TB에 달하는 스캔 데이터를 다이제스트 시키는 작업이었다. 사전에 모델링 된 알고리즘에 스캔 데이터를 주입하여 100만 번에 걸친 반복 학습이 1달여간 진행되었다. 작업이 진행되며 바네사 윈슬리 특유의 언어, 감각, 기억, 감정이 패턴화 되어 알고리즘 파라미터가 정교하게 조율되었다.


두 번째 들숨을 깊게 들이쉬자 3단계 작업이었던 Unit 테스트 과정이 빠르게 지나갔다. 1차(언어), 2차(감각), 3차(기억), 4차(감정)에 걸쳐 뇌의 각 기능이 제대로 복원되었는지 검증하는 작업이었다.


1차(언어) 테스트에서는 기본적인 대화 기능을 검증하였다. 아들러가 키보드로 대화를 시작하면, 스크린에 답변이 타이핑되어 나타났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어를 이해하지 못한 부분, 은유적인 표현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점에서 테스트는 성공이었다. 바네사 윈슬리 사후 97년 동안 변경된 단어와 표현에 대한 데이터를 추가로 주입하여 언어 기능에 대한 최적화 작업을 진행했다.


2차(감각) 테스트에서는 디지털화된 감각 정보를 주입하여, 제대로 반응하는지를 검증하였다.  차가운 물에 대한 반응이 정상치를 크게 벗어나 극도로 예민한 것을 제외하면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평형감각, 피부 감각 모두 정상이었다.


3차(기억) 테스트에서는 살아 있을 때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잘 기억하는지 질의응답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의붓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불행했던 유년 시절, 남편과의 만남과 결혼 이후 작품 활동에 매진할 때의 행복한 기억, 정신질환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 그러나 결국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바네사 윈슬리의 모든 기억이 숨김없이 토해져 나오자 아들러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울고, 비통함에 빠져 들었다.


4차(감정) 테스트에서는 희(기쁨), 노(노여움), 애(슬픔), 락(즐거움) 상황이 주입되었을 때 적절한 감정을 느끼는지 검증하였다. 신경쇠약을 앓았던 탓인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반응은 상당히 무뎠고, 노여움과 슬픔에 대한 반응은 예민하였다.


세 번째 들숨을 깊게 들이쉬자 4단계 작업인 통합 테스트 과정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뇌의 각 기능을 통합 연계하여 End to End로 검증하는 작업을 2차에 걸쳐 진행하게 된다.


1차는 언어+기억+감각에 대한 통합 테스트였다. 통합 테스트부터는 입출력 인터페이스가 추가로 연결되어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먼저 시각을 위한 카메라 센서, 청각을 위한 마이크, 촉각, 미각, 후각을 위한 트라이오드 센서가 부착되었다. 그리고, 바네사 윈슬리 생전의 육성 데이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어렵게 구한 7분짜리 육성 데이터와 신체적 특징을 기반으로 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음성을 모델링하였다. 감정을 제외한 테스트이지만 혹시라도 의식이 재생되어 디지털화된 자신의 모습에 쇼크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몇 가지 예외 처리를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들러는 아직도 1차 통합 테스트를 했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안녕하세요 바네사 윈슬리. 저는 루치안 아들러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들러가 첫인사를 한 후 10초간 정적이 흘렀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아해하고 있는데, 연구실의 고참 여교수님을 연상시키는 차분하면서도 결연하고, 안정된 톤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안이 상당히 눈이 부시는 군요. 여기가 어딘지 한참 동안 생각해봤는데 잘 모르겠네요. 오늘이 몇일인가요?”


1915년 1월 2일 오후 8시입니다. 낮에 템즈강 다리 위에서 글쓰기 작업하신 것 기억나시나요? 1차 통합 테스트는 1915년을 배경으로 진행되기로 했기에 계획된 각본에 따라 답변을 해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 그렇네요. 남편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Max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었죠. 템즈강의 강물이 불어 낳다 줄어들었다 하는 광경이 마치 심장 박동 같았었죠.


바네사 윈슬리는 그날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녀 특유의 언어적 감각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의 테스트였지만, 빛에 대한 감각, 1915년 1월 2일의 기억, 감각적인 언어 구사 능력은 1차 통합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하기에 충분했다.


아들러가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눈을 뜨려는 순간 2차 통합 테스트를 시작하는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2차는 언어, 기억, 감각에 감정 기능까지 포함한 통합 테스트이다. 사실 상 예외 사항 없이 완전 통합 모드로 테스트하는 것이다. 자신의 팔, 다리, 머리 모양, 옷, 신발 모두 가상으로 모델링하여 주입되었기에 디지털 뇌는 실제 자신의 모습으로 인지하게 된다.


'과연, 인간의 의식까지 디지털로 복원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온 논쟁의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인지는 바로 오늘 2차 통합 테스트 결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1차 통합 테스트 때와 마찬가지로 아들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바네사 여사님. 잘 주무셨나요?”


이번에도 곧바로 반응이 오지 않고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5초, 7초, 10초.... 그런데 이상했다. 10초가 넘어도 반응이 오지 않았다. 15초, 20초, 30초가 흘렀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30초가 더 흐른 그때 바네사 윈슬리의 첫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그건 목소리라기보다는 처절한 절규에 가까웠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저 좀 꺼내 주세요. 너무 춥고 무섭고,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대로 죽을 순 없어요~~~ 제발~~~” 


실험실이 떠나갈 듯 외쳐대는 절규의 목소리에 아들러는 너무 놀라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은 손을 내밀어 바네사 윈슬리를 구해주고 싶은데 이상하게 몸은 점점 그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나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려는 순간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빠바밤 빠바밤 빠바밤 빠바바바바 밤 빠바밤 빠바바밤~~~”  


'그리그의 아침의 기분' 연주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제야 아들러는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계는 2038년 3월 28일 새벽 4시를 알리고 있었다. 침대 시트는 밤새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 내가 악몽을 꾸었구나.... 너무나 현실 같은 꿈이었어... 2차 통합 테스트를 앞두고 내가 너무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네....”


3분 43초 간의 연주가 끝나자 가위에 눌린 간밤의 괴로움이 물러가고 상쾌함이 다시 밀려왔다. 여느 때처럼 스트레칭과 샤워를 마치고 왁스로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 올린 후 4시 30분발 모닝캄 택시에 올라탔다.


연구소까지 가는 동안 간밤에 꾼 꿈이 다시금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2차 통합 테스트 프로시저는 꿈에서와 똑같이 진행될 예정이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꿈에서와 같이 그녀가 구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상 차단 버튼을 누르면 될 터이지만, 마지막 단계인 실환경 테스트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2차 통합 테스트를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고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간밤에 비가 내려서인지 도로에 빗 물이 고여있어, 불길한 마음이 더 가중되는 듯하였다. 빗물에 미끄러진 건지, 아니면 빗물을 피해 가려는 것인지 택시가 살짝 왼쪽으로 휘청거렸다가 다시 중심을 잡았다. 깊은 고민에 빠져 오다 보니 몸의 중심이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돌아온 것을 아들러는 느끼지 못했다.


어느새 연구소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 간판이 선분홍 빛을 내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건물 현관 출입구를 통과하고, 그의 연구소 방에 들어가니 벽시계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4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프레도는 아들러의 마음을 읽었는지 에스프레소 투샷을 책상 위에 올려다 주었다. 손을 뻗어 머그컵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에스프레소의 황금빛 크레마도 은 색 머그컵에 반사되어 뿜어져 나오는 오묘한 향기도 무심하게 아들러의 시각 세포와 후각 세포를 지나쳐 갔다.


어느새 벽시계의 분침이 59분으로 변경되었다. 액자 속 모나리자의 두 눈과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오늘따라 더 따갑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리라. 5시 정각에 맞춰 지문과 홍채 인증을 마치고 90도로 회전된 벽을 통과하여 비밀 실험 공간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 버튼을 누르자 스크린과 홀로그램 키보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오른쪽에 UWB 드라이브 스틱 전송용 패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들러는 점퍼에 넣어온 UWB 드라이브 스틱을 꺼내기 위하여 왼 손을 뻗어 점퍼의 왼쪽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당연히 만져져야 할 스틱의 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빠르게 오른쪽 주머니 속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주머니 속에 넣은 것 같은데 없다. 아마도 간밤에 꾼 악몽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져 집의 서재에 두고 온 것이 분명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실험실에서 가지고 나오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해 봐도 너무 늦었다. 사실, 비밀 실험실에서의 작업은 1시간 30분을 넘기면 안 되도록 되어 있다. 다른 연구원들이 출근하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보여야 하니까...어제 실험이 길어지는 바람에 집에서 추가 튜닝 작업을 하려고 가지고 나온 것이 이렇게 될 줄이야... 다행히 UWB 드라이브 스틱은 아들러와 의뢰인 이렇게 단 두명만 접근할 수 있도록 보안 설정이 되어 있어 잃어버려도 안전하다. 의뢰인인 세바스찬 윈슬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사실 상 아들러 외에는 어느 누구도 UWB 드라이브 스틱에 저장된 내용은 접근할 수 없는 셈이다.


어쨌든, 이제 오늘 실험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백업 모드로 전환되어 비밀 실험실내 프라이빗 클라우드에 저장된 데이터를 꺼내오는 방법이 있긴 한데, 어젯밤 집에서 3시간 동안 진행한 튜닝 작업 결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아 고민이 되었다. 어차피 1시간 반 내에 튜닝 작업을 완료하기는 어려울 거라 판단되어 결국 오늘 작업은 내일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아쉬움을 달래며 비밀 실험실 문을 나와 책상에 앉았다. 간밤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나려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오늘 예정되어 있는 일과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오후 3시 이후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어, 평상시 보다 일찍 퇴근하리라 다짐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내일은 계획된 실험을 꼭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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