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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19.

선화와 빌딩 사이를 가로질러 나온 곳은 조용한 골목이었다. 방금 전까지 서울의 가장 번잡한 지역 중 한 곳에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다. 골목 안을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한 명 내지는 두 명, 그마저도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간간히 클럽과 술집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들이 들렸지만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웅웅 거리는 정도라서 오히려 더 고요하게 느껴졌다. 간간히 켜져 있는 빌라의 불빛들이 여기부터는 가정집입니다라는 안내문 같아서 괜히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하지만 선화는 아랑곳 않고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갔다. 발 밑에 놓인 캔을 보지 못하고 발로 차서 쓰러트리기도 했다. 걸음에 차인 음료수 캔은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며 크고 작은 소리를 냈다. 고요한 골목을 울리는 큰 소리가 몇 번 나고 나서야 파란 음료수 캔은 비명을 멈췄다. 나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에는 고양이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꽤 걸었는데도 선화는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과 점점 싸늘해지는 바람을 느끼며 아직 멀었느냐고 물었다. 선화는 이제 조금만 가면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빨리 고요한 골목의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화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적한 거리가 주는 묘한 위압감은 꿈에 그리던 첫사랑과의 시간을 망쳐버린 과거의 나를 선명하게 떠오르게 했다. 나는 선화의 앞에서 병신같이 작아지던 모습을 머릿속으로 몇 번씩이나 복기하며 가슴을 쳤다. 선화가 어디로 이끄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얼른 집에 달려들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종일 유튜브나 보고 싶었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면 야한 동영상을 찾아 그걸로 한바탕 자위를 하고 나면 푹 잠이 들 것이다. 다시 깨어나면 여전히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내 모습이 떠오르겠지만 다시 반복하면 그만이다. 며칠 동안 그 짓을 계속하다 보면 점점 괜찮아질 것이다. 시간은 약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응?"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냐고. 걱정 마 요 앞이야 이제."


나는 못된 생각을 들킨 아이처럼 뜨끔했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씩 웃더니 내 손을 잡아챘다. 얼떨결에 손을 잡힌 나는 흠칫 놀랐지만 처음 만날 때와는 다르게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선화의 체온이 내 손을 타고 전해졌다. 고요한 골목이 주는 압박감이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선화는 가만히 있는 나를 보고 생긋 웃고는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선화가 이끄는 대로 발을 움직였다. 


선화의 손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땀은 아니지만 수분 기를 가득 머금은 손바닥이 젤리처럼 말캉거렸다. 크기도 아주 작아서 초등학교 2학년인 내 사촌동생의 손보다 작은 것 같았다. 선화는 그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앞으로 나아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는 와중에도 선화는 내 손을 놓지 않았고, 나도 선화의 손을 놓지 않았다.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지지직 거리는 가로등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가 마치 폐지 수레를 몰고 힘겹게 올라가는 할머니 같았다. 그렇지만 발걸음까지 할머니의 그것과 같지는 않았다. 선화는 위태로워 보이는 자세와는 다르게 편안하게 나를 이끌고 있었다. 수레인 내가 알아서 선화의 뒤를 쫓았다. 언덕을 절반쯤 넘으니 끄트머리에 조그마한 갓등이 보였다. 다홍색 갓등 겉면에는 검정 글씨로 일본어가 적혀 있었는데, 아마도 술집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자, 여기야!"


선화는 마치 자신의 가게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뭐하는 곳인데?"


"뭐하는 곳 같아 보여?"


"음.. 술집?"


"잘 아네. 2차 어때?"


선화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술집 앞까지 와서 2차 가는 게 어떻냐는 질문을 하는 선화를 보고 나는 저런 장난기 있는 면도 있었나 싶었다. 나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선화는 얼른 들어오라며 술집 입구에 걸린 발을 손으로 들췄다. 선화를 따라 들어간 가게는 생가보다 더 작았다. 성인 두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통로에 입구에서부터 얇은 선반이 길게 바 테이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 테이블 너머로 뒷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요리사가 보였다. 프라이팬에 지글거리는 무엇인가를 볶고 있었는데 고소한 기름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얼마 전까지 먹다 나온 나베에 대해 이럴 거면 애초부터 먹지 말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화는 중년 요리사의 뒤통수에다 대고 '아빠!'하고 외쳤다. 중년 사내는 깜짝 놀란 듯이 뒤를 휙 돌더니 선화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내가 몇 번을 말하냐 갑자기 소리 지르지 말라고!"


"재밌잖아요 반응이. 아빠 친구 데려왔는데 우리 다락 가도 되죠?"


선화의 말에 중년 사내가 지긋이 나를 바라봤다. 사내의 얼굴 곳곳에 패인 주름이 더욱 깊어지며 한 차례 나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경계의 눈빛이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내의 주름들이 나를 탐지하듯 깊어졌다 엷어졌다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던지. 비싸다고 오지 말랬더니 남자까지 데려오냐?" 


사내는 눈썹에도 희끗희끗한 털들이 성기게 있었는데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축 늘어진 볼살 등 전체적인 인상이 호상이었다.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내에게 선화는 앙탈을 부리듯이 말했다. 


"에이 그냥 친구예요."


"친구면 그냥 다찌에서 먹지 뭐하러 다락엘 가?"


"오랜만에 만났으니깐 그렇죠! 아무튼 저희 올라갈게요?"


"아서라, 네가 말한다고 듣냐. 꼴 보기 싫으니까 어서 올라가."


"흥, 그냥 알아서 주세요."


선화는 토라 진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화는 내게 앞장서라고 이야기하고는 계단을 가리켰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계단은 낑낑 거리며 들어온 입구보다 더 폭이 좁았다. 나는 계단에 한 발을 올리고 선화를 바라보며 이거 무너지는 것 아냐하고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그러다 주인장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황급히 계단을 올랐다. 생각보다 계단이 길지는 않아서 두 세 걸음 걸은 것 같은데 어느새 다락에 머리가 올라왔다. 


다락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넓었다. 바닥에 얇게 다다미를 깐 것이 일본의 그것을 최대한 흉내 낸 것 같았다. 다락의 한가운데에는 적갈색의 4인 상이 놓여 있었는데, 상 주위로 동그란 방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락의 천장은 양쪽 끝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모양이었는데, 요즘은 보기 드문 뾰족한 세모 모양의 지붕을 가진 건물 때문이었다. 다락의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고타츠가 놓여있었다. 고타츠 덮개에 피카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어린아이의 것이 분명했다. 


"야, 안 들어가고 뭐해?"


선화가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나는 엉덩이를 맞은 것에 대한 놀람보다는 선화를 계단에 엉거주춤 서있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황급히 다락 위로 올라왔다. 급하게 올라오다 보니 천장에 머리를 쿵하고 박았다. 올라올 때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입구 쪽이 낮은 쪽 지붕이었다. 


"머리 박았지?"


"응, 천장이 생각보다 낮네."


"여기 입구 쪽이 어두워서 천장 낮은 게 잘 안 보여서 그래. 나도 여러 번 박았어."


"여러 번?"


"응, 넌 그런 적 없어? 이상하게 똑같은 장소에서 계속 부딪히는 거. 난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문지방에 같은 발가락만 계속 찧이는 것처럼?"


선화는 내 말에 깔깔거리고 웃으며 바로 그거야!라고 외쳤다. 술에 취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선화는 별 것 아닌 일에도 한참을 웃었다. 내가 멋쩍게 서있자 선화는 다시 한번 내 엉덩이를(이번에는 정말 세게) 찰싹 때리더니 다리 아프니까 빨리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나는 얼른 계단을 올라와 선화가 올라오기 편하게 한쪽 구석으로 비켜섰다. 선화는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능숙하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더니 가운데 있던 식탁을 치우고 구석에서 고타츠를 끌고 왔다. 선화는 고타츠에 달린 코드를 벽에 있는 콘센트에 꽂은 다음 다리를 쭉 펴서 고타츠 안에 넣었다.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뒤로 한껏 꺾더니 '하-' 하는 한숨을 쉬었다. 


"아, 살 것 같다."


나는 목욕탕에서만 보던 감탄사와 대사에 웃음이 나왔다. 선화는 내가 킥킥 대고 웃자 뭐가 그렇게 웃기냐며 눈을 흘겼지만 이내 자기도 못 참겠는지 낄낄거리고 웃고 말았다. 한참 서로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사춘기 소년 소녀들처럼 웃던 우리는 밑에서 들리는 '안주 안 시키냐?' 하는 소리에 장난을 멈추었다.


"사장님이 조금 화나신 것 같은데.."


"아냐 원래 목청이 조금 크신 편이야."


선화는 별 것 아닌 듯 치부했지만 목청이 크다기에는 노기가 섞여 있는 듯해서 나는 신경이 쓰였다. 선화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에게 소주를 먹을 거냐고 물었다. 내가 그러자고 대답하자 선화는 다락 입구에 얼굴을 집어넣고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부지! 우리 알탕 하나랑 소주 하나만!"


선화가 목청 좋게 주문했지만 밑에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엉덩이를 내 쪽으로 내밀고 고개만 다락 입구에 처박고 있는 선화의 모습이 민망해 내가 내려가서 이야기할 테니 다시 와서 앉으라고 이야기했다. 선화는 들은 체도 안 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알탕! 소주 하나!"


"아 귀 안 먹었으니까 소리 그만 질러!"


"아부지가 대답이 없으니깐 그렇죠."


선화가 '히히'하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나는 민망해하면서도 자꾸만 선화 쪽으로 가는 시선을 멈출 수 없었다. 꿈틀거리는 욕망을 억지로 누르기에는 선화의 모습이 너무도 뇌쇄적이었다. 스커트가 살짝 올라가 스타킹 마감 부분이 보였다. 반투명 검정색 스타킹의 유난히 더 진한 색의 끝부분이 내 피를 울컥울컥 아래쪽으로 힘차게 보냈다. 나는 고타츠 아래로 다리를 숨긴 다음 서둘러 선화를 불렀다. 


"아, 따뜻하긴 하다 좋긴 좋네. 얼른 너도 이리 와."


"언제 들어갔어? 어때? 좋지?"


"응 좋네. 그런데 이건 왜 여기 있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너무 갖고 싶었거든. 인터넷으로 주문했었는데 방에 두려니까 너무 좁아서 답답한 거야. 그래서 허락받고 이리로 가져왔지."


"아버지한테?"


나는 이때다 싶어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선화와 하나도 닮지 않은 저 호랑이 같이 생긴 무서운 사람이 너희 아빠야? 하는 뜻을 담아 선화를 쳐다봤다. 선화는 잠깐 놀라는 듯싶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 사장님. 우리 아빠 아니야."


선화는 살짝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 모습이 씁쓸해 보였지만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선화가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생각한 아빠의 모습이었거든. 좀 이상한가?"


"음... 아니, 나도 옆집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던 적이 있었어."


내 말에 선화는 깔깔거리고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선화의 웃는 모습에 좋아진 기분을 감추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야."


"진심?"


"응. 사춘기 때 거의 맨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에이, 매일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좀 너무했다."


"뭐, 지금은 아니니까."


선화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할 때,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입구에서 쟁반이 쑤욱-하고 올라왔다.


"아부지! 여기까지 갖다 줘야지 얼굴도 안보여주고 뭐예요!"


"아 지겨워 무슨 얼굴을 봐 보긴. 얼른 먹고 빨리 가!"


"에이 진짜 너무 하시네."


"너무하긴 니가 너무하다. 술 좀 작작 마셔!"


"알았어요. 알았어. 잔소리도 참."


사장은 선화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쿵쿵 발소리를 남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런 사장의 모습을 보고 선화에게 어떤 부분에서 아빠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가게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본 사장의 행동들은 흔히들 원하는 '자상한 아버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목청이 크고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전형적인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음.. 남자답고 듬직하고.. 거기다 자상하기까지 하니까."


선화가 사장이 두고 간 쟁반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말했다.


"자상한 것과는 거리가 좀 멀어 보이시던데.."


"아냐. 얼마나 자상하신데."


"도대체 어디가?"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자 선화는 싱긋 웃더니 쟁반을 가리켰다. 


"못 믿겠으면 이것 좀 봐봐."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나베가 담긴 검은 솥과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의 하얀 주전자, 앞 접시 두 개와 수저가 놓여있었다. 선화는 앞 접시 중 하나와 수저를 들고는 내게 보여줬다. 투명한 푸른색 앞 접시에는 작은 돌고래가 세 마리 그려져 있었다. 


"이거, 내 전용 앞 접시다?"


선화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 산 장난감을 자랑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화는 그릇을 들고 한 바퀴 빙 돌리며 찬찬히 바라보다가 나에게 내밀었다. 


"너도 봐봐."


"돌고래네."


"응, 내가 여기 첨 왔을 때 엄청나게 취해가지고 아부지한테 장난 아니게 진상 피웠거든. 괜히 접시에 화풀이해서 이쁜 접시를 달라고, 접시가 왜 이리 칙칙하냐고."


"정말?"


"응. 그때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몰라. 보시다시피 여기 접시가 그렇게 못생긴 편이 아니거든. 아니 오히려 그냥 평범하다랄까, 딱히 모난데도 없고 너무 튀지도 않고 보통이지. 그러고 한 2주 정도 있다가 또 여기에 왔는데, 처음에는 나를 못 알아보시나 할 정도로 대하셔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자리에 세팅을 할 때 이 돌고래 접시를 탁- 놓으시더니 니꺼다 이러시는 거야."


"그걸 기억하신 거야?"


"응. 그다음 날 바로 시장 갔다가 사 오셨대."


"흠. 보통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나는 '술 취한 진상 손님의 컴플레인 아닌 컴플레인을 신경 써서 듣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여자와 대화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도 그렇게 말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머리를 굴려 둘러말했다. 다행히 선화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누가 술집 진상 손님이 한 말을 신경 쓰겠어? 그것도 만취한 사람이 아무 말이나 하는 건데. 암튼 그 이후로도 계속 이 집에 단골로 왔었어. 거의 매일."


"매일?"


"응, 매일. 그때는 술 없이는 힘들었거든."


나는 선화에게서 동창회 날 보았던 그늘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선화의 얼굴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캐물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선화의 얼굴에 내린 그늘이 너무 짙었다. 


"뭐 어쨌든, 자주 오다 보니 단골이 됐어. 이것 봐 봐. 내가 젓가락질 힘들다고 투덜댔더니 포카락 사 오신 것 있지?"


선화가 손에 쥔 수저를 자랑스럽게 들었다. 


"진짜 포카락이라니 웬 말이야. 이거 우리 초딩때 나오지 않았나? 아직도 있을 줄 몰랐어 진짜. 시장에서 사셨대. 그래 놓고서는 꼭 젓가락 같이 주시는데 이유가 뭔 줄 알아? 나중에 시집가려면 젓가락질도 할 줄 알아야 상견례 때 큰일 안 난다고. 진짜 웃기지 않아?"


"뭐.. 젓가락질 못하면 좀 그렇긴 하지."


"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선화는 내 대답에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아차 싶어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고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선화가 깔깔거리고 웃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게 됐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순덕이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아무튼, 이렇게 포카락까지 사다 주셨어 내 전용으로. 거기다 또 있어."


선화가 말을 마치고 하얀색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내 앞에 가져다 놨다. 내가 이게 뭐냐고 묻자 선화는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라고 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가지런하고 수북하게 쌓인 오이가 둥둥 떠 있었다. 코 끝으로 전해지는 희미한 알코올 향이 없었더라면 '오이 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소주 냄새가 옅었다. 


"이게 뭐야? 오이?"


"응, 오이 소주야. 나 술 많이 마신다고 소주 시키면 항상 이렇게 오이를 썰어서 넣어주셔. 한 번 마셔볼래?"


선화가 주전자를 들어 내 잔에 따라주었다. 투명한 내 잔에 비해 속이 비치지 않는 도자기 잔을 보니 아마 저 잔도 선화의 전용잔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향이 좋은데?"


"그렇지? 자, 한 잔 하자고"


짠 하고 잔을 부딪힌 우리는 거의 동시에 잔을 내려놓았다. 오이 특유의 향이 코를 통해 들어오다 목 끝에서 희미하게 알코올 향으로 변하는 맛이 독특했다. 


"어때?"


"되게 신기한 맛이네. 순하고."


"그렇지? 아부지 자상하지? 근데 문제는 네 말대로 순하고 잘 안 취해서 한 병 먹을 거 두 병 먹고 간다니깐.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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