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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Nov 01. 2020

27.

선화는 죽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었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내게 이야기한 그녀는 피로 바닥에 사람 두 세명 크기의 웅덩이를 만들어 놓은 채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죽기 전에 나와 같이 있는 사실을 서민주에게 알리고 연락이 없을 시 경찰에 신고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흐릿했던 기억이 점차 또렷해지면서 되짚어보니 분명히 그 날 나와 선화는 약속한 일이 없었다. 단지 선화가 누군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해서 선화의 집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 도대체 선화는 왜 나와 만난다고 서민주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일까? 선화의 주변을 맴돌던 스토커는 대체 누구였을까? 김태식은 분명 아닐 것이다. 선화에게 들은 바로는 김태식은 선화에게 당당히 연락하고 당당히 자신의 권리라고 믿는 것을 실행했다. 게다가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선화를 구태여 죽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선화에게 자신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어떻게 보면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 문제가 김태식에게 약점으로 잡혀있는 이상 김태식의 요구에 반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선화도 충분히 그런 요구에 적응이 되었고 길들여졌기에. 그렇다면 당최 선화를 죽인 범인은 누굴까?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선화의 집을 다시 가봐야 된다는 생각으로 형사의 집을 나왔지만 나는 선화의 집 앞에서 선뜻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다시금 선화의 죽은 두 눈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발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죽치고 앉아서 기억을 더듬고 있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선화의 그늘을 파헤친 장본인으로서 선화의 두 눈은 편히 감겨줘야 하는 것이 나의 도리였다. 김태식이 소유한 사이트를 찾아내 지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부릅 뚠 선화의 눈을 감겨주는 일 정도는 지금도 할 수 있다. 아니해야만 한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강하게 맴돌았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더라도 눈을 감겨주는 것 정도는 용인해주지 않을까?


고민하는 시간은 길었지만 막상 발걸음을 떼니 어느새 선화의 집 문 앞에 와 있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잠금 버튼이 눌린 채로 문이 닫혔는지 샛바람이 겨우 들 정도로 살짝 열려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당겼다. 끼 이익하는 소리도 없이 매끈하게 문이 열렸다. 한 사람이 겨우 서있을 만한 현관 바닥에는 군데군데 빨간 피가 칠하다만 페인트 자국처럼 번져있었다. 현관 바로 옆에 딸린 화장실의 불은 켜져 있었다. 저기서 급하게 세수를 하고 나온 기억이 생생히 떠올라 나도 모르게 물기를 훔치듯 이마를 닦았다.


방은 아직도 어두컴컴했다. 나는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를 잠시간 기다렸다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서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무겁고 텁텁하면서도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향수. 싸구려 향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선화는 벽에 기댄 채로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다만 눈은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냄새의 근원지를 쫓으려는 듯. 나는 조심스럽게 선화에게 다가가 손바닥으로 눈꺼풀을 덮었다. 시멘트 같은 촉감이 손바닥을 차갑게 식혔다. 꺼끌꺼끌한 눈썹이 등 뒤에 소름이 오도도 돋게 만들었다. 나는 선화의 휴대폰을 열 때처럼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선화의 눈꺼풀은 내 손바닥과 함께 내려가지 않았다. 꼿꼿하게 선 눈썹이 손바닥을 빗자루처럼 쓸고 지나갔다. 그 촉감이 너무나 부자연스러워 나도 모르게 황급하게 손을 떼었다.  


"쉽지 않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의 실루엣이 화장실 쪽에 서 있었다. 문틀에 몸을 기대고 있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와 키가 비슷하거나 약간 작은 남자인 듯싶었다. 나는 남자가 서 있는 쪽에서부터 지독한 향수 냄새가 발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죽은 선화가 있는 방에서 깨어난 시점부터 형사를 찾아간 일, 다시 형사의 집에서 선화의 집까지 오면서 선화와 있었던 일을 복기했던 것들이 생생하게 지나갔다. 저 남자다. 저 남자가 내가 선화의 집에 들어오기 전에 선화와 이 방에 있었다. 그때의 선화가 살아있는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죽어서 바람 빠진 인형처럼 벽에 기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저 남자가 선화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선화의 방에서 의식을 찾았을 때 느꼈던 묘한 이질감의 정체를 저 남자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수 냄새가 그때도 선화의 방 안에 분명히 남아있었다. 여자의 방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싸구려틱한 남자의 진한 향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뭔가 무기로 쓸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주먹을 말아주었다. 주먹으로 맞아본 적은 있어도 사람을 때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위태롭게 떨리는 두 주먹이 오늘따라 유난히 작고 초라해 보였다.


"진정해. 너랑 싸우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니까. 설마 깡패처럼 그 주먹을 휘두르려는 건 아니지?"


남자가 손을 뻗어 내 주먹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짐에 따라 남자의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목소리가 퍽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전에 김민수한테 한소리 했다길래 좀 변한 줄 알았는데 여전하네."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사람의 말투였다.


"날 알아?"


"알지. 나도 널 알고 너도 날 알고. 아, 너무 캄캄해서 안 보이나? 스위치가... 아, 여깄네."


남자가 벽을 더듬거리며 불을 켰다. 벽에 세워진 스탠드에서 주백색의 등이 연하게 들어왔다. 천장에는 등이 없었다.


"아니 무슨 방에 달랑 스탠드 하나 켜놓고 살아? 이런 것도 간접등이라고 치는 건가? 나 참 궁상스러워서. 그렇지?"


남자가 경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남자의 말에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희미한 주홍 불빛이 남자의 얼굴을 그림자 속에서 끄집어내듯 드러냈다.


"네가 왜...?"


내 말에 김필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왜?"


"뭐?"


"너는 왜 여기, 최선화의 집에 왔냐고. 죽은 최선화 눈 감겨주러 왔어? 그렇다면 실망인데."


김필수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사후 경직이 일어나서 감기지 않는다고. 인간이라는 게 죽으면 눈 하나 감는 것도 제 스스로 못한다니까. 그렇지?"


김필수가 말할 때마다 농밀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바닥에 흥건한 선화의 피 냄새 대신 김필수의 향수 냄새만이 이 방안에 존재하는 것 같은 상황이 문득 서글프게 느껴졌다. 선화는 죽어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그것도 자신을 죽인 사람에 의해.


"너지?"


김필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네가 죽였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네 향수 냄새. 내가 이 방에서 눈을 떴을 때 네 향수 냄새가 가득했어. 지금 네 몸에서 나고 있는 그 향수 냄새가."


김필수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오, 그림 그리는 친구라 그런가 생각보다 디테일하네."


김필수가 딴청을 하며 대답했다. 나는 선화를 죽인 범인이 김필수인 것을 확신했다.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선화를 죽인 것은 분명 김필수였다. 아니, 애초에 부정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저렇게 태연하게 내 앞에서 범죄 현장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래서 내가 죽였다면?"


내가 머뭇거리자 김필수가 역으로 나에게 질문했다.


"내가 최선화를 죽였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나는 뭐라고 대답하려다 김필수의 당당한 표정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흠, 대답하기 어려우면 질문을 조금 바꾸지. 내가 최선화를 죽였으면... 아니다, 내가 최선화를 죽인 게 맞아. 그럼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지금 네 말에 책임질 수 있어?"


"책임?"


김필수는 내 말을 듣더니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웃는 소리가 하도 커서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쪽으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졸여왔다.


"책임이라. 글쎄, 내가 책임 못 질 일은 하지 않는 주의라서.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치라서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구분은 명확하거든. 그게 없었다면 지금 여기까지 내가 올라오지 못했겠지. 너처럼 최선화 같은 애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다가 눈이나 감겨주러 왔겠지. 어차피 감기지도 않는 눈을 말이야."


김필수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지만 말투에는 가시가 서려 있었다.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하, 네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건 인정해. 그렇다고 나나 선화를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명예와 경제력 같은 것은 애초에 부차적인 것이니까. 너도 나도 선화도 똑같은 사람이야. 너도 칼에 찔리면 죽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그러니 그런 천박한 말은 집어치우지?"


나는 김필수의 말에 발끈해 숨도 쉬지 않고 몰아붙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나는 나에게 확실히 반골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죽은 사람의 방에서, 그것도 그 사람의 피가 덕지덕지 발려 있고 시체가 벽에 기대어 있는 상황에서도 나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듣자 피가 뜨거워져 앞 뒤 안 가리고 말을 뱉었다. 중학교 때도 그랬다. 나를 괴롭히는 김민수 패거리들의 행동이 내 자존심의 한계를 긁는 날에는 어김없이 나는 그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물론 쿠데타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그때마다 혁명을 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지만.


"같은 사람이라... 재밌네."


김민수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네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어. 덕구야, 너나 최선화 같은 인간이랑 나랑은 전혀 같지 않아. 사람들은 눈코입 똑같이 달려 있다고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저엉말 큰 착각이야. 그래,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너희 같은 사람들이 맹신하는 격언이 하나 있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아니야 덕구야. 이 세상에 공평한 것 따위는 없어. 너의 1시간과 나의 1시간이 똑같을까? 이렇게 생각해보자. 너랑 내가 똑같이 1시간이 걸리는 길을 간다고 치자. 너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걸어서 그 장소에 도착해야 해. 반면에 나는 기사가 딸린 최고급 독일제 세단을 타고, 가는 길에 책을 읽으면서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서 오늘 아침 셰프가 최고급 식재료로 만든 샌드위치와 탄산수를 마시지. 그리고는 웬만한 호텔 침대보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파묻고는 한숨 자는 거야. 그러다 보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목적지에 도착해 있지. 헐레벌떡 갖은 에너지 소비를 다 하면서 도착한 너와, 1시간 동안 에너지를 보충하면서 이동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도착한 나와 어떻게 같은 시간을 소비했다고 볼 수 있겠니?"  


타이르듯 나에게 이야기하는 김민수의 표정은 마치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고 나무라는 듯했다. 궤변이다. 김민수의 말은 철저히 궤변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나름의 논리가 있어서 나는 반박할 말을 쉽게 찾지 못했다. 내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자 김민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해는 가는데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해. 너의 1분과 나의 1분은 가치가 다르다니까?"


"그럼 네 말은 대기업 고위직 간부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거야?"


나는 일부러 '나 같은 사람들'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지. 그게 당연한 거지. 가끔 보면 사람들은 착각을 해. 인간을 동물이라고 말하면서도 마치 자기들은 자연법칙에 적용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니까? 인간도 똑같이 먹이사슬에 영향을 받아. 다만 특이한 것이 같은 종끼리에 먹이사슬이 생성되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지 예외는 없어. 하급 계층이 상급 계층에게 먹힌다. 서민계층이 상류층을 위해 일한다."


"무슨 그런 억지가 있어?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말이야.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산다고. 천민자본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들의 돈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을 하지만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대통령도 바뀌지 않을 테고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네 말대로 노예처럼 살다 죽겠지."


"재밌는 말을 하네. 대통령을 바꾼 게 너의 힘인 양 말하는데, 착각하지 마. 바뀔 시점이어서 바뀐 거지 결코 너의 힘으로 바뀐 게 아니니까. 너 같은 애들이 국가 단위로 있어도 그 자리 마음대로 못 바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하네."


나는 김필수의 말에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나를 깔아보는 것에 대한 분노와 오기가 섞인 일종의 도발이었지만 김필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것으로 내 비웃음을 털어버렸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니까."


"그래 좋아. 네 말대로라면 나한테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이유가 뭔데? 네가 그리 잘 나가는 샐러리맨인 것은 이제 잘 알겠어. 근데 그게 죽은 사람의 집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샐러리맨'에 힘주어 말했다. 나의 말에 이번에는 김필수가 반응했다.

   

"김민수가 왜 널 그렇게 싫어했는지 알겠다."


김민수가 내게로 한걸음 다가섰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오만하고 차가운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사람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알아? 10년이야. 10년. 나는 평생 사람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될 줄 몰랐어. 내가 그간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 같은 애들은 꿈에서 조차 알 수 없을 거야. 널 봐.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 가지고. 그 알량한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상처 입을까 봐 그렇게 날을 세우고 덤벼드는 꼴을 보라고. 상대가 누군지 가늠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눈이 뒤집혀서 그렇게 달려드니 강자 입장에서는 열이 뻗치지. 말 좀 듣나 싶을 때 꼭 한 번씩은 개기니까 말이야."


나는 김필수의 말에 발끈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김필수는 김민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김민수처럼 덩치도 크지 않고 김민수처럼 인상이 사납지도 않았다. 오히려 허여 멀 건한 얼굴이 나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 정도라면 내가 주먹을 날리면 쓰러지지 않을까, 저 재수 없는 눈빛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코를 때리면 부서져 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지나가며 나는 주먹을 김필수에게 뻗었다.


그러나 '퍽'하는 타격음은 김필수가 아니라 내 얼굴에서 터졌다. 축축한 것이 코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닦아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 끈적끈적한 피가 입술을 타고 턱 끝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쉽지 않지?"


김필수가 웃으며 말했다. 김필수 옆에 나를 때린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서 있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에 나른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는 검은색 양복차림에 타이는 하지 않은 차림새였다. 옷을 회사원처럼 갖춰 입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후줄근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괜찮아? 피가 나는데."


김필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 피를 닦을만한 것을 찾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코피가 터진 주인공이 옷깃으로 피를 승- 닦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다. 이 축축한 피를 옷으로 그냥 닦아내 버리는 것은 마치 바퀴벌레를 손바닥으로 꾹 찍어 눌러 죽이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피라는 것이 내 몸안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살지만 막상 그것이 몸 밖으로 나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더럽고 불결하다.  


"자, 이걸로 닦아."


김필수가 품 안에 손을 짚어 넣더니 나에게 무엇인가를 휙 던졌다. 나는 갑자기 뭔가 날아오자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은 빠르게 날아오다 도중에 펄럭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이 뭘 또 그걸 피하고 그래. 어서 닦아. 비싼 거다 그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고 보니 손수건이었다. 회색에 끄트머리만 주황색으로 포인트가 된 고급스러운 재질의 천으로 만든 것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수건을 코에 갖다 대었다. 코가 욱신거리면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굳이 엑스레이를 찍지 않아도 뼈가 부러졌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와서 손수건이 금방 축축해졌다. 주르르 흐르는 핏물을 거슬러 손수건에서 싸구려 남자 향수 냄새가 콧속을 자극했다.


"어이구 피가 많이 났네. 이 실장, 애를 왜 그렇게 세게 때렸어? 덕구야 그거 안 돌려줘도 되니까 양껏 닦고 너 써."


김필수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뭐라고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코에서 피가 계속 흐르는 탓에 숨쉬기에 급급했다. 김필수는 이래서야 무슨 대화가 안 되겠네. 우리 덕구가 물어보고 싶은 게 참 많을 텐데 말이야. 오늘 마침 여유가 있으니 조금 기다려줄게라고 말하더니 '이 실장'을 시켜 의자를 가져오게 했다. 이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화의 시체 바로 옆에 있는 화장대에서 조그만 간이 의자를 번쩍 들어 올려 김필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내가 피를 닦는 사이 오후 일정과 관련한 이야기를 꽤 오랜 시간 나누었다.


"자, 덕구야 좀 괜찮니? 치료는 나중에 병원에 가서 하고 이야기나 마저 할까? 이제 더 기다려줄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아, 치료비도 챙겨줄 테니까 걱정 말고."


"너 뭐야 대체?"


"응? 뭐가?"


"뭔데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고, 때려놓고서는 그렇게 당당해? 너 감당할 수 있겠어? 경찰 부르고 언론에 제보하면 힘들 텐데?"


나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가 지나쳤다.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저렇게 당당한 표정과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게다가 김필수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것을 덮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행동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김필수는 내 말에 대답이 없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필수가 직접적으로 선화를 죽였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녹음기가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 나중에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나는 김필수에게 선화를 죽인 것이 너 맞냐고 물었다.


"응 맞아. 내가 죽였어."


나는 김필수가 검사 앞에 선 피고처럼 요리조리 대답을 회피하며 확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김필수는 싱겁게도 자신이 선화를 죽였다고 단박에 시인하고 말았다.


"뭐?"


당황한 나의 대답에 김필수는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죽였다고. 아, 원래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김필수가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꼬며 말했다. 자, 내가 죽였으니 이제 어쩔 건데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죽인 게 맞다고?"


당황한 내가 재차 묻자 김필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덕구야. 당황스럽겠지. 사람이 죽었으니까. 또 그 사람이 네가 남몰래 짝사랑하던 애고, 그 애를 죽인 범인이 네가 되게 생겼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 애를 죽인 사람이 나라고 하니까. 게다가 당당하게 내가 죽였다고 말하니까 할 말이 없겠지. 이해해. 그냥 내가 설명을 해줄게. 응? 중간에 듣다가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말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면 얼마든지 대답해줄게. 알았지?"


김필수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만한 눈빛으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채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을 대하는 부장처럼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반창회가 있던 날, 나와 김민수 패거리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아이들이 옛 추억에 젖었다. 그중에는 김필수도 끼어 있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은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특성이 있다. 그 앞에는 돈이 얼마가 있는지 지위가 높고 낮은 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그 기억에 휩쓸려 한동안 현재와 동떨어져 표류하던가 아니면 잠시간 추억을 음미한 뒤 다시 현재를 살아가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에 해당한다. 아무리 그들이 과거에 젖어 있고 싶어 해도 시간이 용납하지 않는다. 언제나 앞으로 흐르는 시간은 출근이나 육아, 낮과 밤 따위의 과제를 통해 우리의 등을 떠민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사치라는 듯이.


하지만 김필수와 김민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과거에 남아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최선화를 쫓고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빛이 바래버린 그녀였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식으로 선화의 흔적을 더듬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김민수도 선화에게 연락을 했다. 나와 다르게 김민수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았다. 밤 12시나 새벽 1시쯤 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김필수의 말에 의하면) 김민수는 선화가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냈다. 선화는 김민수의 한없이 끈적거리는 연락에 지쳐만 갔다. 김민수도 선화의 태도에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배경과 외모, 거침없는(상대에 따라서는 예의 없는) 리드로 여자들을 꼬셨지만 선화는 자신이 어필하는 매력 중 어느 하나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김민수는 더 필사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선화에게 최대한 많이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었다. 일부러 선화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회사 근처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주말에 하루 종일 선화의 집 주변 카페에서 죽치고 있기도 했다. 물론 메신저와 전화 역시 꾸준히 했다. 그렇다면 선화가 내게 내내 말하던 누군가 쫓는 듯한 느낌은 김민수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김필수는 내 말에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김민수는 그렇게 선화를 한 일주일 쫓아다니다 포기했다고 했다. 김민수의 연락과 우연을 가장한 만남에 지친 선화가 한 번만 더 그러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니 면전에 대고 씨발년 비싸게도 구네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아마 그렇게 하면 선화가 무서워하며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할 줄 알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하던 일이기도 하니 김민수로서도 차라리 잘됐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호감을 얻고 유대관계를 쌓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보다 힘으로써 상대를 굴복시켜 얻어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인 일이니 말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중학생 시절 김민수의 그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선화에게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비열한 미소는 얼마 안가 일그러졌을 것이다. 그런 싸구려 협박이 먹히기에 선화는 너무 무거운 것을 안고 있었다. 김태식에 비하면 김민수의 1차원적인 협박은 귀찮은 수준이었다. 선화가 휴대폰을 들어 112를 누르고 통화음이 울리는 사이 김민수는 나지막하게 씨발이라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 김민수가 선화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선화가 느낀 시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여기 있는 김 실장이야."


김필수가 웃으며 나를 때린 사내를 가리켰다. 나는 의아한 생각에 아까는 이 실장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김필수는 아까보다 조금 더 밝게 웃으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시켰어. 불안하게 좀 만들라고."


"그게 무슨 말인데?"


"말 그대로야. 내가 최선화 주변을 맴돌면서 불안하게 만들라고 시켰다고. 누가 날 지켜보고 있다, 누가 아무도 없는 사이에 나를 어떻게 할 것 같다 이런 느낌을 주는 거지. 그런데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고, 시선은 느껴지고. 사람은 말이야, 생각보다 약해서 이런 멘털적인 부분을 건드리면 금방 무너진다고."


나는 그제야 선화가 이야기한 시선의 정체가 김필수의 지시를 받은 김 실장(때로는 이 실장이 되기도 하는)이었음을 알았다.


김필수가 선화에게 접근한 것은 동창회가 있은 후 2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김필수가 선화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선화가 먼저 김필수에게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간단히 웹사이트에 대한 질문이었다. 선화가 김필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동창회 때 김필수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동창회 때 내가 밀려나듯 선화의 테이블에서 나온 사이 선화와 김필수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술이 들어간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이 자연스럽게 서로 입이 터졌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서로 다니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 주로 하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 주말에는 주로 무엇을 하는지, 저녁에 자기 전에 맥주를 마시는지 같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 이후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가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황급히 택시를 잡았다. 김필수는 처음에는 선화가 쫓기듯이 일어나자 왜 저러나 싶었으나 잠자코 있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아한 내 표정을 본 김필수가 웃으며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 부서 최신 IT부서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정보나 이런 것들을 마음대로 열람하거나 조사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하하. 맞아 불법이지 엄연한. 뭐 사실 걸리지만 않으면 상관없지만 말이야. 사실 IT부서를 맡고 있는다고 해서 최선화에 대한 걸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단지 최선화가 나에게 연락한 것이 내가 IT부서를 맡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거지."


선화는 술자리에서 김필수가 IT부서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흥미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필수가 최신 IT기술과 앞으로 미래에 구현될 기술을 현란하게 표현했기에 선화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구세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인류가 화성에 갈 준비를 한다는데 한낱 아마추어가 만든 웹사이트 따위 없애는 데에는 손짓 한 번으로 충분할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선화는 조심스럽게 김필수에게 웹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쇼핑몰을 하려고 하는데 개인이 간단히 웹사이트를 만들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런 것은 해주는 업체들이 많으니 돈만 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자 선화는 망하거나 했을 때 웹사이트를 삭제하는 일도 가능하냐고 물었다. 김필수가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없애는 거야 당연히 가능하다고 하자 선화는 조심스럽게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참 귀찮았지. 요즘 이래저래 스트레스받는 일이 아니었다면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도 최선화라는 과거의 네임밸류 때문에 흥미가 돋은 거지. 뭐 우리들 사이에서만 있는 이름값이긴 하지만 말이야. 이제는 나이도 먹고 고생도 했는지 예전만 못하더라고. 못 배워먹어서 그런지 술집 주인에게 아빠 아빠 거리질 않나 나 원 참."


선화는 김필수를 만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골목길 깊숙이 숨겨진 야네우라로 김필수를 데리고 갔다. 야네우라는 선화에게 있어 마음의 안식처이자 자신의 비밀이 담긴 장소였다. 그리고 선화의 비밀이 담긴 상자는 세상에서 선화가 가장 신뢰하는 '아빠'가 지키고 있었다. 선화는 내게 '아빠'가 야네우라를 지키고 있는 한,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다락방 바깥에서의 일들이 아무리 자기를 괴롭혀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선화가 빛도 잘 들지 않는 반지하에 자리를 잡은 것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야네우라와 비슷한 공간에서 보내고 싶은, 그런 욕망의 발현이었지 않을까. 김태식의 마수에서 견디기 위해서는 매일 같이 야네우라에 몸을 숨기고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김필수에게 선화의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야네우라는 이상한 골목에 있는 '가게 같지도 않은 가게'였고 선화의 '아빠'는 술집 사장이었다. 선화는 '술집 사장을 아빠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년'이었다. 그는 선화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미 김 실장을 통해 선화의 이야기는 다 알고 있었다. 김 실장의 보고를 다 들은 후 김필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얼굴 좀 반반해서 잘만하면 쉽게 쉽게 살 수 있었는데 한심하네.'


김필수는 그 말을 끝으로 선화에게 흥미를 잃을 뻔했다. 곧이어 걸려온 김민수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김필수가 선화를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 필수야? 나야 민수. 어떻게, 통화 괜찮니? 하하, 밥은 먹었고?"


시답잖게 걸려오는 김민수에 전화에 김필수는 웃음이 나왔다. 매번 김민수가 자신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김민수에 비굴한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김필수가 지금 좀 바빠서 그런데 무슨 일이냐고 말하자 김민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김필수에게 말했다.


"아 내가 바쁜데 전화했구나 미안 미안. 하하, 혹시 동창회 또 할 건데 올래? 저번에 너도 꽤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김필수는 글 쎄라고 대답했다. 아마 김민수는 이번 달 갱신되는 아버지 회사의 계약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어 전화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과 친구관계로 엮기 위해 동창회 이야기를 꺼내는 김민수의 모습에 웃음이 비져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하지만 전화를 곧 끊어야 했다. 김실장이 조용히 손목을 가리키며 다음 스케줄로 이동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김실장의 의견을 김필수가 곧이곧대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실장은 말 그대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고 그 의견을 수용할지 여부의 문제는 오롯이 김필수의 몫이었다. 하지만 김필수는 고민할 필요 없이 김실장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지 않은 김실장의 성격상 이번 의견은 김필수가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가이드' 성향임이 분명했다.

 

"좀 생각해 볼게."


김필수는 그만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뒤이은 김민수의 말에 방문을 열러 가는 김실장을 손바닥을 들어 제지했다.


"그, 그래 꼭 좀 잘 생각해보고! 마침 오늘 최선화 만나기로 했는데 적극적으로 추진 한 번 해볼게!"


"최선화?"


"응, 기억하지? 왜 우리 중학교 때 예쁘다고 난리였잖아. 그때 보니까 지금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웬만한 여자애들보다는 훨씬 낫지? 내가 따로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어. 오늘 향수도 제대로 뿌렸다 아주 하하."


김민수는 김필수가 반응을 보이자 이때다 싶어 황급히 말을 이었다.


"내가 다음 동창회 때 최선화 딱 꼬셔서 옆에 데리고 나갈게. 크 딱 폼나게 말이야. 최선화 정도 네임밸류를 여친으로 만들어서 나가면 애들이 기절하겠지? 재밌을 거야. 내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까 필수 너도 꼭 와!"


김필수는 김민수와 전화를 끊고 김실장에게 최선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찾아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김실장이 미리 대기시켜놓은 차에 오른 김필수의 머릿속에는 늦은 약속시간에 대한 걱정보다는 최선화와 김민수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김필수가 최선화의 웹사이트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김실장이 보내준 링크에는 최선화의 출생부터 현재까지의 기록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중 빨간색으로 표시된 항목에는 '김태식에게 성관계 동영상으로 협박을 당하고 있음'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김태식에 대한 정리도 있었는데 최선화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여자들에게 영상으로 협박하고 돈을 갈취하는 그저 그런 쓰레기였다. 김필수는 '쯧'하고 혀를 찼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만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인맥만 제대로 만났으면 이런 저질 양아치 같은 인간들하고는 마주치지도 않을 삶을 살았을 텐데 자기 팔자를 자기가 꼬는구나 싶었다. 김필수는 대충 스크롤을 내리며 내용을 읽은 뒤 김태식이 만들어놓았다는 최선화의 웹사이트를 클릭했다. 150개의 영상이 카테고리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겉보기에 꽤나 신경 써서 만든 티가 났다. 아마도 김태식이라는 인간은 이렇게 여자들 한 명 한 명으로 성인사이트를 만들어 이걸 빌미로 돈과 성을 갈취하고 종국에는 대중에게 오픈해 돈을 벌 생각인 것 같았다.


"재밌네."


김필수는 영상들을 보며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중요한 프로젝트 때문에 여자와 잠을 자지 않았단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대로 바지를 내리고 조용히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김필수는 조용히 영상 속의 남자와 싱크를 맞추어 페니스를 부드럽게 흔들다 곧 사정했다. 김필수는 휴지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보면서 채 해소되지 않은 욕구를 느꼈다. 김필수는 곧바로 김실장에게 연락해 최선화의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김실장은 평소처럼 금방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김실장에게 지시만 하면 일은 항상 김필수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회장의 양아들이 되고 나서는 늘 이런 삶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삶에 안주했지만 김필수는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었다. 자신 같은 위치의 사람들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위치. 신, 말 그대로 그곳에 있는 이들은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상의 신이었다. 김필수는 신이 목표였다. 신이 되면 뭘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궁금할 뿐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위치를 보고도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보다 위는 도대체 어떤 세계일까 하는 막연한 호기심이 김필수는 더 위를 올려다보게끔 하는 원동력이었다. 회장이 자신에게 붙여준 김실장이라는 인물도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김필수의 의지를 부추기는 데에 한 몫했다. 김실장은 김필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얼굴, 키, 몸 어느 한 군데 빠지는 곳이 없었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을 거의 원어민에 가깝게 구사했으며 격투기 역시 세계 랭킹에 포함될 수준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이었다. 경영 지식 또한 상당해서 지금까지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김실장이 없으면 진행되지 않았을 것들도 상당히 많았다. 처음 김필수의 궁금증은 도대체 김 실장 같은 사람이 왜 한 사람에게 묶여서 때로는 비서보다도 더 귀찮은 일들을 하는가였다. 김필수의 궁금증은 김 실장의 입을 통해 해결이 되었다. 김필수가 어렵게 꺼낸 질문에 김실장은 늘 그렇듯 감정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정도 위치에 계신 분들은 다 저 같은 사람들이 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커왔고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김실장은 그러면서 김필수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면 자신도 같이 회수된다고 덧붙였다. 김필수가 자신이 자리에서 내려가게 되는 조건이 뭐냐고 묻자 김실장은 그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단지 위의 결정이라고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날부터 김필수는 '위'로 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계획을 조정했다.


최선화에게 가기로 한 것은 분명 '위'를 향한 계획 안에 있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몇 개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서 자신을 위한 아무 보상도 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필수가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영상 속의 최선화가 아니라 실제 최선화와 자는 것. 김필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최선화는 김태식에 의해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었고 그저 그런 인생을 사는 여자이니 차라리 자신과 하룻밤을 자고 물질적으로 크게 보상을 받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김실장이 내려다 준 곳은 한적한 골목에 있는 허름한 빌라 앞이었다. 계단을 오르려고 발을 내딛자 김실장이 조용히 '지하입니다'라고 말해 김필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김실장의 안내를 따라 반층 내려가니 102호라고 적힌 푯말이 달린 녹슨 문이 살짝 열린 채 김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필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잡이를 감싸 쥐고 가볍게 몸 쪽으로 당겼다. 끼기익 하는 녹슨 쇳소리가 불쾌하게 귀를 긁었다.


연분홍색 벽지가 촌스럽게 발려진 방 안을 둘러본 김필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이십 분. 최선화는 평일에는 퇴근하고 곧바로 집으로 귀가했다. 조금 있으면 최선화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김필수가 두리번거리며 앉을 곳을 찾자 김실장이 조그만 의자를 가지고 와서 김필수 옆에 놓았다. 김필수는 가만히 의자 위에 앉아 흥분되는 마음을 관조했다. 이것은 여흥이다. 단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과정이다. 게임이다. 같은 말 따위를 속으로 되뇌어도 발기된 페니스는 가라앉지 않았다. 김필수는 조용히 손짓으로 김실장을 내보냈다. 최선화의 서랍장으로 걸어간 김필수는 순서대로 손잡이를 당겼다. 첫 번째 칸은 양말과 스타킹이 줄지어 들어있었고 둘째 칸에는 속옷이 동글동글하게 말려있었다. 김필수는 오른손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 첫마디로 속옷 뭉치들을 쓸어내렸다. 까끌까끌한 레이스들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김필수가 검은색 브래지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을 때 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현관문이 반쯤 열리더니 김실장의 팔이 최선화를 휙 밀어 넣고는 문을 닫았다. 최선화는 무슨 일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채 검은색 브래지어를 들고 있는 김필수를 쳐다보았다. 검은색 브래지어가 자신의 것임을 알기까지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김필수는 손에 든 브래지어를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뜨렸다. 당황하는 최선화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 아닌 사과를 한 뒤,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다. 최선화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다가 멍했다가 마지막에는 화가 난 듯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김필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반인에게 꽤 큰돈과 원하는 데로 웹사이트까지 지워준다는데 이런 거래를 거절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김필수는 최선화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필수는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꺼내 선화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최선화는 김필수의 손에 들린 네모난 화면 안에서 교성을 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최선화는 이성을 잃었다.(김필수는 영화에 나오는 괴수 같은 소리를 질렀다고 말했다) 곧바로 화장실 옆에 딸린 조그만 부엌 싱크대에서 과도를 꺼내 김필수에게 겨누었다. 김필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 들린 과도가 애처롭게 보였다고 말했다.


김필수는 마지못해 김실장을 소리쳐 불렀다. 김실장은 그대로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와 구둣발로 최선화의 명치를 걷어찼다. 최선화가 윽 하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벽에 부딪혔다. 충격으로 액자가 떨어지며 이마에서 핏줄기를 만들어냈다. 김필수는 조용히 다가가서 최선화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최선화는 김실장에게 차인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김필수는 김실장에게 나가 있으라고 지시한 뒤 배를 잡고 있는 최선화의 팔을 억지로 젖혀 윗옷을 벗기고 스커트를 내렸다. 김필수는 페니스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속옷 차림이 되어버린 최선화는 다시 배를 부여잡고 있었지만 눈은 김필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필수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굴복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필수는 휴대폰을 켜고 최선화가 가장 치욕스럽다고 여길만한 동영상을 틀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김필수는 웃었다. 자기도 그렇게까지 할 작정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저 스트레스가 조금 쌓여서 푼다는 것이 일이 커졌을 뿐이라고. 


선화는 김필수가 그 동영상을 틀자 아픈 배를 가리고 있던 손을 들어 김필수의 뺨을 후려갈겼다고 한다. 그러고는 두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김필수에게 '씨발 곰보 새끼 죽여버린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게 화근이었다. '곰보 새끼'는 김필수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관통하는 단어였다. 김필수는 자신도 무엇에 홀린 듯이 행동했다고 말했다. 발치에 떨어진 과도를 집어 들어 선화의 목을 관통하는 데까지는 십 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필수는 선화의 목에서 끄륵하는 피 끓는 소리가 멎을 때까지 힘주어 칼을 밀어 넣었다며 칼끝에 걸린 것이 아마도 목뼈였을 것이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선화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자신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칼을 뽑았다고 말했다. 김필수는 자그마한 구멍에서 울컥울컥 사방으로 뿌려지는 피를 보며 다급하게 김실장을 찾았다고 한다. 김실장은 손에 과도를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김필수에게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몇 가지 옵션을 제시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말끔히 치우고 행불 처리를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씌우거나 하는 편입니다."


김필수가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지 묻자 김 실장은 꽤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김필수는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씌운다'는 김 실장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김필수는 김 실장에게 근처 로드샵에서 남자 향수를 사 오게 시켰다. 김 실장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현관문을 나서려고 문을 열었다. 잠시 뒤 김 실장이 김필수가 말한 싸구려 남자 향수를 사 왔고, 김필수의 지시대로 방안 구석구석 향기가 퍼지도록 세밀하게 뿌렸다. 김필수가 화장실에서 얼굴에 튄 선화의 피를 깨끗하게 씻고 나왔을 즈음 선화의 방안에는 지독한 남자 향수 냄새가 선화의 피냄새와 섞여 끔찍한 냄새를 만들어냈다. 김필수는 김 실장에게 어서 나가자고 이야기했고 김 실장이 현관문을 여는 순간, 


"네가 들어온 거지. 김 실장이 순식간에 네 뒤로 돌아가 뒤통수를 쳐서 기절을 시켰어. 잘 기억 안나지?"


내가 대답하지 않고 김필수를 쳐다보자 김필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김필수는 내가 최선화의 집에 올 것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당황했다고 말했다. 김실장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김필수는 일단 방에 넣어두고 자리를 뜬 다음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김필수가 뿌려놓은 향수와 함께 선화와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 것이다. 


"향수는 왜 뿌린 거지?"


"아아, 그 향수 어디서 맡은 것 같지 않아? 넌 냄새에 예민하지 않은 편인가? 아무튼, 우리 동창회 때 김민수가 신나게 떠들던 말 기억해? 일부러 싸구려 향수를 뿌리는 이야기."


기억을 더듬어보니 김민수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얼마간 마신 술과 김민수가 나를 윽박지르던 일, 선화와 대화한 일 등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자 김필수가 설명했다. 동창회 날 술에 취한 김민수가 잔뜩 으스대며 아이들에게 여자 꼬시는 법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는데, 그 노하우가 바로 싸구려 남자 향수였다. 


"냄새로 어, 이미지를 만드는 거라고 이미지를. 잘해주다가 나쁘게 구는 밀당은 기본이고, 나 같은 진짜 고수는 이런 디테일을 챙기는 거지. 알아? 싸구려 향수지만 이게 향이 뇌에 콕 박혀서 지워지지가 않는다고. 나중에는 남자 스킨 냄새만 맡아도 내 생각이 나는 거라니까?"


김민수는 그러면서 자신의 소매를 들어 주위 애들에게 냄새를 맡게 했다. 실제로 김민수는 지독한 향수 냄새를 이리저리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뭐 사실 그 당시에는 의미 없는 행동이었어. 나중에 김 실장이 짚어줘서 알았지만 말이야. 김민수에게 뒤집어 씌우려면 그딴 싸구려 향수를 덕지덕지 뿌리는 일 자체는 굳이 안 해도 된다더군. 그냥 몇 가지 조작만 하면 됐는데 내가 그때 뭘 알았겠어? 사람을 죽인 게 처음인데 말이야. 대신 애꿎게 너만 향수 냄새로 내가 범인인 걸 알아버렸지 뭐야. 그렇지?"


김필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내 앞으로 던졌다. 탁, 하는 꽤 큰 소리와 함께 떨어진 것은 내 휴대폰이었다. 


"너를 범인으로 만들까 고민하기도 했어. 김 실장은 목격자가 있어도 행불로 만드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했는데 나는 왠지 찝찝해서 말이야. 그런데 하루 동안 네 휴대폰을 보고 생각을 해보니 마음이 바뀌었어. 덕구야. 너는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아직도 중학교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야? 이런 애 만나면 네 인생은 어쩌려고. 출발선이 다르면 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애를 잡아야 하지 않겠니?"


김필수가 진심으로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훈계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필수가 선화를 죽이고 그것을 김민수에게 뒤집어 씌우려다가 때마침 도착한 나를 기절시키고 다시 내가 여기로 돌아올 때를 기다려 김필수가 나타났다는 사실들이 도대체 어떤 인과관계를 갖는지 알 수 없었다.


"최선화와 알콩달콩 연애라도 할 생각이었어? 정신 차려 덕구야. 쟤는 그냥 인생 꼬인 애야. 이렇게 말해도 너는 알아듣지 못하겠지? 그래서 너한테 기회를 주고 싶어 졌어."


"무슨 기회?"


"네가 과거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 그 지옥 같았던 중학생 권순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 너도 벗어나고 싶지만 아직까지 못 벗어났잖아? 되려 김민수에게 맞을 뻔했지. 그러니까 나는 네게 기회를 주고 싶어. 김민수한테 같이 시달렸던 동료애랄까? 그러니까 결정 잘해봐.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네게 보여주는 것은 아무래도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세상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네가 깨달았으면 하는 내 작은 배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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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화의 집에서 나와서 버스를 탄 나는 김필수가 한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세상을 움직이는 0.00001%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한 채 그들을 위해 일하다 죽는 당연한 삶을 산다는 이야기. 드라마나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라고 말하자 그것조차도 그들 중 일부의 소소한 유희일뿐이라는 이야기. 내가 그리는 애니메이션보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김필수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은 좀 자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 선화가 죽은 것도, 김필수의 이야기도, 나를 지금쯤 미친 듯이 찾고 있을 형사도 다 제쳐놓은 채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몇 시간이나 지나있는, 그런 개운한 잠.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은 채 줄 곧 잠을 갈망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발길이 이끄는 대로 집으로 왔다. 이틀이 지나서야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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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여전히 분주하다. 분명 어디서는 누군가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을 텐데, 세상이라는 큰 덩어리는 아랑곳 않고 꾸준히 분주하다. 선화가 죽은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뉴스나 인터넷을 아무리 봐도 선화에 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닷새 동안 집에만 있었는데도 나를 찾는 사람 역시 없었다. 나를 잡아 가두었던 그 형사는 내가 줄곧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할까. 아니면 김필수의 말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세력의 힘을 이용해서 나를 사건의 중심에서 핀셋으로 콕 집어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인도 같은 곳에 떨어뜨려 놓아 버린 것일까?


닷새만에 밖에 나온 나는 체념하듯 선화의 집으로 발을 옮겼다. 누군가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상관없었다. 형사든 김필수의 부하든 그런 것은 정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차분하게 이 사태를 관찰하고자 하는 의지만이 뚜렷하게 날이 섰다. 선화의 빌라에는 노란 폴리스 라인도, 시끄러운 경찰차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빌라 입구로 들어가 햇빛이 잘 들지 않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고리를 돌려보았지만 철컥철컥하는 쇳소리만 들릴 뿐 녹슨 현관문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빌라 밖으로 나와 선화의 방이 보이는 창가에 쭈그려 앉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벽지가 발린채 텅 비어있는 방이 얼마 전에 이사 간 사람의 집처럼 보였다. 


나는 선화와 이야기했던 빌라 앞 벤치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말갛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선화는 그 날을 직후로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춘 것이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선화의 휴대폰을 꺼냈다. 김필수가 앞으로 선화의 물건은 이것밖에 없을 거라며 내게 넘겨준 물건이었다. 나는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아 켜지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선화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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