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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21.

선화가 한번 더 내 말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있었다. 


"그날도 봤잖아. 김민수한테 아무 말도 못 하고 얻어맞기만 하고. 너 아니었으면 진즉에 집에 갔어. 아, 너 때문에 집에 못 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랑 좀 더 있으려고 2차를 간 거라는 말이야.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난 그래. 너 말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중학교 때 괴롭힘 당하던 권순 덕이라는 인간이 질리지도 않은지 10년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살아왔던 거야."


선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잠시 쳐다보다니 한숨을 푹- 쉬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술잔의 모양을 따라 빙글빙글 돌리더니 온나나 카세가 든 주전자 대신 보리 꿀차가 든 주전자를 들었다. 선화는 내 잔에도 차를 따라주고는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호호 불어가며 차를 마셨다. 나는 원래 차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하얗게 올라오는 김에 섞인 단내가 입가에 침을 고이게 만들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단 것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살짝 뜨거운 술잔을 잡고 조심스럽게 불어가며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보리차도 꿀차도 아닌 오묘한 맛이었다. 


"맛있지?"


"응. 신기한 맛이네."


"그치. 술 먹고 먹으면 진짜 맛있어. 속도 풀리고."


"그러게. 이렇게 챙겨주시고.. 정말 자상하시네."


"그치? 자상하시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러게."


"순덕아."


"응?"


"다시 말하지만 미안해. 그때 내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비겁했어. 근데 정말 내가 널 보고 용기를 낸 것은 사실이야.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지 너를 보고 내가 힘을 낸 것만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니까 믿어줬으면 좋겠고, 너도 너무 너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네 꿈 이루길 바라. 너만은 꼭 빛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변하지 말고... 부탁이야."


나는 선화의 말이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지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존재라고 말하기에는 선화의 눈이 너무 애절했다. 내가 알겠다고 하자 선화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웃었다. 


"약속한 거다?"


"아니 약속이랄 것까지는..."


"아니. 약속해야 돼."


"알겠어."


"고마워."


나는 대화가 점점 이상해진다고 느꼈다. 도대체 선화는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런 약속을 강요하는 것일까?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지 않고서는 선화의 깊은 곳에 숨겨둔 그늘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선화야.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선화는 내가 '약속'을 하자 긴장이 풀어진 사람처럼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여름날 토요일 오후 네시에 소파에 누워 가만히 에어컨을 쐬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가롭게 쉬고 있는 사람의 평온을 에어컨 스위치를 꺼버림으로써 깨트리고 싶은 악취미는 없었지만 지금은 자리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너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선화의 표정이 순간 잠을 방해받은 사람처럼 짜증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습조차도 예쁘다는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내야 했다. 어렵게 꺼낸 말이기에 원하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미묘하게 깔린 선화의 표정을 보며 오늘은 기필코 저 그늘의 정체를 밝혀내리라 하는 어떤 사명감이 솟았다. 


"옛날이랑 많이 달라서. "


"뭐가?"


"어.. 뭔가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는 그런데."


"괜찮아. 말해봐."


"뭐랄까. 예전에는 더 밝은 느낌이었달까, 좀 활력 있어 보이고 음... 그렇다고 지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예쁘지만 그 전에는 좀 더 화사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칙칙해?"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미안 아무래도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횡설수설하네. 술까지 마시니까 더 그런가 봐. 못 들은 걸로 해줘."


처음 시작과는 달리 나는 황급히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화의 기분을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평소보다 더 횡설수설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제껏 다른 사람과 단 둘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한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며 원하는 답을 끌어낼 수 있는 대화법을 알 리 만무했다. 생각해보면 선화와 거의 둘 밖에 없는 공간에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편하게 느꼈던 것은 단지 선화가 이야기를 주도했기 때문이고 피를 타고 흐르는 알코올이 쓸데없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진실이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래. 칙칙할 수 있지 사람이."


"아니 난 정말 그런 의도로 이야기한 게 아니라..."


"뭔가 예전같이 상큼 발랄하지 않지?"


선화가 배시시 웃으며 CF모델처럼 머리를 휙 넘겼다. 선화의 왼쪽 귀에 꽂힌 피어싱이 반짝하고 빛났다. 머리카락으로 항상 귀를 가리고 있어서 몰랐는데, 꽤 많은 피어싱이 귀에 박혀 있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선화가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 말 네가 처음이 아니니까 괜찮아. 사실 꽤 자주 그런 말 들어. 어딘가 변했다는 말. 특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중에서도 감이 예리한 친구들한테 듣는 말인데. 역시 순덕이 너는 예술을 하니까 바로 알아보는구나."


"아니 예술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 까지는 없는데..."


"에이, 약속했잖아."


선화가 웃으며 내 말을 끊었다. 나는 아까 선화와 했던 약속이 기억나 사족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편한 압박감이 몸을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 말이 맞아. 많이 변했지. 특히 네 기억 속의 최선화는 앞으로 있을 일에 100만 분의 1도 안 되는 짐을 지고는 힘들어 못버티겠다고 하는 어린 여자애였으니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음... 오늘은 말고 다음에."


"왜?"


"오늘은 술도 많이 취했고...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친구랑 술 마시는데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다음에 말해줄게 다음에."


내가 몇 번 더 졸랐지만 선화는 '다음에'를 반복했다. 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선화가 괘씸하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래도 너니까 다음에 이야기해준다고 말하는 거야. 나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 한 적 없거든."


"정말?"


"그래. 나도 십몇 년 만에 만난 학교 동창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뭐, 그만큼 네가 편해서 그렇겠지? 네가 편한만큼 좋은 사람이길 바라."


선화가 찻잔을 들어 호로록 소리를 냈다. 내가 그만 내려가서 계산하고 가자고 말하자 선화는 여기서 자고 가겠다며 나에게 큰길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늦었으니까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고 이야기하자 선화는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고 가는 것이라며 완강히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핑- 도는 취기를 느끼며 혼자서 계단을 내려왔다. 카운터 옆에서 호랑이를 닮은 사장이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흔들어 깨우기는 뭐해서 헛기침을 몇 번 하니 사장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계산하겠다고 말하니 사장은 가래 끓는 목소리로 쟤가 이미 했어 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도대체 언제 선화가 계산을 했는지 몰라 곰곰이 머릿속을 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 속의 선화는 계속 나와 같이 있었다.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사장이 이상한 사람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민망해진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가게 문을 나섰다. 선화가 알려준 대로 큰길을 찾아 걸어가는 와중에  선화가 한 말이 귀에서 계속 맴돌았다. 편한만큼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선화에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가슴이 따땃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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