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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23.

나는 생각이 정리되자 방에서 나왔다. 현관으로 향하는데 문득 선화의 집에 가기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느닷없이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나더니 급격하게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실에 매달린 시계를 보고 형사가 나간 지 십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옆면에는 배달음식점 선전지가 동그란 자석으로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단출하게 놓인 김치 몇 통과 달걀 한 줄, 겉에 이슬이 맺힌 맥주 3캔이 있었다. 나는 맥주 하나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쌀쌀했다. 이미 봄이 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여전히 스며있는 겨울의 체온은 맥주를 쥔 손을 더욱 차갑게 식혔다. 나는 아파트 현관을 벗어나기 전에 맥주캔을 땄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기포를 느끼며 허겁지겁 맥주를 마셨다. 빈속을 채우는 알싸한 알코올이 몸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머리도 살짝 띵 한 것이 괜히 마셨나 싶었지만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끝까지 비운 뒤 맥주캔을 우그러뜨렸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쓰레기통을 찾다가 이내 그만두고는 지하실에 휙 던져버렸다. 어두운 계단 밑으로 찌그러진 맥주캔이 깡- 깡-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거리로 나온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다 건너편에서 오는 택시를 불러 세워 탔다. 택시 기사에게 선화의 집 주변에 있는 스타벅스로 가달라고 말한 뒤 뒤통수를 시트에 대고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졸음이 쏟아져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길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웃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형사의 집에서 나와서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택시기사가 생각에 잠긴 나를 불렀다. 나는 주머니에서 선화의 카드를 꺼내 택시비를 지불했다. 나는 문득 이 상황이 재밌다고 느꼈다. 죽은 선화의 집에서 도망치듯 떠난 내가 선화의 카드로 택시를 타고 다시 선화의 집으로 돌아오다니, 마치 선화가 나를 다시 불러온 듯한 그림이었다. 


선화의 집은 겉으로 보기에 평소처럼 평온했다. 아니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나는 혹시 몰라 조금 더 관찰했다가 들어가기 위해 맞은편에 있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선화의 빌라 입구에는 다행히 아무런 조치도 되어있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선화의 시체를 보고 신고를 했다면 당장 북적북적하게 경찰관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서 무전기를 들고 떠들거나 노란색으로 된 경찰 테이프로 입구를 칭칭 감아놨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을 보니 다행히 아무도 선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마 조금 있으면 내가 사라진 것을 깨달은 형사가 부하 1, 2와 함께 선화의 집을 조회해 들이닥칠 것이다. 그전에 선화의 집에서 증거를 찾아내야만 한다. 반드시.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선화의 방 창문이 보이는 건물 외벽 쪽으로 이동했다. 선화의 집은 반지하라 얼굴을 가까이 대면 방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하지만 창이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쪽으로 나있기도 하고 선화가 집에 오랜 시간 있지 않은 탓인지 선화는 방이 들여다보이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은 듯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창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아직 해가 다 오지 않아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벽지에 묻은 피들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선화는 정수리 부분만 보였는데, 내가 나올 때 모습 그대로 인 듯했다. 나는 일어나서 다시 벤치로 돌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주택가 한복판에서 살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범인은 면식범인 것 같았다. 나를 방에 가두었던 형사와 같은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나로서도 그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선화의 방은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고, 짐을 뒤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탐정 만화나 소설에서는 보통 이런 경우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짓는다. 물론 주인공의 추리에 의해 그 결론은 산산조각이 나지만, 지금으로서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선화의 집에 침입해 선화를 죽이고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요 며칠 동안 선화의 주변을 맴돌며 살펴본 결과 선화에게 수상쩍은 사람이 얼씬 거린 적도 없었다. 


선화와 세 번째 만났을 때였다. 선화와 '다락'에서 처음 만난 뒤로 우리는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메시지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밥은 먹었냐느니 직장 상사가 짜증 나게 한다느니 요즘 나온 영화는 별로라느니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누군가 '오늘 저녁에 시간 돼?' 하는 말에 다른 쪽이 '좋아'라고 하면 만나는 것이었고 '오늘은 안돼'라고 하면 다시 시시한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한 번은 외주 미팅 자리에서 선화와 신나게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미팅이 끝나고 한소리 들은 적도 있었다. 


"순덕 씨,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미팅 내내 집중도 못하시고 계속 휴대폰만 보시잖아요. 애인이라도 생겼어요?"


"아,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중요한 연락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에이 됐어요 죄송은 무슨. 여자예요?"


"네?"


"중요한 연락, 여자냐고요. 순덕 씨는 꼭 말을 두 번 시킨다니깐. 그런 거 여자들이 싫어해요 알아요?"


"아.. 네."


"그래서, 여자예요?"


"네 중학교 동창..."


"어머어머, 순덕 씨 숙맥인 줄 알았더니 동창회 가서 썸도 타고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오랜만이라서 할 말이 많은 것뿐이에요."


"순덕 씨, 여자는 관심 없는 사람이랑은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지 않아~"


"아뇨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쨌든, 순덕 씨 연애사업은 연애사업대로 잘하시고, 일은 일이니까 우리 작업도 잘 좀 부탁해요 알았지? 다른 담당자였으면 순덕 씨 진짜 한 소리 들었어!"


담당자에게 별 관계가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실은  나 역시 속으로는 이런 것이 썸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연애의 감정이 배꼽 아래쪽에서부터 가슴 쪽으로 뭉클뭉클 솟아나는 그런 때였다. 선화와 세 번째로 만나기로 한 날도 역시 그런 기분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도 선화가 저녁을 샀으므로(자긴 이자카야 쐈는데 넌 치킨 살 거냐며 자기가 냈다) 이번에는 내가 꽤 유명한 맛집을 예약해둔 차였다. 맛집 탐방으로 유명한 블로그를 얼마나 들락날락했는지 나중에는 봤던 블로그도 괜히 새로운 것 같아 몇 번이고 더 들어가고는 했다. 뜻하지 않게 새벽 늦게까지 음식점을 찾은 나와는 달리 선화는 다른 이유로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한창 블로그를 탐색하고 있을 때 선화의 메시지가 휴대폰을 울렸다.


'자니?'


'아니 아직. 늦었는데 왜 안자?'


'잠이 안 와서..'


'왜? 낮잠이라도 잔 거야? 아님 커피를 늦게 마셨던가.'


'그런 건 아니고 요즘 계속 잘 못 자.'


'무슨 일 있어?'


'그냥 요즘 기분이 이상해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선화는 일단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메시지를 보낸 다음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려고 노력해야겠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선화가 느끼는 불안함이 단순히 피곤하고 예민한 상태이기 때문에 느끼는 기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선화는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남자들의 구애를 받아왔다. 고등학생 때는 근처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까지 선화의 하교시간에 맞춰서 교문 앞에 서 있을 정도였으니 그때와 비교해서 여전한 미모를 지니고 있는 선화에게 스토커가 생겼다고 해도 선화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선화를 남몰래 연모하는 사람이 선화를 엿보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아무래도 내일 저녁을 먹은 후에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 근처에서 조금 시간을 때우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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