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arka Nov 01. 2020

24.

"왔어?"


"응, 많이 기다렸어? 미안 차가 좀 막혀서."


"이번에는 너가 늦었네."


선화가 배시시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야기하며 밥은 내가 사겠다고 이야기했다. 선화는 원래 네가 사기로 한 거였잖아 2차까지 쏴라고 말하며 슬쩍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속으로 놀랐으나 또 놀라면 선화가 손을 뺄 것이 분명하기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식당으로 들어갔다. 선화는 나를 따라가며 '오 이제 안 놀라는데? 놀리는 재미가 하나 사라졌어'라며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식당 안에 들어서니 빈 테이블은 2개 정도밖에 없었고 전부 차 있었다. 자리를 안내받고 나니 그나마 빈 테이블 2개 중 하나가 내가 예약한 테이블이었다. 나머지 하나도 예약자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 크지 않은 가게라 사람이 가득 차면 부산스럽고 답답할 만도 한데, 이 가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환기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선선한 공기가 답답함을 느끼지 않게 했고, 조도가 낮은 조명과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사람들의 목청을 낮췄다. 분위기가 사람들을 묘하게 눌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선화가 속삭이듯 물었다. 나는 밤새 블로그를 뒤졌다고 이야기하면 선화가 만족하지 못했을 때 제대로 된 감상을 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는 사람이 소개해줬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화는 그 사람 인기 많겠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근데, 여기 뭐 파는 곳인데?"


"오마카세 집이라서 알아서 줄 거야."


"오마카세?"


선화가 오마카세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의외였다. 선화가 나를 '야네우라'에 데려갔기 때문에 비싼 이자카야나 미식가들이 갈 법한 음식점에 빠삭한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야네우라'는 아는 사람만 찾아갈 법한 곳에 있었고, 실제로 선화도 여기는 아는 사람만 오는 곳이야라며 어깨를 으스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당에 들어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선화의 모습은 미식에 통달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춘기 소녀가 좋아하는 오빠를 따라 생전 처음 파스타 집에 온 것처럼 낯설지만 들떠보였다. 물론 나는 선화가 좋아하는 오빠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들뜬 선화의 표정이 귀엽게 느껴졌다. 


"셰프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이야"


"오마카세가 맡긴다는 뜻이야?"


"응."


"뭔가 낭만적인데."


"낭만적이라고?"


"낭만적이잖아. 당신에게 다 맡기겠소! 그래서 여기 뭐 파는 곳인데?"


"닭 오마카세 집이야. 사실 나도 오마카세 집은 처음이라..."


"닭? 닭을 마음대로 요리해서 주는 거야?"


"음... 어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닭을 마음대로 요리해서 주는 것은 맞아."


"치킨은 치킨으로 갚는다 이거네?"


"그런 셈이지."


우리가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있을 때 서버가 따뜻한 차와 물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보리차 비슷한 맛이었지만 보리차는 아닌 것 같았다. 선화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식힌 다음 한숨을 뱉었다. 


"후, 피로가 좀 풀리는 기분이야. 혀가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 알아?"


"그건 잘 모르겠고 목욕탕에 처음 들어갔을 때 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은 알아."


"비슷해. 그게 혀에 집중되었을 뿐."


"어제 잠 잘 못 잤다고 그랬지?"


"응. 요 며칠 잠을 잘 못 자."


"혹시 불면증 있어?"


"음... 원래 불면증까지는 아니고 잠을 잘 못 자는 편이긴 한데. 이번에는 유독 심하네."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요즘 그냥 불안해.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선화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전날 선화가 보낸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때도 선화는 누군가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누가 쳐다보는 것 같다고?"


나는 스토커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려다가 선화의 피곤한 표정을 보고는 말을 돌렸다. 스토커 이야기를 괜히 꺼냈다가 더 밤 잠을 설칠 것 같았다.


"응. 누군가 뒤에서 스윽 하고 쳐다보는 느낌, 뭔지 알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팔에 소름이 우수수 돋는 그런 기분."


"흠. 요즘 기가 허한가?"


"글쎄. 그럴지도. 요즘 바쁠 시기이니까. 하긴 갑자기 오한이 들고 하면 귀신이 지나간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많이 하니까. 근데 낮에도 그런 느낌을 받는 거는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선화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기가 허한 것 아니냐는 말을 꺼냈지만 선화는 진지하게 반응했다. 확실히 낮에도 그런 시선과 느낌을 받았다면 확실하게 문제가 있다. 대체로 사람의 감이란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어떤 시점에서는 굉장히 잘 맞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사람의 불확실한 감이 정확하다. 선화가 콕 집어서 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했으니 아마 누군가 선화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 한번 스토커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첫 번째 메뉴가 나왔다. 검지 손가락보다 조금 긴 크기의 꼬치에 닭고기가 두툼하게 꽂혀있었다. 위에는 분홍 빛이 도는 하얀 소스가 듬뿍 얹어져 있었다. 


"와, 이게 뭐예요?"


"구운 닭가슴살에 명란이 들어간 마요네즈 소스를 얹은 꼬치입니다."

 

"세상에, 이런 것 처음 먹어봐!"


선화는 난생처음 햄버거를 먹어본 유치원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서빙을 해주던 직원은 그 모습을 보고 빙긋 웃으며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선화의 그런 모습이 나는 싫지 않았다. 만약 선화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면 나이 먹고 왜 이렇게 주책스러울까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화는 이런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창회 날 만났을 때의 선화보다 지금의 선화가 더욱 선화인 것 같았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선화가 꼬치를 들다 말고 나에게 말했다. 


"왜 안 먹어?"


"아아, 먹을 거야. 먼저 먹어."


"엄청 맛있겠다 그렇지? 이건 뭐지?"


선화가 숟가락 옆에 놓인 꼬챙이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끝이 포크처럼 두 갈래로 갈라지다가 몸통 쪽으로 끝이 휜 희한한 모양의 꼬챙이였다. 나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옆 테이블을 봤더니 나무 꼬치에서 편하게 분리할 수 있게 사용하는 도구였다. 


"이렇게 사용하는 거네."


"와, 이렇게 쉽게 분리가 돼? 역시 인간은 대단해."


"하고자 하면 못하는 게 없지 인간은."


"얼른 먹자, 너도 먹어 어서."


선화는 꼬챙이의 사용법을 알게 되자 신이 난 듯 나무 꼬치에서 닭가슴살을 분리해 냈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닭가슴살을 전부 꼬치에서 분리한 다음 소스를 듬뿍 얹은 부위를 입에 가져갔다. 바삭하는 식감과 함께 잘 익은 닭고기의 육즙이 뿜어지듯 입안을 메웠다. 알이 톡톡 씹히는 마요네즈 소스가 잘게 썰린 고기를 부드럽게 식도로 안내했다. 


"와, 이거 정말 맛있는데?"


"대박이지! 세상에. 나 이런 맛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이건 닭고기가 아니라... 흠. 달리 비교할 대상이 생각나진 않는데 아무튼 정말 맛있네."


"내 말이! 여기 소개해준 친구 진짜 여자들한테 인기 최고로 많겠다."


"다음에 내가 더 맛있는 식당 알아올게."


"일단 여기부터 먹고! 자 한 잔 받아."


우리가 처음 나온 닭꼬치에 대해 침을 튀기다시피 하며 평가를 하는 동안 주문한 술이 나왔다. 선화가 웃으며 병을 잡고 빙빙 돌리더니 까드득- 소리를 내며 병목을 비틀었다. 


"더 좋은 술도 많던데."


"에이, 무슨 소리야 술은 소주지."


"여기 안동소주도 있는데."


"그게 무슨 소주야. 소주는 여기 응? 개구리가 붙은 초록색이 소주지. 저런 건 양반들이나 먹는 술이야. 낭만 없게."


"낭만이 없다고?"


"그래! 소주가 말이야, 싸고 처음엔 쓰고 취하면 달고 다음날 숙취 심하고! 그래야 소주지!"


"그건... 그냥 몸에 안 좋은 것 아니야?"


"그러니까 낭만이 있는 거지! 멋있지 않아? 딱 우리 같은 사람들 같잖아."


"나도?"


"너도 오늘부터 낭만 소주파 해."


"이렇게 쉽게 받아줘도 되는 건가?"


"당연하지. 건배!"


선화는 내 손에 쥔 잔에 힘껏 자기 잔을 부딪히더니 단숨에 목을 젖혀 소주를 털어 넣었다. 느닷없는 소주 예찬에 선화의 목소리가 커진 탓인지 몇몇 테이블에서 눈총을 주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일일이 맞추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선화는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빈 잔에 소주를 채워 넣었다. 나도 빈 잔을 선화에게 내밀었다. 선화는 쨍- 소리가 나도록 병목을 부딪히더니 병을 한껏 위로 들어 소주를 채웠다. 


"난 이렇게 따르는 게 좋더라. 쪼르르 소리가 귀엽지 않아?"


"근데 잔이 작아서 소리가 얼마 안 나는데."


"그 맛이지. 원래 아쉬움이 남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음식이든 사람이든."


"사람도?"


"그래야 매력 있잖아?"


선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잔에 잔을 부딪혔다. 우리는 함께 원샷을 하고 동시에 크- 하는 소리를 뱉었다. 선화는 깔깔깔 웃더니 이제 어엿한 낭만 소주파가 됐다고 말했다. 나는 고작 두 잔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시켜줘서 고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두 어잔쯤 더 비웠을 때 새로운 메뉴가 나왔다. 닭다리살을 오븐에 구운 꼬치와 닭껍질 튀김, 은행과 버섯이 번갈아 끼워진 꼬치가 한 접시에 나왔다. 선화는 영락없는 소주 안주라며 박수를 쳤다. 우리는 안주가 나온 기념으로 한 잔 하기로 하고 서로의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소주 특유의 알싸한 향이 코를 타고 목으로 넘어갔다. 미쳐 넘어가지 않은 알코올 향이 다시 코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역시 소주는 역하다는 생각을 하며 안주로 뭘 먹을지 고민하다 닭다리가 꽂힌 꼬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연분홍색의 닭다리살이 번들거리는 기름을 두르고 먹음직스럽게 나무꼬치에 꽂혀 있었다. 꼬치용 포크로 조심스럽게 한 덩이를 빼내 후추가 섞인 소금을 찍어 입 안에 넣었다. 기름 가득한 닭다리살이 짭조름한 소금과 함께 입에서 사르르 녹듯이 부서졌다. 


"와, 더 맛있는데?"


"여기 진짜 최고다. 나 피곤이 싹 가셨어."


선화가 닭고기를 입 안에 넣은 채 우물거리며 소주병을 내밀었다. 우리는 연거푸 석 잔을 마시며 접시를 비웠다. 세 번째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추가로 시켰다. 선화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입안에 맴도는 감칠맛 덕분에 피로를 잊었는지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다. 나도 선화의 속도에 맞추어 잔을 비우느라 금방 얼굴이 화끈거리며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다. 


"아 안주가 맛있으니까 술이 다네 달아. 소주가 달면 취하는데 오늘 취하겠다."


"낭만 소주파가 이 정도로 취해서 되겠어?"


"물론 아니지. 제법 우리 파 다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순덕이?"


"가입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열심히 활동해야지."


"아주 좋은 자세야. 자 한 잔 더하자고!"


선화가 기세 좋게 잔을 내밀었다. 우리가 다시 한번 동시에 목을 꺾어 잔을 비웠을 때 세 번째 요리가 나왔다. 알맞게 구운 날개살로 만든 꼬치와 구운 채소꼬치였다. 날개살에는 껍질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채 붙어있어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선화는 채소를, 나는 닭날개 꼬치를 잡고 한입씩 베어 물었다. 우리 둘 다 맛있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은 채 약속한 듯이 조용히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혀를 감싸는 감칠맛이 달아나기 전에 빈 잔을 채워 소주를 부어 넣었다. 안주를 먹고 잔을 비우고의 연속이었다. 


호기롭게 잔을 치켜든 낭만 소주파는 주문한 소주가 채 3병이 되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나는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선화는 말끝마다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자연스레 술잔을 집어 드는 빈도수보다 안주를 입에 넣는 횟수가 잦아졌고, 다섯 번째 메뉴 가지 나온 시점에선 배가 불러 그마저도 하지 않고 간간히 차만 여러 번 시켜 홀짝였다. 유명한 술집에 와서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선화의 기분 좋게 취한 모습도 선선한 가게 안의 공기도, 알딸딸하게 머리를 어지럽히는 취기마저 사랑스러운 밤이었다. 선화의 입에서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그늘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전까지는 너무 행복해서 오래도록 곱씹고 싶은 밤이었다. 


"... 었으면 좋겠어."


선화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턱을 괴고 테이블 한쪽 구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혼잣말을 하는 선화를 보며 나는 쎄한 기분을 느꼈다. 예쁘게만 보이던 눈이 초점이 사라지자 마네킹을 보는 듯한 오싹함마저 느껴졌다.


"뭐라구?"


내가 되물었지만 선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선화의 대답을 기다렸다. 몇 초, 몇십 초, 몇 분이 지나가기까지 선화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답답한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나는 기다렸다. 본능적으로 선화가 가진, 그리고 내가 그토록 알기를 갈망했던 그늘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머리를 지그시 누르던 취기가 선화의 대답을 갈망하는 목소리에 점차 밀려났다. 조급함을 누르고 선화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식사가 끝난 테이블이 하나 둘 일어나 홀 안의 테이블이 듬성듬성 비었다. 디저트를 내와야 하는지 고민하는 서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소주가 반 정도 남았지만 새로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직원이 빈병을 치우고 새 소주를 가져오고 나서야 선화는 입을 열었다. 


"죽었으면 좋겠어."


"누가?"


선화의 초점 없던 눈이 선명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아주 새까만 그 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매혹적이고도 그 안에 빠져들면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소름 끼치는 빛깔이었다. 나는 팔에 우수수 돋아나는 소름을 감추려 조심스레 왼손을 들어 팔을 쓸어내렸다. 선화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작스럽게 눈물을 흘렸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다이아몬드를 실제로 눈 앞에서 보면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굵고 투명한 눈물이었다. 주황색 조명에 물든 눈물 알알이 반짝이며 테이블 위로 툭툭 떨어졌다. 선화는 눈물을 닦을 생각은 전혀 없는지 말없이 그저 테이블을 치는 눈물을 그대로 놔두었다. 선화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었다. 테이블 위에 떨어지는 눈물들이 선화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듯했다. 나는 옆에 놓인 휴지를 몇 장 뽑아서 선화에게 건넸다. 선화는 말없이 내가 준 휴지를 받아 들고는 여전히 눈물을 떨어냈다. 나는 다시 휴지를 몇 장 뽑아 선화의 눈가를 톡톡 찍어내고는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눈물들을 정리했다. 


"무슨 일이니?"


내가 물었지만 선화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망설임 없이 다시 물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부모의 마음처럼 선화의 눈물을 멈추고 다독여주고 싶었다. 눈물을 닦아주고 두 팔로 꼭 안아 괜찮다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나가자.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래."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값을 지불했다. 문 앞으로 나와서 선화를 기다리는 동안 메시지를 확인했다. 중학교 동창들의 단체 메시 지방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꽤나 많이 쌓여있었다. 나는 메시지를 전부 읽음 표시를 한 후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선화가 가게에서 나와 내 옆에 잠시 멈춰 서더니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선화의 뒤를 따랐다. 어디를 가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선화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나를 움직였다. 선화와 나는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서 십 분쯤 걸었다. 어느새 큰길이었다. 선화가 팔을 뻗어 마주오는 택시를 멈춰 세웠다. 


"상수동으로 가주세요."


선화는 목적지를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기사가 가는 동안 두세 번 애인 사이냐, 술 한 잔 했냐 하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선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침묵하자 택시기사는 혼잣말로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선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기사에게 현금으로 택시비를 지불한 다음 내려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나는 선화를 뒤 따랐다. 처음에 우리가 만난 '다락'으로 가는 길처럼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지나왔다. 나는 속으로 큰길로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선화의 뒤를 쫓았다. 선화는 어두컴컴한 골목을 휘적휘적 거닐더니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멈춰 섰다. 나무 아래에는 손때가 묻어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고동색 벤치가 놓여있었다. 선화는 벤치 위를 손으로 탁탁 털더니 철퍼덕 소리가 나게 앉았다. 나도 선화를 따라 손으로 벤치를 슥 닦고는 옆에 앉았다. 


"춥니?"


"아니 괜찮아."


"이 나무 진짜 크지?"


"응,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운치 있네."


"저기 빌 라보여?"


"응."


"저기가 우리 집이야."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선화가 가리킨 빌라와 선화를 번갈아 보았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름하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동네가 조용하네."


"맞아 조용해 조용하지. 낡고, 부서지고 조용한 동네야. 그래서 여기에 살기로 마음먹은 것도 있고. 물론 돈도 한 몫했지만 이 분위기가 마음에 와 닿았달까, 너무 나랑 닮은 것 같아서 홀린 듯이 집도 안 보고 계약한다고 했어. 그랬더니 부동산 사장이 보지도 않고 계약하는 게 어딨냐고 펄펄 뛰며 억지로 끌고 갔는데 반지하더라구.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어. 아늑하달까. 남들한테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이 드니까 포근한 느낌마저 드는 거 있지."


"그래도 반지하면... 답답하지 않아?"


"전혀. 나는 오히려 잠도 잘 오고 좋더라. 나 좀 이상한가?"


선화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취한 듯했지만 집까지 오는 동안 알코올이 많이 달아났는지 발음이 새지는 않았다. 다만 눈에는 여전히 피곤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근데 요즘은 잘 못 잤다며."

작가의 이전글 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