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by starka

"누가?"


선화의 초점 없던 눈이 선명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아주 새까만 그 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매혹적이고도 그 안에 빠져들면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소름 끼치는 빛깔이었다. 나는 팔에 우수수 돋아나는 소름을 감추려 조심스레 왼손을 들어 팔을 쓸어내렸다. 선화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작스럽게 눈물을 흘렸다. 실제로 눈 앞에서 보면 본 눈물 중 가장 굵고 투명한 눈물이었다. 주황색 조명에 물든 눈물 알알이 반짝이며 테이블 위로 툭툭 떨어졌다. 선화는 눈물을 닦을 생각은 전혀 없는지 말없이 그저 테이블을 치는 눈물을 그대로 놔두었다. 선화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었다. 테이블 위에 떨어지는 눈물들이 작은 호를 여러 개 만들었다. 나는 옆에 놓인 휴지를 몇 장 뽑아서 선화에게 건넸다. 선화는 말없이 내가 준 휴지를 받아 들고는 여전히 눈물을 떨어냈다. 나는 다시 휴지를 몇 장 뽑아 이번에는 직접 선화의 눈가를 톡톡 찍어내고는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눈물들을 정리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지만 선화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망설임 없이 다시 물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부모의 마음처럼 선화의 눈물을 멈추고 다독여주고 싶었다. 눈물을 닦아주고 두 팔로 꼭 안아 괜찮다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나가자.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래."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값을 지불했다. 문 앞으로 나와서 선화를 기다리는 동안 메시지를 확인했다. 중학교 동창들의 단체 메시 지방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꽤나 많이 쌓여있었다. 나는 메시지를 전부 읽음 표시를 한 후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선화가 가게에서 나와 내 옆에 잠시 멈춰 서더니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선화의 뒤를 따랐다. 어디를 가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선화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나를 움직였다. 선화와 나는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서 십 분쯤 걸었다. 어느새 큰길이었다. 선화가 팔을 뻗어 마주오는 택시를 멈춰 세웠다.


"상수동으로 가주세요."


선화는 목적지를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기사가 가는 동안 두세 번 애인 사이냐, 술 한 잔 했냐 하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선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침묵하자 택시기사는 혼잣말로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선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기사에게 현금으로 택시비를 지불한 다음 내려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나는 선화를 뒤 따랐다. 처음에 우리가 만난 '다락'으로 가는 길처럼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지나왔다. 나는 속으로 큰길로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선화의 뒤를 쫓았다. 선화는 어두컴컴한 골목을 휘적휘적 거닐더니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멈춰 섰다. 나무 아래에는 손때가 묻어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밤색 벤치가 놓여있었다. 선화는 벤치 위를 손으로 탁탁 털더니 철퍼덕 소리가 나게 앉았다. 나도 선화를 따라 손으로 벤치를 쓱 닦고는 옆에 앉았다.


"춥니?"


"아니 괜찮아."


"이 나무 진짜 크지?"


"응,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운치 있네."


"저기 빌라보여?"


"응."


"저기가 우리 집이야."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선화가 가리킨 빌라와 선화를 번갈아 보았다. 선화는 그런 나를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름하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동네가 조용하네."


"맞아 조용해 조용하지. 낡고, 부서지고 조용한 동네야. 그래서 여기에 살기로 마음먹은 것도 있고. 물론 돈도 한 몫했지만 이 분위기가 마음에 와 닿았달까, 너무 나랑 닮은 것 같아서 홀린 듯이 집도 안 보고 계약한다고 했어. 그랬더니 부동산 사장이 보지도 않고 계약하는 게 어딨냐고 펄펄 뛰며 억지로 끌고 갔는데 반지하더라구.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어. 아늑하달까. 남들한테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이 드니까 포근한 느낌마저 드는 거 있지."


"그래도 반지하면... 답답하지 않아?"


"전혀. 나는 오히려 잠도 잘 오고 좋더라. 나 좀 이상한가?"


선화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취한 듯했지만 집까지 오는 동안 알코올이 많이 달아났는지 발음이 새지는 않았다. 다만 눈에는 여전히 피곤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근데 요즘은 잘 못 잤다며."


"응. 원래도 잠을 잘 자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 집에 오고 나서는 그래도 푹 잤거든. 그런데 요즘 잠을 못 자겠어 통."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응."


선화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 연약한 어깨가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선화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간신히 참아내었다. 아무리 부모의 마음이라도 그것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누가 쳐다보는 느낌 느낀 적 있어?"


"음... 아니 나는 딱히. 누가 날 쳐다보는 것 같아서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관심이 없더라고."


나는 선화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농담 섞인 대답을 했지만 선화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끈질긴 시선은 정말 겪어봐야 알아. 집념이 가득 담긴 눈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쓱 훑는 느낌은... 등부터 시작한 소름이 손끝까지 타고 내려가는 기분은 당해본 사람만 알 거야."


선화는 시선을 생각하자 오한이 드는지 양팔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런 선화의 모습에서 진한 두려움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술집에서만 하더라도 즐거워 보이던 선화는 얼굴에 피곤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별 일 아닐 거야 라는 말 따위로 위로해봤자 저 진득한 두려움을 가시게 할 것 같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화의 옆에 앉아만 있었다. 선화는 잠시 깊은 한숨을 몰아쉬더니 빌라 쪽을 흘긋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내 삶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부터인지, 중학교 때 잠깐 사귀었던 고등학생 남자 친구 때문인지, 스무 살 때 처음 잠자리를 한 그 쓰레기 같은 새끼 때문인지..."


나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선화도 딱히 내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우리 엄마 되게 예뻤다? 어렸을 때였는데도 기억나. 엄마 손 잡고 마트라도 가면 마트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확 느껴질 정도로 엄마는 예뻤어. 아빠도 인물이 좋았지만 그래도 엄마만 못했어. 아빠는 내심 그게 부담스러웠나 봐. 엄마랑 같이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만 따로 나가는 것은 더 질색했지. 아마 남자라는 동물의 본능에 가까운 것을 느껴서 그랬는지도 몰라. 내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런 게 항상 속에 있었는데 일이 터진 거지. 어떤 남자가 지나가다가 엄마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서 연락처를 물어본 거야. 엄마는 자기 애 딸린 유부녀라고 이러지 마시라고 했는데도 그 남자는 끈질기게 엄마를 붙잡고 놔주지 않은 거지. 그러다 엄마 손까지 잡고 못 가게 했는데 그걸 아빠가 지나가다가 딱 본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나는 마침내 입을 열고 선화에게 물었다. 선화는 여전히 내 쪽은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보통이라면 그 남자를 어떻게 했겠지. 하지만 우리 아빠는 그러지 않았어. 그대로 모르는 척 집으로 가버렸지. 집으로 가서 엄마가 오기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기다린 다음 엄마가 들어오자마자 뺨을 후려갈겼어. 여편네가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니까 저런 양아치 새끼들까지 꼬이는 것 아니냐고."


선화가 어이가 없지 않냐며 나를 보고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선화는 이번에도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지. 허구한 날 아빠는 엄마를 몰아붙였어. 계속해서 구석으로 모퉁이로. 아빠는 술도 마시지 않았어.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면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술이 나쁜 거라는 핑계라도 댔을 텐데 말이야. 맨 정신으로 사람을 그렇게 의심하고 때린다는 게 선뜻 이해가 안 되지? 그런데 웃긴 게 나중에는 아빠도 엄마를 왜 때리는지도 모른 채 때리는 거야. 엄마도 왜 맞는지도 모르고 가만히 맞고만 있고. 마치 서로 해야 될 일을 마땅히 하는 사람들처럼. 그러다 엄마가 집을 나갔어."


"집을 나가셨다고?"


"응. 기가 막히지. 초등학생인 딸을 내버려 두고 훌쩍 사라져 버린 거야. 어느 날 말도 없이. 더 웃긴 건 엄마가 하루아침에 충동적으로 집을 나간 게 아니라는 점이야. 엄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기 흔적을 지웠어. 화장품부터 옷가지, 사진, 심지어 자기 수저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 거 있지.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더 소름 돋는 건 뭔 줄 알아? 나한테 생일 선물로 줬던 머리핀까지 없애버린 거야. 나도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머리핀에서 그친 걸까? 아직도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머리핀까지 가지고 가버렸는지 나는 궁금해. 반은 엄마의 피지만 나머지 반은 아빠의 피라서 나를 그냥 가만히 두고 간 걸까? 엄마는 대체 언제부터 사라질 준비를 했던 걸까? 아빠한테 맞을 때마다 초점 없는 눈을 뜨고 속으로는 오늘은 무엇을 버릴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선화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렸다. 아무리 오래된 상처라도 흉터에 아로새겨진 아픔은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선화는 잠시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단순히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만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엄마가 나간 뒤에도 나름 씩씩하게 자랐어. 일부러 더 활짝 웃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기 최면까지 걸 정도로 노력했지. 그러다 보니 실제로 행복하다고 느껴지더라? 게다가 엄마가 나간 뒤로 아빠도 집에 밤늦게 돌아오거나 며칠 씩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혼자 지내다시피 했지. 다행인 건 엄마가 나간 뒤로 나에게는 한마디도 안 했지만 식탁에 생활비는 꼬박꼬박 두고 갔다는 거야. 그게 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엄마에게 생활비를 주던 것이 버릇처럼 남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꽤 큰돈을 매달 주었으니 나는 풍족하게 살았지. 아빠는 내가 어디에다 돈을 쓰는지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어. 하지만 나도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어. 매달 나가는 공과금을 체크해서 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마트에서 장을 보기도 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사춘기 꼬마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어른 노릇을 했는지 몰라. 아마 중학생 치고는 꽤 큰돈을 다루니 스스로 어른이 된 것처럼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뭐,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어. 아빠가 이따금 술 취해 들어왔을 때 나를 한참 동안이나 무섭게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빼고는 말이야."


"난 전혀 몰랐어... 힘들었겠구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으로 고르고 골라 가장 뻔한 대답을 했다. 말해놓고 보니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사람들도 나와 같이 할 말을 찾지 못해 가장 보편적인 말을 골라냈을 것이다. 적당한 공감과 적당한 위로가 될, 욕을 먹지 않을 정도의 친절을 베푸는 문장을 말이다.


"아니 전혀. 말했잖아 나쁘지 않았다고. 정말로 그렇게 힘든 경험은 아니었어. 오히려 또래보다 성숙한 기분이 우쭐하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엄마가 떠난 바로 직후는 조금 힘들었지만 그다음은 아니었어."


나는 선화가 또래보다 성숙하게 느껴졌던 기억을 되새기며 괜히 선화에게 여인의 모습이 느껴졌던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선화는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고, 남자들에게 한 번씩 찾아오는 누나에 대한 욕망을 일깨우는 묘한 매력이 있는 아이였다.


"뭐 나름대로 살만하네 라는 생각이 드는 때였어. 애들은 내가 예쁘다고 잘해주지, 주위에 잘 나간다 하는 애들이 친구들이지,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이 생활에 간섭하지도 않지, 돈도 좀 있겠다 남부러울 게 있었겠어? 사춘기 소녀가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진 셈이었지. 그래도 난 이성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었어. 관심이 없었기보다는 무서웠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아버지 때문에?"


"맞아. 맨날 때리는 아빠와 맨날 맞는 엄마 사이에 있으면 남자라는 동물이 무서울 수밖에. 아빠도 처음부터 엄마를 그렇게 대했던 것은 아니니까. 아무리 잘해줘도 나중에는 저렇게 때리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색안경을 씌워버린 거지."


선화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선화의 삶의 일부분이 무겁게 느껴졌다. 선화는 길게 호흡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내뱉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치만 나도 사춘기 소녀라 궁금하긴 했어 남자라는 동물이. 내가 그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런 걸까? 남자는 여자랑 어떻게 다를까? 어느 순간 그런 질문들이 머릿속에 생겨나면서 계속해서 남자에 대해 생각하게 됐지. 온종일 남자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날도 있었어. 드라마에서 보던 커플들처럼 남자랑 만나면 저런 웃음이 나올까? 첫 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들린다는데 정말일까? 이런 시답지도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 마침 내가 좋다고 하는 남자들은 많았고. 미안 이건 자랑이 아니라... 아냐 자랑 좀 섞어서 이야기하면 진짜 많았어."


"그건 내가 잘 알지. 당신의 말이 진실임을 제가 보증합니다."


선화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나름 재치 있다고 생각한 말로 받아치자 선화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 정말 많았어. 귀찮을 정도로. 그러다 남자를 만나면 내가 가진 이런 문제들이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든 거야. 더 이상 귀찮게 하는 애들도 없어질 테고, 남자에 대한 궁금증도 해결되고.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든거지. 근데 그러려면 만날 남자가 귀찮은 애들이 넘보지 못할 만큼 힘이 있어야 했어. 십 대 사춘기 소년 소녀들에게 있어서 힘이 뭐겠어?"


"폭력이겠지."


"맞아.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게, 중고등학생 때 제일 잘 어울리는 말 같아. 물리적인 폭력이야 말로 10대 들에게 진정한 법이지. 어른들도 똑같아. 단지 물리적인 폭력에서 돈으로 종류만 바뀔 뿐이지 강자에게 붙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똑같달까. 마침 나를 좋아한다던 남자애들 중에 소위 '짱'이라고 불리는 애가 있었어.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싸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겨서 유명했지."


나는 선화가 고등학생과 사귀었던 때를 기억했다. 선화가 우리 동네는 물론 옆동네까지 유명한 고등학생과 사귄다는 말이 학교에 퍼지자마자 난리가 났었더랬다.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한쪽은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둘의 외모는 어느 누가 낫다고 하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에 둘의 만남에 대해 완벽한 커플이 탄생했다고들 이야기했다. 다른 한쪽은 '굳이'라는 반응이었다. 물론 잘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불량스러운 소문이 항상 따라다니는 남자와 최선화가 굳이 사귀어야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반응은 선화의 인기를 초등학교 때부터 지켜본 애들이 주로 보였다. 그렇게 물밀듯이 쏟아져 오는 러브콜들을 다 거절하던 선화가 느닷없이 잘생긴 양아치와 사귄다니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주변에서 납득하든 못하든 간에 당사자들의 만남은 의견이 아니라 사실이었고, 나로서는 둘 중 어느 의견도 아니었다. 선화의 연애 소식이 퍼지기 며칠 전 선화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가 거나하게 차인 직후라 그런 것은 나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패자에게 들려오는 승자의 승전보란 다시 한번 패배를 상기시키는 것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깊은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그보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절망의 크기가 더 커지지는 않는다. 절망이란 이미 그 상황 자체로 최악의 상황에 몰려있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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