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작은 쿠데타

by starka

"나도 알아. 내가 너에게 고백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그 소식이 돌았으니까."


선화는 내 말투에서 묘한 뾰족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선화의 눈을 마주친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질투심을 느껴 욱하다니 최악이라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게다가 십 년도 넘은 일을 가지고 질투라니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뭐야 순덕이,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선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아니라고 얼버무렸지만 선화는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십 년도 넘은 일을 가지고 질투해주다니 고맙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참 오래되긴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그때 민주가 했던 말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민주 걔가 말을 좀 함부로 하기는 해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


나는 선화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서민주가 착하다니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말을 함부로 하는 애 정도로 치부하기엔 내가 그날 겪었던 일은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충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정말 더웠던 여름인 것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유난히 빨리 찾아온 더위에 남자애들 교복의 등이 땀으로 항상 젖어있고 짙은 밤꽃 냄새가 학교 주변을 맴돌던 시기였다. 교복을 줄여 사타구니 바로 아래까지 오는 치마를 입은 여자애들과 그런 여자애들을 일부러 넘어뜨리거나 번쩍 들어 팬티를 보려고 장난치는 남자애들이 복도에서 시끌벅적하게 구는 때였다. 그렇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애들도 선화가 복도를 지나갈 때면 넋을 잃고 홀린 듯 선화를 쳐다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복도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누군가 볼륨을 일부러 낮춘 듯 조금씩 잦아들면 그 끝에는 언제나 선화가 있었다. 선화가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아이들의 조심스러운 속삼임과 진한 샴푸 향이 남았다. 한창때의 사내아이들의 냄새를 다 지우고도 남을 그 미미한 샴푸 향은 남자아이들의 콧속으로 깊이 스며 여러 날을 잠 못 이루게 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전교생들에게 김민수의 지독한 괴롭힘을 받고 있는 중임을 보여주고 나서도 선화에 대한 열망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소유욕과는 다른 것이었다. 명치 안, 갈비뼈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내장의 안쪽에서 뜨겁게 타는 것을 꼭 뱉어야만 하겠다는 욕망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인지시켜주고 싶다는 열망. 어쩌면 원치 않는 상대방에게는 폭력일 수 도 있는 그런 욕망이었다. 제방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저수지의 물이 이내 둑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물로 쓸어버리듯이 내 안의 욕망도 그러했다. 어느 날부터 조금씩 조금씩 비집고 나온 열기가 마침내 둑을 무너뜨렸다. 여름 치고는 바람이 선선한 바로 그 날이었다.


"어머, 얘 뭐야?"


선화의 옆에 붙어있던 서민주가 날 먼저 발견하고 불쾌한 듯 소리쳤다. 서민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변을 지나던 아이들이 하나 둘 우리를 주목했다. 선화는 무슨 일이냐는 듯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갑작스레 몰린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내 안의 욕망은 기름을 부은 듯 더 뜨겁게 타올랐다. 얼른 말해버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가끔씩 이런 기분일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 뒷산 연못에 가재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학원도 빼먹은 채 밤늦게까지 뒷산에 있었던 날도 그랬고, 엄마 지갑에서 돈을 몰래 빼내 용산에서 게임 CD를 샀던 날도 그랬다. 김민수의 바지를 벗긴 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했던 행동은 다 달랐지만 가슴속에서 타는 듯한 열망은 모두 같았다.


"아 뭐냐고 길 막고!"


서민주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아까보다 더 많은 시선이 이번에는 정확히 나를 쳐다보았다. 선화는 여전히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선화야 나 너 좋아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자 몸 안에서 느껴지던 타는 듯한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민주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고 선화는 난감한 듯 웃었다. 주변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몇몇은 폭소했고 몇몇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야유를 보냈다. 나는 기분 좋은 꿈을 꾸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잠을 깬 아이처럼 지독히 느껴지는 현실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순덕아."


선화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나에 대한 멸시나 혐오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선화를 쳐다볼 수 없었다. 시커멓게 때가 탄 실내화를 보며 세탁이라도 좀 하고 올 걸이라는 바보 같은 후회만 속으로 되뇌었다.


"나 같은 애 좋아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만 받을게. 미안해."


선화의 말에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거절의 의미에 대해 고맙다고 이야기한 그때 나의 심정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의 고백에 고맙다고 말해줬기 때문에 나 역시 고맙다고 이야기한 것일까? 많은 아이들 앞에서 심한 말로 거절해주지 않아서 고마움을 느낀 것일까? 뭐가 되었든 내게 남은 것은 완곡하지만 확실한 거절이었다. 내가 무슨 의미로 고맙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준 것보다 선화에게 받은 말이 참을 수 없이 무거웠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은 나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선화가 말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당사자에게 직접 묻기에 바빴다. 선화에게 직접 말할 정도로 친하지 않은 아이들은 서로 선화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선화는 난처하게 웃으며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은 아이들의 아이돌로 자리 잡던 그녀가 누구와 사귈지에 대한 궁금증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선화가 단지 '좋아한다'라고만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선화가 그 사람과 사귀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여신의 고백을 거절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남자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선화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는 동안 나는 멀뚱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꼬질꼬질한 실내화가 계속 눈에 거슬렸다. 괜히 발을 꼼지락 거리고 있는데 슬리퍼를 신은 발이 내 앞으로 와서 멈춰 섰다. 붉은빛이 도는 하얀 살결에 발톱은 새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나는 선생님인 줄 알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으나 내 앞에 서있는 것은 서민주였다. 서민주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 덕구."


서민주가 화가 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멀뚱히 서서 서민주를 바라봤다. 서민주는 내가 대답이 없자 기가 찬 듯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노려봤다. 선화를 미쳐 따라가지 못한 아이들이 나와 서민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감지하고 우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네가 뭔데 선화한테 그딴 말을 해?"


"뭐가?"


나는 황당했다. 선화에게 거절당할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각오한 일임에도 착잡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서민주에게 이런 종류의 모욕을 당하는 것은 내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내가 발끈한 감정을 담아 서민주를 쳐다보며 되묻자 서민주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민주의 시나리오에도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서민주는 잠시 쭈뼛쭈뼛 대더니 주변에 하나 둘 몰린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다시 기세를 다듬고 나를 쏘아붙였다.


"뭐가? 네가 뭔데 선화한테 좋아한다 만다야? 니 주제를 알아야지. 오타쿠 새끼가."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오오 하는 환호를 보냈다. 마치 상대 수비수를 화려한 기술로 제치고 골대로 달려가는 공격수에게 보내는 것 같은 환호였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선화가 남긴 말이, 고마운데 미안하다는 그 한 마디 말이 더욱 크고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서민주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화려한 발재간으로 나를 제친 공격수는 더 큰 관중들의 환호를 위해 골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너는 좋아한다고 말하면 끝이지? 선화 입장은 생각도 해본 적 없지? 너 같은 새끼가 좋아한다고 이렇게 애들 앞에서 말하면, 선화는 뭐가 돼?"


글쎄, 서민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선화의 입장은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화에게 고백하는 것이 실례가 되는 행동이면서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나는 도대체 왜 하필이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선화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자 했을까?


"너 같은 새끼들은 안돼. 진짜 민폐야. 그냥 좀 네가 감당 안 되는 것은 넘보지 않으면 안 돼? 애초에 다르다고 레벨이 너랑은. 죽은 듯이 살아 시키는 거나 잘하고. 그럼 너도 편하잖아? 받아들이라고. 적당히 해야지 진짜. 너 같은 새끼가 선화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이렇게 고백한 거 보면 다른 새끼들도 주제 파악 못하고 달려들 거 아니야. 하 진짜."


그래, 바로 이거였다. 내가 굳이 학교에서 선화에게 고백한 이유. 서민주의 말대로 굳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화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내 마음만 전하는 것에 충실했다면, 오히려 단 둘이 있는 시간에 말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철창 속 원숭이를 보듯 하는 아이들도, 지금 내 앞에서 주제넘게 떠들고 있는 서민주도 없는 곳에서 선화에게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온전한 내 마음을 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내가 그러지 않았던 것은 나조차도 정확히 내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했던 부분에 기인했다. 그것은 외침이었다. 나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고 너희와 똑같이 누군가에게 대화하고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하나의 외침이었다. 서민주의 말대로 나와 같이 약자로 낙인찍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누리지 못한 이들의 봉기를 이끌어내는 하나의 쿠데타였다. 서민주가 짚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갈 뻔한 내 안의 작지만 어떤 것보다도 더 뜨겁게 불타고 있던 혁명의 불씨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한 짓은 폭력이라고 폭력. 알아? 선화 얼굴에 침 뱉고 따귀 때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서민주가 아이들의 눈을 의식하며 열변을 토했다. 주변에 몰린 아이들은 서민주의 입이 열릴 때마다 오오 하는 환호성과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저렇게 까지 말하는데 너는 어떡할래?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이 사람 좋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라고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아는 상식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사람보다 용감한 사람은 몇 없었다. 그중에 남에게 쏠리는 스포트라이트의 한 줄기를 뺏어서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서민주와 같은 인간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입을 열어 서민주와 같은 인간의 추악한 낯을 낱낱이 밝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제 능력으로 오른 것이 아닌 자리에서 거꾸로 추락하는 무능한 권력자를 바라보는 감정은 어떨까. 하지만 나의 그런 생각은 상상에 그쳤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왼쪽 광대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씨발놈이."


김민수는 나에게 씨발놈이라고 욕을 하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나를 때렸다. 무엇이 김민수를 그렇게 화나게 했던 것일까. 김민수는 악에 바쳐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그의 부모를 욕보이거나 혹은 그의 애인을 탐하는 것 같은 인륜을 저버린 범죄를 저지른 줄로 알 것이다. 나는 어쩐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김민수의 얼굴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악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왼쪽에서 김민수의 주먹이 날아온다. 이어서 오른쪽에서도. 나는 오른쪽 광대보다 왼쪽 광대에서 더 깊은 통증을 느끼며 왜 그런지 이유를 생각했다. 뒤이어 날아오는 김민수의 발차기를 보며 나는 답을 찾았다. 김민수는 오른손잡이였다. 왼쪽 배에 김민수의 발이 틀어박히는 것을 보며 나는 김민수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에 대해서도 짐작이 갔다. 아마도 서민주와 같은 맥락이면서도 약간은 결이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김민수가 선화를 좋아하는 것은 알만한 애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김민수 주변에 붙은 애들은 은근히 최선화와 언제 사귈 거냐며 김민수를 부추겼는데, 김민수 역시 앞에서는 아닌 체 해도 내심 최선화와 자기가 가까운 시일 내에 사귈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민수에게는 그 당시 부족한 것이 없었다. 얼굴도 꽤나 남자답게 생겼고 키도 180에 가까웠다. 공부도 노는 것에 비해 꽤 잘했고 무엇보다 잘 사는 집과 잘 나가는 형이 있는 것이 또래 애들에게 대단히 크게 다가왔다. 김민수 역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러한 시선과 비위를 맞춰주는 말들을 즐겼기에 지금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도 아직 하지 않은 고백을 매일 같이 괴롭히던 내가 먼저 했다는 사실이 치욕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운동장에서 선화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성기를 꺼내놓은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일이 생기게 한 범인이 나라는 사실도. 나는 벽 쪽에 바짝 붙어 손으로 눈 옆을 가리고 팔꿈치를 허벅지에 닿을 듯이 허리를 숙였다. 언젠가 삼촌이 알려준 급소를 보호하는 법이었다. 김민수가 분이 안 풀리는지 내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어 올리려고 할 때 이재민이 달려와 뒤에서 김민수를 끌어안았다. 김민수가 놓으라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이재민은 그러다 애 죽겠다며 놔주지 않았다. 이재민이 빨리 좀 말려보라고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애들이 쭈뼛쭈뼛 다가와 김민수를 복도 끝쪽으로 데리고 갔다. 옆에 있던 유현석이 한창 재미있었는데 아쉽다고 혀를 찼다. 머리에 해바라기 모양의 머리핀을 한 여자애가 벽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얼굴이 낯이 익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가슴께 명찰을 보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그 아이의 친구가 팔을 잡고 이리오라며 끌고 가서 미처 보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고 싶었지만 수업종이 울렸다. 어쩔 수 없이 쩔뚝거리며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찬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니 다들 한 번씩 내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칠판 쪽으로 돌렸다. 그중에는 서민주도 있었다. 나는 그 얄미운 심성에 욕이라도 시원하게 한 바가지 할 걸이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항상 서민주는 저런 식이 었다. 일을 크게 키워 스포트라이트는 받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어느새 사라져 안전한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나서야 세상에 서민주와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과 인간들 대부분이 하나쯤은 추악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서민주에 대한 기억이 좋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나이에 어쩜 그렇게 치졸하고 영악스러웠을까 하는 악감정만 더 진해졌다. 그런 서민주가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선화를 지금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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