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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14.

이광철이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매일 같이 와이프랑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하고 이사를 가네 마네, 병원 상담을 받아보네 마네 하던 차에 어느 날 와이프가 딱 그러는 거야.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내 딸이 이렇게 고통을 받냐고. 나는 살면서 남 괴롭히거나 하지 않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내 딸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 펑펑 우는데, 아차 싶었지. 나는 아니었거든. 나는 와이프처럼 살지 않았으니까."


이광철이 말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촉촉하게 젖은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저것은 속죄의 눈일까 아니면 자기 딸과 아내에게 충실한 한 가장의 간절한 눈일까. 나는 그만 입이 텁텁해져 물을 마시고 싶어 졌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광철은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이광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십 년도 넘게 지난 일을 단지 자신의 딸이 왕따를 당한 사건으로 인해 나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 졌다는 것은 동기라고 보기에는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이광철에게 악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광철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고 좋지 않은 감정만이 부정확한 기억과 함께 혼탁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나는 이광철에게 안에 애들이 기다리니까 얼른 들어가서 인사를 하라며 들여보냈다. 그러자 이광철은 이야기가 길어져서 미안하다며 머쓱하게 웃고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광철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서 상황을 곱씹었다.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물 안에 뜬 먼지처럼 머릿속에서 부유했다.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직도 식지 않은 담배 똥에서 기다란 연기가 하늘 위로 끊어질 듯 말 듯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발로 꽁초를 지긋이 문대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문을 닫으면서 뒤로 도는데 퍽 하고 누군가 나에게 부딪혔다. 상대는 비틀거리더니 나는 쳐다도 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가게를 나가버렸다. 여자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코 끝을 건드리는 샴푸 냄새를 풍기고 갔다. 익숙한 향. 뒷모습을 보니 선화가 분명했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가 금방이라도 어딘가에 부딪힐 듯 위태로워 보였다. 얇디얇은 발목을 감싸고 있는 뾰족구두가 아스팔트 위를 푹푹 찍으며 힘겹게 최선화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괜찮아!?'라고 말하며 달려가려던 순간 선화는 바로 앞에 도착한 택시를 타고 휙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달려온 김민수와 이재민이 최선화를 찾았다. 내가 방금 택시를 타고 갔다고 말하자 김민수는 '씨발 아깝네'라며 이재민에게 담배를 요구했다. 이재민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려주자 김민수는 조만간 또 날 한번 잡아보라고 말했다. 


"그래 뭐, 애들도 오늘 보니까 좋아하네. 담 달에나 한 번 또 모아 보지 뭐."


"아 한 달이나? 그냥 다음 주에 바로 잡으면 안 되나?"


"에이, 십몇 년 만에 만났는데 당장 다음 주에 나오겠냐? 좀 기다려야지."


"아씨 진짜 아깝네, 데리고 나가서 술 한 잔 딱 하면 딱인데."


이재민이 킥킥 웃으며 김민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쟤한테 집착하는 거냐? 아까 보니까 쟤도 이제 늙어서 갔더만. 어린애들 놔두고 왜."


김민수가 킬킬 웃으며 이재민에 말에 답했다.


"그냥? 건방지잖아. 지가 아직도 중학생 때 최선화인 줄 아나 아까도 내가 몇 마디 걸었더니 쓱 쳐다보는 게 진짜 같잖아가지고. 그러고 보니 뭐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네. 뭐 한대냐 개?"


"몰라? 아까 김필수랑 이야기하는 거 슬쩍 들어보니까 회사 다니는 것 같던데."


"회사는 지랄. 얼굴만 반반했지 걔 꼴통이었잖아. 어디 가서 경리나 하나 보네. 우리 회사에 넣어줄 테니까 오라고 해볼까?"


김민수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재민도 마주 웃더니 이광철 이야기를 꺼냈다. 


"광철이도 왔는데, 오랜만에 우리끼리 3차나 갈까? 애들도 이제 다 파할 분위기던데."


"씨바, 그 새끼랑 뭔 얘기를 하냐? 노동자 새끼. 같이 계속 놀았으면 자리라도 하나 해주지 지만 살겠다고 연락 끊더니 에효. 한심하다 한심해."


"야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한 잔 하지... 그러고 보니 '유재'는 어디 갔대?"


"몰라. 아까 여자 친구랑 통화하는 것 같더니 간 듯?"


"하여튼 지 맘대로 하는 건 변하지가 않는구만."


"뭐 어쩌겠냐. 아오 나도 오늘은 몸이 찌뿌드 한게 피곤하다. 가다 마사지나 받고 가야지. 너도 갈래?"


"아냐 나도 낼 가게 오픈하려면 얼른 가서 쉬어야지. 이만 파하자."


김민수가 검지 손가락으로 담배 끄트머리를 툭툭 쳐서 담배 똥을 떨궈냈다. 떨어진 담배 똥이 아스팔트 사이에 박혀 연한 주홍색을 빛냈다. 김민수와 이재민은 나를 한 번 흘끗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가게로 들어갔다. 나는 그들의 얄팍한 우정에 웃음이 나왔다.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우정이었다. 나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껴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잠시 후 입구가 시끌시끌해지더니 하나 둘 술에 취한 인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전부 다 나왔는지 가게 안을 한 번 살펴본 김민수는 자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번에 또 모입시다 하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 올 때와는 다르게 집에 갈 때는 여러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그 모습이 자기 살 길을 찾아 빨빨 거리며 움직이는 벌레와도 같아 심히 역겨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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