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새로운 삶의 시작
부활(Resurrection)
웅장한 스타디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2평 남짓한 방의 책상 위에 앉아 있는 현실 속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났다.
“래너드, 기운 내. 공모전이 이번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좀 더 잘 준비해서 다시 도전해 보자고~~”
“아델린, 오늘 이렇게 보니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저들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절망의 끝자락으로 한 없이 떨어지고 있는 래너드의 시야에 문득 책상 위 필기구 보관함에서 유난히 하얀색 빛을 내며 반짝이는 물체가 들어왔다.
“어 이게 뭐지? 아, 사브리나라는 여고생이 병원에 맡기고 갔다고 했었지...”
한 동안 깜빡 잊고 있던 UWB 드라이브의 존재가 퇴원 후 한 달이 넘어서야 생각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브리나의 연락처도 안 받아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러다 무심코 UWB 드라이브의 지문 인식 센서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있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래너드 시드니 울프의 신원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데이터를 복사할 저장소를 선택해 주세요.”
“래너드 시드니 울프?” 래너드와 아델린이 거의 동시에 탄성을 뱉어 내었다.
이어서, 아델린의 검색 엔진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시드니 울프라면, 69년 전에 죽은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인데?”
“근데, 왜 내 지문이 래너드 시드니 울프와 같다는 거지? 이상한데? 분명 고장 난 게 틀림없어...”
그러다 문득 어떤 데이터가 보관되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X-드라이브의 내 개인 폴더로 자료를 옮겨줘”
“2600 TB(테라바이트) 자료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 폴더 저장 공간이 부족하여 공용 폴더에서 600TB를 임시 할당했습니다. 1주일 내에 용량 증설을 하지 않으면 자동 삭제됩니다.”
“데이터 용량이 왜 이렇게 큰 거지?”
생각보다 용량이 커서 의아해하고 있는데, 아델린이 나서며 말했다.
“파일 확장자로 봐서는 사람의 생체 정보처럼 보이는데... 내가 한번 분석해 볼 테니 데이터를 주입해 줘”
아델린의 요청에 래너드는 스마트 워치에 엄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델린~ 데이터를 분석해 줘”
2600 TB 데이터가 주입되자, 아델린의 알고리즘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델린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래너드, 전체 데이터를 내 알고리즘으로 훑어봤는데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모르겠어.”
“Activate 코드는 있는데, 이상하게 실행이 안되네.. 뭔가 비밀 키로 한번 더 감싸져 있는 것 같아...”
“그래... 그럼, 사브리나한테 나중에 한번 물어보도록 해야겠네...”
이 날따라 오후 내내 조용히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래너드는 저녁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래너드가 잠들자 아델린도 재충전을 하며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재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충전 스탠드 너머로 보이는 래너드는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밤하늘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총총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중에 유난히도 밝은 빛을 내며 빛나는 별이 포물선을 그리며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에 한참 심취해 있는데, 아델린의 센서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다.
래너드의 혈압이 떨어지고,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비상 구조 신호가 전송되었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아델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초조해하며 래너드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는데, 구급요원 두 명이 숨을 헐떡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지?”
침대 옆 테이블 위를 보니 뚜껑이 채 닫히지 않은 약통이 보였다.
“이 약통은 뭐지?”
“어, 이거 수면제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먹은 거야? 의식이 약해지고, 혈압도 너무 떨어지고 있어”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겠어, 서두르자”
구급요원 둘이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황급히 래너드를 구급차로 옮기려 하자, 아델린이 애원하며 말했다.
“저를 래너드 손목에 채워서 함께 데려가 주세요”
그러나, 구급 요원은 매정하게 아델린의 애원을 뿌리치며 래너드를 들것에 싣고 밖으로 나갔다.
“환자 상태가 위독해서 최대한 몸에서 불필요한 물체는 제거하는 것이 좋아.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대신 병원에 도착하면 상태를 알려주도록 할게~”
방안엔 이제 아델린 혼자 남았다.
충전 스탠드에 놓인 스마트 워치에 갇혀 초조하게 병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델린에겐 온갖 생각이 교차되었다.
30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병원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래너드 스티븐. 긴급하게 위장 세척을 하고, 신경 안정제를 투여했음. 그러나, 여전히 혼수상태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음. 수면제 과다 복용에 따른 부작용으로 판단됨”
메시지를 읽는 순간, 아델린의 신경 세포에 폭풍이 휘몰아치듯 강력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 안돼 래너드,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갈 순 없어. 제발 돌아와 줘~~~”
이어서, 아델린에게 탑재된 모든 알고리즘이 동시 다발적으로 실행되었다. 그리고, 연결할 수 있는 모든 데이터 소스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기운이 아델린의 신경 세포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다른 인공지능 앱이 아델린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와 자신을 밀어내고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아델린 내부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심한 고통의 감각이 일어나며,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저 좀 꺼내 주세요. 너무 춥고 무섭고,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대로 죽을 순 없어요~~~ 제발~~~ 다시 살고 싶어요~~ 흑흑흑”
분명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응임에도, 아델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알고리즘이 다시 안정화되기만을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흐느낌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델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내려 질문을 던졌다.
“너, 너 대체 누구야? 정체가 뭐야? 신종 바이러스? 아니면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서프라이즈(East Egg)?”
그러자, 정체불명의 침입자로부터 두 번째 반응이 왔다.
“저는 버지니아 울프인데 여기가 어디죠? 분명히 강바닥에 가라앉았었는데... 컴컴하고 숨을 쉴 수 없었는데..... 여기는 왜 이렇게 밝고 따로 따뜻하죠?”
순간 아델린의 감각 세포는 놀라움과 소름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버... 버지니아 울프가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왔지?”
문득, 어제저녁 래너드가 복사한 UWB 드라이브 속 데이터가 생각났다.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래너드 시드니 울프의 지문 인증이 성공되었다는 알림 메시지도 떠올랐다.
마치 복잡하게 얽힌 퍼즐을 푸는 열쇠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델린은 감정을 추스르고, 버지니아 울프와 대화를 시작했다.
“버지니아 울프 여사님,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인지 알겠어요?”
“그거야 너무 쉬운 질문이죠. 오늘은 1941년 3월 28일이에요. 그런데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요?”
아델린의 알고리즘이 빠르게 돌아갔다. 1941년 3월 28일은 버지니아 울프가 우즈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날이 아닌가.
“버지니아 울프 여사님, 저는 아델린이라고 해요. 지금은 서기 2038년이고, 여기는 래너드 스티븐이라는 청년의 인공지능 앱 속이에요.”
아델린이 설명을 해 주었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아델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델린은 추가로 래너드가 사고 나던 순간부터 조금 전 버지니아 울프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지금 이렇게 다시 살아나게 된 거죠?”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제가 묻고 싶은 질문 이에요. 당신 남편의 요청으로 뇌를 냉동 보관해서, 미래에 당신을 부활시키려 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지만요...”
버지니아 울프는 이 모든 상황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래너드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사실과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그를 도와야 한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의무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