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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22.

"잠깐."


형사가 내 말을 끊었다. 손에 쥔 맥주캔을 가볍게 우그러뜨리더니 탕 소리가 나도록 책상에 내려놓았다. 


"후... 야 순덕아."


"네."


"너가 죽은 최선화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은 알겠어."


"아 그런 사이는 아니었구요..."


"아니 아무튼간에. 그렇고 그런 사이이든 아니든 나는 상관없다고. 응? 순덕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아니요..."


"하."


형사의 한숨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눈을 내리깔았다. 눈을 바닥으로 내릴 때 뒤통수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형사는 어깨에 손을 대고 이리저리 목을 돌리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 너한테 그런 시시콜콜한 것을 이야기하라고 시킨 게 아니라는 말이지. 하필이면 내가 쉬는 날에, 같은 아파트 사는 고삐리인지 대학생인지 모를 남자애가 피 묻은 칼을 들고 나한테 왜 왔느냐를 설명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거란 말이야. 응?"


형사의 얼굴이 벌게졌다. 형사는 답답한지 티셔츠 목덜미를 잡고 펄럭 펄럭하더니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래서, 니가 안 죽였다고?"


"네! 정말이에요! 제가 왜 죽였겠어요!"


"그럼 증거는?"


"네?"


"증거 있냐고 니가 안 죽였다고 너 대신 말해줄 증거."


형사가 진정이 되었는지 평온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형사의 표정과 반대로 복잡해졌다. 내가 선화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줄 증거. 그런 것이 나에게 있을 리 없었다. 내게 있는 것은 아까부터 계속 저릿하게 머리를 누르는 통증과 형사에게 맞아 살짝 부은 턱이 전부였다. 


"병신 같이 범행도구인 칼은 챙겨놓고 아무것도 없다 이거지? 그래 놓고 너가 안죽였다고?"


형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쯧쯧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나는 형사의 말에 주머니 속에 있는 선화의 휴대폰이 생각이 났다. 왼쪽 허벅지에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형사가 주머니를 뒤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형사에게 이야기했다. 


"저기... 제가 선화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데요..."


"뭐? 그걸 네가 왜 갖고 있어?"


"선화가 손에 쥐고 있어서... 제 휴대폰인 줄 알고 빼왔는데 아니었어요."


"너도 참 골 때리는구나. 줘봐."


형사가 손을 내밀었다. 두툼한 손바닥에 군데군데 붙은 굳은살이 휴대폰을 넘기는 것을 망설이게 했다. 


"뭐해? 빨리 내놔."


형사가 내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잠시 움찔했으나 형사의 손에 휴대폰을 넘기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형사는 내게 받은 선화의 휴대폰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버튼을 몇 번 누르고는 켜지지 않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형사가 중얼거리며 방에 들어갔다 오더니 분석실에 일단 넘겨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 충전기를 연결했지만 전원이 켜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기 형사님..."


"왜?"


"선화는 죽은 게 맞겠죠?"


내가 머뭇거리며 묻자 선화는 이상한 사람 본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죽었다며?"


"네?"


"아니 니가 그랬잖아. 죽었다고. 아니야?"


"아니 그건 맞는데... 다시 확인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야 순덕아."


"네?"


"후우. 경찰이 한가한 줄 아니? 너 같으면 갑자기 비번날 들이닥친 애가 '살인사건에 연루된 것 같아요!' 하면서 주머니에 씨바 칼 꽂고 지랄하면, 아 그래요? 얼른 출동시키죠! 하면서 사이렌 왜애앵 울리면서 수색할 것 같아?"


형사의 얼굴이 다시 벌게졌다. 


"니가 주머니에 사시미만 없었어도 그냥 한대 쥐어박고 돌려보냈을 거야. 알아? 에이씨 재수가 없으려니까 말이야. 너 뭐 약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지? 에휴. 그냥 시바 삶이 좆같아서 묻지 마 살인하려고 했어요 하지 무슨 친구가 뒤졌다고 말을 하냐. 이왕 들은 거 수사는 해야 하니까 기다려. 일을 아주 만들어주네 만들어줘."


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였다. 형사에게 다 털어놓으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형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다짜고짜 칼을 들고 찾아온 사람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형사는 일단 서에 가야겠다며 재킷을 챙겼다. 나에게 주먹질을 할 때 손에 둘둘 말았던 카키색 재킷을 툭툭 털어 걸친 그는 나에게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묶어 두었던 의자에 다시 앉혔다. 


"야 순덕아."


"네."


"내가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내가 어제 차를 수리를 맡겼어."


"네."


"그래서 그런데, 내가 서에 가서 차 타고 올 테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어차피 너 인적사항이랑 다 아니까 굳이 다른 데 가서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알았지? 맘 같아서는 내가 너 묶어두고 싶은데, 지금 수갑도 없고 요즘 인권 어쩌구 하도 말이 많아가지고 말이지."


"네. 여기 가만히 있을게요."


"그래. 그리고 저.. 아까 때린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구든 모르는 사람이 칼 들고 집에 찾아오면 그럴 거야. 이해하지?"


형사가 짐짓 미안한 듯 말했다. 얼굴이 다시 평소의 색으로 돌아온 것을 보니 적잖이 다혈질인 성격인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형사를 먼저 보내기 위해 최대한 협조했다. 형사는 내가 고분고분하게 알겠다고 하자 마음이 놓였는지 목이 마르면 냉장고에 물이 있으니까 꺼내 마시라고 까지 이야기한 다음 금방 돌아올 테니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형사가 나가고 나는 다시금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복기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책 없이 형사의 집을 찾은 것 같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찰서로 바로 출두하는 것은 더 좋지 않은 선택이 분명하다고 애써 자위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형사가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아마 1시간 안팎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나를 이송해야 하고 차를 타고 온다고 했으니 분명 경찰 한 두 명 정도를 데려올 것이 뻔했다. 형사가 말한 대로 우선 내가 선화의 죽음을 언급했으니 일단 수사는 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나는 두 개의 선택지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첫 번째는 여기서 형사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다. 형사가 정해준 의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형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형사가 부하들을 데리고 우당탕 거리며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형사는 '야 이 새끼 들아 니네 집도 아닌데 좀 살살해라 살살!'이라고 호통을 치며 부하 1의 뒤통수를 찰싹 때린다. 그러면 부하 1은 멋쩍게 웃으며 '그래도 용의자 검거하는데 살살할 수 있나요'하며 배시시 웃는다. 형사는 '민증에 인주도 안 마른 애새끼 한 명인데 뭘!'이라며 핀잔을 준다. 나는 한 편의 콩트와도 같은 그들을 보면서 형사가 정해준 의자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부하 2가 의자에 앉은 내게 와서 손을 뒤로 하게 만든 뒤 수갑을 채운다. 수갑을 너무 꽉 조인 나머지 의자 등받이에 팔이 걸려 일어나질 못한다. 형사는 '이런 병신 새끼도 경찰 하라고 나라에서 허락해준 거야?'라며 부하 2의 뒤통수를 좀 전의 부하 1의 뒤통수보다 더 세게 후려갈긴다. 부하 2는 부하 1과는 달리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라 부하 1처럼 대꾸는 못하고 구레나룻만 만지작거린다. 형사는 그런 부하 2에게 '씨바 시간 남아도냐? 얼른 수갑 다시 안 채워? 이 새끼는 신발까지 처 신고 들어왔네 하'라고 말하며 부하 1을 째려본다. 부하 1은 '얼른 나갈게요 선배님'이라고 미안한 듯 웃는다. 부하 2가 수갑을 다시 풀고 채운은 과정에서 내 손목 살이 살짝 집혔다. 내가 '아!' 하고 침음 성을 흘리자 형사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부하 2의 뒤통수를 한 대 더 갈긴다. '야 인마 살살하라고 살살. 과잉진압으로 징계받고 싶어?' 부하 2는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다. 형사는 다시 나를 쳐다보고는 '순덕아, 너 뭐 불편한 것 없었지? 나는 최대한 배려해준 거야. 서에 가서 말 잘해 알았지?'라며 억지웃음을 짓는다. 


나는 형사의 뻔한 속내를 알지만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로 다짐한다. 서에서 얌전히 조사를 받은 후 무죄가 입증되면 풀려날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말이다. 처음 가본 경찰서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깡패처럼 생긴 형사들은 없어도 표정은 그들과 같았다. 하나같이 냉혹한 살인마 같은 얼굴로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선화와 무슨 관계냐부터 시작해서 그 집에는 왜 갔냐, 칼은 왜 들고 있었냐 어머니 아버지는 직업이 무엇이냐 같은 질문을 하며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고 어떤 때는 가만히 손가락을 놀려 타이핑을 했다. 형사들은 선화를 죽이지 않았다는 나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이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서만 대답을 잘하면 된다고 계속해서 나를 타일렀다. 나는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자 불안한 마음이 들어 부모님과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변호사를 선입하겠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그러라고 했다. 지나가는 한 형사의 혼잣말이 내 귀에 날아들어 박혔다. 


'씨발 쉽게 쉽게 가지 좆만 한 게 사람 귀찮게 하네.'


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에 헛구역질을 느끼며 서둘러 상상 속에서 빠져나왔다. 손바닥에 난 기분 나쁜 땀을 바지에 슥슥 닦고 두 번째 방법을 생각했다. 


1. 형사가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2. 선화의 집으로 가서 현장을 살펴본다.

3. 범인을 찾는다. 


첫 번째 상황보다 훨씬 명쾌했다. 도대체 어떻게 범인을 찾을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 따위는 없었지만 적어도 첫 번째 상황처럼 나를 숨 막히게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선화의 집에 간다면 진범을 찾을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까부터 머릿속에 맴돌았다.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선화의 집에 간다면 단박에 풀릴 것만 같았다. 형사의 말을 어기고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은 내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었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곰팡이 냄새 가득한 취조실에 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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