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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15.

"그래서?"


형사는 맥주를 홀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눈은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범죄자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로 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내 이야기를 전부 듣고 판단하기 위해 일부러 감정을 배제한 채 나를 관찰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형사가 어떤 생각으로 이야기를 듣던지 간에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소소한 것까지 상세하게 전부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물론 형사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약간은 멍한 기운이 남아있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 기억의 족적을 쫓아갔다. 맥주를 마시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형사와 함께 흥미진진한 추리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의 끝이 미치광의 살인마의 소설로 끝날지, 살인마에 의해 간택된 누명 쓴 피해자가 될는지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와도 되겠냐고 형사에게 물었다. 형사는 다녀오라고 말했다. 대답은 흔쾌했지만 화장실을 가는 내내 시선이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봤자 여기서 내가 어떻게 도망친다고 그러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한숨 대신 답답한 속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구레나룻 쪽에 살짝 거뭇한 자국이 보였다. 나는 수도꼭지를 찬물로 돌리고 손바닥을 바가지처럼 모아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세면대에 놓인 초록색 비누를 집에 거품을 냈다. 거품에선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났다. 


한차례 세수를 끝내고 수도꼭지를 잠그자 찾아온 침묵이 나에게 현실을 일깨웠다. 여전히 형사와 단 둘이 형사 집에 있다는 사실과 형사가 나를 살인 용의자로 의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언제 경찰서로 나를 이송해갈지 모른다는 점이 거실로 나갈 용기를 점점 잃게 만들었다. 나는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잠시 앉았다. 정신을 잃고 나서부터 여태까지 앉아있었지만 지금에야 말로 온전히 자리에 앉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잠깐 숨을 돌리려는데 화장실 문쪽으로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꽃무늬가 그려진 슬리퍼는 분명 형사가 신기에는 한참은 작은 사이즈였다. 고개를 들어 세면대 쪽을 보니 칫솔이 세 개가 걸려있었다. 세 개 중에 하나는 한 뼘 크기도 되지 않는 어린이용이었다.    


"이제 그만 나오지?"


형사가 재촉했다. 나는 조금 더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목소리에 섞인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이 변기에서 엉덩이를 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니 형사가 소파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의심이 아까보다 조금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에 조금 오래 있었다고 의심이 늘어난다는 것이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지금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이 전혀 현실 같지 않고 황당했다. 


"자, 그럼 다시 이야기해보지. 지금까지 네 이야기는 죽은 피해자가 최선화이고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났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있지. 그럼 동창 중 한 명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 이야기만 듣던 형사가 난데없이 질문을 해왔다. 나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라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나는 그저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쭉 일대기처럼 설명한 것일 뿐인데 형사는 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을 용의자로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형사의 추리가 마냥 틀렸다고 볼 수는 없었다. 실제로 김민수와 이재민은 최선화에게 술을 먹이고 하룻밤 유희를 즐길 의도가 있었고, 최선화 역시 나와 따로 만난 자리에서 동창중 누군가가 귀찮게 한다는 말을 은근히 흘렸었다. 하지만 단순히 김민수와 이재민의 대화를 내가 들었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그것을 실행했는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아니.. 딱히 그런 것은 아닌데..."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리고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 선화가 얼마 전부터 제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밤에 집에 올 때면 누가 따라오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봐."


형사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차가운 시선에 적응해야 된다는 사실이 참담하게 다가왔지만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풀어나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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