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여름에는 노래를 했으니 겨울에는 춤을 추렴

by starka

선화가 눈을 반짝이며 허공에 칼 손잡이를 잡는 시늉을 했다. 나도 따라서 허공에 칼 한 자루를 뽑자 선화는 그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지. 이 상황에서 기사는 나고 너는 드래곤을 해야지."


"드래곤?"


"그래. 불 뿜는 용."


나는 용 흉내를 어떻게 내야 할지 몰라서 양팔을 높게 들고 우어-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선화는 그게 뭐냐며 킥킥대고 웃었다.


"용이 무슨 그래."


"미안. 용 흉내는 도통 내보질 않아서."


내가 멋쩍은 척 웃으며 말했다. 선화는 하긴 용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에 나는 도무지 어떤 것이 선화의 진짜 얼굴인지 혼란스러웠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몇 년간 그 알량한 성취감은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줬어. 아빠한테 조금씩이나마 내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모은 돈과 아빠에게 얼마간 지원받은 돈으로 졸업과 동시에 독립도 할 수 있었지. 정말이지 아빠와는 함께 있기 싫었으니까."


"아빠가 근데 독립을 허락하셨어?"


"물론 처음에는 반대했지. 어디 여자가 혼자 사냐고. 근데 사실 어쩔 수 없었던 게 나는 알다시피 공부를 좀 못했거든.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못해서 지방 전문대밖에는 갈 데가 없었어. ㅇㅇ대학 알아? 통학하기에는 너무나 머니까 아빠도 반대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나는 선화가 공부에 썩 재능이 없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보통 정도는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의외라고 생각했다. 선화는 내 표정을 보고 겉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라니까 라며 빙긋 웃었다.


"어쨌든 결국 독립하게 됐어. 아빠랑도 떨어져 살게 됐고 드디어 내 삶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 다 좋았어. 동기들도 다들 성격이 잘 맞았고 선배들도 처음에는 군기를 잡는 척하더니 나중에는 같이 어울려 놀았지. 평화로운 한때였어. 드라마에서나 보던 캠퍼스 라이프 그 자체였으니까. 취업이나 졸업 후 미래 같은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어. 굳이 이야기해봤자 좋은 방향 쪽의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다들 쉬쉬했지. 미래의 시간을 언급하는 것은 마치 불길한 소리처럼 터부시 되는 종류의 것이었어. 하지만 말을 꼭 하지 않아도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듯이 때가 되면 하나 둘 연락이 끊어지고 사라졌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우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으로서 서서히 잊히듯이, 같이 놀던 선배들 혹은 후배들이 하나둘 사라졌지. 우리는 그것마저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모른 체했지. 불편한 사실이니까. 단지 ‘다음에는 혹시 내 차례인가? 내 차례가 오지 않기를!’이라고 마음속으로 비는 수밖에. 그렇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나에게도 사라질 차례가 다가오기 마련이야.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듯이."


"죽음이랑 비교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것 아니야?"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근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으로는 반쯤 죽은 사람들이야."


"왜?"


"흠, 그걸 굳이 일일이 말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선화가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왠지 그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워 고개를 돌렸다. 선화의 말에 반박하는 것은 유치한 오기였다. 그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선화의 말 그대로 반쯤 죽은 상태였다. 우리는 어떠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때가 되면 사회라는 무리 속에 던져져 살아남아야 했다. 앞서 나간 선배들을 보면 대개는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사회의 최하층에 자리 잡고 어떻게 해서든 제도권으로 진입하려는 부류와 사회 밖으로 떨어져 나가 보통사람들은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는 부류. 나는 아직까지 어떤 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선화의 말이 '너도 어서 선택해'라는 말처럼 들려 가슴이 갑갑해졌다.


"어쨌든 나에게도 그 차례는 오고 있었어. 말 그대로 내게 '오고' 있었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어. 같이 놀던 애들도 언제부터인가 얘가 걔고 걔가 얘인가 싶을 정도로 헷갈리고 오빠나 언니라는 말을 내가 하는 대신 언니나 누나라는 말을 더 많이 들을 때쯤 어느덧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었지."


내가 말했다. "불안했겠네."


나 역시도 선화와 같은 기분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스무 살은 잔인한 나이었다. 법 테두리 안에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무한한 자유가 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졸업이 점점 다가올수록 누렸던 자유는 거대한 채무가 되어 발끝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내 몸을 좀먹기 시작한다. 왕이라는 최고 권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불안했지. 이제 6개월 뒤면 어엿한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거야. 부랴부랴 취업카페에 가입하고 학교 취업센터에 상담예약을 했지. 카페에서 취업 관련 글들을 보는데 내가 얼마만큼 시간을 허비하면서 살아왔는지 알겠더라. 남들은 나보다 훨씬 좋은 학교 나와서도 어학점수에 봉사활동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고 이름 있는 회사에서 한 번이라도 더 인턴십을 하려고 아등바등 사는데 나는 학교 뒷동산에서 날씨 좋다고 막걸리 따 마시고 과방에서, 동방에서 술이나 마시고 앉아있고."


"근데 다들 신입생 때는 그러잖아. 또 대학생활이라는 게... 그때 아니면 언제 또 놀겠어."


나는 선화와 그 시절 나에게 면죄부를 주려 말했지만 선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알지?"


"여름에 개미는 땀 흘려 일하고 베짱이는 노래하고 놀기만 하다가 겨울 되니까 먹을 게 없는 베짱이가 개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


"응. 혹시 그 뒤에도 알고 있어?"


나는 선화의 말에 뒤의 이야기를 생각해봤지만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이솝우화 같은 동화를 기억하기에는 이미 너무도 멀리 왔는지도 모른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개미가 먹을걸 주고 해피엔딩 아니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지만 끝이 다른 이야기가 있어. 어쩌면 더 진짜에 가까운 이야기가."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갑자기 선화가 개미와 베짱이를 뜬금없이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게 더 진짜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여름 내내 노래를 부르며 놀던 베짱이가 겨울이 되자 먹을게 없어져 개미를 찾아가서 식량을 구걸해. 여기까지는 똑같아. 그런데 그런 베짱이에게 개미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아니."


"여름에는 노래를 불렀으니 겨울에는 춤을 추렴."


나는 입을 다물었다. 기억 속에,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들이 사실은 순화되어 아름다운 결말을 맺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새드엔딩보다는 해피엔딩을 좋아하고 어린 나이에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는 법이니까. 머리가 완전히 자라고 어른이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었을 때 삶에는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실 남의 새드엔딩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내가 말했다. "굉장히 냉정한 이야기네."


"그렇지. 삶은 원래 냉정한 거야. 자연을 봐. 태풍이나 산불이 어디 인간의 사정을 봐주면서 오니? 아무런 사심도 없이 그저 일어나야 해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야. 거기에 인간이 의미부여를 할 뿐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대비밖에 없어. 베짱이가 여름 내내 노래를 부르며 놀 동안 열심히 일해서 식량을 비축해둔 개미처럼."


"하지만 개미도 태풍이나 산불에는 어쩔 수 없잖아."


"그렇지. 그렇지만 갈 땐 가더라도 베짱이처럼 굶어 죽지는 않겠지?"


"그건 또 그렇네."


"어쨌든 나는 그동안 베짱이로 살아왔던 거고 사회에는 열심히 사는 개미들의 개체수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어. 이제와 내가 아무리 카페에 취업 관련 조언을 구해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겨울에는 춤이나 추렴'이라는 말뿐이었지. 이해해. 그들은 서로 얼마만큼의 식량을 모았는지에 대해 떠들어 댈 때, ‘저는 지금 모아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한 셈이니까. 그 뒤로는 막막하더라고.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지방에 이름 모를 대학에 와서 졸업장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바로 취업을 했어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처음에는 몇 시간에 한 번씩, 나중에는 몇 초에 한 번씩 머릿속을 휘저어놓곤 했어. 예약해 두었던 학교 취업센터도 가지 않고 자취방에 틀어박혀 혼자 조용히 있었지. 말 그대로 조용하게, 죽은 사람처럼. 이름도 간신히 기억해내야 떠오르는 선배들처럼 나도 그렇게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선화가 양팔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끔찍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아 보였다.


"그때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이 민주였어."


"서민주가?"


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의 서민주는 선화 옆에서 시녀노릇이나 하는 애였지 끈끈한 우정 같은 것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연락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응. 민주가 너한테,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고 못되게 군 것은 알아. 하지만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야.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줬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알고 보면 속이 참 여리고 착한 애야. 너도 그걸 알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너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때는 민주가 내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어. 같이 놀던 아이들도 연락이 다 끊어졌고 가족은 이제는 너도 알다시피 아빠밖에는 없었으니까. 집 나오고는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거든. 게다가 학비 때문에 계속해오던 아르바이트도 취업 준비한다는 명목 하에 그만둔 터라 생활비도 거의 동이 나다시피 했어. 그러니 더욱 자취방에서 나오지 않게 됐지.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대게 그렇듯 나 역시도 나만의 굴을 파서 숨기 바빴어. 점점 더 깊이. 그런데도 민주는 나에게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어. 주말이면 내 자취방까지 찾아와서 밥을 해주거나 억지로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게 해주고는 했어. 사실 나도 너처럼 민주가 그러는 것에 의외의 감정을 느끼기는 했어. 아무리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사이더라도 어른이 되어서는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이 고작이잖아? 그래서 민주가 내게 잘해주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스럽고 내게 왜 이러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 그리고 그때는 나도 벼랑 끝에 몰린 심정이라 굉장히 예민해 있었기 때문에 경계하는 마음도 컸었고. 그런데 민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러더라."


"뭐라고 그랬는데?"


"친구니까 힘들 때 도와주는 거지 다른 이유가 필요 있냐고."


친구.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 중 하나이지만 아직도 내게는 낯설었다. 서민주는 친구이기 때문에 선화가 힘들 때 만사 제쳐놓고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토록 멸시하고 외면했던 것일까?


"네 말대로 너한테는 소중한 친구네."


내 말에 돋친 가시를 확인했는지 선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괜히 이야기를 끊은 듯한 기분이 들어 선화에게 그런 것 아니라고 말했다.


"미안 오래전 일인데도 떠올리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 어렸을 때의 일일 뿐인데."


"아냐. 오히려 내가 민주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해. 네가 그러는 것도 이해해. 사람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도드라지는 것들이 분명히 있으니까."


선화는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선화의 이야기에서 화제가 나에 대한 것으로 옮겨지는 것이 불편했다. 선화에게 그래서 서민주 덕에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냐고 묻자 선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구렁텅이. 정말 지독히 깊은 구렁텅이 었지. 근데 민주가 아무리 케어해줘도 그 속에서 나를 끌어올리지는 못했어. 민주도 처음에는 취미를 가져봐라, 날씨가 좋은데 혼자 밖에도 나가보고 사람들도 만나봐라 하는 이야기도 많이 했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나중에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 없이 그냥 같이 밥 먹어주고 이야기해주고 하는 정도였지. 나였으면 그렇게 못했을 텐데. 마치 요양병원에 입원한 치매 노인을 간병하는 기분이었을 거야. 정말로 내 이름 석자와 주변에 대한 기억들만 가지고 있었을 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거든. 사실 민주가 조심스럽게 병원에 한 번 가보자고 했는데 무서워서 가질 못했어. 정신병원에 가면 정말로 내가 정신병이 생겨버린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거부했어. 인터넷을 뒤져보고 자가진단을 해보니 '중증 우울증이 의심되오니 빠른 시일 안에 의사의 진료를 권합니다'라고 나오더라. 그래도 병원은 절대로 안 간다고 다짐했어.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병원에 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내 안의 무언가가 그 부분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선화가 담담하게 자신의 치부를 말하는 동안 한차례 미풍이 우리 둘 사이를 쌀쌀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고 지나갔다.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알코올이 바람에 실려 상당수 날아가고 기분 좋을 정도의 취기만 남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발갛게 달아올랐던 선화의 뺨도 조금씩 건강한 색을 되찾고 있었다. 다만 선화의 눈은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무겁고 질척 질척한 감정의 끈이 내 어깨에도 올라타 지긋이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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