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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17.

사람들은 지상에 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지하에서부터 나를 이끌던 거대한 '흐름'은 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나만 덩그러니 놓아두고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강남역 10번 출구'라고 적힌 기둥 아래에 서서 지금 일어난 마법 같은 일들을 곱씹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제 갈길 가기에 바빠 보였다. 오늘만을 기다린 듯 바삐 움직이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어느덧 해가 빌딩 뒤로 서서히 숨으며 하늘이 라벤더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보니 아직 약속했던 시간까지는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근처 카페라도 들어가서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그 정도까진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그냥 선화를 기다리기로 했다. 날씨가 쌀쌀하긴 했지만 못 버틸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 눈이 오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겨울 냄새가 상쾌했다. 출구 번호가 적힌 곳에서 기다리겠다는 연락을 선화에게 보내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어딘지 모르게 살짝 미소 짓는 얼굴들이다. 저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선화는 말과는 달리 전혀 미안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고 보통 먼저 온 사람에게 의례 하는 인사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선화가 일단 추우니 어디라도 들어가자고 말했다. 내가 이미 예약해놓은 곳이 있다고 이야기하자 선화는 잘됐다며 얼른 가자고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느닷없는 선화의 스킨십에 나도 모르게 팔을 슬쩍 빼려는 시도를 해버렸다. 그러자 선화는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아차 싶은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그렇다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하며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선화는 더 이상 내 팔을 붙잡지 않았다. 


나는 나의 어수룩함을 속으로 탓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선화와 나는 가까운 듯 멀게 거리를 둔 채 나의 인도를 따라 걸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찾아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침묵하는 시간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이자카야 앞에 도착한 우리는 테이블 정리에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직원의 안내에 밖에 마련된 의자에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아까 선화를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춥지 않은 날씨였는데 술집 앞에 도착하자 하늘이 까만색으로 뒤덮이더니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선화도 바바리코트를 한껏 여몄다. 기다리는 동안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다. 벌써부터 인사불성이 되어 나오는 사람과 어떻게든 그 사람을 택시에 태워 보내려는 사람, 아직 자리 정리가 멀었냐고 앙칼지게 따지는 목소리와 점원의 불친절한 잠시만 기다리세요 요 하는 외침이 선화와 나를 더욱 어색한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후 점원이 큰 소리로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나는 나를 부르는 줄 모르고 멀뚱멀뚱 서 있다가 점원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자 선화와 함께 서둘러 들어갔다. 점원의 불친절한 행동에 기분이 나쁠 새도 없이 우리는 마련된 자리로 던져지다시피 앉게 되었다. 게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어서 주문하라는 듯한 눈초리로 서있는 점원의 눈치에 나베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시킨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후, 정신없네."


"그러게.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나 봐."


선화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빨갛게 상기된 선화의 볼이 귀엽게 느껴졌지만 잔뜩 지친 표정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서둘러 주말이라 사람이 많다고 맞장구쳤지만 정답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선화는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겨 정리를 하고는 물컵에 물을 따라 단숨에 비웠다. 괜히 머쓱해진 나머지 나도 선화를 따라 물을 마셨다. 


"하, 이제 살 것 같다."


선화가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똑같이 물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를 찰나, 다행스럽게도 선화가 말을 이어갔다. 


"주말에 강남이라니... 사람 구경하고 싶었니?"


선화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혀 다행스럽지 않은 전개였다.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선화는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근데 사람 진짜 많다. 여기 꽤 유명한 곳인가 봐?"


"으응, 리뷰가 꽤 많더라고."


"오, 블로그 같은 거 찾아본 거야?"


선화가 귀엽다며 웃었다. 나는 그만 얼굴이 화끈거려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아마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너가 만나자고 해서 놀랐어 조금."


"어.. 무리한 거면 미안해 나는 그냥.."


"아니, 아니! 내 말은 나 같은 애한테 따로 연락하고 그런 게 놀랐다는 거지! 고마웠다는 말이야!"


선화가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막았다. 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선화를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애'라는 표현은 절대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저련 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은 유형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사람들한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많이 내뱉은 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전이나 누군가가 내게 호의 섞인 말을 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나 따위에게 무슨'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한 번은 내가 왜 이러는지 나 자신도 신기해 인터넷에 같은 증상이 없는지 검색해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꽤나 많았는데, 정신과 의사의 답변은(실제로 정신과 의사인지 알 길은 없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종종 하는 행위'라고 정의해주었다. 그 날부터 나의 이유 없는 자기 비하가 자존감이 낮아서라는 사실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내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낸 중학교 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억을 떠올릴 뿐 그 기억에 대해 어떤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그저 '그들의 괴롭힘이 내 자존감을 저하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만을 인정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반창회에서 김민수를 보고는 난데없이 화가 나긴 했지만 그것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기억에다가 알코올의 힘을 빌어서 그랬던 것이지 다음 날 내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게 하진 못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선화의 말이 의문스럽게 느껴졌다. 나처럼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그 영향으로 성인이 되어서까지 칙칙한 분위기를 두르고 사람들을 대하는 게 어려워진 사람이나 뱉는 말을 선화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녀가 내뱉을 만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 말이었다. 


나는 기억 속에서 반창회 때의 선화의 모습을 끄집어냈다. 어딘지 맥없어 보이는 미소와 종종 쉬는 한숨이 무엇인가 고민을 떠안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선화의 그늘진 표정을 떠올린 나는 속으로 오늘은 꼭 그녀가 가진 어두움의 정체를 밝혀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맙다니, 나는 네가 이렇게 선뜻 나와줄 줄은 전혀 생각 못했어. 나야말로 갑작스럽게 불러내서 미안하고 또 나와주니까 고맙지.”


“참 우리 십 년 넘어 만나서는 서로 고맙다는 이야기밖에 안 하네?”


“그러게.”


나는 가볍게 맞장구를 치고는 말을 이끌어가는 재주가 없는 나 자신을 원망했다. 어색한 침묵이 몇 번이나 우리 주위를 맴돌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선화가 적절하게 내게 말을 건네 침묵을 내쫓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아도 우리의 대화는 좀 더 깊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얕은 수면만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우리의 대화는 주로 선화가 말하면 내가 대답하는 식이었는데 이따금 선화가 말을 멈추면 내가 먼저 어렵게 말을 꺼내기도 했다. 깊이 없는 대화가 늘 그렇듯이 우리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주제를 넘나들며 대화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주제도 하나같이 가벼웠다. 날씨가 꽤 쌀쌀하다는 이야기부터 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가 소변을 못 가려 엄마한테 혼난 이야기, 직장을 다니는 삶에 대한 이야기와 옆 테이블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간간한 신음소리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말하는 정도였다. 


"하는 것 같지?"


"글쎄... 그냥 어디가 아픈 것 아닐까?"


"아프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픈 애가 술집을 와?"


선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아픈 사람이 신음소리를 참아가며 술집에 앉아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선화와 옆 테이블 커플의 노골적인 애정행각에 대해 논하기에는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음.. 그냥 잠시 바람 쐬러 나왔다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선화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저건 백 프로 애무하는 거야."


나는 선화의 직설적인 표현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아까보다 훨씬 더 빨개져 있을 나의 얼굴을 상상하며 나는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단어들을 뒤졌다. 


"얼굴은 왜 빨개져?"


선화가 내 얼굴을 보며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방이 조금 더워서 그렇다는 핑계를 댔다. 선화는 하나도 덥지 않은데 왜 그러냐며 열이 나는지 살펴보려고 손을 이마 쪽으로 가까이 가져왔다. 나는 순간 놀래서 고개를 뒤로 빼고는 한 박자 늦게 후회했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못 참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미안 미안 내가 너무 놀렸지? 아까 처음 만났을 때 보니까 숙맥인 것 같더라고 너. 재밌어서 조금 놀려봤어 미안!"


선화가 눈을 찡긋하며 두 손을 합장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중학교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늘에 대해 나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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