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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18.

"아 참, 우리 번호도 없지? 핸드폰 줘 봐."


내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선화는 휙 낚아채더니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초쯤 통화음이 울리더니 익숙한 멜로디가 선화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딴, 따란딴 딴, 딴따라라라란' 하는 들어본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맴돌며 도대체 무슨 노래였더라 생각하는 사이 선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슈베르트 송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


"아, 송어구나. 난 여태까지 숭어인 줄 알았는데."(참조)


"그건 오역이래. 듣기만 해도 엄청 신나지 않니? 딴~ 따라란."


선화가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웃었다. 나는 신나기는 하는데 조금 아저씨 취향 아니냐고 선화를 놀렸다. 내가 말하고 나서도 나한테 이런 농담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혹여나 질 낮은 나의 농담에 기분이 상했을까 봐 선화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살짝 삐친 표정을 지을 뿐 기분이 상해 보지는 않았다. 


"치. 클래식이라고. 아저씨가 아니라."


"흠. 그래 클래식. 그런데 어쩌다 숭, 아니 송어를 좋아하게 된 거야? 클래식이라기에는 뭔가.. 흔하다고 해야 하나? 쉽잖아?"


나는 송어를 흔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또다시 살짝 긴장했다. 타인의 취향에 대해 흔하다거나 쉽다거나 평가하는 짓은 굉장히 예의가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만화나 영화, 게임 캐릭터를 따라 그린 나로서는 나의 취향이 타인에 의해 왈가왈부되는 상황이 얼마나 불편하고 성질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별명이 '덕구'라고 지어졌던 날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선화는 나와는 다르게 크게 상관없는 눈치였다. 


"그렇지 아무래도. 사람들도 많이 알고 흔하지."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근데, 그래서 나는 더 좋아 흔해서."


"왜?"


"흔하다는 것은 누구나 접할 수 있다는 거잖아? 누구나 쉽게, 우연한 계기로, 어쩌다 갑자기 마주칠 수 있는 게 흔한 것이라고 한다면 난 그런 흔한 것들이 좋아."


"흠, 신기하네. 보통 사람들은 유니크한.. 그러니까 특별하고 희귀하고 이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나? 나도 그렇구."


"나도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냐."


"왜?"


"음.. 뭐랄까. 특별하고 희귀하고 이런 것들은 적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어떤 것들이 더 숭고하고 고결하고 그래 보여. 행복도 불행도 소수의 사람한테만 돌아간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겠어?"


선화의 말을 듣고 나는 그럴싸한 논리지만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흔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값어치가 저렴하다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값이 나가는 희귀한 것에 목을 맨다. 행복한 소수를 위해, 소수의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클럽 안에 들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거나 은행 대출을 빌려 레버리지를 일으키던가 하는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소수의 행복한 사람들을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불행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들보다 행복한 소수의 클럽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항상 불행하다. 어째서 선화는 불행이 소수의 사람한테만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차피 자본주의가, 아니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이 살아가는 한 생존은 경쟁이고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어떤 학자는 수렵채집인이었을 당시 인간이 현대사회보다 훨씬 일도 적게 하고 다양한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봤을 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간이란 동물 자체가 함께 등을 부비며 살아가는 한 누군가는 일만 해야 하고 누군가는 얻어먹기만 하는 관계가 반드시 생긴다. 행복은 언제나 소수에게 돌아가고 불행은 다수가 짊어질 수 없는 그런 동물이 인간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굳이 선화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간에 사람이라는 동물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존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옳고 그름과는 또 다른 문제다. 나는 기껏 날씨나 좋아하는 색깔 따위의 얕은 이야기들로 한 겹 한 겹 좁힌 선화와의 거리를 훌쩍 멀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흠 그럴 수도 있지. 그건 나 같은 흔한 사람한테는 참 위안이 되는 말인데?"


내가 농담조로 웃으며 말했다. 선화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넌 흔한 사람 아닌데?"


"응?"


"네가 왜 흔한 사람이야?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아.. 어 뭐. 하긴 나 같은 사람이 흔할 리 없지."


나는 뜻밖의 대답에 의기소침해졌다. 생각해보면 선화가 말하는 '흔한 사람'에 내가 포함되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흔하다는 것은 곧 평범하다는 말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고, 보통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학창 시절을 보냈을 리 없다. 평범하게 반 친구들과 어울리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졸업 후에 가끔 만나며 안부도 묻는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씁쓸함이 몰려와 혀 끝을 씹었다. 


"어? 아니 아니 나쁜 뜻 아닌데!"


선화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 흔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하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였어!"


나는 선화의 눈을 보며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특이하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특별하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선화같이 정말 특별한 사람에게서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칭찬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선화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칭찬이야. 참, 특별하다는 말을 칭찬이 아닌 다른 말로 알아듣는 걸 보니 너도 꼬였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아니긴 뭘 아니야 표정에 다 써있구만!"


"미안.."


"아니 뭘 또 사과까지 하고 그래!"


"그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선화는 그런 거 아니라고 어르고 달랬지만 다시 선화의 눈을 마주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화는 마치 울기만 하는 어린애를 겨우 달래 놓은 초보 엄마 같은 표정을 짓고는 나가자고 나를 재촉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나베 하나와 소주 한 병이 적힌 계산서를 받아 든 점원은 처음에 우리에게 자리를 안내했던 점원이었다. 점원은 계산서를 쓱 훑어보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이만 팔천 원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자 직원은 카드를 받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애쓰는 듯이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와 선화를 보며(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소개팅 자리라고 생각한 듯싶었다. 술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주 한 병에 안주 하나만 시켜놓고 후다닥 나가는 모양새가 점원에 눈에는 소개팅에 실패한 폭탄처럼 보인 듯했다. 나는 순간 욱하는 마음에 직원의 생각을 바꿔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있는 선화의 모습을 보니 그러한 오해가 딱히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다. 게다가 직원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나가자는 선화의 재촉과 카드와 함께 받은 영수증에 적힌 소주 1, 나베 1이라는 숫자가 정황상 증거임을 드러낼 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가슴께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각자 팔짱을 껴야 했다. 겨드랑이에 손을 숨긴 두 명의 사람이 사람 하나 사이를 두고 걷는 모습은 차라리 서로 모르는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서로 어디를 가는지 묻지도 않은 채 도로에 난 길을 따라 쭉 걸었다. 주말이라 북적이는 거리를 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용케 서로를 잃지 않고 여전히 사람 하나를 사이에 둔 사람들처럼 걸었다. 나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반쯤 포기한 채 지하철 역을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십 미터 정도 돼 보이는 곳에 아까 선화와 만난 출구가 길게 목을 빼고 있었다. 나는 선화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자연스럽게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화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여전한 거리를 두고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몇 번이고 팔짱을 풀고 있는 안쪽으로 스며들기 위해 세차게 불었다. 그럴 때마다 겨드랑이로 손을 꽉 움켜쥐어 가슴 안쪽으로는 바람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대로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오한이 들었다.


출구 쪽에 다 와 갈 즈음 내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자 소매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쪽 아니야."


선화가 내 옆에 바짝 붙어 내 소매를 잡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서 선화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말문이 막히려고 했지만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다. 


"버스 타고 가게?"


나는 고르고 고른 말이 '버스 타고 갈 거냐'는 말인 것에 대해 속으로 나 자신을 원망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하철이 아니면 버스 타고 가는 게 맞지 않냐고 머릿속에서 합리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숙맥이더라도 선화의 제스처가 버스를 타러 가자고 내 소매를 잡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보면 아는 것'이었다. 어쩌면 선화는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긴 거리를 사람 하나 사이를 두고 걸어오면서 한 마디라도 걸어주기를, 선화 역시 팔짱을 낀 채 모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답답하고 초조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선화가 먼저 나에게 이야기했다.


"저쪽으로 가자."


선화가 가리킨 곳은 빌딩 사이로 나 있는 샛길이었다. 나는 군소리 없이 선화가 이끄는 대로 쫓아갔다. 슬쩍 돌아본 지하철 출구가 무저갱처럼 깊어 보였다. 나는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사람처럼 황급히 선화의 옆으로 뛰듯이 걸어가 발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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