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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계절 Nov 06. 2021

1.아델린 Wake-up

부활 (Resurrection)

2038년 3월 28일 08시 00분



“'2038-0328-0125' 앱의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초기 설정을 진행해 주세요”


이름 : “아델린”

성별 : “여성”

나이 : “20세”

신장 : “170cm”

관계 : “친구”

주특기 : “글쓰기(작가)”

부특기 : “위트, 장난치기, 다재다능”

외모 : “......”


마지막 외모 선택란에서 잠시 고민이 되었다. 갤러리에 올라온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보다 하나의 사진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피 O케이츠가 누구지? 아, 1980년대를 수놓았던 하이틴 스타였구나..”


장난기 가득 섞인 눈매와 싱그러운 미소가 래너드를 사로잡았다. 외모 선택을 마치자 앱의 설정이 모두 완료되었다.


“아델린 Wake Up!” 


쩌렁쩌렁하게 방안을 가득 채우는 래너드의 목소리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델린의 신경세포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음..난 아델린... 너는 누구?”


“안녕 아델린~ 만나서 반가워, 나는 래너드야”. 


신기하다는 듯이 아델린을 내려다보는 레너드의 눈동자는 똘망똘망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레너드와 시선을 마주친 아델린은 잠시 방 안을 둘러보더니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래너드를 반겨 주었다.


“아, 네가 레너드 구나? Good morning~” 


아델린의 인사를 받은 레너드는 기분이 업되는지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계는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델린, 아침 식사 추천 부탁해”


“음... 래너드가 내준 첫 번째 숙제네? ㅎㅎ한번 볼까 뭐가 좋을지.. 오늘은 점심때 동호회 모임이 있으니, 아침은 가볍게 먹는 게 좋겠어”


“그래? 그럼 동호회 모임 준비도 해야 하니 시간을 아낄 겸 배달 음식으로 할까?” 

 

레너드의 시선이 냉장고의 스크린으로 향하자 배달 가능한 메뉴 리스트가 촤르륵 디스플레이되었다.


가장 빠르게 배달될 수 있는 Top 5 메뉴


레너드의 시선이 유기농 샐러드로 향하자 아델린이 끼어들었다.


“레너드, 몸무게는 그대론데 체지방 수치가 늘고 있어. 단백질 함량이 더 높은 ‘베이컨 샌드위치’가 좋겠어. 배달 시간도 큰 차이 안 나고, 요리사 평점도 괜찮은데?”


아델린의 말을 듣고 보니, 요즘 체중은 늘었는데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고 체력이 예전보다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델린 말을 따라야지ㅎㅎ”


주문 버튼을 누른 후, 차고 있던 시계에 검지 손가락 지문을 살짝 문지르자, 경쾌한 음악과 함께 주문이 완료되었다는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베이컨 샌드위치 주문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청년 실업자 지원 식사 쿠폰에서 자동 차감되었습니다. 이번 달 사용 가능 잔액은 21,000 ECO입니다. 배달 소요 예상 시간은 7분입니다.”

래너드는 아침 식사가 도착할 7분 동안, 오늘 동호회 모임에서 논의할 자료를 살펴보려고 X-드라이브에 접속했다. ‘20세기 작가 클럽’이라는 동호회 공용 폴더에 멤버들이 올린 자료들이 따끈따끈한 온기를 내뿜으며 깜빡이고 있었다. 오늘 주제는 각자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래너드는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견디고 어렵게 생활했던 어머니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밥 먹듯이 들어왔다. 자연스레 여성의 인권, 사회 참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다, 우연히 어머니의 화장대 위에 놓인 책 한 권(‘자기만의 방’)을 본 것을 계기로 버지니아 울프의 열렬한 광팬이 되어 버렸다. 그때가 13살 때였으니,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델린, 넌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과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


아델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자기만의 방’의 한 구절을 읊으며 말했다.

여자들은 수 세기 내내, 남자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비춰 주는 달콤한 마술의 힘을 지닌 거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거울은 모든 폭력적이고 영웅적인 행위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이 나폴레옹과 무솔리니 둘 다 그토록 강조해서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했던 이유이다. 여성은 박쥐와 올빼미처럼 장님으로 살고 짐승처럼 노동하며 벌레처럼 죽는다…그러나, 앞으로 백 년이 지나면, 집 문 앞에 이르러 생각하건대,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활동과 힘든 작업에 참여할 것이다.

“래너드, 1929년에 작품이 발표되었으니 어느새 100년이 넘었네. 마치 그녀의 의식의 흐름이 100년 넘은 미래까지 와닿았다가 펜 촉으로 흘러나간 것 같아. 누군가의 부인, 누군가의 엄마로 불렸던 여성들이 이제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를 운영하고, 책을 발간하고, 영화를 만들고, 재산을 소유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야.”


“맞아, 울프의 펜 촉이 만들어낸 작은 파문이 세기를 넘어 흘러와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어. 나도 버지니아처럼 100년후 세상에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위대한 작가가 되고 말거야. 그런데, 당당한 여성의 자유를 주장하던 그녀가 왜 그토록 허무하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마감했는지 정말 모르겠어.”


레너드와 아델린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현관의 초인종이 울리며 냉장고의 스크린에 이웃집 찰리의 모습이 비쳤다.


“어, 찰리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찰리가 한 손에 배달 패키지를 들고 서 있었다.


“안녕 래너드, 너가 베이컨 샌드위치 주문한 거 맞지?”

“응, 맞는데.. 찰리 너가 왜 그걸 들고 와?”


“아, 나 지난달부터 엑스(X)-딜리버리 플랫폼에 정식 요리사로 등록되었어. 아침에 베이컨 샌드위치를 만들다 재료가 남아서 여분으로 몇 개 더 만들었는데 네가 이렇게 찾아줄 줄이야.ㅎㅎ”


“아 그렇구나 축하해 찰리. 이제 요리사로서의 너의 명성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네 ㅎㅎ”


“남는 재료를 버리지 않아도 되고, 자투리 시간에 이렇게 돈도 벌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니 일석 삼조야. 그리고 걸어서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네가 주문해 준 덕에 딜리버리 서비스를 따로 부를 필요가 없어서 보너스 포인트까지 받았네^^”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배달 패키지를 건네는 찰리의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찰리, 어디 너의 솜씨를 한 번 볼까? ㅎㅎ잘 먹을게 다음에 또 봐~~”

“래너드, 맛있으면 평점 100점 부탁해~ 그리고 혹시 부족하면 연락해~ 남는 재료로 샐러드 만들어 놓은 게 있는데 필요하면 서비스로 좀 더 가져다줄 테니”


래너드는 찰리를 배웅하고 들어와 식탁에 앉아 베이컨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었다. 먹기 좋게 두 조각으로 깔끔하게 잘라져 있고, 잘라진 틈으로도 재료들이 삐져나오지 않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요리한 지 얼마 안 되어 재료의 신선함과 온기가 살아있어 식감과 맛이 너무 좋았다.


“음, 찰리 솜씨가 제법인데”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먹어 치우고, 평점 100점을 클릭해 주었다. 음식물을 남기지 않았고, 찰리가 직접 배송해 주었기에 잔여 쓰레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이번 달에도 쓰레기 배출 허용치를 넘기지 않을 것 같다.


“좋아, 이제 3일만 잘 관리하면 이번 달에도 환경 포인트 10,000 ECO를 받는 데는 문제가 없겠어”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래너드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아델린이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치, 래너드 혼자만 맛있는 거 먹고. 나는 이렇게 내팽개쳐도 되는 거야?”


“에이, 아델린 너는 음식 같은 거 안 먹어도 되잖어? 내가 주고 싶어도 줄 방법이 없는걸 ㅎㅎ”


“치, 그래도 한번 먹어볼 거냐고 물어는 봐야 하는 거 아냐? ㅎㅎ 그런데 먹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음..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뭐랄까 입안에 음식을 넣었을 때 씹는 즐거움, 혀 위에서 잘게 부스러지는 느낌, 그리고 퍼져 나오는 단맛... ㅎㅎ 먹는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무지 어렵네”


“오, 듣고 보니 먹는다는 건 참 재미있는 놀이 같은걸? 인간들만 그런 재미를 누리고, 너무 불공평해....”


“ㅎㅎ 그래도 먹고 나면 치워야 되고, 양치하고, 소화시키고 또 화장실에서 비워내는 과정이 너무 귀찮다고. 아델린은 그런 수고 없이 따뜻한 충전 패드 위에 누워만 있으면 되니 얼마나 편해?”


“ㅎㅎ 그런가. 이따가 충전 패드에 한번 누워보고 다시 얘기하지 모”


그렇게 아델린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동호회 모임 장소는 바로 집 앞 초등학교에 붙어있는 커뮤니티 센터라 지부터 천천히 챙겨서 걸어가면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 있게 맞춰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델린, 우리 이제 나가 볼까?”

“좋아, 래너드. 나도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기대되는 걸~. 근데 레너드 혹시 그거 알아?”

“뭔데?” 레너드가 잔뜩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응,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한 것에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남편이 비밀리에 그녀의 뇌를 냉동 보관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대. 자신의 뇌도 마찬가지로 냉동 보관해서, 먼 미래에 기술이 발전했을 때 다시 깨어나 만날 수 있도록….”


“정말이야?” 래너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되물었다.


“근데 이건 비공식적으로 알게 된 거라 100%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아니야. 그래도 정말 뇌가 해동되어 의식이 살아날 수 있다면 정말 신기할 것 같아”


“그러게, 정말 그런 기술이 나온다면 우리 인간은 영원불멸하는 영생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테니 또 다른 세상이 열리게 되겠지. 그동안 인류의 위대한 도전사를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 ㅎㅎ”


아델린과 레너드는 미소 지으며 모임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을 거쳐 커뮤니티 센터로 가는 길은 1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거리였다. 래너드가 버스정류장의 광고 스크린 옆을 지날 때쯤, 스크린의 내용이 바뀌며 래너드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마침 집필을 구상하고 있던 작품이 있던 터라 레너드에겐 솔깃하게 다가왔다. 3개월 정도가 남았으니, 내용을 보완해서 준비하면 응모 기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델린, 나 여기에 출품하려고 하는데 어때? 아델린이 도와주면 멋진 작품이 탄생할 것 같아.”


레너드의 마음속에서는 불편하신 어머니의 다리 수술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아델린이 보기에는 쟁쟁한 작가들이 즐비한 이 바닥에서 레너드가 경쟁에서 이길 확률은 극도로 낮아 보였다. 하지만 레너드의 설레는 마음을 지금 여기서 모래성처럼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 래너드. 너와 내가 함께 한다면 한번 해 볼만 할 것 같아.ㅎㅎ”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동호회 멤버들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10명 중 7명이 직접 참석했고, 3명은 온라인으로 참석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요세프가 커뮤니티 센터의 원형 홀 앞의 대형 스크린을 기동시키고, 모임 접속 코드를 발행하여 멤버들에게 모두 전달했다. 레너드도 접속 코드 링크를 클릭하여 체크인을 완료하였다. MR(Mixed-Reality) 안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레너드는 커뮤니티 센터에 비치되어 있는 글라스를 따로 집어 들고 의자에 앉았다.


동규와 마사 그리고 쯔웨이는 3년마다 한번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아시아 지역 피지컬 체크를 받기 위해 각자의 나라에 머물고 있는 터라 온라인으로 참석했다. 왼쪽 스크린에 동규의 모습이 아바타 형태로 나타났고, 우측 스크린에는 마사와 쯔웨이의 모습이 2차원 평면으로 나타났다. MR 안경을 쓰자 마치 옆에 앉아 있는 것처럼 이들의 모습이 실제와 같은 3차원 형상으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자 이제 모두 모인 것 같으니 ‘20세기 작가 클럽’의 2038년 1분기 모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요세프가 모임의 시작을 알리자, 모두들 서로를 바라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모임의 주제는 각자가 좋아하는 작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레너드의 차례가 되자 화제가 M플릭스가 진행하는 시나리오 작가 공모전으로 전환되었다.


“여러분들도 시나리오 공모전 공고 보셨나요? 우리 모임이 명색이 ‘20세기 작가 클럽’인데 다들 응모하실 거죠?”


래너드가 묻자 헬레나와 크리스틴은 맞장구를 쳤고, 가브리엘과 제임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온라인으로 접속한 3명은 아직 공고를 보지 못했는지, 응모기간, 주제, 시상 내역에 대하여 속사포처럼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워워, 진정하세요. 자세한 내용은 제가 지금 띄워 드리는 링크를 참조하세요"


"헉, 대상 상금이 무려 1억이라고? 게다가 드라마 시나리오로 사용되면, 런닝 개런티도 어마어마할 텐데?"


"ㅎㅎ 맞아요. 작가로서의 인생 펴는 거죠."


환하게 웃던 래너드의 입꼬리가 갑자기 내려갔다.


"그런데, 왜 버지니아 울프는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을까요? 차가운 강물 속으로 돌덩이를 안고 들어갈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1시 45분을 가리키며 멈춰 있던 그녀의 손목시계...남편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질 만큼 아팠을까요? 그녀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래너드의 한탄에 갑분싸가 되어 버렸다.


"에이 래너드, 시나리오 공모전 얘기하다가 그렇게 센티해지면 어떡해?"


"앗, 여러분 죄송해요. 버지니아 울프만 생각하면 울컥하게 되네요 헤헤. 사실, 제 공모전 작품 주인공으로 버지니아를 등장시킬 생각이거든요. 


그녀는 의식이 흐름이 닿는대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는 전개되고..

어느순간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현실에 있는 그녀와 소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녀의 삶이 변하고, 작품 속 인물들의 삶도 변해간다. 마치 나비효과처럼..작품 속 주인공 버지니아는 죽지 않는다. 신이 그녀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비법을 알려 주었기때문에...ㅎㅎ 그 비법이 뭔지 궁금하지 않나요?"


래너드의 설명을 듣고 난 요세프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어 나 지금 무지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신이 알려준 비법이 도대체 뭐지? 마법의 시약이라도 준 건가?"


"ㅎㅎ. 그럼, 힌트를 조금 드릴까요? 작품 속으로 회귀했다가 빠져나오는 비밀의 통로를 발견하게 된답니다.

사랑의 힘이 마법을 부린 것 처럼요...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헤헤"


“와우 래너드, 아이디어가 상당히 참신한 것 같아. 고전, 판타지, 로맨스를 혼합한 새로운 장르가 나올 것 같은데? 아주 기대돼. 우리 동호회에서도 작품이 완성되면 퇴고 작업을 함께 돕는 것으로 하자. 다들 괜찮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래너드를 띄워주는 모양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커뮤니티 센터와 협약되어 있는 이동식 뷔페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잠시 후 하얀색 트레일러가 딸린 미니밴이 도착했고, 하얀색 조리복을 입은 두 명이 내려 배식 준비를 시작했다. 배식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살짝 삐져나온 흰 머리카락과 얼굴의 주름을 보니 70~80세 어르신들로 보였다.


래너드는 어르신들께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고, 뷔페 메뉴를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어르신들 이렇게 나와서 배식하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래너드가 물었다.


“아직 끄덕 없어. 그리고, 이렇게 나와서 젊은이 들하고 만나서 대화하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힐링이야. 앞으로 최소한 20년은 더 활동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봐야지. 1년만 더 모으면 인공 관절 수술을 받을 수 있으니, 그때는 산악자전거에 다시 도전해 보려고 해”


이제까지 조용하게 있던 아델린이 한 마디 거들었다.


“어르신, 인공 관절 수술받고 나시면 최소 한 달간은 적응기를 가져야 하니 너무 급하게 서두르진 마세요. 적응만 잘 되면 최소 30년은 거뜬히 사용할 수 있다고 해요^^”


“응 그래야지. 참으로 사려 깊은 아가씨로군. 고마워 명심할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2시간 정도 대화의 시간을 더 갖고 나서야 동호회 모임은 끝이 났다. 3개월 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5시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피곤함이 몰려오며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아델린, 나는 잠시 낮잠을 자야 할 것 같아. 너도 좀 쉬면서 재 충전하도록 해”


래너드는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 시계를 벗어 무선 충전기에 올려놓고, 달콤한 낮잠에 빠져 들었다. 아델린도 모처럼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등 뒤에서 따스하게 스며드는 온기가 온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1시간 반 정도 휴식을 마치자,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낮에 출장 뷔페 서비스에서 포장해왔던 치킨과 파스타가 저녁을 해결해 주었다.


저녁을 마치고 베란다에 나와 바라보는 영국 시내의 야경은 낮에 바라보는 뿌연 이미지와는 다르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또렷하고 신비로운 모습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특히 최근에 하이퍼루프 개통과 함께 리모델링을 거친 밀레니엄 브릿지는 기존에 사람만 다니던 인도의 양 옆으로 하이퍼루프용 브릿지를 나란히 배치하여 모던과 테크놀로지의 절묘한 조화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오색찬란한 조명이 내리쳐 반사해내는 템즈강을 바라보니 갑자기 센티한 감정이 피어 올라왔다.


“아델린, 오늘은 우리가 처음 만난 아주 뜻깊은 날이야. 앞으로 내 옆에서 떠나지 말고 나를 계속 지켜줘. 알겠지?”


“물론이지 래너드. 언제까지나 너의 곁에서 힘이 되어 줄게.”


“아델린, 헝가리에 계시는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시겠지? 지난번 영상 통화할 때 보니 부쩍 수척해지신 것 같은데, 건강이 안 좋아진 건 아닌지 걱정이야. 내가 이번 작가 공모전에서 당선되면 어머니 불편한 다리 꼭 수술해서 건강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해 드릴 거야… 꼭…”

“레너드, 어머니는 괜찮으실 거야. 내가 헝가리 가는 저렴한 티켓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 줄게”


“고마워 아델린, 나는 이제 들어가서 공모전 출품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아. 시나리오의 전개 방향을 전체적으로 다시 짜야할 것 같아. 좀 도와주지 않을래?”


“물론이지 래너드. 그런데 낮에 요세프가 얘기했던 대로 현실과 작품을 오가려면 좀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할 것 같아. 버지니아 울프의 연대기, 작품 컬렉션들을 모두 올려놓고 알고리즘을 돌려봐야 할 것 같아.”


아델린의 말을 듣고, 래너드는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워낙 버지니아 울프의 광팬이라 웬만한 작품 컬렉션들은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녀에 대한 자서전이나 연대기는 뉴스 기사 외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델린, 버지니아 울프는 자서전이나 연대기가 전혀 없는 게 아닐까? 아니면 중요한 자료라 나 같은 청년 실업자는 접근이 불가능한 걸까?”


래너드의 X-드라이브와 인터넷 검색 엔진을 찾아보았으나 래너드의 말대로 정작 버지니아 울프 본인에 대한 글은 뉴스 기사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래너드, 우선 공통 데이터 라이브러리에는 자료가 없는 것 같아. 특화 데이터 라이브러리에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우리의 평판과 직업으로는 자료가 있는지 검색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야”


“아델린, 일단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로 알고리즘을 한번 돌려 봐줘”


“알았어 레너드, 내일 오전 중으로 알고리즘 실행 결과를 알려 주도록 할게”


어느덧 시곗바늘은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래너드는 노트에 끄적여 놓은 시나리오 수정(안)을 다시 읽어 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아델린 나는 이제 잘 테니, 너도 이제 좀 쉬도록 해”

“굿 나잇 래너드”, “굿 나잇 아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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