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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12.

"처음에는 나도 못 알아봤지. 곰.. 아니 얼굴도 깨끗해지고, 눈도 코도... 엄청나게 바뀐 건 아닌데... 뭔가 예전의 인상이 아니잖아."


김민수의 말에 나 역시 공감했다. 김필수는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쟤 김필수잖아!'라고 해주지 않는다면 김필수라고는 전혀 생각이 안 드는 기묘한 외모가 되어버렸다.


"뭐, 아무래도 피부가 깨끗해진 게 크겠지."


이재민이 김민수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래. 그래서 나도 처음 만났을 때 별생각 없었단 말이야. 아버지랑 같이 만나기도 했고, 내 입장에서는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굽신거리기도 싫었고. 나도 어쨌든 명함은 이사로 팠으니까, 그렇게 꿇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뭐, 그럴 만도 하지."


유재환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이 새끼가 아버지가 먼저 인사하면서 명함을 건네는데 쳐다도 안 보고 나만 물끄러미 보는 거야. 옆에 있던 그 새끼 비서도 당황하고 아버지도 무슨 상황인가 싶어 명함 내민 손 그대로 굳어버리고 나는 나대로 뭐하는 새낀가 싶어서 나도 쳐다봤지."


김민수가 다 핀 꽁초를 둘둘 말아 손가락으로 탁 퉁기고는 이재민에게 한 가치만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이재민이 담뱃갑을 열더니 '아 쌍댄데...' 하며 김민수에게 한 가치를 건넸다. 옆에서 유재환이 나중에 자기가 한 갑 사 줄 테니 어서 얘기나 듣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이재민은 툴툴거리면서 김민수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김민수가 또 한 번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고는 담배연기를 길게 뿜었다. 자욱하게 퍼져가는 담배연기가 김민수의 짜증스러운 기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참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라고. 나도 오기가 생겨서 계속 쳐다봤지. 그러더니 지가 먼저 고개를 돌리대? 그래서 '하 새끼 졸았네'했지. 그냥 우리가 하청업체고 하니까 기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속으로 비웃고 있었는데 이 새끼가 비서를 부르더니 갑자기 차를 대기시키라는 거야 나가겠다고. 비서가 놀래서 네? 이러니까 이 새끼가 우리 아버지는 쳐다도 안 보고 '저런 사람들이랑은 거래 못하겠네요' 하더니 휙 나가버리는 거야."


김민수가 말을 멈추고 담배를 다시 한번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았다.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가 아까보다 더 짙게 느껴졌다.


“아빠도 그쯤 되니까 열이 받았지. 그 양반 성격 알잖냐. 그 길로 김필수를 뒤따라가서 붙잡고는 말했지. ‘어이 이사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는 경우가 아니지 않느냐’고.”


“그렇지 너네 아부지가 그 걸 참으실 리 없지.”


이재민이 김민수의 의견에 동조하며 말했다.


“맞아.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김필수 팔을 잡고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김필수 그 새끼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거야. 그대로 아빠를 쳐다보더니 ‘아드님한테 물어보세요’ 하고는 팔을 뿌리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버렸어.”


“와 그래서 어떻게 됐냐?”


“어떻게 되긴. 아빠는 황당해서 나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 근데 그때는 그 김필수가 그 김필수인지 내가 알았냐? 나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그랬지. 그 길로 우리는 회사로 돌아왔어. 부장급 위로 다 호출해서 긴급회의를 했지. 근데 그 양반들 모아서 회의한다고 방법이 있냐? 이번 거래 끊기면 회사가 도산할 위기인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거지. 아빠는 노발대발하면서 재떨이 던지고 임원들은 전화 붙잡고 김필수란 새끼가 대체 뭐하는 새낀지 알아보느라 난리고. 어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아주.”


“아주 회사가 뒤집어 졌겠구만.”


“난리도 아니었지 진짜. 나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멍하게 있다가 그 새끼가 나를 걸고넘어지니까 이건 안 되겠다 싶더라고. 다시 H사로 차 타고 갔지. 비서한테 물어보니까 웬걸 안에 있다네? 그래서 면담 좀 하러 왔다고 전해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잠깐 기다리라는 거야.”


“오 그래서?”


“후, 씨바 근데 삼십 분이 지나도 어째 오라는 기미가 없는 거야. 그때가 세시인가 그랬는데. 근데 뭐 별 수 있냐? 갑질이라면 힘없는 을이 숙이는 수밖에. 주야장천 기다렸지 뭐. 그랬더니 여섯 시인가? 그 새끼가 가방 들고 안에서 나오는 거야. 그러더니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고 비서한테 ‘먼저 퇴근할게요’하면서 나가는 거 있지.”


"와 나 진짜 황당한 그 기분 아냐 너희들? 내가 진짜.. 아무리 옛날에 개 같이 살았어도 이제 마음 잡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데 꼭 그걸 못 참고 건드리는 놈들이 나타나는 기분?"


유재환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옛날엔 진짜 막 살기는 했지."


"근데 어쩌겠냐. 회사 존망이 걸려있는데. 바로 엘리베이터 잡고 쫓아 내려갔지. 갔더니 기사가 차 문 열어주고 있대? 그대로 차 문 붙잡고 아이고 이사님 했지."


김민수가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하며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 자식이 눈을 이렇게 올려 뜨고는 '무슨 일 인데요?'하는거야. 와 그때는 열도 안 받더라 단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이 새끼가 고분고분해질까? 이 생각밖에 안 드는 거야. 그래서 일단 무릎 구부리고 눈높이를 맞췄지. 이게 정말 간단한 퍼포먼스인데, 꼰대들은 이걸 기가 막히게 좋아한대. 응? 나도 아빠한테 배운 거지 옛날에. 씨바 꼰대가 나이 많다고 다 꼰대냐? 젊은 놈들도 대접받는 거 좋아하고 권력 휘두르고 이러면 꼰대지. 아무튼 그러니까 이 새끼가 표정이 좀 변하대? 이때다 싶어서 내가 아이고 이사님 제가 좋은 데 아니까 그쪽으로 모실게요 식사 한 번 어떠십니까 했지."


"야 그걸 어떻게 참냐 너도 참 대단하다."


"나도 속으로 내가 대견했다니까 그때는? 그래서 이제 강남에 VVIP들만 가는 룸빵에 갔지. 와 씨 너네 거기 얼마인 줄 아냐? 테이블당 500이야 500. 그것도 카드 안 받고 현금으로. 내가 진짜 내 돈 털어서 데리고 갔다. 예약도 못하고 마담한테 사정사정해서."


"그런데가 있어? 야 우리도 함 데리고 가주라."


이재민이 낄낄거리며 이야기하자 김민수가 꺼지라고 말하고는 김필수와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무튼 가서 애들도 A급으로 싹 불러 모아서 일렬로 대기시키고 술도 샹동으로 준비했지. 그랬더니 이 새끼가 처음엔 당황하대? 그러더니 테이블에 혼자 가서 싹 앉는 거야. 그래서 옳다쿠나 싶었지. 너 새끼도 남자는 남자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제 됐다 싶었던 거야. 얼른 옆에 뛰어가서 술잔 쥐어주고 한 잔 따라줬지. 그랬더니 술잔 들더니 냄새를 킁킁 맞대? 그래서 나는 새끼가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그런다며 속으로 웃었지. 그러더니 갑자기 냅다 술을 내 얼굴에 뿌리는 거야."


"뭐? 술을 얼굴에 뿌렸다고?"


"그래 씨바. 하 내가 술 싸대기는 그때 처음 맞아봤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건데."


"미치겠다 진짜. 아니 왜?"


"들어봐. 그래서 내가 순간 당황해서 한 3초? 멍 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열이 너무 뻗치는 거야. 그대로 일어나서 그 새끼 머리카락 쥐고 욕 갈겼지. 개새끼가 사람 무시해도 유분수 아니냐고."


“아니, 넌 그래서 머리채를 잡았다고? 김민수 성격 여전하네.”


“야, 씨바 너 같으면 참겠냐? 아부지 굽신거리는데 쳐다도 안 보지, 내가 응, 이사님 이사님 하면서 룸빵 데리고 왔더니 술 싸대기를 때리지, 그걸 어떻게 참냐?”


“하긴 그건 그렇네. 그래서 그 새끼가 뭐라든?”


“내가 머리채 잡고 한대 쥐어박으려고 하는데 이 새끼가 표정이 이상하게 평온한 거야. 뭐지 싶었는데 말을 하더라고 ‘민수야, 너 이래도 되냐?’라고. 그 말을 듣네 피가 싸 하게 식는 게 느껴지는 기분 너네 뭔 줄 아냐? 갑자기 막 아버지 얼굴 떠오르면서 우리 회사 망해서 차압당하고 직원들 짐 싸고 이런 게 상상이 되는데 와 미치겠더라… 그 순간 머리채 놓고 바로 무릎 꿇었지. 내가 무릎 꿇고 이사님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비는데 이 새끼가 낄낄 거리면서 갑자기 웃는 거야.”


말을 멈춘 김민수가 다시 가게 안쪽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민수야 나야 필수. 이러는데 내가 맨날 그.. 별명 불렀지 언제 이름을 부른 적이 있어야지. 씨바 필수가 누구야? 이 생각에 다시 얼굴을 보니까, 와 곰보인 거야. 내가 놀래서 멍 때리니까 이 새끼가 내 뺨을 툭툭 치더니 ‘친구끼리 장난 좀 쳐봤어. 너 장난 좋아하잖아?’ 이러는데 진짜 미치겠더라. 그러더니 ‘오늘 일은 아버지한테 잘 말해둘게’ 이러면서 짐 챙겨서 나가더라.”
 


 “와 소름 돋네. 아버지가 뭐라셨냐?”



“우리 아빠 성격에 어떻게 됐겠냐? 재떨이 날아가고 장난 아니었지. 야 나이 서른 다 돼가는데 골프채로 맞았다 씨바 말이 되냐?”


“김필수가 대체 아부지한테 뭐라 그랬대?”


“뭐 다행히 학교 다닐 때 얘긴 깊게 안 했나 봐. 그냥 동창인데 행실이 불량해서 같이 일 안 한다고 했던 거래. 근데 내가 술 취해서 폭행하려 했다고 얘기했다더라. 아빠는 그 말 듣고 꼭지가 돌아버린 거지 완전. 씨바 집에서 내쫓길뻔한 거 엄마가 말리고 내가 진짜 싹싹 빌어서 넘어갔다.”


김민수가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유재환과 이재민이 뭔가 더 듣고 싶은 눈치였지만 김민수가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말했다. 김민수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감지한 탓인지 이재민이 불쑥 최선화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그래. 이제 들어가자 오래 나왔다. 오랜만에 최선화도 보는데 술이나 이빠이 마셔야지.”


“미친놈. 근데 최선화 뭔가 한물간 것 같지 않냐? 애가 옛날에는 청순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맛이 없어.”


“어 나도 느꼈는데! 뭔가 아직도 이쁘장하긴 한데 뭐라그래야 하나 축 늘어진 화초 같다고 해야 되나?”


“씨바꺼 김필수 새끼 때문에 짜증 나는데 오늘 함 해봐?”


“너한테는 안 줄듯.”


김민수 패거리는 선화를 향한 음담패설을 내뱉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그들은 들어가는 내내 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저들의 이야기에 취해 낄낄거리며 술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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