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모든 남자가 다 그러는 것은 아니야

by starka

"아무튼 그 고등학생과 사귀고 나서는 예상대로 귀찮은 일이 퍽 줄었어. 물론 알 수 없는 편지나 선물 같은 게 사물함에 놓이는 일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직접적으로 연락처를 물어오거나 시간을 내달라거나 하는 곤란한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어."


그렇지 그 형 소문은 장난 아니었으니까라고 내가 이야기하자 선화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수가 그렇게나 자랑하는 자신의 형도 선화의 남자 친구에게는 나이도 선배인 데다가 유명세도 밀렸다.


"그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 주변에는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이 발에 채 일정도로 넘쳤고 그 당시 나이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해볼 수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어떤 것들?"


"뻔하지. 술이나 담배, 클럽, 운전 같은 것들이지."


"중학생 때 그런 게 가능했다고?"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선화는 킥킥 웃으며 어른들 생각보다 애들은 영악해라고 말했다.


"거기다 법이 허술하기도 하지."


"그래도 그렇지 넌 중학생이었잖아. 그때 클럽을 갔다고?"


"뭐, 자주 가지는 않았어. 두세 번 정도?"


"두세 번이라도 갔다는 게 너무 신기하네."


"왜? 양아치 같아?"


선화는 씩 웃더니 둘째 셋째 손가락을 펴서 입에 대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냈다.


"아니라고 하면 이상하지."


선화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네 그런 솔직한 점이 좋다며 내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나는 선화의 스킨십이 좋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떨떠름함을 느꼈다. 어렸을 적 첫사랑(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의 과거를 듣는 것이 썩 좋지는 않았다. 선화 주변에 양아치들이 많다는 것과 선화가 공부를 썩 잘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선화도 그들과 같은 부류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해서 선화가 양아치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쩌다 화장대 위에서 떨어진 진주 귀걸이가 먼지에 뒤덮인 100원짜리 동전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똑같은 짤짤이 취급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화는 우연히 떨어진 진주 귀걸이 었고, 주인은 언제고 진주 귀걸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온 방을 뒤져 찾을 것이 분명했다. 틈새로 넣은 긴 막대기에 걸려 진주 귀걸이와 함께 딸려온 100원짜리 동전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진주 귀걸이를 깨끗이 닦아 보석상자에 넣어놓고는 동전들은 잊어버린 채 기쁨을 만끽하며 방을 나설지도 모른다. 어쩌면 먼지 섞인 100원짜리 동전들을 집어 몇 년 전에 길거리에서 나눠준 '아프리카 난민 돕기 모금함'에 툭 던져 넣을지도. 그런 그들과 선화는 애초에 결합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종’이었다. 하지만 선화는 지금 그들과 자기가 같은 부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괴로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선화는 그런 나의 속마음을 당연히 알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정말 아슬아슬했지. 그래, 아슬아슬했다는 표현이 딱 맞아. 조금만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 아래로 바로 추락하는 폭이 좁은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달까, 정말로 아슬아슬했어."


선화는 자신이 말하고도 만족스러운지 '아슬아슬이라니, 정말 딱 맞는 표현이야'라고 중얼거렸다.


"떨어질 듯 말 듯한 그 분위기를 즐겼어 그때는. 왜, 사람이 뭔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온전한 재미를 느끼는 것들도 있잖아?"


"스카이다이빙이라던지, 번지점프라던지 하는 것들처럼 말이야?"


"응. 그거랑 비슷해. 하지만 조금은 달라. 그때 나에게는 구명 끈이 허리에 둘러져 있거나 낙하산을 메고 있거나 하지 않았거든. 온전히 나 스스로만이 나를 떨어지지 않게 잡아줘야만 했어. 뭐 어쨌든 맥락은 비슷하니까 그렇다고 치자."


선화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여전히 낯선 선화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기사 애초에 선화와 나는 낯서니 마니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이가 아니었다. 단지 내 스스로 만들어 낸 선화의 이미지와 괴리가 느껴지는 경험담에 혼자 이질감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마치 팬덤이 빚어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아이돌에게 실망하는 것처럼.


"유혹을 즐기기만 하고 넘어가지 않는 기분이 얼마나 짜릿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 알 거야. 간질간질하게 이리로 넘어오라는 목소리의 달콤함을 즐기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성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만 하지. 그 아찔한 줄다리기가 얼마나 황홀한지! 아마 손만 잡고 잘 테니 하룻밤 모텔에서 묵어가자는 남자가 정말로 손만 잡은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기분이 제일 비슷할 거야."


나는 선화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리로 넘어오라는 유혹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싸우는 이성의 갈등이 도대체 어떻게 짜릿할 수 있는 것일까? 내게는 그 과정이 차라리 고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지 중간은 안된다. 회색은 어디에서나 질타받는 위치다. 아마 내가 모텔에 간 남자라면 손만 잡겠다는 약속을 어겨 유혹에 넘어가든지 아니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으로 가서 상상 속에서 그녀를 생각하며 사정을 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 것은 중용이 아니라 괴로운 상태다.


"근데, 아무래도 인간이 유혹을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 나도 하마터면 넘어갈 뻔한 적이 있었어. 덫에 발이 잡혀 이도 저도 못하고 애처롭게 울다 죽음을 맞이하는 산짐승처럼."


"그래서 유혹의 덫은 피했어?"


"결과적으로는. 사춘기 남자애들이 다들 그렇듯이 그 고딩도 여자랑 어떻게든 한 번 자보고는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어. 잘 나가는 일진이지, 얼굴 잘생겼지 여자애들이 싫다고 해도 꼬이는 상황이었으니 아랫도리가 뻐근할 정도로 답답했을 거야."


나는 선화의 표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선화는 그런 내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사귀고 50일이 됐을 때 나한테 학교 수업을 빠지고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하더라고. 부모님 출근하셔서 안 계시니 같이 놀자고. 내가 수업 빠지면 집에 연락 갈 텐데 어떡하냐고 그랬더니 자기는 괜찮대. 어차피 자주 빠져서 신경도 안 쓸 거라고. 그래서 나만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조퇴하겠다고 이야기하고 걔네 집에 갔지. 그때 생전 처음 남자애 방에 들어가 봤어. 있지, 그 나이 때 여자애들도 성에 관심이 많은 거 알아? 남자애들처럼 직접적으로 그 행위에 대한 갈망은 아니더라도 행위가 가져다주는 기쁨에 대한 호기심은 남자애들 못지않아."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하면 어떤 기분일까' 같은 뉘앙스 차이인가?"


"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나 역시 그때는 '사춘기 소녀'였으니까 남자에 대한, 엄밀히 말하면 남자의 육체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어. 첫 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난다던데 진짜일까, 남자 생식기를 실제로 보면 어떨까, 또 그걸 내 몸에 넣으면 어떤 기분일까 따위의 것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했지. 말해두는데, 나는 결코 이런 것들이 변태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른들은 이런 걸 아이들에게 쉬쉬하면서 숨기기 바쁘니까. 단지 그 나이 때의 애들의 관심사가 성에 쏠리는 것은 신체의 변화에 따른 것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 다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교육을 제공받지 못했을 뿐이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교육을 제공받지 못해다는 선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적당할 때 조치를 하지 않고 쉬쉬하고 넘어가면 균열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무튼 그런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걔네 집에 가게 된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겁도 없었지 혈기왕성한 남자애 집에 여자 혼자 놀러 간다니, 그건 '호기심'이라는 이름으로 덮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였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때 그 애는 내 남자 친구였고, 어른들이 말하는 사랑보다는 조금 미성숙하지만 풋풋한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뭐, 나야 너한테 뭐라고 할 자격 같은 건 없으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사실 속으로는 전혀 덤덤할 수 없었다. 선화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있었고, 부모님이 안 계시는 시간을 노려 그 남자애 집에 단 둘이 있었다. 둘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어쨌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성적 호기심 또한 왕성한 시기였다. 그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그렇긴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야.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는 단지 예와 아니오의 차이로 구분하기에는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가져오거든."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선화는 딱히 무슨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처음 얼마간은 괜찮았어. 집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기도 했고, 부엌에서 같이 먹을 점심을 요리하기도 했지. 요리라고 해봤자 라면 두 개와 계란 두 개가 다였지만 말이야. 서로 사이좋게 계란 하나씩을 얹은 라면을 맛있게 먹고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서 누웠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어쩜 그리도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의 상상이 전개되기도 전에 선화가 먼저 말을 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우리 둘 사이의 생각은 비슷하긴 했지만 확연히 다른 구석이 있었어.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서 그 아이의 팔을 베고 누운 다음 수줍게 키스. 딱 여기까지가 그 날 나의 호기심이었어. 그 이상의 것들은 궁금했지만 미래의 나를 위해 남겨두는 그런 것이었지. 사춘기 소녀가 열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막연한 경계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 애의 생각은 달랐어. 어떻게든 미지의 문을 열어젖히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지. 달콤한 키스를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그 애의 손은 내 셔츠를 풀고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가 내 가슴을 유린하기 시작했어. 나는 안된다고 그 애의 가슴팍을 밀쳤지만 180이 넘는 남자애를 힘으로 어떻게 이기겠니? 망연하게 타인에 의해 만져지는 내 가슴을 지켜볼 수밖에. 웃긴 게 뭔 줄 알아? 남자들은 신기한 게 여자가 싫다고 이야기하면 그게 거짓말인 줄 안다는 거야. '에이 그냥 한 번 튕기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기저에 있더라."


"모든 남자가 그러는 것은 아니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선화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듣기가 힘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이고 그때도 지금도 선화와 나는 '동창'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관계일 뿐 어떤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화의 옛 남자 친구에 대해 듣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좋았던 기억을 말하는 거였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선화가 옛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내가 유린당하는 기분이 들어 구역질이 났다. 거기다 그 애와 '남자'라는 이유로 같은 카테고리에 묶여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하면서도 발끈하는 감정이 일었다.


"뭐, 모든 남자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


선화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내 이야기를 더 들으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너도 조금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선화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선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뿌연 밤하늘 사이사이로 희미한 별빛이 보였다. 별빛은 아주 희미해서 조금만 한눈을 팔면 어디로 갔는지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별빛 사이로 깜빡이는 비행기 불빛이 1초 간격으로 반짝거리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빛을 잃은 별들 사이에서 깜빡이는 저 불빛이 선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빛을 잃기 전 선화도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강렬하게 내뿜으며 자신만이 아는 곳으로 훌쩍 날아가 아무도 모르게 빛을 잃고 희미해진 저 별빛처럼 되겠지. 그 생각이 들자 가슴이 텁텁했다.


"나는 계속해서 내 몸을 탐하는 그 애의 손을 밀치려고 노력했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애도 내가 점점 강하게 저항하자 내 입술에서 입을 떼고 '가만히 있어'라고 말했지. 그래도 내가 저항하자 강제로 키스를 하려고 했어."


선화는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아까부터 불편한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어폰을 꽂고 메탈 음악을 크게 틀은 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속에 얽힌 이야기를 막 풀어내려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기분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늘 그렇다. 마치 하나의 계약이 이루어진 것처럼. 타인의 비밀을 듣겠다고 대답한 사람은 그에 맞는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가장 어둡고 축축한 이야기를 듣기로 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치밀어오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연 상자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아무쪼록 선화의 이야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선화는 오래전 일임에도 어제 일처럼 명확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 아이가 키스를 하면서 한 손으로는 가슴을 만지고 한 손으로는 팬티 위를 비비적거렸다는 것도, 그 이후에 저항하는 선화의 뺨을 세 차례 때렸다는 것도 그 아이가 풀썩 쓰러진 선화에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것도 시간과 순서에 맞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냥 장난이라고 했어."


선화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복 셔츠의 단추가 다 떨어져서 브래지어가 그대로 드러나고 스타킹이 반쯤 내려가다 만 채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내가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 지르니까 걔가 한 대답이야."


선화가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왠지 선화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하늘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선화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장난이라는 말은 정말 마법의 단어야. 그 말 한마디면 끔찍한 일도 별 것 아닌 일이 되어버리지. 당한 사람이 화를 내면 되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해버려."


나는 김민수 패들을 떠올렸다. 그 애들도 항상 장난이라고 말했다. 뒤통수를 세게 때릴 때도, 의자에 우유팩을 놓고 내가 앉아서 터뜨리기만을 기다릴 때도, 명치를 세게 맞아 구역질을 하며 점심때 먹은 음식물들을 토해냈을 때도 저들끼리 낄낄 웃으며 장난이야 미안해 라고 말했다. 물론 미안하다는 말에 일말의 감정도 실리지 않았지만 그들로서는 표면적으로는 사과를 한 셈이다. 당치 않는 사과였지만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는 내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난이 도를 지나치기 직전에 항상 이광민이 제지했다는 것이다. 이따금 김민수는 이광민의 그만하라는 소리에 버럭 화를 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이광민을 김민수는 거스를 수 없었다. 멋쩍게 웃으며 친구끼리 장난친 건데 왜 그렇게 정색하냐며 어깨동무를 할 뿐이었다.


"그치만 나는 그때 참을 수 없었어. 장난? 장난이라는 말로 하기에는 너무 끔찍했거든. 뺨을 맞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 얼얼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는 생각도 안나. 다만 나도 잘 안 만지는 그곳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닿는 기분, 내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드러나는 내 몸의 감촉이 너무도 낯설었어. 어쩌면 소름이 돋았을지도 몰라. 단지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그 생각밖에는 없었어."


선화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을 곱씹는 듯한 얼굴이었다.


"근데 웃긴 게 나도 참 한 성깔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지 뭐야. 보통 그 자리에서 울거나 경찰에 신고한다거나 하는 말을 했을 텐데 나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어. 셔츠를 잠그고 스타킹을 올린 다음 그 자식 멱살을 쥐고는 한마디 해줬지."


"뭐라 그랬는데?"


"너 이러는 거 너네 엄마가 알아?"


선화가 갑자기 내 멱살을 쥐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연극톤의 목소리를 뱉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변한 선화를 보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조그맣게 실소를 흘렸다.


"뭐야, 내 혼신을 다한 연기에 대한 반응이 피식 밖에 안돼?"


"아니 갑자기 그럴 줄은 몰랐어."


"원래 '갑자기'에서 사람의 내면이 나오는 거거든?"


선화가 장난스럽게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종잡을 수 없는 선화의 모습에 적잖은 혼란과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동시에 느끼며 원래 선화의 성격이 이랬던가 하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그러나 이어진 선화의 말에 상념을 길게 가져갈 수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식 멱살을 잡고 그렇게 말해줬어. 그랬더니 그 자식 엄청나게 당황하더라? 학교에서는 얌전하기만 했던 애가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니 어처구니가 없었겠지. 처음에는 화난 표정 지으면서 놓으라고 했어. 근데 내가 놓겠니? 더 멱살을 꽉 쥐고 내 눈 똑바로 보면서 말하라고 했지. 너네 집, 학교, 너희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까지 내가 다 말하겠다고.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랬더니 아까까지는 뺨도 때리고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애가 주춤하더라? 똥 마려운 개처럼 어쩔 줄 몰라하더니 미안하다고 울먹이면서 제발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빌더라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걔네 아빠가 애를 엄청나게 패면서 키웠나 봐. 그래서 아빠 이야기만 나오면 어쩔 줄 몰라한다고 하더라고."


"의외네. 골목대장이 파파 보이라니."


"원래 겉만 봐서는 사람을 알 수 없는 거니깐. 뭐 그 당시에는 나도 몰랐던 부분이었지만 말이야."


"그 뒤로 어떻게 됐어?"


"그 날 이후 연락 뚝 끊더니 일주일 뒤쯤에 유학 갔다고 하더라. 그 날 집에 아무도 없는 데다가 어차피 일주일 뒤에 한국 뜨겠다, 여자랑은 한 번 자봐야겠는데 마침 여친도 있겠다 날 잡은 거지. 물론 내가 그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때 다행스러운 감정보다도 내가 승리했다는 도취감에 더 빠져버렸어. 그전까지는 한 번도 내 의지를 강력하게 주장한 적은 없었거든.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야 그렇게 되더라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 그 고양감이란 마치 내가 중세시대에 나오는 기사 같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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