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계절 Nov 26. 2021

2. 빗속의 사고

부활(Resurrection)

'후두둑 후두 후두둑'


템즈강 수면을 살포시 어루만지고 넘어온 바람이 창문에 소리 없이 부딪히며 작은 물방울을 남기는가 싶더니 후두둑 후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밀레니엄 브릿지의 오색 찬란한 조명 사이를 헤집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분위기 있는 재즈 힙합을 연주하는 듯 그루비한 비트 가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깊은 잠에 빠진 래너드의 몸이 허공에 붕 뜨더니 어느새 템즈강변의 BAR로 장면이 전환되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잔을 한 모금 음미하고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니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는 작가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의 시놉시스가 계속 맴돌고 있다. 첫 장면을 이런 분위기 있는 BAR에서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성년이 되고 나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 한번 제대로 못한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에도 BAR 테이블 위에도 전화기는 보이지 않는데 계속 울려대고 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전화를 안 받고 있는 건지 짜증이 밀려왔다. 그때 멀리서 아델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래너드, 얼른 일어나 봐! 이른 새벽에 누가 이렇게 전화를 하는 건지 1번 울리고 말겠지 했는데 벌써 3번째 계속 울려대고 있어”


아델린의 재촉에 래너드의 몸이 다시 허공에 붕 뜨더니 침대 옆 테이블 위로 손을 뻗는 자신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선충전기 위에 놓인 손목시계가 구급차의 경광등처럼 다급하게 반짝반짝 깜빡이고 있었다. 실크를 풀어놓은 듯 매끈한 와인 맛이 입안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꿈에서 깨야만 하는 사실이 너무 아쉬워, 몇 번이고 외면하고픈 마음을 달래고 달랜끝에 검지 손가락을 시계 위로 가져갈 수 있었다. 그 순간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토해내며 다급하게 외치는 50대 여인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래너드, 나 제시 아줌마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니... 네 엄마가...엄마가.....쓰...쓰러지셨어”


엄마가 쓰러졌다는 말에 온 몸에 피가 휘몰아쳐 돌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제...제시 아줌마. 어..어떻게 된 거예요? 엄마가 어떻다고요?”

“레너드, 네 엄마가 쓰러져서 지금 병원에 와 있어.. 요새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이더니, 집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 같아.. 마침 내가 지나가는 길에 봐서 망정이지, 조금만 늦게 발견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아무래도 네가 와야 할 것 같아..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데, 계속 네 이름을 부르는 통에 이렇게 새벽 시간에 전화를 하게 되었네...”


제시 아줌마의 도움으로 병원에 계시다는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머릿속엔 온통 빨리 헝가리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시계는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델린, 헝가리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가 몇 시인지 한번 알아봐 줄래?”


사실, 래너드가 부탁하기 전부터 아델린은 비행기 시간과 공항 가는 차편을 알아보고 있었다.


“래너드, 아침 6시 30분 비행기가 가장 빨라. 택시가 30분 뒤에 집 앞으로 오기로 했으니 서둘러 준비하는 게 좋겠어. 다행히 정부에서 지원하는 무료 항공 왕복 쿠폰이 1개 남아 있어,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서둘러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 입고 나니 4시 45분이 되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한밤에 심술궂게 내리치던 빗방울이 진정되어 보슬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아델린, 택시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빗길이라 평소보다 공항 가는 길이 더 오래 걸릴 것 같아”


래너드의 시선이 냉장고 문의 스크린으로 향하자 런던 시내 지도가 나타났다.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로 향하던 택시가 연구소 앞 정문에서 잠시 정차하더니 방향을 바꿔 래너드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시간에 연구소로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4시 55분이 되자 택시로부터 5분 뒤에 도착 예정이라는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정각 5시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택시가 도착했다.


돌고래를 연상시키는 미끈한 외형에 이른 새벽의 적막을 깨지 않고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모습이 큰 의식을 치르기 전에 밀려오는 엄숙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스르르 열리는 슬라이딩 도어를 통과하여 택시 안으로 들어가니 정방향과 역방향 시트가 나란히 마주 보고 배치되어 있었다. 역방향 시트는 멀미가 나는 터라 정방향 시트에 앉았다. 비행기 조정석에 앉은 듯 전면부터 옆면까지 시원하게 펼쳐지는 윈도를 보니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다음과 같은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저희 모닝캄 택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까지는 58분 30초가 소요될 예정입니다. 간밤에 비가 내려 도로가 미끄러운 관계로 평소보다 속도를 줄여 안전모드로 운행합니다. 속도를 줄이는데 동의하지 않는 경우 정당한 사유를 말씀해 주세요. 본인 또는 가족의 생명을 다투는 긴급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응급 모드 운행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평상시 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20분이나 더 걸린다는 말을 들으니, 탑승 수속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6시 30분 비행기를 놓치면 9시 비행기를 타야 되는데,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응급 모드로 운행에 주세요. 헝가리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해서 6시 30분 비행기를 꼭 타야 됩니다.”

5초 정도 정적이 흐르더니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부다페스트 세멜바이스 병원 응급동에 어머니 한나가 입원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응급 모드 운행이 승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또 다른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응 모드를 선택해 주세요. 1번은 공리 우선 모드입니다. 50%의 탑승객이 선호하는 모드입니다. 2번은 탑승객 우선 모드로 10%의 탑승객이 선택하는 모드입니다. 3번은 최선 모드입니다. 탑승객과 공리를 모두 만족하는 최선의 선택을 하되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확률적 랜덤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 경우 1번 모드로 설정됩니다.”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는 래너드의 맘속엔, 빨리 공항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1번 모드로 동작하겠다는 안내 멘트도 래너드의 청각 세포를 무심히 지나쳐 흘러갈 뿐이었다. 응급 모드로 동작하는 택시는 날렵하게 도로를 미끄러져 나갔고, 도로의 신호등들도 래너드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녹색불을 깜빡이며 길을 터 주었다. 비는 이제 그쳤지만 도로 곳곳엔 배수관으로 채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고여 있었고, 바뀌가 닿는 순간 스프링 쿨러처럼 가는 물 분수를 양 옆으로 뿜어 내었다.


출발한 지 20분 남짓 되었을 무렵, 택시는 하이드 파크 앞 교차로를 돌아 웰즐리 호텔 방향의 직선로로 들어섰고, 탄력을 받아 나아가기 위해 RPM 수치를 높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택시의 센서에 이상 기류가 감지되었다. 호텔 앞 보행자 신호등이 래너드를 통과시키기 위해 녹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는 순간, 트레이닝 복을 입고 맞은편 인도에서 달려가던 한 여성이 횡단보도 옆 인도를 그냥 지나가나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직각으로 꺾어 횡단보도 쪽으로 전환하며 달려 나왔다.


그러자, 택시의 자율 주행 사고 대응 알고리즘이 긴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트레이닝복 모자를 눌러쓴 탓에 래너드의 택시가 다가오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한 건지 그녀는 횡단보도 맞은편을 향해 힘차게 오른발을 뻗어 내달렸다. 택시와 횡단보도까지는 불과 10M. 이대로 지나가면 정면으로 칠 확률이 95%로 계산되었다. 급 정거를 하더라도 빗길이라 제동력이 떨어져 치명상을 줄 확률이 90% 이상이었다. 마지막 남은 선택지는 속도를 최고로 높이고 차선을 우측으로 급변경하여 보행자를 최대한 피해 통과하는 것으로 계산되었다. 이 경우 사고를 피할 확률이 95%였기에, 즉시 실행에 옮겼다.


갑작스럽게 방향이 전환되는 바람에, 래너드의 몸이 좌측으로 휘청거렸다. 아델린도 급격하게 중심이 무너지며 아드레날린 수치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가속도를 내며 만들어내는 급격한 차선 변경에 고요한 새벽의 정적이 깨지며 유리를 밝고 지나가는 것 같은 요란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서야 새벽 조깅의 자유를 느끼며 경쾌한 달림질을 내딛던 그녀에게 택시의 존재가 드러났고, 바로 앞을 미꾸라지처럼 스치며 쏜살같이 지나가는 매끈한 차체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고 맞은편 인도에 두 발이 닫는 순간 방금 전 지나갔던 택시가 균형을 잃고 회전하며, 차선을 벗어나 인도로 미끄러져 넘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편, 사고 대응 알고리즘이 정확한 결정을 했다고 판단한 순간, 또다시 비상 모드로 전환되었다. 보행자를 불과 30cm 차이로 피해 가기 위해 긴급 조향을 하면서 무너진 차체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조향 보정이 들어갔다. 그 순간 오른쪽 앞바뀌가 물웅덩이 위를 지나 헛돌더니 차체의 뒷부분이 오른쪽으로 쏠리며 순식간에 차가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360도 회전하며 인도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석에 오른쪽 바퀴가 부딪치며 차체가 붕뜨더니 인도로 날아가 가로수를 덮치며 거꾸로 뒤집혀 버렸다. 사고 대응 알고리즘의 계산 범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돌발 상황이었다.


다행히 안전벨트와 서라운드 에어백이 래너드의 머리를 감싸며 충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어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듯했다. 차체가 회전하며 거꾸로 뒤집히는 동안 래너드의 머릿속엔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사고가 나서 비행기 출발 시간을 놓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푹신한 에어백에 머리가 닿으며 허리가 오른쪽 문 방향으로 살짝 돌아가며 문에 닿는 것 같더니 택시가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창 밖을 내다보니 위쪽으로는 가로수가 심어진 인도의 바닥이 보였고, 아래쪽으로는 윗 둥이 꺾여 쓰러진 플라타너스 나무 밑동이 새벽하늘을 올려 보며 래너드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래너드를 향해 소리치는 한 여성의 목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헉헉.. 괘 괜찮으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911에 신고했으니 곧 응급차가 올 거예요. 정신 차리고 조금만 계세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성이 놀란 눈을 깜빡거리며 래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래너드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잠시 후 응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창문을 깨고 래너드를 끄집어내려고 손을 내밀었다.


“혼자 나올 수 있겠어요?” 응급대원이 물었다. 별다른 통증은 없는 것 같아 래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벨트를 풀고, 자세를 고쳐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평상시와는 몸의 느낌이 달랐다. 하반신의 감각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허리로 가져가니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만져졌다. 손을 조금 더 움직이니 딱딱한 나뭇가지가 허리에 깊게 박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엄청난 통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아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제 허리에 나뭇가지가 박혀 있는 것 같아요. 통증은 전혀 없는데, 다리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어요.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이때 아델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래너드의 혈압이 떨어지고 있어요. 허리에 박힌 나뭇가지 때문에 출혈이 심해지는 것 같아요. 지혈부터 하고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 말을 들은 응급 대원이 래너드의 허리를 살펴보았다. 아델린의 말대로 창문을 깨고 들어온 플라타너스 나뭇가지가 래너드의 척추 근처에 깊게 박혀 있었고, 흘러나온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나뭇가지 밑을 지혈 붕대로 감아 피가 흘러나오는걸 최대한 막고, 조심스럽게 래너드를 택시 밖으로 끄집어내어 응급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뭇가지가 허리에 박혀 있던 터라 엎드린 자세로 이송할 수밖에 없었다. 택시 옆에 서 있던 여고생에게 응급대원이 물었다.


“여기 사고 난 분 하고는 어떤 관계죠? 사고 날 확률이 10만 분의 1도 안되는 자율 주행 택시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아 저는 사브리나라고 해요. 아침 조깅을 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저를 피하려다가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멀리서 횡단보도 녹색불이 깜빡이는 것을 분명히 봤었는데, 횡단보도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빨간색으로 바뀌었어요. 설마 지나가는 차가 있겠어하고 안이하게 생각한 제 잘못이에요. 이어폰을 끼고 있어 차가 오는 소리도 못 들었어요.”


말을 마치고 뒤집힌 택시 안을 살펴보던 사브리나는 방금 전 래너드가 앉아있던 좌석 위에 놓인 하얀색 UWB 드라이브 스틱을 집어 들고 응급차에 함께 올라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깜빡이며 아무렇지 않게 사브리나를 바라봤던 래너드는 눈을 감고 죽은 듯이 구급차의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택시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혈을 받고, 허리에 박힌 나뭇가지를 제거하는 수술이 바로 진행되었다. 다행히 1시간 만에 수술은 완료되었고, 회복실로 옮겨진 래너드의 의식도 곧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지금 몇 시지?” 의식이 돌아오자 6시 30분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이른 새벽의 다급함이 다시 몰려들었다.


“레너드, 제시 아줌마에게는 내가 이미 연락했어. 날씨가 안 좋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바로는 못 갈 것 같다고 말이야. 다행히 네 엄마는 그렇게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몸 회복하는 거에 신경 쓰도록 하자.”


아델린의 다정한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그제야 한평 남짓한 입원실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는 빨간색 테두리가 두드러진 타원형의 시계가 아침 9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오른편에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고생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래너드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다 제 잘못이에요.”


사브리나가 어쩔 줄 몰라하며 래너드에게 사과하자 아델린이 거들면서 말했다.


“래너드, 방금 전 교통국 사고 조사반으로부터 조사 결과가 도착했어. 자동차 블랙박스와 근처 CCTV 영상을 분석한 결과 자동차 자체의 오동작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어. 사브리나를 보호하기 위한 알고리즘의 판단은 최선이었어. 서라운드 에어백도 제대로 터졌고. 단지 도로의 빗물이 배수되지 않고 고여 있었던 것이 택시가 전복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판결 났어. 원래 오늘 새벽에 도로 정비과에서 노면 보수 공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연기되었다고 해. 보수 공사만 좀 더 일찍 되어 있었어도....”


사고 조사 결과를 알려주는 아델린의 음성에는 시에서 좀 더 민첩하게 도로 정비를 진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 잔뜩 녹아들어 있었다.


“아 그리고,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는지 모르고 뛰어든 사브리나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어. 보행자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것이 제1원칙이고, 택시가 응급 모드로 주행하면서 횡단보도 신호가 갑자기 변경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상황이었어.”


“결국. 시에서 도로 정비를 제 때에 하지 못한 과실이 인정되어 택시회사에는 차량 교체 비용을 지불하고, 래너드 네게는 수술비용, 입원비용 그리고 1년 치 재활비용을 모두 지원해 주기로 했어. 그리고 이번 사고 데이터를 알고리즘에 추가해서, 응급 모드로 주행 시 도로 신호등이 변경되는 타이밍을 좀 더 최적화시킬 예정이래.”


아델린이 말을 마치자, TV 뉴스에서 교통사고 소식이 흘러나왔다. 


“[앵커] 

저희 BOC 뉴스 역사상 최악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오늘 새벽 5시 11분쯤 웰즐리 호텔 앞 횡단보도에서 자율 주행 택시가 전복되어 가로수가 훼손 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이 사고로 택시 안에 타고 있던 20대 초반 승객이 큰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습니다. 교통국 사고 조사반 담당자를 연결해 사고의 원인을 들어보겠습니다.


[교통국 담당자]

차량의 블랙박스 데이터, 도로의 카메라와 센서 데이터를 살펴본 결과 사고의 원인은 이상 기온 현상으로 급작스럽게 내린 비 때문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앵커]

그게 무슨 말이죠? 밤새 폭우가 쏟아진 것도 아니고, 국지성 소나기가 잠깐 내린 걸로 알고 알고 있는데요.


[교통국 담당자]

아, 네 그게 설명하자면 아주 복잡합니다.발단은 이번 달부터 적용된 자율 주행 택시의 응급 모드 운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 발생했던 사건 기억 나시죠?


[앵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택시에 탑승했던 승객에게 심장 쇼크가 발생했는데, 병원에 늦게 도착해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죠. 그래서, 올해부터 시의 교통 신호 체계와 연동된 응급 모드 운행이 허용된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고와 무슨 상관이죠? 


[교통국 담당자]

네, 이번에 사고가 난 택시는 응급 모드로 주행 중이었습니다. 신호등도 택시와 유기적으로 연동되어 척척  바뀌었고요. 근데, 횡단보도 신호가 갑자가 빨간불로 변한 걸 보지 못하고 뛰어든 보행자를 피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택시 자체의 결함은 아니었습니다. 자율 주행 알고리즘은 완벽했어요.덕분에 보행자는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탑승객과 택시도 아무 문제없이 지나가도록 판단을 내렸단 말이죠.그런데,  횡단보도 바닥에 고여있던 물 웅덩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바퀴가 헛돌면서 미끄러져 버렸어요. 이런 건 알고리즘으로 커버할 수 없죠.


[앵커]

네, 그렇군요. 그런데, 물웅덩이가 있다는 건 시에서도 미리 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교통국 담당자]

사실, 시에서도 물 웅덩이가 있는 걸 미리 알고 도로 정비과에 정비를 지시했단 말이죠. 하지만, 예전처럼 이른 새벽에 비 맞으며 보수하라고 했다간 각종 노동자 인권 보호 단체의  집중포화를   맞게 될게 뻔하잖아요..

이런 건 도로 배수 시설을 보강하거나, 로봇 노동자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할 문제예요. 결국, 시에서 이번 사고의 모든 책임을 떠안기로 했습니다. 


[앵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율 주행 택시가 도입된 이래 이처럼 심각한 사고는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교통국 담당자]

네, 맞습니다. 아마도, 최근 3년간 발생된 유일한 인명 사고가 아닐까  판단됩니다. 3년 연속 무사고 기록이 중단되는 오명을 안게 되었습니다.


[앵커]

네, 아무쪼록 이번 사고를 계기로 시의 교통 관리 체계가 더욱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번 사고로 하반신 마비 상태에 빠진 승객의 빠른 쾌유를 빌며 뉴스를 마칩니다.”


뉴스 보도를 듣고 나서야, 래너드는 자신이 하반신 마비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하반신 마비라고? 반신 불구?” 믿어지지가 않아 침대 이불을 곧바로 들춰 보았다. 


두 다리는 정상적으로 침대 끝을 향해 뻗어 있고,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무릎을 구부려 보려고 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골반 밑에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아델린, 하체에 아무런 감각이 없어. 내 두 다리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이때  담당 의사 선생님이 침대 왼편으로 다가와 래너드에게 따스하게 말을 건넸다.


“좀 어떠세요? 수술은 잘 되었는데, 상처 난 부위가 척수 쪽이어서 회복되는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척추 골절은 없는데, 척수가 나뭇가지에 눌려 찢기면서 하반신으로 연결되는 신경이 손상을 입었어요. 최소 3개월은 절대 안정을 취하고 그 이후부터 재활 치료를 조금씩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줄기 세포를 이용한 척수 재생인데, 비용이 너무 비싸서 지금으로서는 안정 및 재활 치료를 우선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재활의 여지가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지만, 이대로 영원히 반신 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선생님 척수 재생 수술 비용은 얼마나 되나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용을 묻는 래너드에게 의사 선생님이 망설이며 답을 해 주었다.


“1회 시술 비용이 1000만 ECO (한화 1억)입니다. 그런데, 1회 시술로 완전히 회복되는 확률은 50%이고, 90% 이상 회복되려면 추가 시술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1000만 ECO라는 말을 듣자, 의사 선생님이 재활치료를 우선 고려하자고 한 이유가 바로 이해되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시나리오 작가 공모전에 출품할 거라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래너드에게 떠오르는 감정은 비관, 절망, 우울이라는 단어뿐이었다. 의욕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거동이 제한되면서 신체 활동이 줄어드니, 두뇌 회전도 덩달아 느려진 것 같았다. 글을 쓸 때 중요한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집중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이 상태로는 공모전 출품은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급격하게 비관 모드로 빠져들고 있는 래너드의 심경 변화를 눈치챈 아델린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래너드, 공모전 출품은 내가 도와줄 테니 포기하지 말고 한번 도전해 보자. 내가 어제 얘기한 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로 밤새 알고리즘을 돌려 보았는데, 한번 확인해 보고 나한테 의견을 얘기해 주면 좋겠어.”


아델린이 도와준다는 말에 힘이 나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단, 1g의 의욕과 열정도 모두 날아가 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한낮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해가 떨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델린이 고생해서 돌린 알고리즘 결과가 문득 궁금해졌다.


*작품 제안 #001 

- Drafted by 2038-0328-0125(app), resulted at 2038년 3월 29일 08시 20분, elapsed 9시간 20분

아델린이 돌린 첫 번째 알고리즘의 결과는 래너드의 상상 이상이었다. 사실, 래너드도 2002년 개봉되어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디아워스(The hours)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이었는데, 래너드 자신을 등장인물에 추가하여 버지니아 울프와 각자의 작품을 통해 영적 교감을 한다는 스토리는  정말 획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놉시스와 목차를 한 동안 바라보던 래너드의 마음속에 왠지 모르게 2% 부족한 아쉬움이 맴돌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을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왜 버지니아 자신에 대한 전기는 찾아볼 수가 없는 걸까....? 그녀가 썼다는 일기장은 왜 자취를 감춰버린 걸까? 분명히 일기장이 있다고 했는데... 이상해...”


탄탄하고 획기적인 스토리라인을 만드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버지니아 울프의 내면을 알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커다란 벽에 가로막힌 것과 같은 답답함이 다시 몰려왔다. 그러자, 오늘 새벽 사고의 순간이 악몽같이 다시 떠올랐고, 반신불구로 영원히 살아야 될지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몸 전체를 휘감아 옥죄기 시작했다.


“아델린, 오늘은 이만 자야 겠어.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어.....”

“그래, 내일은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래너드. 좋은 꿈 꾸고 잘 자~”

이전 02화 1.아델린 Wake-up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