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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25.

    "응. 원래도 잠을 잘 자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 집에 오고 나서는 그래도 푹 잤거든. 그런데 요즘 잠을 못 자겠어 통."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응."


선화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 연약한 어깨가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선화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간신히 참아내었다. 아무리 부모의 마음이라도 그것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누가 쳐다보는 느낌 느낀 적 있어?"


"음... 아니 나는 딱히. 누가 날 쳐다보는 것 같아서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관심이 없더라고."


나는 선화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농담 섞인 대답을 했지만 선화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끈질긴 시선은 정말 겪어봐야 알아. 집념이 가득 담긴 눈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쓱 훑는 느낌은... 등부터 시작한 소름이 손끝까지 타고 내려가는 기분은 당해본 사람만 알 거야."


선화는 시선을 생각하자 오한이 드는지 양팔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런 선화의 모습에서 진한 두려움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술집에서만 하더라도 즐거워 보이던 선화는 얼굴에 피곤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별 일 아닐 거야 라는 말 따위로 위로해봤자 저 진득한 두려움을 가시게 할 것 같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화의 옆에 앉아만 있었다. 선화는 잠시 깊은 한숨을 몰아쉬더니 빌라 쪽을 흘긋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내 삶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부터인지, 중학교 때 잠깐 사귀었던 고등학생 남자 친구 때문인지, 스무 살 때 처음 잠자리를 한 그 쓰레기 같은 새끼 때문인지..."


나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선화도 딱히 내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우리 엄마 되게 예뻤다? 어렸을 때였는데도 기억나. 엄마 손 잡고 마트라도 가면 마트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확 느껴질 정도로 엄마는 예뻤어. 아빠도 인물이 좋았지만 그래도 엄마만은 못했어. 아빠는 내심 그게 부담스러웠나 봐. 엄마랑 같이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고 엄마만 따로 나가는 것도 질색하다시피 했지. 아마 남자라는 동물의 본능에 가까운 것을 느껴서 그랬는지도 몰라. 내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런 게 항상 있었는데 일이 터진 거지. 어떤 남자가 지나가다가 엄마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서 연락처를 물어본 거야. 엄마는 자기 애 딸린 유부녀라고 이러지 마시라고 했는데도 그 남자는 끈질기게 엄마를 붙잡고 놔주지 않은 거지. 그러다 엄마 손까지 잡고 못 가게 했는데 그걸 아빠가 지나가다가 딱 본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나는 마침내 입을 열고 선화에게 물었다. 선화는 여전히 내 쪽은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보통이라면 그 남자를 어떻게 했겠지. 하지만 우리 아빠는 그러지 않았어. 그대로 모르는 척 집으로 가버렸지. 집으로 가서 엄마가 오기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기다린 다음 엄마가 들어오자마자 뺨을 후려갈겼어. 여편네가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니까 저런 양아치 새끼들까지 꼬이는 것 아니냐고."


선화가 어이가 없지 않냐며 나를 보고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선화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지. 허구한 날 아빠는 엄마를 몰아붙였어. 계속해서 구석으로 모퉁이로. 아빠는 술도 마시지 않았어.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면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술이 나쁜 거라는 핑계라도 댔을 텐데 말이야. 맨 정신으로 사람을 그렇게 의심하고 때린다는 게 선뜻 이해가 안 되지? 그런데 웃긴 게 나중에는 아빠도 엄마를 왜 때리는지도 모른 채 때리는 거야. 엄마도 왜 맞는지도 모르고 가만히 맞고만 있고. 마치 서로 해야 될 일을 마땅히 하는 사람들처럼. 그러다 엄마가 집을 나갔어."


"집을 나가셨다고?"


"응. 기가 막히지. 초등학생인 딸을 내버려 두고 훌쩍 사라져 버린 거야. 어느 날 말도 없이. 더 웃긴 건 엄마가 하루아침에 충동적으로 집을 나간 게 아니라는 점이야. 엄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기 흔적을 지웠어. 화장품부터 옷가지, 사진, 심지어 자기 수저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 거 있지.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더 소름 돋는 건 뭔 줄 알아? 나한테 생일 선물로 줬던 머리핀까지 없애버린 거야. 나도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머리핀에서 그친 걸까? 아직도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머리핀까지 가지고 가버렸는지 나는 궁금해. 반은 엄마의 피지만 나머지 반은 아빠의 피라서 나를 그냥 가만히 두고 간 걸까? 엄마는 대체 언제부터 사라질 준비를 했던 걸까? 아빠한테 맞을 때마다 초점 없는 눈을 뜨고 속으로는 오늘은 무엇을 버릴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선화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렸다. 아무리 오래된 상처라도 흉터에 아로새겨진 아픔은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선화는 잠시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단순히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만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엄마가 나간 뒤에도 나름 씩씩하게 자랐어. 일부러 더 활짝 웃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기 최면까지 걸 정도로 노력했지. 그러다 보니 실제로 행복하다고 느껴지더라? 게다가 엄마가 나간 뒤로 아빠도 집에 밤늦게 돌아오거나 며칠 씩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혼자 지내다시피 했지. 다행인 건 엄마가 나간 뒤로 나에게는 한마디도 안 했지만 식탁에 생활비는 꼬박꼬박 두고 갔다는 거야. 그게 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엄마에게 생활비를 주던 것이 버릇처럼 남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꽤 큰돈을 매달 주었으니 나는 풍족하게 살았지. 아빠는 내가 어디에다 돈을 쓰는지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어. 하지만 나도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어. 매달 나가는 공과금을 체크해서 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마트에서 장을 보기도 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사춘기 꼬마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어른 노릇을 했는지 몰라. 아마 중학생 치고는 꽤 큰돈을 다루니 스스로 어른이 된 것처럼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뭐,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어. 아빠가 이따금 술 취해 들어왔을 때 나를 한참 동안이나 무섭게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빼고는 말이야."


"난 전혀 몰랐어... 힘들었겠구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으로 고르고 골라 가장 뻔한 대답을 했다. 말해놓고 보니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사람들도 나와 같이 할 말을 찾지 못해 가장 보편적인 말을 골라냈을 것이다. 적당한 공감과 적당한 위로가 될, 욕을 먹지 않을 정도의 친절을 베푸는 문장을 말이다.


"아니 전혀. 말했잖아 나쁘지 않았다고. 정말로 그렇게 힘든 경험은 아니었어. 오히려 또래보다 성숙한 기분이 우쭐하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엄마가 떠난 바로 직후는 조금 힘들었지만 그다음은 아니었어."


나는 선화가 또래보다 성숙하게 느껴졌던 기억을 되새기며 괜히 선화에게 여인의 모습이 느껴졌던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선화는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고, 남자들에게 한 번씩 찾아오는 누나에 대한 욕망을 일깨우는 묘한 매력이 있는 아이였다.


"뭐 나름대로 살만하네 라는 생각이 드는 때였어. 애들은 내가 예쁘다고 잘해주지, 주위에 잘 나간다 하는 애들이 친구들이지, 돈도 좀 있겠다 남부러울 게 있었겠어? 사춘기 소녀가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진 셈이었지. 그래도 난 이성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었어. 관심이 없었기보다는 무서웠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아버지 때문에?"


"맞아. 맨날 때리는 아빠와 맨날 맞는 엄마 사이에 있으면 남자라는 동물이 무서울 수밖에. 아빠도 처음부터 엄마를 그렇게 대했던 것은 아니니까. 아무리 잘해줘도 나중에는 저렇게 때리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색안경을 씌워버린 거지."


선화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선화의 삶의 일부분이 무겁게 느껴졌다. 선화는 길게 호흡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내뱉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치만 나도 사춘기 소녀라 궁금하긴 했어 남자라는 동물이. 내가 그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런 걸까? 남자는 여자랑 어떻게 다를까? 어느 순간 그런 질문들이 머릿속에 생겨나면서 계속해서 남자에 대해 생각하게 됐지. 온종일 남자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날도 있었어. 드라마에서 보던 커플들처럼 남자랑 만나면 저런 웃음이 나올까? 첫 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들린다는데 정말일까? 이런 시답지도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 마침 내가 좋다고 하는 남자들은 많았고. 미안 이건 자랑이 아니라.. 아냐 자랑 좀 섞어서 이야기하면 진짜 많았어."


"그건 내가 잘 알지. 당신의 말이 진실임을 제가 보증합니다."


선화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나름 재치 있다고 생각한 말로 받아치자 선화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 정말 많았어. 귀찮을 정도로. 그러다 남자를 만나면 내가 가진 이런 문제들이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든 거야. 더 이상 귀찮게 하는 애들도 없어질 테고, 남자에 대한 궁금증도 해결되고.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든거지. 근데 그러려면 만날 남자가 귀찮은 애들이 넘보지 못할 만큼 힘이 있어야 했어. 십 대 사춘기 소년 소녀들에게 있어서 힘이 뭐겠어?"


"폭력이겠지."


"맞아.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게, 중고등학생 때 제일 잘 어울리는 말 같아. 물리적인 폭력이야 말로 10대 들에게 진정한 법이지. 어른들도 똑같아. 단지 물리적인 폭력에서 돈으로 종류만 바뀔 뿐이지 강자에게 붙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똑같달까. 마침 나를 좋아한다던 남자애들 중에 소위 '짱'이라고 불리는 애가 있었어.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싸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겨서 유명했지."


나는 선화가 고등학생과 사귀었던 때를 기억했다. 선화가 우리 동네는 물론 옆동네까지 유명한 고등학생과 사귄다는 말이 학교에 퍼지자마자 난리가 났었더랬다.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한쪽은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둘의 외모는 어느 누가 낫다고 하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에 둘의 만남에 대해 완벽한 커플이 탄생했다고들 이야기했다. 다른 한쪽은 '굳이'라는 반응이었다. 물론 잘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불량스러운 소문이 항상 따라다니는 남자와 최선화가 굳이 사귀어야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반응은 선화의 인기를 초등학교 때부터 지켜본 애들이 주로 보였다. 그렇게 물밀듯이 쏟아져 오는 러브콜들을 다 거절하던 선화가 느닷없이 잘생긴 양아치와 사귄다니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주변에서 납득하든 못하든 간에 당사자들의 만남은 의견이 아니라 사실이었고, 나로서는 둘 중 어느 의견도 아니었다. 선화의 연애 소식이 퍼지기 며칠 전 선화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가 거나하게 차인 직후라 그런 것은 나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패자에게 승자의 승전보란 다시 한번 패배를 상기시키는 것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깊은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그보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절망의 크기가 더 커지지는 않는다. 절망이란 이미 그 상황 자체로 최악의 상황에 몰려있다는 것이니까.


"나도 알아. 내가 너에게 고백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그 소식이 돌았으니까."


선화는 내 말투에서 묘한 뾰족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선화의 눈을 마주친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질투심을 느껴 욱하다니 최악이라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게다가 십 년도 넘은 일을 가지고 질투라니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뭐야 순덕이,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선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아니라고 얼버무렸지만 선화는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십 년도 넘은 일을 가지고 질투해주다니 고맙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참 오래되긴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그때 민주가 했던 말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민주 걔가 말을 좀 함부로 하기는 해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


나는 선화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서민주가 착하다니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말을 함부로 하는 애 정도로 치부하기엔 내가 그날 겪었던 일은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충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정말 더웠던 여름인 것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유난히 빨리 찾아온 더위에 남자애들 교복의 등이 땀으로 항상 젖어있고 짙은 밤꽃 냄새가 학교 주변을 맴돌던 시기였다. 교복을 줄여 사타구니 바로 아래까지 오는 치마를 입은 여자애들과 그런 여자애들을 일부러 넘어뜨리거나 번쩍 들어 팬티를 보려고 장난치는 남자애들이 복도에서 시끌벅적하게 구는 때였다. 그렇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애들도 선화가 복도를 지나갈 때면 넋을 잃고 홀린 듯 선화를 쳐다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복도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누군가 볼륨을 일부러 낮춘 듯 조금씩 잦아들면 그 끝에는 언제나 선화가 있었다. 선화가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아이들의 조심스러운 속삼임과 진한 샴푸 향이 남았다. 한창때의 사내아이들의 냄새를 다 지우고도 남을 그 미미한 샴푸 향은 남자아이들의 콧속으로 깊이 스며 여러 날을 잠 못 이루게 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전교생들에게 김민수의 지독한 괴롭힘을 받고 있는 중임을 보여주고 나서도 선화에 대한 열망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소유욕과는 다른 것이었다. 명치 안, 갈비뼈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내장의 안쪽에서 뜨겁게 타는 것을 뱉어야만 하겠다는 욕망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그 말을 상대방에게 인지시켜주고 싶다는 열망. 어쩌면 원치 않는 상대방에게는 폭력일 수 도 있는 그런 욕망이었다. 제방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저수지의 물이 이내 둑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물로 쓸어버리듯이 내 안의 욕망도 그러했다. 어느 날부터 조금씩 조금씩 비집고 나온 열기가 마침내 둑을 무너뜨렸다. 여름 치고는 바람이 선선한 바로 그 날이었다.


"어머, 얘 뭐야?"


선화의 옆에 붙어있던 서민주가 날 먼저 발견하고 불쾌한 듯 소리쳤다. 서민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변을 지나던 아이들이 하나 둘 우리를 주목했다. 선화는 무슨 일이냐는 듯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갑작스레 몰린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내 안의 욕망은 기름을 부은 듯 더 뜨겁게 타올랐다. 얼른 말해버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가끔씩 이런 기분일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 뒷산 연못에 가재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학원도 빼먹은 채 밤늦게까지 뒷산에 있었던 날도 그랬고, 엄마 지갑에서 돈을 몰래 빼내 용산에서 게임 CD를 샀던 날도 그랬다. 김민수의 바지를 벗긴 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했던 행동은 다 달랐지만 가슴속에서 타는 듯한 열망은 모두 같았다.


"아 뭐냐고 길 막고!"


서민주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아까보다 더 많은 시선이 이번에는 정확히 나를 쳐다보았다. 선화는 여전히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선화야 나 너 좋아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자 몸 안에서 느껴지던 타는 듯한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민주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고 선화는 난감한 듯 웃었다. 주변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몇몇은 폭소했고 몇몇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야유를 보냈다. 나는 기분 좋은 꿈을 꾸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잠을 깬 아이처럼 지독히 느껴지는 현실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순덕아."


선화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나에 대한 멸시나 혐오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선화를 쳐다볼 수 없었다. 시커멓게 때가 탄 실내화를 보며 세탁이라도 좀 하고 올 걸이라는 바보 같은 후회만 속으로 되뇌었다.


"나 같은 애 좋아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만 받을게. 미안해."


선화의 말에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거절의 의미에 대해 고맙다고 이야기한 그때 나의 심정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의 고백에 고맙다고 말해줬기 때문에 나 역시 고맙다고 이야기한 것일까? 많은 아이들 앞에서 심한 말로 거절해주지 않아서 고마움을 느낀 것일까? 뭐가 되었든 내게 남은 것은 완곡하지만 확실한 거절이었다. 내가 무슨 의미로 고맙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준 것보다 선화에게 받은 말이 참을 수 없이 무거웠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은 나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선화가 말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당사자에게 직접 묻기에 바빴다. 선화에게 직접 말할 정도로 친하지 않은 아이들은 서로 선화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선화는 난처하게 웃으며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은 아이들의 아이돌로 자리 잡던 그녀가 누구와 사귈지에 대한 궁금증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선화가 단지 '좋아한다'라고만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선화가 그 사람과 사귀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여신의 고백을 거절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남자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선화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는 동안 나는 멀뚱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꼬질꼬질한 실내화가 계속 눈에 거슬렸다. 괜히 발을 꼼지락 거리고 있는데 슬리퍼를 신은 발이 내 앞으로 와서 멈춰 섰다. 붉은빛이 도는 하얀 살결에 발톱은 새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나는 선생님인 줄 알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으나 내 앞에 서있는 것은 서민주였다. 서민주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 덕구."


서민주가 화가 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멀뚱히 서서 서민주를 바라봤다. 서민주는 내가 대답이 없자 기가 찬 듯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노려봤다. 선화를 미쳐 따라가지 못한 아이들이 나와 서민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감지하고 우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네가 뭔데 선화한테 그딴 말을 해?"


"뭐가?"


나는 황당했다. 선화에게 거절당할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각오한 일임에도 착잡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서민주에게 이런 종류의 모욕을 당하는 것은 내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내가 발끈한 감정을 담아 서민주를 쳐다보며 되묻자 서민주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민주의 시나리오에도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서민주는 잠시 쭈뼛쭈뼛 대더니 주변에 하나 둘 몰린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다시 기세를 다듬고 나를 쏘아붙였다.


"뭐가? 네가 뭔데 선화한테 좋아한다 만다야? 니 주제를 알아야지. 오타쿠 새끼가."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오오 하는 환호를 보냈다. 마치 상대 수비수를 화려한 기술로 제치고 골대로 달려가는 공격수에게 보내는 것 같은 환호였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선화가 남긴 말이, 고마운데 미안하다는 그 한 마디 말이 더욱 크고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서민주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화려한 발재간으로 나를 제친 공격수는 더 큰 관중들의 환호를 위해 골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너는 좋아한다고 말하면 끝이지? 선화 입장은 생각도 해본 적 없지? 너 같은 새끼가 좋아한다고 이렇게 애들 앞에서 말하면, 선화는 뭐가 돼?"


글쎄, 서민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선화의 입장은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화에게 고백하는 것이 실례가 되는 행동이면서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나는 도대체 왜 하필이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선화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자 했을까?


"너 같은 새끼들은 안돼. 진짜 민폐야. 그냥 좀 네가 감당 안 되는 것은 넘보지 않으면 안 돼? 애초에 다르다고 레벨이 너랑은. 죽은 듯이 살아 시키는 거나 잘하고. 그럼 너도 편하잖아? 받아들이라고. 적당히 해야지 진짜. 너 같은 새끼가 선화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이렇게 고백한 거 보면 다른 새끼들도 주제 파악 못하고 달려들 거 아니야. 하 진짜."


그래, 바로 이거였다. 내가 굳이 학교에서 선화에게 고백한 이유. 서민주의 말대로 굳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화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내 마음만 전하는 것에 충실했다면, 오히려 단 둘이 있는 시간에 말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철창 속 원숭이를 보듯 하는 아이들도, 지금 내 앞에서 주제넘게 떠들고 있는 서민주도 없는 곳에서 선화에게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온전한 내 마음을 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내가 그러지 않았던 것은 나조차도 정확히 내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했던 부분에 기인했다. 그것은 외침이었다. 나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고 너희와 똑같이 누군가에게 대화하고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하나의 외침이었다. 서민주의 말대로 나와 같이 약자로 낙인찍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누리지 못한 이들의 봉기를 이끌어내는 하나의 쿠데타였다. 서민주가 짚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갈 뻔한 내 안의 작지만 어떤 것보다도 더 뜨겁게 불타고 있던 혁명의 불씨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한 짓은 폭력이라고 폭력. 알아? 선화 얼굴에 침 뱉고 따귀 때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서민주가 아이들의 눈을 의식하며 열변을 토했다. 주변에 몰린 아이들은 서민주의 입이 열릴 때마다 오오 하는 환호성과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저렇게 까지 말하는데 너는 어떡할래?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이 사람 좋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라고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아는 상식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사람보다 용감한 사람은 몇 없었다. 그중에 남에게 쏠리는 스포트라이트의 한 줄기를 뺏어서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서민주와 같은 인간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입을 열어 서민주와 같은 인간의 추악한 낯을 낱낱이 밝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제 능력으로 오른 것이 아닌 자리에서 거꾸로 추락하는 무능한 권력자를 바라보는 감정은 어떨까. 하지만 나의 그런 생각은 상상에 그쳤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왼쪽 광대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씨발놈이."


김민수는 나에게 씨발놈이라고 욕을 하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나를 때렸다. 무엇이 김민수를 그렇게 화나게 했던 것일까. 김민수는 악에 바쳐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그의 부모를 욕보이거나 혹은 그의 애인을 탐하는 것 같은 인륜을 저버린 범죄를 저지른 줄로 알 것이다. 나는 어쩐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김민수의 얼굴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악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왼쪽에서 김민수의 주먹이 날아온다. 이어서 오른쪽에서도. 나는 오른쪽 광대보다 왼쪽 광대에서 더 깊은 통증을 느끼며 왜 그런지 이유를 생각했다. 뒤이어 날아오는 김민수의 발차기를 보며 나는 답을 찾았다. 김민수는 오른손잡이였다. 왼쪽 배에 김민수의 발이 틀어박히는 것을 보며 나는 김민수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에 대해서도 짐작이 갔다. 아마도 서민주와 같은 맥락이면서도 약간은 결이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김민수가 선화를 좋아하는 것은 알만한 애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김민수 주변에 붙은 애들은 은근히 최선화와 언제 사귈 거냐며 김민수를 부추겼는데, 김민수 역시 앞에서는 아닌 체 해도 내심 최선화와 자기가 가까운 시일 내에 사귈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민수에게는 그 당시 부족한 것이 없었다. 얼굴도 꽤나 남자답게 생겼고 키도 180에 가까웠다. 공부도 노는 것에 비해 꽤 잘했고 무엇보다 잘 사는 집과 잘 나가는 형이 있는 것이 또래 애들에게 대단히 크게 다가왔다. 김민수 역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러한 시선과 비위를 맞춰주는 말들을 즐겼기에 지금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도 아직 하지 않은 고백을 매일 같이 괴롭히던 내가 먼저 했다는 사실이 치욕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운동장에서 선화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성기를 꺼내놓은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일이 생기게 한 범인이 나라는 사실도. 나는 벽 쪽에 바짝 붙어 손으로 눈 옆을 가리고 팔꿈치를 허벅지에 닿을 듯이 허리를 숙였다. 언젠가 삼촌이 알려준 급소를 보호하는 법이었다. 김민수가 분이 안 풀리는지 내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어 올리려고 할 때 이재민이 달려와 뒤에서 김민수를 끌어안았다. 김민수가 놓으라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이재민은 그러다 애 죽겠다며 놔주지 않았다. 이재민이 빨리 좀 말려보라고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애들이 쭈뼛쭈뼛 다가와 김민수를 복도 끝쪽으로 데리고 갔다. 옆에 있던 유현석이 한창 재미있었는데 아쉽다고 혀를 찼다. 머리에 해바라기 모양의 머리핀을 한 여자애가 벽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얼굴이 낯이 익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가슴께 명찰을 보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그 아이의 친구가 팔을 잡고 이리오라며 끌고 가서 미처 보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고 싶었지만 수업종이 울렸다. 어쩔 수 없이 쩔뚝거리며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찬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니 다들 한 번씩 내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칠판 쪽으로 돌렸다. 그중에는 서민주도 있었다. 나는 그 얄미운 심성에 욕이라도 시원하게 한 바가지 할 걸이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항상 서민주는 저런 식이 었다. 일을 크게 키워 스포트라이트는 받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어느새 사라져 안전한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나서야 세상에 서민주와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과 인간들 대부분이 하나쯤은 추악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서민주에 대한 기억이 좋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나이에 어쩜 그렇게 치졸하고 영악스러웠을까 하는 악감정만 더 진해졌다. 그런 서민주가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선화를 지금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 고등학생과 사귀고 나서는 예상대로 귀찮은 일이 퍽 줄었어. 물론 알 수 없는 편지나 선물 같은 게 사물함에 놓이는 일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직접적으로 연락처를 물어오거나 시간을 내달라거나 하는 곤란한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어."


그렇지 그 형 소문은 장난 아니었으니까,라고 내가 이야기하자 선화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수가 그렇게나 자랑하는 자신의 형도 선화의 남자 친구에게는 한 수 접어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 주변에는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이 발에 채 일정도로 넘쳤고 그 당시 나이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해볼 수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어떤 것들?"


"뻔하지. 술이나 담배, 클럽, 운전 같은 것들이지."


"중학생 때 그런 게 가능했다고?"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선화는 킥킥 웃으며 어른들 생각보다 애들은 영악해라고 말했다.


"거기다 법이 허술하기도 하지."


"그래도 그렇지 넌 중학생이었잖아. 그때 클럽을 갔다고?"


"뭐, 자주 가지는 않았어. 두세 번 정도?"


"두세 번이라도 갔다는 게 너무 신기하네."


"왜? 양아치 같아?"


선화는 씩 웃더니 둘째 셋째 손가락을 펴서 입에 대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냈다.


"아니라고 하면 이상하지."


선화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네 그런 점이 좋다며 내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나는 선화의 스킨십이 좋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떨떠름함을 느꼈다. 어렸을 적 첫사랑(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의 과거를 듣는 것이 썩 좋지는 않았다. 선화 주변에 양아치들이 많다는 것과 선화가 공부를 썩 잘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선화도 그들과 같은 부류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해서 선화가 양아치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쩌다 화장대 위에서 떨어진 진주 귀걸이가 먼지에 뒤덮인 100원짜리 동전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똑같은 짤짤이 취급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화는 우연히 떨어진 진주 귀걸이 었고, 주인은 언제고 진주 귀걸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온 방을 뒤져 찾을 것이 분명했다. 틈새로 넣은 긴 막대기에 걸려 진주 귀걸이와 함께 딸려온 100원짜리 동전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진주 귀걸이를 깨끗이 닦아 보석상자에 넣어놓고는 동전들은 잊어버린 채 기쁨을 만끽하며 방을 나설지도 모른다. 어쩌면 먼지 섞인 100원짜리 동전들을 집어 몇 년 전에 길거리에서 나눠준  '아프리카 난민 돕기 모금함'에 툭 던져 넣었을 지도. 그런 그들과 선화는 애초에 결합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종이 었다. 하지만 선화는 지금 그들과 자기가 같은 부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괴로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선화는 그런 나의 속마음을 당연히 알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정말 아슬아슬했지. 그래, 아슬아슬했다는 표현이 딱 맞아. 조금만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 아래로 바로 추락하는 폭이 좁은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달까, 정말로 아슬아슬했어."


선화는 자신이 말하고도 만족스러운지 '아슬아슬 이라니, 정말 딱 맞는 표현이야'라고 중얼거렸다.


"떨어질 듯 말 듯한 그 분위기를 즐겼어 그때는. 왜, 사람이 뭔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온전한 재미를 느끼는 것들도 있잖아?"


"스카이다이빙이라던지, 번지점프라던지 하는 것들처럼 말이야?"


"응. 그거랑 비슷해. 하지만 조금은 달라. 그때 나에게는 구명 끈이 허리에 둘러져 있거나 낙하산을 메고 있거나 하지 않았거든. 온전히 나 스스로만이 나를 떨어지지 않게 잡아줘야만 했어. 뭐 어쨌든 맥락은 비슷하니까 그렇다고 치자."


선화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여전히 낯선 선화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기사 애초에 선화와 나는 낯서니 마니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이가 아니었다. 단지 내 스스로 만들어 낸 선화의 이미지와 괴리가 느껴지는 경험담에 혼자 이질감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마치 팬덤이 빚어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아이돌에게 실망하는 것처럼.


"유혹을 즐기기만 하고 넘어가지 않는 기분이 얼마나 짜릿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 알 거야. 간질간질하게 이리로 넘어오라는 목소리의 달콤함을 즐기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성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만 하지. 그 아찔한 줄다리기가 얼마나 황홀한지! 아마 손만 잡고 잘 테니 하룻밤 모텔에서 묵어가자는 남자가 정말로 손만 잡은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기분이 제일 비슷할 거야."


나는 선화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리로 넘어오라는 유혹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싸우는 이성의 갈등이 도대체 어떻게 짜릿할 수 있는 것일까? 내게는 그 과정이 차라리 고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지 중간은 안된다. 회색은 어디에서나 질타받는 위치다. 아마 내가 모텔에 간 남자라면 손만 잡겠다는 약속을 어겨 유혹에 넘어가든지 아니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으로 가서 상상 속에서 그녀를 생각하며 사정을 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 것은 중용이 아니라 괴로운 상태다.


"근데, 아무래도 인간이 유혹을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 나도 하마터면 넘어갈 뻔한 적이 있었어. 덫에 발이 잡혀 이도 저도 못하고 애처롭게 울다 죽음을 맞이하는 산짐승처럼."


"그래서 유혹의 덫은 피했어?"


"결과적으로는. 사춘기 남자애들이 다들 그렇듯이 여자랑 어떻게든 한 번 자보고는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어 그때 만났던 그 고딩도 마찬가지였지. 게다가 잘 나가는 일진이지, 얼굴 잘생겼지 여자애들이 싫다고 해도 꼬이는 상황이었으니 아랫도리가 뻐근할 정도로 답답했을 거야."


나는 선화의 표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선화는 그런 내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사귀고 50일이 됐을 때 나한테 학교 수업을 빠지고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하더라고. 부모님 출근하셔서 안 계시니 같이 놀자고. 내가 수업 빠지면 집에 연락 갈 텐데 어떡하냐고 그랬더니 자기는 괜찮대. 어차피 자주 빠져서 신경도 안 쓸 거라고. 그래서 나만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조퇴하겠다고 이야기하고 걔네 집에 갔지. 그때 생전 처음 남자애 방에 들어가 봤어. 있지, 그 나이 때 여자애들도 성에 관심이 많은 거 알아? 남자애들처럼 직접적으로 그 행위에 대한 갈망은 아니더라도 행위가 가져다주는 기쁨에 대한 호기심은 남자애들 못지않아."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하면 어떤 기분일까' 같은 뉘앙스 차이인가?"


"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나 역시 그때는 '사춘기 소녀'였으니까 남자에 대한, 엄밀히 말하면 남자의 육체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어. 첫 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난다던데 진짜일까, 남자 생식기를 실제로 보면 어떨까, 또 그걸 내 몸에 넣으면 어떤 기분일까 따위의 것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했지. 말해두는데, 나는 결코 이런 것들이 변태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른들은 이런 걸 아이들에게 쉬쉬하면서 숨기기 바쁘니까. 단지 그 나이 때의 애들의 관심사가 성에 쏠리는 것은 신체의 변화에 따른 것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 다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교육을 제공받지 못했을 뿐이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교육을 제공받지 못해다는 선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적당할 때 조치를 하지 않고  쉬쉬하고 넘어가면 균열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무튼 그런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걔네 집에 가게 된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겁도 없었지 혈기왕성한 남자애 집에 여자 혼자 놀러 간다니, 그건 '호기심'이라는 이름으로 덮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였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때 그 애는 내 남자 친구였고, 어른들이 말하는 사랑보다는 조금 미성숙하지만 풋풋한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뭐, 나야 너한테 뭐라고 할 자격은 없으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사실 속으로는 전혀 덤덤할 수 없었다. 선화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있었고, 부모님이 안 계시는 시간을 노려 그 남자애 집에 단 둘이 있었다. 둘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어쨌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성적 호기심 또한 왕성한 시기였다. 그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그렇긴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야.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는 단지 예와 아니오의 차이로 구분하기에는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가져오거든."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선화는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처음 얼마간은 괜찮았어. 집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기도 했고, 부엌에서 같이 먹을 점심을 요리하기도 했지. 요리라고 해봤자 라면 두 개와 계란 두 개가 다였지만 말이야. 서로 사이좋게 계란 하나씩을 얹은 라면을 맛있게 먹고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서 누웠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어쩜 그리도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의 상상이 전개되기도 전에 선화가 먼저 말을 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우리 둘 사이의 생각은 비슷하긴 했지만 확연히 다른 구석이 있었어.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서 그 아이의 팔을 베고 누운 다음 수줍게 키스. 딱 여기까지가 그날 나의 호기심이었어. 그 이상의 것들은 궁금했지만 미래의 나를 위해 남겨두는 그런 것이었지, 사춘기 소녀가 열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막연한 경계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 애의 생각은 달랐어. 어떻게든 미지의 문을 열어젖히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지. 달콤한 키스를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그 애의 손은 내 셔츠를 풀고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가 내 가슴을 유린하기 시작했어. 나는 안된다고 그 애의 가슴팍을 밀쳤지만 180이 넘는 남자애를 힘으로 어떻게 이기겠니? 망연하게 타인에 의해 만져지는 내 가슴을 지켜볼 수밖에. 웃긴 게 뭔 줄 알아? 남자들은 신기한 게 여자가 싫다고 이야기하면 그게 거짓말인 줄 안다는 거야. '에이 그냥 한 번 튕기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기저에 있더라."


"모든 남자가 그러는 것은 아니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선화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듣기가 힘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이고 그때도 지금도 선화와 나는 '동창'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관계일 뿐 어떤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화의 옛 남자 친구에 대해 듣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좋았던 기억을 말하는 거였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선화가 옛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내가 유린당하는 기분이 들어 구역질이 났다. 거기다 그 애와 '남자'라는 이유로 같은 카테고리에 묶여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하면서도 발끈하는 감정이 일었다.


"뭐, 모든 남자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


선화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내 이야기를 더 들으면 왜 그런지 너도 조금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선화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선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뿌연 밤하늘 사이사이로 희미한 별빛이 보였다. 별빛은 아주 희미해서 조금만 한눈을 팔면 어디로 갔는지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별빛 사이로 깜빡이는 비행기 불빛이 1초 간격으로 반짝거리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빛을 잃은 별들 사이에서 깜빡이는 저 불빛이 선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빛을 잃기 전 선화도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강렬하게 내뿜으며 자신만이 아는 곳으로 훌쩍 날아가 아무도 모르게 빛을 잃고 희미해진 저 별빛처럼 되겠지. 그 생각이 들자 가슴이 텁텁했다.


"나는 계속해서 내 몸을 탐하는 그 애의 손을 밀치려고 노력했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애도 내가 점점 강하게 저항하자 내 입술에서 입을 떼고 '가만히 있어'라고 말했지. 그래도 내가 저항하자 강제로 키스를 하려고 했어."


선화는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아까부터 불편한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어폰을 꽂고 메탈 음악을 크게 틀은 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속에 얽힌 이야기를 막 풀어내려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기분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늘 그렇다. 마치 하나의 계약이 이루어진 것처럼. 타인의 비밀을 듣겠다고 대답한 사람은 그에 맞는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가장 어둡고 축축한 이야기를 듣기로 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치밀어오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연 상자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아무쪼록 선화의 이야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선화는 오래전 일임에도 어제 일처럼 명확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 아이가 키스를 하면서 한 손으로는 가슴을 만지고 한 손으로는 팬티 위를 비비적거렸다는 것도, 그 이후에 저항하는 선화의 뺨을 세 차례 때렸다는 것도 그 아이가 풀썩 쓰러진 선화에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것도 시간과 순서에 맞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냥 장난이라고 했어."


선화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복 셔츠의 단추가 다 떨어져서 브래지어가 그대로 드러나고 스타킹이 반쯤 내려가다 만 채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내가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 지르니까 걔가 한 대답이야."


선화가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왠지 선화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하늘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선화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장난이라는 말은 정말 마법의 단어야. 그 말 한마디면 끔찍한 일도 별 것 아닌 일이 되어버리지. 당한 사람이 화를 내면 되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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