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arka Nov 01. 2020

13.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자리에서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김필수의 성공 이야기도 그렇고 김민수와의 악연도 그렇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김민수의 말대로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들이 담배 몇 가치 태울 시간 동안 김민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남기고 간 선화의 대한 질 낮은 농담은 내 머릿속을 더욱 혼돈으로 치닫게 했다. 그들의 시시껄렁한 음담패설이 단지 남자들의 친목을 위한 단순한 유희로 치부되기에는 선화의 표정이 너무나 쓸쓸했다. 미처 흩어지지 않은 담배연기가 콧속을 매캐하게 찔렀다.


“순덕이냐?”


찝찝한 기분을 곱씹으며 멍 때리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렀다. 내가 놀라서 돌아보자 그곳에는 누가 봐도 아저씨처럼 생긴 남자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혹시.. 이광철?”


남자는 긴가민가하는 내 물음에 껄껄 웃더니 그래 오랜만이다라며 내 손을 찾아 쥐고는 아래 위로 흔들었다. 거칠고 두툼한 손바닥이 내 손을 짓눌렀다. 묵직한 압력이 그동안 살아온 그의 삶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얼떨결에 그와 악수를 했지만 사실 이광철과 나는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인사할만한 사이는 아니라 조금 당황했다. 이광철도 그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쥐었던 손을 놓고는 멋쩍게 웃었다.


“그.. 미안하다. 우리가 반갑게 악수할 처지는 아닌데 말이야.”


“아냐. 오랜만이네 진짜.”


“그래, 거의 십삼 년 만인가? 별 일 없지? 아직 그 동네 살고?”


“응 나야 뭐 별 일 없지. 아직 거기 학교 앞 쪽 살아. 넌 어때?”


“나야 뭐, 보시다시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야.”


이광철이 자기 옷을 가르치며 말했다. 이광철의 시선을 따라 그의 옷을 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저기 흙먼지 투성이의 두터운 잠바는 소매가 많이 닳아 있었다. 펑퍼짐한 바지도 재질이 꽤나 질겨보였다. 그가 신은 갈색의 안전화는 신발 코 끝에 흠집이 많이 나 있어서 그 부분만 색깔이 달랐다.


“어.. 일 끝나고 오는 길이야?”


나는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불쑥 그런 것을 묻기에는 이광철의 행색이 신경 쓰여 말을 돌렸다.


“응. 얼마 전에 폐업한 가게 철거 좀 하느라. 원래 좀 일찍 오고 싶었는데 일이 늦게 끝났네.”


“아 인테리어 쪽 일 하는구나?”


“인테리어는 무슨 그냥 노가다지. 뭐 페인트나 공구리 같은 밑 작업도 하긴 해."


“그렇구나. 애들 기다리겠다. 가서 다른 애들이랑 인사 좀 할래?”


나는 이광철과 더 이야기할 거리가 없어 어색해진 나머지 안으로 들어가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이광철은 고개를 저으며 잠깐 이야기 좀 더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지만 이광철이 나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광철이 나에게 할 이야기는 없을 텐데 굳이 밖에서 나와 이러고 있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이광철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어떤 열패감이 오랜만에 만나는 중학교 동창들 앞에서 드러날까 봐 미리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광철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까까지 허물없이 잘 이야기하던 이광철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는 갑자기 우물쭈물하고 있는 이광철을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기억하는 소년의 이광철은 범접하기 어려운 대장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이광철은 말수가 적기는 해도 소녀처럼 할 말을 고심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광철이 어쩔 줄 몰라하며 할 말을 고르고 있자 나는 속으로 이광철이 대체하기 힘든 말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보험 영업을 하거나 돈을 빌려놓고 잠적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광철은 보험 쪽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한다고 했으므로 남은 것은 후자였다. 나는 이광철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됐다. 나이가 들어 유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이광철은 어쨌든 카리스마 있는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김민수 패거리에게 아직도 옛날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로서는 이광철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은 하겠지만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것은 뻔했다.


나는 이광철을 앞에 두고 어떻게 하면 거절을 쉽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이광철이 납득하면서도 다시는 돈을 빌려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이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변명이 쉽게 떠오를 리 없었다. 속으로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이광철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일은 정말 미안하다.”


나는 뜻밖의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이광철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어떻게 너의 인생에서 꼬여버린 그 순간을 풀 수는 없겠지만 너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꼭 하고 싶었다.”


“무슨..”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겠지만은.. 그래도 내가 그때 방관만 한 것은 분명히 잘못이었지. 충분히 막을 힘도 있었고, 너를 도와줬어야 했는데.. 변명이지만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어. 그렇게까지 생각이 깊지 못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지만..”


“잠깐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내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이광철을 제지하며 물어보자 이광철이 슬며시 내 눈치를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철없을 때의 이야기를 사과하려고 하는 거야.”


내가 대답이 없자 이광철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우.. 하긴 이렇게 다짜고짜 불쑥 찾아와서 사과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언젠가 꼭 사과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어 이건 정말이야. 다만 너에게 따로 연락해 찾아갈 만큼의 용기도 여건도 되지 않았어.”


이광철이 씁쓸하게 웃었다.


“얼마 전에 딸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했어. 이제 곧 학교 들어가."


뜬금없는 이광철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결혼까지는 몰라도 설마 벌써 아이가 있을 줄은(게다가 나이가 꽤 찬)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광철의 말에 나는 결혼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광철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사실 스물두 살에 결혼했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했거든. 자퇴하고 바로 해병대 입대해서 2년 뺑이치고 나와서 나이트에서 술 먹다가 만난 여자가 지금 내 와이프야."


이광철이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을 몇 마디 문장으로 말해버리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이광철은 그런 나를 보고는 씨익 웃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나이트에서 만났다고 하더라도 정말 사랑하니까.”


나는 이광철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내자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다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괜찮아 이제는 익숙하니까. 처음에는 다들 나이트에서 만났다고 이야기하면 그런 반응이거든. 뭐 이제는 와이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구구절절이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미리 내가 말해버려.”


“귀찮으니까 선수를 치는 느낌으로?”


“그런 거지.”


이광철은 내가 말을 알아듣자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얼굴은 웃었지만 속으로는 이광철이 정말 많이 변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이광철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편이라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듯 그의 자존심도 세상의 풍파 앞에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가 어느새 강가의 조약돌처럼 작고 둥글둥글 해졌는지도 모른다.


“뭐, 그래서 예상하다시피 애가 들어서는 바람에 급하게 결혼을 하게 됐어. 정말 우리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내 새끼를 세상에서 없던 일로 되돌린다거나 하는 일은 죽어도 하기 싫었거든. 다행히 와이프 쪽도 우리 집도 홀 어머니 가정이라 딱히 반대는 없었어. 오히려 못마땅해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기색이더라고. 어쨌든 자식이 결혼해서 분가하게 되면 큰 산하나 넘는 거니깐. 그래서 일사천리로 후다닥 결혼했지.”


“그랬구나... 벌써 결혼한 지 꽤 됐네.”


나는 어쩐지 이광철이 나보다 나이를 훌쩍 더 먹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던 이광철이 아니라 나보다 열 살은 더 먹은 이광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른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광철은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나로서는 결혼이라든지 육아라든지 하는 이야기들은 저 멀리 떠있는 별들과의 거리만큼 먼 이야기였다.


“뭐 그렇지. 이번에 딸아이가 졸업을 했다고 했잖아? 아 참, 이름은 수련이야. 이수련. 집사람이 수련을 좋아하거든. 찾아보니까 꽃말도 예쁘고 해서 그렇게 지었어. 수련이가 음..”


이광철이 잠시 망설이며 뜸을 들였다.


“애가 좀 조용해. 유치원 선생님 말로는 지나치게 내성적이랄까, 말도 잘 안 하고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아. 나도 집사람도 그런 성격이 아닌데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 그래서 그런지 유치원에서 남자애들이 짓궂게 괴롭혔나 봐. 여자애들도 애가 말도 안 하고 반응도 없고 하니까 같이 놀려고 하지도 않고.. 말하자면 왕따, 요즘도 왕따라는 말을 쓰나? 여하튼 그런 걸 당한 거지.”


이광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갑자기 무겁게 흐르는 이야기에 할 말을 찾다가 아까 김민수 패거리들이 던져버린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왔다. 담배 피울 거면 피워도 괜찮다고 이야기했더니 이광철은 몇 년 전에 끊었어라며 괜찮다고 말했다.


“자식이 그렇게 따돌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무슨 느낌인 줄 알아? 화? 아니 화는 그렇게 바로 나지 않아. 목젖 바로 아래에서 시뻘건 무언가가 울컥울컥 대면서 눈이 뽑힐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들어.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엄청난 생각들이 쏟아져. 어떻게 하면 좋지, 아이들을 불러다 맛있는 걸 먹일까, 전부 다 불러놓고 타이를까, 무섭게 혼을 낼까, 아니면 걔들 부모들을 찾아갈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돌아다니다가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발만 동동 구를 때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우수수 무너지는 느낌. 절망, 그래 절망이라는 게 그럴까 싶어.”


작가의 이전글 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