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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20.

선화는 배시시 웃으며 내 잔과 자기 잔에 소주를 따랐다. 선화의 말대로 이 정도라면 나로서도 꽤 마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자 선화가 나베도 좀 먹어보라고 권했다. 맛있어 보이는 기름이 둥둥 뜬 국물을 수저로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왔다. 혀 끝에서 느껴지는 청양고추의 매콤한 향이 느끼한 맛과 어우러져 깔끔하게 목으로 넘어갔다. 내가 정말 맛있다고 말하자 선화는 마치 자기가 요리한 것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어두컴컴한 다락에 선화와 둘이 있으니 분위기가 묘했다. 도마를 두드리는 희미한 칼질 소리만 아니었다면 선화와 둘이 외딴 펜션에 놀러 온 연인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졌을 것 같았다. 우리는 술 주전자 한 동이를 금세 비우고 소주 하나를 더 시켰다. 사장은 '술 좀 작작 마셔 기지배야!'하는 호통 아닌 호통을 치며 역시나 손만 쑥 뻗어 다락 입구에 주전자를 놓고는 얼굴도 비추지 않은 채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주전자 안에는 여전히 새파란 오이가 가지런히 썰려 있었고, 나는 비로소 사장이 자상하다는 선화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으 이제 꽤 취한다."


"그러게. 역시 소주는 소주인가 봐."


새로 시킨 소주의 주전자의 목을 90도로 꺾을 정도로 술을 비운 우리는 알딸딸한 기분으로 숟가락을 자꾸만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사람 대 사람으로 이렇게 오붓하게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시피 한 나로서는 이제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주말만 되면 술자리를 찾는지 이해가 됐다. 


"한 병 더 마실래?"


"아니, 더 마시면 집에 못 갈 것 같아."


"못 가면 여기서 자고 가면 되지."


"여기서?"


"응. 나 술 마시고 여기서 잔 적 많은데?"


"사장님이 허락하셔?"


"당연하지, 딸이 잔다는데 허락 안 할 아버지가 어딨어?"


선화가 낄낄대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래도 남의 가게에서 잔다는 사실이(아무리 가족 같은 기분이 들어도) 이해가 되질 않아 선화에게 물었다.


"에이, 그래도 가게에 다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해. 사장님 가족들이라던지..."


"괜찮아 올 사람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부지도 나 밖에 없거든."


"가족이 없으셔?"


"있었지. 지금은 없어. 딸이 있었는데 돌아가셨대. 그 이후로 사모님과는 서먹해지다 이혼. 지금은 혼자 셔."


"딸이 몇 살이었길래..."


"나보다 한 살 어렸대. 벌써 몇 년 전 일일 거래.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갔는지는 몰라 나도. 그런 것은 물어보기도 힘든 질문이고 구태여 기회가 오더라도 여쭤보고 싶지 않아. 꼭 그런 것을 알아야만 사람 사이의 유대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잖아? 누구나 하나쯤은 말하기 싫은 것이 있을 거고."


선화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전자를 들었다. 주전자를 아무리 꺾어도 술이 나오질 않자 선화는 뚜껑을 열어 술에 바짝 절여진 오이를 포카락으로 푹 찍어서 오물거리며 씹었다. 


"술 정말 더 안 해?"


"응. 이미 많이 마셨어."


"아쉽네."


선화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오이를 찍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손에 잡힐 만큼 술기를 머금은 오이는 만만하지 않았다. 이리 찍고 저리 찍어도 뭉그러지기만 할 뿐 잡히는 것이 없자 선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화의 그런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나 자신을 보며 무언가 단단히 홀리긴 홀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수저를 들어 물컵에 휘휘 저은 다음 선화의 포카락을 피해 도망친 오이들을 한 움큼 퍼서 선화의 입 앞에 잡아왔다. 선화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입을 크게 벌려 내 숟가락을 합 하고 삼켰다.


"고마워."


"별말씀을."


"우리 간접키스네?"


"응?"


"간접키스잖아. 네 숟가락이니까."


선화가 낄낄 거리며 내 숟가락을 가리켰다. 나는 얼굴이 발개지는 것을 느꼈다. 간접키스라니, 중학교 때 들어본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나이 서른을 코 앞에 둔 남자를 이렇게 까지 수줍게 만드는 것을 보니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된 셈이다. 


"장난이야 장난. 너무 놀려서 미안."


"아냐 괜찮아."


"너랑 있으니까 되게 편하다. 재밌구.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친하게 지내는 거였는데 말이야. 그땐 내가 용기가 너무 없었어."


선화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화가 말한 용기라는 말에 중학교 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확실히 어른 아이 때의 기억은 희미해질지언정 사라지진 않는다고 생각하며 선화에게 말했다.


"괜찮아. 그때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야."


이번에는 내가 오이 무더기를 한 움큼 입속에 넣고 씹었다. 간접키스라는 선화의 말이 신경이 쓰였지만 멋쩍은 지금 상황을 버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씹을 것이 필요했다. 차라리 아까 선화의 말대로 술을 한 병 더 시켰으면 좋았을 것을. 


"나한테 말만 걸어도 민수네 애들이 괴롭히거나 놀렸을 것이 뻔했으니까. 괜찮아.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다 하고 생각..."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선화는 손을 들어 내 입을 막았다. 놀라서 선화를 보니 어쩐지 화가 난 얼굴이었다. 선화는 큰 목소리로 소주 하나만 더 주세요 라고 소리치고는 내 입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나를 노려봤다. 침묵은 꽤나 길었다. 아래층에서 들리던 통통 도마를 울리던 칼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삐- 하는 주전자 끓는 소리가 정적을 잠시 깼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조용해졌다. 선화는 여전히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오이를 썰어주시지 않는 걸까'하는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선화가 침묵을 깬 것은 사장이 조심스럽게 쟁반 위에 주전자 두 개를 올려 다락 입구 쪽에 놔둔 시점이었다. 


"저것 좀 갖다 줄래?"


선화의 말에 나는 곧바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뜨거운 피가 다리 쪽으로 흐르며 저릿저릿했다. 쟁반을 들고 보니 주전자 하나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아까 들은 삐- 하는 소리의 정체가 이 주전자 끓는 소리였구나 싶었다.


"보리 꿀차야."


"보리 꿀차가 뭔데?"


"보리차에 아카시아 꿀 섞은 거. 나 술 많이 마시는 날이면 해주시는 건데 한 병 더 시켰더니 같이 주셨나 보네."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니 은은하게 보리와 꿀의 향이 났다. 선화는 다른 주전자를 집어 들어 내 잔과 선화의 잔에 따랐다. 엉겁결에 술을 받은 나는 황급히 보리 꿀차가 든 주전자를 내려놓고 잔을 받았다. 선화는 내가 잔을 받자 곧바로 잔을 부딪히더니 순식간에 고개를 꺾어 잔을 비워버렸다. 


"소주가 아니네?"


내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케야. 온나나카세라는."


"온나나카세?"


"응. 여자를 울리는 술이라는 뜻이야."


"무슨 술 이름이 그래? 맛은 있는데..."


정말이었다. 오이소주도 그냥 마시는 소주에 비해 훨씬 품격 있다는 느낌이 드는 맛이었는데 이 온나나카세라는 요상한 이름을 가진 사케는 아예 다른 술이었다. 목을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술의 감촉과 꽃향 비스무리한 단내가 입안을 즐겁게 했다. 나는 술을 꽤 마셨음에도 한 잔 더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술병을 바라봤다. 청록색의 투명한 병에 그려진 일본 여자의 그림이 유혹하듯 보였다. 


"맛있지? 여자를 옆에 두고 이 술을 마시면 술만 마시고 여자는 본체 만체 해서 여자를 울리는 술 이래. 지금 너처럼."


선화가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이 민망해서 슬며시 술병에서 시선을 뗐다. 


"그런데 다른 뜻도 있어."


"무슨 뜻인데?"


"여자의 눈물을 담아서 만든 술이라는 뜻. 나는 개인적으로 이 뜻이 더 맘에 들어."


"왜?"


선화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내가 물끄러미 선화를 바라보고 있자 선화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더니 조용히 잔을 내밀었다. 우리는 말없이 건배를 하고 이번에도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은은한 단내가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확실히 이 정도라면 여자를 소홀히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편으로는 선화의 눈물은 보고 싶지 않다는 웃기지도 않은 망상을 했다. 그 망상은 선화가 입을 떼고 나서야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우선은 미안해."


"응?"


"나는 그런 의미로 용기가 없다고 한 게 아니었어."


선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민수네 애들한테 괴롭힘 당하는 건 알고 있었어. 그치만 나는 그래서 너에게 친해지자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야."


"그럼?"


"나는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예상치도 못한 선화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채 입만 벙긋거리다 술잔을 잡았다. 선화는 자연스럽게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술잔을 비웠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이고 앞으로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말인데..."


"정말로, 나는 그때의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어."


"대체 왜?"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선화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넌 꿈이 있었으니까."


"꿈?"


"응. 넌 애들이 괴롭혀도 포기하지 않았잖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나는 정말로 선화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꿈이라니, 그 시절에는 꿈같은 것은 꾸지도 않고 살았던 것 같은데 막상 선화의 입에서 꿈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정말 꿈같은 것을 꿨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림... 민수가 아무리 널 괴롭혀도 그림 포기하지 않았잖아."


"아..."


"나는 그런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도 절대 놓지 않는, 몸은 부서져도 영혼은 절대 뺏기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눈빛. 그래 넌 그때 그런 눈을 하고 있었어."


"그건 너무 과한 칭찬인데 그런 것 아니야."


"아냐. 그때 내가 본 너는 그랬어.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어. 나라면 절대로 그렇게 못했을 거고, 실제로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너라는 애를 보면서 힘을 많이 냈어. 미안해. 너의 힘든 상황을 보고 힘을 냈다고 해서... 그런데 내가 너보다 나은 상황이라서 너를 동정하거나 연민했던 것이 아니야. 말 그래도 너를 보고 힘을 냈어. 절대로 꺾이지 않는 신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나보다 강한 상대방이라고 해도 절대로 굽히지 않는 하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눈은 정말로 큰 힘이 돼."


선화가 말을 멈추고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나는 말없이 내 잔을 선화에게 내밀었다. 선화는 내 잔에도 똑같이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먹먹한 감정이 단내를 풍기며 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었는데. 내가 멋있다거나 누군가에게 힘을 줄 정도로 열심히 살았거나 하는 그런 생각들."


"적어도 나에게는 강하고 멋있는 사람이었어 너는."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진짜야.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그때 말이라도 걸어볼걸, 친하게 지낼걸 하는 생각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러다가 동창회 때 너가 나온다니 얼마나 반가웠는 줄 알아? 게다가 아직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어. '역시 얘는 끝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동안 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에 비하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좌절감도 들고... 그래도 무엇보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를 보고 또다시 힘을 낼 수 있겠다는 사실이 참 좋더라."


선화에 말에 나는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치장하는 것에 대해 느끼는 겸손의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사실과 다르게 나를 이해하고 있는 선화의 착각과 오해에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었다. 선화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대단한 사람은커녕 자기 일에 대해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앞가림조차 하지 못하는 팔푼이일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내 성격에 차분하게 내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이 내 세계를 밖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지금이나 그때나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림밖에 없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세계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거장들처럼 거창한 작품을 만들거나 유파를 만들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이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을 못하는 나로서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유일한 대화였다. 사과를 맛있게 먹었으면 사과를 그렸고 판타지 영화를 재밌게 봤으면 영화 배경을 모방해 그린 다음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나를 대변하는 조연을 그려 넣었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일러스트를 따라 그렸을 뿐이고, 그게 직업이 됐을 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나는 십 년도 더 전에 일이 꼬여버렸지만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나의 학창 시절 아이돌이 나 따위를 정신적 지주로 삼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길로 빠져있는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선화야. 네가 오해가 있는데, 난 그냥 이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것뿐이야. 그리고 지금 하는 것도 있잖아."


"잠깐."


다급하게 이야기하는 나를 선화가 제지했다. 이제껏 선화가 내 말을 끊으면 잠자코 있었지만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어서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 바닥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고 변변하게 취업을 한 것도 아니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을 뿐이야. 네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꿈을 좇는 것도 아니고, 이게 정말 어디서부터 오해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순덕아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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