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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26.

나는 김민수 패들을 떠올렸다. 그 애들도 항상 장난이라고 말했다. 뒤통수를 세게 때릴 때도, 의자에 우유팩을 놓고 내가 앉아서 터뜨리기만을 기다릴 때도, 명치를 세게 맞아 구역질을 하며 점심때 먹은 음식물들을 토해냈을 때도 저들끼리 낄낄 웃으며 장난이야 미안해 라고 말했다. 물론 미안하다는 말에 일말의 감정도 실리지 않았지만 그들로서는 표면적으로는 사과를 한 셈이다. 당치 않는 사과였지만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는 내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난이 도를 지나치기 직전에 항상 이광민이 제지했다는 것이다. 이따금 김민수는 이광민의 그만하라는 소리에 버럭 화를 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이광민을 김민수는 거스를 수 없었다. 멋쩍게 웃으며 친구끼리 장난친 건데 왜 그렇게 정색하냐며 어깨동무를 할 뿐이었다.


"그치만 나는 그때 참을 수 없었어. 장난? 장난이라는 말로 하기에는 너무 끔찍했거든. 뺨을 맞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 얼얼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는 생각도 안나. 다만 나도 잘 안 만지는 그곳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닿는 기분, 내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드러나는 내 몸의 감촉이 너무도 낯설었어. 어쩌면 소름이 돋았을지도 몰라. 단지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그 생각밖에는 없었어."


선화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을 곱씹는 듯한 얼굴이었다.


"근데 웃긴 게 나도 참 한 성깔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지 뭐야. 보통 그 자리에서 울거나 경찰에 신고한다거나 하는 말을 했을 텐데 나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어. 셔츠를 잠그고 스타킹을 올린 다음 그 자식 멱살을 쥐고는 한마디 해줬지."


"뭐라 그랬는데?"


"너 이러는 거 너네 엄마가 알아?"


선화가 갑자기 내 멱살을 쥐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연극톤의 목소리를 뱉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변한 선화를 보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조그맣게 실소를 흘렸다.


"뭐야, 내 혼신을 다한 연기에 대한 반응이 피식 밖에 안돼?"


"아니 갑자기 그럴 줄은 몰랐어."


"원래 '갑자기'에서 사람의 내면이 나오는 거거든?"


선화가 장난스럽게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종잡을 수 없는 선화의 모습에 적잖은 혼란과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동시에 느끼며 원래 선화의 성격이 이랬던가 하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그러나 이어진 선화의 말에 상념을 길게 가져갈 수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식 멱살을 잡고 그렇게 말해줬어. 그랬더니 그 자식 엄청나게 당황하더라? 학교에서는 얌전하기만 했던 애가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니 어처구니가 없었겠지. 처음에는 화난 표정 지으면서 놓으라고 했어. 근데 내가 놓겠니? 더 멱살을 꽉 쥐고 내 눈 똑바로 보면서 말하라고 했지. 너네 집, 학교, 너희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까지 내가 다 말하겠다고.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랬더니 아까까지는 뺨도 때리고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애가 주춤하더라? 똥 마려운 개처럼 어쩔 줄 몰라하더니 미안하다고 울먹이면서 제발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빌더라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걔네 아빠가 애를 엄청나게 패면서 키웠나 봐. 그래서 아빠 이야기만 나오면 어쩔 줄 몰라한다고 하더라고."


"의외네. 골목대장이 파파 보이라니."


"원래 겉만 봐서는 사람을 알 수 없는 거니깐. 뭐 그 당시에는 나도 몰랐던 부분이었지만 말이야."


"그 뒤로 어떻게 됐어?"


"그 날 이후 연락 뚝 끊더니 일주일 뒤쯤에 유학 갔다고 하더라. 그 날 집에 아무도 없는 데다가 어차피 일주일 뒤에 한국 뜨겠다, 여자랑은 한 번 자봐야겠는데 마침 여친도 있겠다 날 잡은 거지. 물론 내가 그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때 다행스러운 감정보다도 내가 승리했다는 도취감에 더 빠져버렸어. 그전까지는 한 번도 내 의지를 강력하게 주장한 적은 없었거든.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야 그렇게 되더라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 그 고양감이란 마치 내가 중세시대에 나오는 기사 같았다니까?"


선화가 눈을 반짝이며 허공에 칼 손잡이를 잡는 시늉을 했다. 나도 따라서 허공에 칼 한주를 뽑자 선화는 그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지. 이 상황에서 기사는 나고 너는 드래곤을 해야지."


"드래곤?"


"그래. 불 뿜는 용."


나는 용 흉내를 어떻게 내야 할지 몰라서 양팔을 높게 들고 우어-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선화는 그게 뭐냐며 킥킥대고 웃었다.


"용이 무슨 그래."


"미안. 용 흉내는 도통 내보질 않아서."


내가 멋쩍은 척 웃으며 말했다. 선화는 하긴 용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에 나는 도무지 어떤 것이 선화의 진짜 얼굴인지 혼란스러웠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몇 년간 그 알량한 성취감은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줬어. 아빠한테 조금씩이나마 내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모은 돈과 아빠에게 얼마간 지원받은 돈으로 졸업과 동시에 독립도 할 수 있었지. 정말이지 아빠와는 함께 있기 싫었으니까."


"아빠가 근데 독립을 허락하셨어?"


"물론 처음에는 반대했지. 어디 여자가 혼자 사냐고. 근데 사실 어쩔 수 없었던 게 나는 알다시피 공부를 좀 못했거든.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못해서 지방 전문대밖에는 갈 데가 없었어. ㅇㅇ대학 알아? 통학하기에는 너무나 머니까 아빠도 반대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나는 선화가 공부에 썩 재능이 없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보통 정도는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의외라고 생각했다. 선화는 내 표정을 보고 겉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라니까 라며 빙긋 웃었다.


"어쨌든 결국 독립하게 됐어. 아빠랑도 떨어져 살게 됐고 드디어 내 삶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 다 좋았어. 동기들도 다들 성격이 잘 맞았고 선배들도 처음에는 군기를 잡는 척하더니 나중에는 같이 어울려 놀았지. 평화로운 한때였어. 드라마에서나 보던 캠퍼스 라이프 그 자체였으니까. 취업이나 졸업 후 미래 같은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어. 굳이 이야기해봤자 좋은 방향 쪽의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다들 쉬쉬했지. 미래의 시간을 언급하는 것은 마치 불길한 소리처럼 터부시 되는 종류의 것이었어. 하지만 말을 꼭 하지 않아도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듯이 때가 되면 하나 둘 연락이 끊어지고 사라졌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우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으로서 서서히 잊히듯이, 같이 놀던 선배들 혹은 후배들이 하나둘 사라졌지. 우리는 그것마저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모른 체 했지. 불편한 사실이니까. 단지 다음에는 혹시 내 차례인가? 내 차례가 오지 않기를!이라고 마음속으로 비는 수밖에. 그렇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나에게도 사라질 차례가 다가오기 마련이야.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듯이."


"죽음이랑 비교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것 아니야?"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근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으로는 반쯤 죽은 사람들이야."


"왜?"


"흠, 그걸 굳이 일일이 말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선화가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왠지 그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워 고개를 돌렸다. 선화의 말에 반박하는 것은 유치한 오기였다. 그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선화의 말 그대로 반쯤 죽은 상태였다. 우리는 어떠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때가 되면 사회라는 무리 속에 던져져 살아남아야 했다. 앞서 나간 선배들을 보면 대개는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사회의 최하층에 자리 잡고 어떻게 해서든 제도권으로 진입하려는 부류와 사회 밖으로 떨어져 나가 보통사람들은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는 부류. 나는 아직까지 어떤 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선화의 말이 '너도 어서 선택해'라는 말처럼 들려 가슴이 갑갑해졌다.


"어쨌든 나에게도 그 차례는 오고 있었어. 말 그대로 내게 '오고' 있었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어. 같이 놀던 애들도 언제부터인가 얘가 걔고 걔가 얘인가 싶을 정도로 헷갈리고 오빠나 언니라는 말을 내가 하는 대신 언니나 누나라는 말을 더 많이 들을 때쯤 어느덧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었지."


내가 말했다. "불안했겠네."


나 역시도 선화와 같은 기분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스무 살은 잔인한 나이었다. 법 테두리 안에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무한한 자유가 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졸업이 점점 다가올수록 누렸던 자유는 거대한 채무가 되어 발끝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내 몸을 좀먹기 시작한다. 왕이라는 최고 권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불안했지. 이제 6개월 뒤면 어엿한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거야. 부랴부랴 취업카페에 가입하고 학교 취업센터에 상담예약을 했지. 카페에서 취업 관련 글들을 보는데 내가 얼마만큼 시간을 허비하면서 살아왔는지 알겠더라. 남들은 나보다 훨씬 좋은 학교 나와서도 어학점수에 봉사활동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고 이름 있는 회사에서 한 번이라도 더 인턴십을 하려고 아등바등 사는데 나는 학교 뒷동산에서 날씨 좋다고 막걸리 따 마시고 과방에서, 동방에서 술이나 마시고 앉아있고."


"근데 다들 신입생 때는 그러잖아. 또 대학생활이라는 게... 그때 아니면 언제 또 놀겠어."


나는 선화와 그 시절 나에게 면죄부를 주려 말했지만 선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알지?"


"여름에 개미는 땀 흘려 일하고 베짱이는 노래하고 놀기만 하다가 겨울 되니까 먹을 게 없는 베짱이가 개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


"응. 혹시 그 뒤에도 알고 있어?"


나는 선화의 말에 뒤의 이야기를 생각해봤지만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이솝우화 같은 동화를 기억하기에는 이미 너무도 멀리 왔는지도 모른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개미가 먹을걸 주고 해피엔딩 아니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지만 끝이 다른 이야기가 있어. 어쩌면 더 진짜에 가까운 이야기가."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갑자기 선화가 개미와 베짱이를 뜬금없이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게 더 진짜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여름 내내 노래를 부르며 놀던 베짱이가 겨울이 되자 먹을게 없어져 개미를 찾아가서 식량을 구걸해. 여기까지는 똑같아. 그런데 그런 베짱이에게 개미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아니."


"여름에는 노래를 불렀으니 겨울에는 춤을 추렴."


나는 입을 다물었다. 기억 속에,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들이 사실은 순화되어 아름다운 결말을 맺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새드엔딩보다는 해피엔딩을 좋아하고 어린 나이에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니까 라고만 치부했었다. 머리가 완전히 자라고 어른이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었을 때 삶에는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실 남의 새드엔딩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내가 말했다. "굉장히 냉정한 이야기네."


"그렇지. 삶은 원래 냉정한 거야. 자연을 봐. 태풍이나 산불이 어디 인간의 사정을 봐주면서 오니? 아무런 사심도 없이 그저 일어나야 해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야. 거기에 인간이 의미부여를 할 뿐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대비밖에 없어. 베짱이가 여름 내내 노래를 부르며 놀 동안 열심히 일해서 식량을 비축해둔 개미처럼."


"하지만 개미도 태풍이나 산불에는 어쩔 수 없잖아."


"그렇지. 그렇지만 갈 땐 가더라도 베짱이처럼 굶어 죽지는 않겠지?"


"그건 또 그렇네."


"어쨌든 나는 그동안 베짱이로 살아왔던 거고 사회에는 열심히 사는 개미들의 개체수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어. 이제와 내가 아무리 카페에 취업 관련 조언을 구해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겨울에는 춤이나 추렴'이라는 말뿐이었지. 이해해. 그들은 서로 얼마만큼의 식량을 모았는지에 대해 떠들어 댈 때, 저는 지금 모아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한 셈이니까. 그 뒤로는 막막하더라고.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지방에 이름 모를 대학에 와서 졸업장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바로 취업을 했어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처음에는 몇 시간에 한 번씩, 나중에는 몇 초에 한 번씩 머릿속을 휘저어놓곤 했어. 예약해 두었던 학교 취업센터도 가지 않고 자취방에 틀어박혀 혼자 조용히 있었지. 말 그대로 조용하게, 죽은 사람처럼. 이름도 간신히 기억해내야 떠오르는 선배들처럼 나도 그렇게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선화가 양팔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끔찍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아 보였다.


"그때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이 민주였어."


"서민주가?"


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의 서민주는 선화 옆에서 시녀노릇이나 하는 애였지 끈끈한 우정 같은 것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연락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응. 민주가 너한테,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고 못되게 군 것은 알아. 하지만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야.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줬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알고 보면 속이 참 여리고 착한 애야. 너도 그걸 알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너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때는 민주가 내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어. 같이 놀던 아이들도 연락이 다 끊어졌고 가족은 이제는 너도 알다시피 아빠밖에는 없었으니까. 집 나오고는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거든. 게다가 학비 때문에 계속해오던 아르바이트도 취업 준비한다는 명목 하에 그만둔 터라 생활비도 거의 동이 나다시피 했어. 그러니 더욱 자취방에서 나오지 않게 됐지.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대게 그렇듯 나 역시도 나만의 굴을 파서 숨기 바빴어. 점점 더 깊이. 그런데도 민주는 나에게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어. 주말이면 내 자취방까지 찾아와서 밥을 해주거나 억지로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게 해주고는 했어. 사실 나도 너처럼 민주가 그러는 것에 의외의 감정을 느끼기는 했어. 아무리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사이더라도 어른이 되어서는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이 고작이잖아? 그래서 민주가 내게 잘해주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내게 왜 이러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 그리고 그때는 나도 벼랑 끝에 몰린 심정이라 굉장히 예민해 있었기 때문에 경계하는 마음도 컸었고. 그런데 민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러더라."


"뭐라고 그랬는데?"


"친구니까 힘들 때 도와주는 거지 다른 이유가 필요 있냐고."


친구.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 중 하나이지만 아직도 내게는 낯설었다. 서민주는 친구이기 때문에 선화가 힘들 때 만사 제쳐놓고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토록 멸시하고 외면했던 것일까?


"네 말대로 너한테는 소중한 친구네."


내 말에 돋친 가시를 확인했는지 선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괜히 이야기를 끊은 듯한 기분이 들어 선화에게 그런 것 아니라고 말했다.


"미안 오래전 일인데도 떠올리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 어렸을 때의 일일 뿐인데."


"아냐. 오히려 내가 민주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해. 네가 그러는 것도 이해해. 사람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도드라지는 것들이 분명히 있으니까."


선화는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선화의 이야기에서 화제가 나에 대한 것으로 옮겨지는 것이 불편했다. 선화에게 그래서 서민주 덕에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냐고 묻자 선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구렁텅이. 정말 지독히 깊은 구렁텅이 었지. 근데 민주가 아무리 케어해줘도 그 속에서 나를 끌어올리지는 못했어. 민주도 처음에는 취미를 가져봐라, 날씨가 좋은데 혼자 밖에도 나가보고 사람들도 만나봐라 하는 이야기도 많이 했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나중에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 없이 그냥 같이 밥 먹어주고 이야기해주고 하는 정도였지. 나였으면 그렇게 못했을 텐데. 마치 요양병원에 입원한 치매 노인을 간병하는 기분이었을 거야. 정말로 내 이름 석자와 주변에 대한 기억들만 가지고 있었을 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거든. 사실 민주가 조심스럽게 병원에 한 번 가보자고 했는데 무서워서 가질 못했어. 정신병원에 가면 정말로 내가 정신병이 생겨버린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거부했어. 인터넷을 뒤져보고 자가진단을 해보니 '중증 우울증이 의심되오니 빠른 시일 안에 의사의 진료를 권합니다'라고 나오더라. 그래도 병원은 절대로 안 간다고 다짐했어.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병원에 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내 안의 무언가가 그 부분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선화가 담담하게 자신의 치부를 말하는 동안 한차례 미풍이 우리 둘 사이를 쌀쌀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고 지나갔다.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알코올이 바람에 실려 상당수 날아가고 기분 좋을 정도의 취기만 남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발갛게 달아올랐던 선화의 뺨도 조금씩 건강한 색을 되찾고 있었다. 다만 선화의 눈은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무게를 느끼게끔 했다. 무겁고 질척 질척한 감정의 끈이 내 어깨에도 올라타 지긋이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찰나에 처음으로 민주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어."


나는 선화가 가진 어두운 그림자의 원인이 지금 이야기하려는 인물 때문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선화는 조그맣게 김태식이라는 이름을 말했다. 지금까지 제삼자의 시선으로 태연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던 선화가 처음으로 머뭇거리며 불안해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선화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이미 충분히 선화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었고 더 이상은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구렁텅이 이야기를 꺼내 나에게서 선화에게로 화제를 전환한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나의 말로 인해 선화의 트라우마를 깨운 것 같아 갑자기 불안정한 상태가 된 선화를 보기가 힘들었다. 힘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선화는 대답하지 않고 혼자 심호흡만 크게 쉬었다. 들숨과 날숨이 천천히 선화의 코에서 입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다섯 번, 선화가 입을 열었다.


"김태식이라고, 한 학번 아래 후배가 있었어. 학번으로는 후배지만 재수를 했기 때문에 나랑 동갑이었지. 의외였어. 나랑은 그렇게까지는 친하지 않았거든. 하필 내가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연락을 하다니 나로서도 곤란한 입장이었어. 민주 외에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거든. 그렇지만 아예 연락을 안 하기도 좀 그랬어. 왠지 연락을 받지 않으면 영영 사회로 나가는 문이 닫혀버릴 것만 같은 그런 두려움이 엄습하는 시기였거든. 때마침 병원에 가지 않는 대신 스스로 노력하기로 다짐하던 차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 모순된 감정이 뒤섞인, 말 그대로 혼란스러운 때에 그 애가 연락이 온 거야. 선배 잘 있어요? 하면서."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물었다.


"응 맞아. 그렇지만 걔는 한 번도 말을 놓거나 선배라고 부르지 않은 적이 없었어. 우리 학교는 그래도 학번제나 기수제 같은 것들이 그리 심하지 않았음에도 걔는 자기와 동갑이더라도 꼬박꼬박 선배, 선배 하면서 존댓말을 썼지. 그게 우리 윗 선배들한테는 퍽 기특해 보였는지 선배들이 참 예뻐했어. 술도 많이 사주고. 정작 우리 학번 애들은 처음에는 불편해했지만."


"처음에는?"


선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사람이란 동물이 역시 간사하고 또 적응의 동물인 것이, 처음에는 동갑인 애가 선배라고 하면서 존댓말을 쓰니까 영 부담스러웠는데 그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고 한 학기가 지나가니까 이제는 그게 자연스러워진 거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존댓말을 듣는 게 싫지 않았던 거지."


"하긴 사람이라는 동물이 그렇지. 대접받는 거 좋아하고."


"맞아. 게다가 더 높은 선배들이 인정하고 힘을 실어주니까 자연스럽게 학과를 장악했지. 차기 과대표는 무조건 김태식이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애였어. 나도 과 생활을 안 한 것은 아니라서 가끔 술자리 같이하기도 하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연락하거나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어서 얘가 나한테 왜 연락이 왔나 싶었지. 학기초에 남자 선배들이 하도 시끄러운 일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남자들과 단 둘이 만나거나 연락하는 일을 극도로 피했고 우리 학과 사람들은 내가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거든. 뭐 유별나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이해 줬어."


나는 선화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데이트 신청이나 남자들의 스토킹에 시달렸던 모습을 직접 본 당사자로서는 선화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해 유별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원래 같았으면 답장을 안 했을 텐데 아까 말했듯이 이 연락을 받지 않으면 사회와 연결되는 고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오랜만이라는 답장을 하게 만들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어. 김태식은 전역하고 인사차 과방에 왔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어. 생각해보니 걔를 본지가 거의 2년 만이더라고. 아는 사람이 없을 만도 하지. 같이 놀던 사람들은 대부분 졸업을 했든 안 했든 간에 학교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기억 속에서 잊힐 타이밍?"


"그렇지. 나도 마침 그 시기를 겪는 중이었고. 자기랑 같이 놀던 선배들에게 한 명 한 명 연락을 돌려봐도 썩 시큰둥한 반응이었나 봐. 그래서 그 연락이 나까지 오게 된 거지."


나는 김태식이라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군대를 전역하고 느끼는 그 막연한 외로움은 갔다 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사회에서 잘 살고 있던 사람을 그대로 오린 듯이 떼어내어 군대라는 격리된 곳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그렇게 2년 여가 지나면 다시 그 사람을 군대에서 오려내어 사회로 복귀시킨다. 군대에서 매일 부대끼던 인간관계들을 다 떼어버리고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한 순간에 이쪽 사회에서 저쪽 사회로 넘나듦을 반복하는 사이 그 사람의 인간관계는 다시 초기값으로 세팅된다. 다시 0에서부터 차근히 쌓아가야 하는 사회적 관계를 생각하면 세상에 나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아득한 외로움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리는 것이다.


아마 김태식도 그러한 외로움에 못 이겨 여기저기 전화를 했으리라. 연락할 사람이 없고 폐쇄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나조차도 무지막지한 외로움을 느꼈는데 활발하게 생활하던 사람이야 오죽했을까.


"내가 전역 축하한다고 답장을 보내자마자 그 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걸었어. 그렇지만 나는 통화까지는 도저히 할 용기가 나질 않아 받지 않았지. 그랬더니 자기 전화 피하는 거냐고 섭섭하다고 그러더라. 그때 민주도 같이 있었는데 내가 어쩔 줄 몰라하니까 대뜸 내 휴대폰을 뺏어서  걔한테 전화를 걸고는 휴대폰을 나한테 휙 던져주는 거야. 민주는 그게 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출구라고 생각했다고 해. 나는 얼떨결에 떨리는 목소리로 여보세요 라고 말했고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보니 '그럼 내일 봐요 선배'라는 문자가 와있었지."


"만나기로 한 거야?"


"결과적으로는.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말도 더듬고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튼 만나기로 해서 만났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가 묻자 선화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다음은 뻔한 이야기야. 우울감과 불안증에 시달리던 여자가 자길 웃게 해 주고 위로해주고 보듬어주는 남자에게 푹 빠진다는, 삼류 드라마의 전형적인 스토리지. 어쩌면 내 삶이 삼류라서 그런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선화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어. 어쩔 수 없다, 참 비겁한 말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그 말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너덜너덜해진 영혼에 포근한 이불을 덮어주는 것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세상에는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어.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던 나에게 그 애는 너무 많은 것들을 줬어."


나는 선화의 말에서 아직 버리지 못한 감정의 잔여물을 느꼈다. 버려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종전에 좋았던 기억들이 만들어낸 찌꺼기들이 선화의 눈에서 먼지처럼 떠다녔다. 선화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끝내야 될 일을 마쳐야 하는 사람처럼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어. 사람이라는 동물이 '원래 그렇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라고 생각해.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잖아? 척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 적응하는 것처럼 부적절하고 불필요하고 나쁜 환경에도 적응하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거든."


"나쁜 환경에 좋게 적응할 수도, 나쁘게 적응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 가진 모순점이기는 하지."


나는 선화에게 대답하며 나쁘게 적응한 사례들을 떠올렸다. 나는 몇 가지 인간상들을 머릿속으로 그린 다음 손바닥으로 휘휘 저어 흩어버렸다. 나로서는 그들의 태도를 '환경 적응'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나쁜 환경에 나쁘게 적응해버린 거지. 나나 김태식이나 안 좋은 방향으로 진화를 선택한 거야. 벌레 먹은 사과밖에 먹을 게 없는 세상에서 성한 부분을 베어 먹고 진화하는 방향이 아닌 벌레를 먹고 살아가는 쪽을 택한 거지."


나는 다시 머릿속으로 벌레를 먹으며 서로를 껴안고 있는 남녀를 상상했다. 꿈틀거리는 벌레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며 애정을 속삭이는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시작은 처음으로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였어. 서로 사귀기로 약속한 사이도 아닌데 자연스레 내 집에 놀러 온 김태식은 자연스럽게 나와 잠자리를 가졌어. 몇 년 전 상황과 비슷했지만 서로 오고 간 사람이 달랐고 그때의 풋풋했던 사춘기 소녀는 넋이 나간 상태였지. 그 애의 입술도, 손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어. 간신히 미약한 호흡을 붙들고 있기에도 벅찬 나에게 저항을 위한 힘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어. 게다가 굳이 저항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있었고. 이렇게 못난 나를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는 애한테 이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나, 겁은 나지만 어차피 겪을 일이면 이 사람에게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 합리화라면 합리화지만 말이야."


선화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멈추었다. 서늘한 바람이 다시 한 차례 우리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이제 몸 안에 남아있는 알코올은 거의 다 날아간 것 같았다. 점점 또렷한 정신이 돌아오자 선화는 이런 이야기까지 나에게 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듯했다. 나로서도 그것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보기 싫은 것들을 제 손으로 파내어 남의 눈 앞에 내려놓는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다만 그런 일을 할 때 한 가지 위안을 삼는 것은 나에게는 보기 싫고 냄새나는 것이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화가 끄집어내려고 시도하는 그것은 나 역시 보기 싫고 피하고 싶은 형태의 무엇이었다.


"이런 얘기까지 솔직히 할 줄은 몰랐어. 민주한테도 이야기 안 하고 나 혼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이야기인데 말이야."


"원래 그런 이야기는 데면데면한 사이에서 더 잘 나오는 법이야."


"우리가 데면데면한 사이는 아닌데?"


"그렇다고 깊은 사이라고 할 수도 없지." 내가 말했다.


"음 좋아. 데면데면은 너무 정 없고 그렇다고 네 말대로 깊은 사이는 아니니 '알아가는 사이'라고 해두자."


"알아가는 사이." 나는 선화의 말을 곱씹었다.


"응. 알아가는 사이. 원래 알아가는 사이 초반에는 이런 무거운 이야기는 하는 게 규칙이긴 한데, 우리는 데면데면을 넘어서 알아가는 사이로 단계가 격상되었으니까 일종의 페널티라고 하자."


선화 말대로 '알아가는 사이'로 나아가기 위한 페널티라고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선화에 대한 감정이 일종의 향수 같은 것인지 아니면 이성으로서의 애정인지는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처음에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선화가 직접 이야기해준다는 사실이었다. 선화의 깊고 깊은 어두운 면을 대면할 준비가 나는 비로소 되었다고 느꼈다.


"게다가 일단 시작한 이야기는 어떻게든 끝을 맺어야 해. 그게 나의 규칙이야. 끝이 없는 이야기는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 나아."


"아무렴. 거기에 더해 열린 결말도."


"열린 결말은 왜? 매력적이잖아! 사람에 따라 새드 엔딩도 해피 엔딩으로 만들 수 있는걸!"


"그래도... 나는 딱 정해진 결말이 좋아."


"뭐 그럴 수 있지. 안심해 내 이야기는 열린 결말은 아니니까."


선화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갑작스러운 미소에 나도 모르게 마주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굳은 입꼬리는 올라가지 못하고 빤히 선화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선화는 내 표정을 보고 쿡쿡 웃더니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찮았어. 우리 둘 다 다시 사회로의 복귀를 시작하는 시점이었거든. 걔는 전역 후 다시 복학해서 적응하는 중이었고 나 역시 우울증에서 벗어나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서로의 이해점이 맞았다고 할 수 있지."


"서로 낯선 상황으로 뛰어드는 입장이니까."


"그렇지.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 우리에게도.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것은 우리가 비슷하지만 다른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것이었어. 나는 내 안의 세계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었다면 걔는 애초부터 밖에 있던 존재라는 거였지. 나라는 존재에서 다른 사회로의 편입이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전이의 과정일 뿐이었던 거지. 마치 무리에서 떨어진 동물이 다른 무리에 들어가려는 시도처럼, 상대적으로 나보다는 훨씬 더 낫고 풍요로운 환경이었어. 애초에 다른 종으로의 편입이 아니라 같은 종이 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너도 같은 '인간'이니까 같은 종으로의 편입인 것 같은데."


"뭐, 종으로서는 그렇지만 색깔이 다르잖아."


"색깔?"


"나는 그때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온통 검은색의 세상에서 살았어. 내 주변에 오는 사람들을 온통 검게 물들일 정도로 말이야. 한 색깔과 다른 색깔이 섞이면 또 다른 아름다운 색깔이 나타나야 하는데 나와 섞이는 사람들은 온통 검정 검정 검정... 어떻게든 나 스스로의 색깔을 검정에서 다른 색으로 바꾸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갈 수 없는 거야. 만나기만 하면 자기 색을 잃고 검정으로 변해버리는데 그런 사람과 누가 함께하고 싶겠니?"


"그렇지만 서민주는 검정으로 변하지 않았잖아." 내가 반박하듯 말했다.


"나중에야 민주가 말해줘서 안 사실이지만 민주도 나를 만나고 난 다음이면 무척 우울하고 힘들었다고 해. 그래서 일부러 다른 친구들을 만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장소를 찾아다니며 기분을 풀었다고 하더라고."


나는 선화가 왜 그렇게 서민주를 옹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색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 친구의 색을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당연히 누가 봐도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태식도 나와 만나면서 처음에는 좋았을 거야.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복학인 데다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군대물이 아직 빠지지 않아 각이 딱 잡혀있는 상태였으니까. 밖에서 온통 긴장 투성이로 지내다가 나를 만나러 내 방에 찾아오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온 몸이 노곤해지는 거지. 사우나를 하고 나서 나온 사람처럼 말이야."


'그리고 실제로 같이 목욕도 했겠지.'


나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머릿속으로 자꾸만 선화와 김태식이라는 얼굴모를 사내가 가보지도 않은 선화의 자취방에서 서로 키스를 하고 애무를 하는 모습이 재생되었다. 나는 선화에게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흔들어 선화의 것이 아닌 알몸을 흩어내 버렸다. 새삼스럽게 나 자신이 찌질스럽다고 느끼며.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 즈음 나는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어. 온몸을 두르던 무력감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는 게 느껴졌고 예전과 달리 하루에 한 번은 외출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됐어. 좋아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지. 나도 태식이도 말이야. 하지만 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나보다 조금 더 빠르게 적응했던 거야. 매일 같이 오던 우리 집을 일주일에 세 번으로 줄더니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할 정도로 빈도수가 줄었어. 나로서는 애간장이 타는 일이었어. 같이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나도 완전히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보니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 느낌이랄까. 맞아 그때는 정말 팔다리라도 잃은 기분이었어. 몇 번이고 그 문제로 우리는 다퉜어. 주로 내가 먼저 언제 오냐고 재촉하는 편이었고 걔는 참다 참다 마지못해 우리 집에 오는 식이었지."


"엄청 자존심이 상했을 것 같은데..."


"자존심이야 부차적인 문제였어. 나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어느새 나는 그만큼이나 김태식이라는 사람을 의지하고 있었던 거야. 의지라기보다는 의존에 가깝겠지. 하루는 2주 만에 내 집에 와서 섹스를 하면서 '예전만 못하네'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예전만큼 좋지가 않다는 거야. 그리고는 사정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샤워하러 가더라.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망연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어.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아마 한 여름에 태양빛에 뜨겁게 익어가며 죽은 개구리가 그러했을까.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 애한테 물었지.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거냐고. 지금이야 생각하면 이미 오래전에 관계를 끊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때는 내가 그럴 수 없었어. 나한테 밖으로 연결되는 오로지 걔 하나였거든. 걔랑 사귀면서 민주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우리 집에 오는 횟수가 줄었으니까. 나름의 배려였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내가 그렇게 말하니 걔는 나를 흥미로운 장난감을 바라보는 다섯 살짜리 아이의 눈으로 말없이 쳐다봤어. 그러더니 씩 웃으면서 좀 더 색다른 게 필요하다고 했지."


"색다른 거라면 어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똑같이 물어봤어. 색다른 게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거냐고. 그 물음에 걔는 다른 대답 없이 나한테 성큼성큼 다가왔어. 어느새 페니스를 아까 전보다 크게 부풀리고서는 말이야. 나를 침대에 눕히고 자기 휴대폰을 꺼내 들었어. 침대 옆에 있는 선반에다 휴대폰을 놓더니 내 다리를 벌렸지. 내가 뭐하는 짓이냐고 하니까 이게 색다른 거라고 말했어."


내가 담담한 척 말했다. "섹스 비디오 같은 건가."


"응. 그리고는 한 차례 사정한 다음 영상을 돌려보더니 다음번에는 삼각대를 가져와야겠다 라고 말하더라고. 그때부터 이 지옥이 시작됐어."


나는 말을 멈춘 선화의 얼굴을 살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쳐다보는 선화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지 않았지만 선화는 분명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새로운 것을 원했어. 계속해서 더 자극적인 거, 더 자극적인 거 하면서. 난 벗어날 수 없어. 방법이 없거든 이제."


선화의 목소리에 절절한 감정이 흘렀다. 나는 선화의 그늘을 파헤치고자 했던 것을 후회했다. 선화의 그늘은

생각보다 더 깊고 더 어두웠으며 자그마한 빛 조차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인 허무였다. 그 허무의 끝자락을 살짝 접한 나로서는 선화가 겪고 있을 어떤 고통도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건 진짜 아닌데, 진짜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야. 그런데 정말로 어쩔 수 없었어. 이미 나의 나체와 남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은밀한 모습들이 카메라 안에 담겼고, 절대로 지워줄 생각은 한 톨만큼도 없었거든.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더 무리한 것을 요구했지. 거절할 수는 없었어.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정말 아니다 싶어서 말할 즈음에는 이미 내 이름으로 된 사이트가 만들어져 있었거든."


"사이트?"


"응. 인터넷 사이트. 그동안 찍어온 영상들이 업로드된 사이트. 교묘하게 자기 얼굴만 모자이크해 놓은 영상들을 올려놓은 사이트를 만들어놨어. 그 사이트를 나한테 보여주면서 말하더라. 한 번만 더 자기 말에 따르지 않으면 영상 다 공개하겠다고. 아직 임시 사이트라 주소가 노출되지 않지만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다 퍼뜨릴 거라고. 학교는 물론이고 가족, 친구까지. 어쩌면 중국에서 내 영상을 사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더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지. 아 이제 내 인생은 끝이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의지했던 존재가 나를 억압하는 존재로 바뀌자마자 비로소 제대로 된 정신이 돌아왔어. 나를 밖으로 연결해주는 사다리인 줄 알았던 존재가 사라지자 오히려 내 안의 세계가 붕괴하면서 현실로 꺼내진 거야. 머리가 또렷해지면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앞으로 해야 할 일 같은 게 착착 정리가 되면서. 참 웃기지?"


선화가 덤덤한 목소리로 조금은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선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린 나이인 스물세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김태식이라는 사람에게 미래를 뺏겨버렸다. 선화의 빛을 갈취한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선화를 찾아와 몸을 요구했고 새로운 영상과 함께 선화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선화는 죽어서도 여전히 영상 속에서 살아있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죽을 용기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 영상이 존재하는 한, 김태식이 자신에게 흥미를 잃지 않는 한 이 지옥 같은(지옥이 만약 있다면) 생활을 지속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선화에게 해줄 말을 머릿속으로 한참을 찾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나로서는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경찰에 신고해라,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라 하는 식의 이야기는 적당한 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병행하면 날씬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선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는 사람처럼 끊이지 않고 김태식의 만행을 낱낱이 읊었다.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면서 선화의 목소리에서는 감정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부재중을 알리는 자동응답기 여자의 목소리처럼 무미건조한 음성이 영화 속에서 검사가 피의자의 범행을 낱낱이 알리는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피고 김태식은 최선화의 젊음을 영속토록 소유하고자 은밀한 행위를 불법적으로 촬영하였습니다. 피고는 최선화에게 해당 영상을 업로드한 사이트를 보여주며 자신의 요구사항을 따르지 않을 시, 대중에게 해당 사이트를 공개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김태식이 요구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최선화는 평생 동안 김태식의 성적 욕구 해소에 힘쓴다.


2. 최선화는 김태식의 요구에 절대로 NO라고 대답할 수 없다.


3. 최선화는 언제든지 김태식이 호출하는 시간에 김태식이 원하는 장소로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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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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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열거한 사항대로 피고 김태식은 인간의 도덕성과 헌법 윤리를 위반하였습니다. 증거물인 김태식이 개설한 사이트와 복사된 영상을 보면 공소사실이 모두 인정이 됩니다. 원고인 故 최선화 양의 진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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