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깊이, 더 깊이

by starka

선화와 세 번째 만났을 때였다. 선화와 '다락'에서 처음 만난 뒤로 우리는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메시지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밥은 먹었냐느니 직장 상사가 짜증 나게 한다느니 요즘 나온 영화는 별로라느니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누군가 '오늘 저녁에 시간 돼?' 하는 말에 다른 쪽이 '좋아'라고 하면 만나는 것이었고 '오늘은 안돼'라고 하면 다시 시시한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한 번은 외주 미팅 자리에서 선화와 신나게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미팅이 끝나고 한소리 들은 적도 있었다.


"순덕 씨,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미팅 내내 집중도 못하시고 계속 휴대폰만 보시잖아요. 애인이라도 생겼어요?"


"아,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중요한 연락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에이 됐어요 죄송은 무슨. 여자예요?"


"네?"


"중요한 연락, 여자냐고요. 순덕 씨는 꼭 말을 두 번 시킨다니깐. 그런 거 여자들이 싫어해요 알아요?"


"아, 네."


"그래서, 여자예요?"


"네 중학교 동창..."


"어머어머, 순덕 씨 숙맥인 줄 알았더니 동창회 가서 썸도 타고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오랜만이라서 할 말이 많은 것뿐이에요."


"순덕 씨, 여자는 관심 없는 사람이랑은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지 않아~"


"아뇨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쨌든, 순덕 씨 연애사업은 연애사업대로 잘하시고, 일은 일이니까 우리 작업도 잘 좀 부탁해요 알았지? 다른 담당자였으면 순덕 씨 진짜 한 소리 들었어!"


담당자에게 별 관계가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실은 나 역시 속으로는 이런 것이 썸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연애의 감정이 배꼽 아래쪽에서부터 가슴 쪽으로 뭉클뭉클 솟아나는 그런 때였다. 선화와 세 번째로 만나기로 한 날도 역시 그런 기분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도 선화가 저녁을 샀으므로(자긴 이자카야 쐈는데 넌 치킨 살 거냐며 자기가 냈다) 이번에는 내가 꽤 유명한 맛집을 예약해둔 차였다. 맛집 탐방으로 유명한 블로그를 얼마나 들락날락했는지 나중에는 봤던 블로그도 괜히 새로운 것 같아 몇 번이고 더 들어가고는 했다. 뜻하지 않게 새벽 늦게까지 음식점을 찾은 나와는 달리 선화는 다른 이유로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한창 블로그를 탐색하고 있을 때 선화의 메시지가 휴대폰을 울렸다.


'자니?'


'아니 아직. 늦었는데 왜 안자?'


'잠이 안 와서...'


'왜? 낮잠이라도 잔 거야? 아님 커피를 늦게 마셨던가.'


'그런 건 아니고 요즘 계속 잘 못 자.'


'무슨 일 있어?'


'그냥 요즘 기분이 이상해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선화는 일단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메시지를 보낸 다음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려고 노력해야겠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선화가 느끼는 불안함이 단순히 피곤하고 예민한 상태이기 때문에 느끼는 기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선화는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남자들의 구애를 받아왔다. 고등학생 때는 근처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까지 선화의 하교시간에 맞춰서 교문 앞에 서 있을 정도였으니 그때와 비교해서 여전한 미모를 지니고 있는 선화에게 스토커가 생겼다고 해도 선화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선화를 남몰래 연모하는 사람이 선화를 엿보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아무래도 내일 저녁을 먹은 후에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 근처에서 조금 시간을 때우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만난 선화는 잠을 별로 못 잔 사람 치고는 너무나 활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왔어?"


"응, 많이 기다렸어? 미안 차가 좀 막혀서."


"이번에는 너가 늦었네."

선화가 배시시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야기하며 밥은 내가 사겠다고 이야기했다. 선화는 ‘원래 네가 사기로 한 거였잖아! 2차까지 쏴!’라고 말하며 슬쩍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속으로 놀랐으나 또 놀라면 선화가 손을 뺄 것이 분명하기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식당으로 들어갔다. 선화는 나를 따라가며 '오 이제 안 놀라는데? 놀리는 재미가 하나 사라졌어'라며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식당 안에 들어서니 빈 테이블은 2개 정도밖에 없었고 전부 차 있었다. 자리를 안내받고 나니 그나마 빈 테이블 2개 중 하나가 내가 예약한 테이블이었다. 나머지 하나도 예약자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 크지 않은 가게라 사람이 가득 차면 부산스럽고 답답할 만도 한데, 이 가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환기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선선한 공기가 답답함을 느끼지 않게 했고, 조도가 낮은 조명과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사람들의 목청을 낮췄다. 분위기가 사람들을 묘하게 눌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선화가 속삭이듯 물었다. 나는 밤새 블로그를 뒤졌다고 이야기하면 선화가 만족하지 못했을 때 제대로 된 감상을 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는 사람이 소개해줬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화는 그 사람 인기 많겠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근데, 여기 뭐 파는 곳인데?"


"오마카세 집이라서 알아서 줄 거야."


"오마카세?"


선화가 오마카세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의외였다. 선화가 나를 '야네우라'에 데려갔기 때문에(선화의 단골 술집 이름이 ‘야네우라’라는 사실은 내가 직접 일본어 사전에서 비슷한 글자들을 보고 알아낸 것이었다) 비싼 이자카야나 미식가들이 갈 법한 음식점에 빠삭한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야네우라'는 아는 사람만 찾아갈 법한 곳에 있었고, 실제로 선화도 여기는 아는 사람만 오는 곳이야라며 어깨를 으스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당에 들어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선화의 모습은 미식에 통달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춘기 소녀가 좋아하는 오빠를 따라 생전 처음 파스타 집에 온 것처럼 낯설지만 들떠보였다. 생각해보니 선화는 내가 ‘야네우라’를 알려주기 전까지 그 술집이름을 ‘다락’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다락’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나는 묘하게 들뜬 선화의 표정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마카세는 셰프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이야."


"전부?"


"응."


"뭔가 낭만적인데."


"낭만적이라고?"


"낭만적이잖아. 당신에게 다 맡기겠소! 그래서 여기 뭐 파는 곳인데?"


"닭 오마카세 집이야. 사실 나도 오마카세 집은 처음이라..."


"닭? 닭을 마음대로 요리해서 주는 거야?"


"음... 어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닭을 마음대로 요리해서 주는 것은 맞아."


"치킨은 치킨으로 갚는다 이거네?"


"그런 셈이지."


우리가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있을 때 서버가 따뜻한 차와 물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보리차 비슷한 맛이었지만 보리차는 아닌 것 같았다. 선화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식힌 다음 한숨을 뱉었다.


"후, 피로가 좀 풀리는 기분이야. 혀가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 알아?"


"그건 잘 모르겠고 목욕탕에 처음 들어갔을 때 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은 알아."


"비슷해. 그게 혀에 집중되었을 뿐."


"어제 잠 잘 못 잤다고 그랬지?"


"응. 요 며칠 잠을 잘 못 자."


"혹시 불면증 있어?"


"음... 원래 불면증까지는 아니고 잠을 잘 못 자는 편이긴 한데. 이번에는 유독 심하네."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요즘 그냥 불안해.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선화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전날 선화가 보낸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때도 선화는 누군가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누가 쳐다보는 것 같다고?"


나는 스토커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려다가 선화의 피곤한 표정을 보고는 말을 돌렸다. 스토커 이야기를 괜히 꺼냈다가 더 밤잠을 설칠 것 같았다.


"응. 누군가 뒤에서 스윽 하고 쳐다보는 느낌, 뭔지 알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팔에 소름이 우수수 돋는 그런 기분."


"흠. 요즘 기가 허한가?"


"글쎄, 그럴지도. 하긴 갑자기 오한이 들고 하면 귀신이 지나간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많이 하니까. 근데 낮에도 그런 느낌을 받는 거는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선화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기가 허한 것 아니냐는 말을 꺼냈지만 선화는 진지하게 반응했다. 확실히 낮에도 그런 시선과 느낌을 받았다면 확실하게 문제가 있다. 대체로 사람의 감이란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어떤 시점에서는 굉장히 잘 맞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사람의 불확실한 감이 정확하다. 선화가 콕 집어서 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했으니 아마 누군가 선화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 한번 스토커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첫 번째 메뉴가 나왔다. 검지 손가락보다 조금 긴 크기의 꼬치에 닭고기가 두툼하게 꽂혀있었다. 위에는 분홍 빛이 도는 하얀 소스가 듬뿍 얹어져 있었다.


"와, 이게 뭐예요?"


"구운 닭가슴살에 명란이 들어간 마요네즈를 얹은 꼬치입니다."


"세상에, 이런 것 처음 먹어봐!"


선화는 난생처음 햄버거를 먹어본 유치원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서빙을 해주던 직원은 그 모습을 보고 빙긋 웃으며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선화의 그런 모습이 나는 싫지 않았다. 만약 선화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면 나이 먹고 왜 이렇게 주책스러울까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화는 이런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창회 날 만났을 때의 선화보다 지금의 선화가 더욱 선화인 것 같았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선화가 꼬치를 들다 말고 나에게 말했다.


"왜 안 먹어?"


"아아, 먹을 거야. 먼저 먹어."


"엄청 맛있겠다 그렇지? 이건 뭐지?"


선화가 숟가락 옆에 놓인 꼬챙이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끝이 포크처럼 두 갈래로 갈라지다가 몸통 쪽으로 끝이 휜 희한한 모양의 꼬챙이였다. 나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옆 테이블을 봤더니 나무 꼬치에서 편하게 분리할 수 있게 사용하는 도구였다.


"이렇게 사용하는 거네."


"와, 이렇게 쉽게 분리가 돼? 역시 인간은 대단해."


"하고자 하면 못하는 게 없지 인간은."


"얼른 먹자, 너도 먹어 어서."


선화는 꼬챙이의 사용법을 알게 되자 신이 난 듯 나무 꼬치에서 닭가슴살을 분리해 냈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닭가슴살을 전부 꼬치에서 분리한 다음 소스를 듬뿍 얹은 부위를 입에 가져갔다. 바삭하는 식감과 함께 잘 익은 닭고기의 육즙이 뿜어지듯 입안을 메웠다. 알이 톡톡 씹히는 마요네즈 소스가 잘게 썰린 고기를 부드럽게 식도로 안내했다.


"와, 이거 정말 맛있는데?"


"대박이지! 세상에. 나 이런 맛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이건 닭고기가 아니라... 흠. 달리 비교할 대상이 생각나진 않는데 아무튼 정말 맛있네."


"내 말이! 여기 소개해준 친구 진짜 여자들한테 인기 최고로 많겠다."


"다음에 내가 더 맛있는 식당 알아올게."


"일단 여기부터 먹고! 자 한 잔 받아."


우리가 처음 나온 닭꼬치에 대해 침을 튀기다시피 하며 평가를 하는 동안 주문한 술이 나왔다. 선화가 웃으며 병을 잡고 빙빙 돌리더니 까드득- 소리를 내며 병목을 비틀었다.


"더 좋은 술도 많던데."


"에이, 무슨 소리야 술은 소주지."


"여기 안동소주도 있는데."


"그게 무슨 소주야. 소주는 여기 응? 개구리가 붙은 초록색이 소주지. 저런 건 양반들이나 먹는 술이야. 낭만 없게."


"낭만이 없다고?"


"그래! 소주가 말이야, 싸고 처음엔 쓰고 취하면 달고 다음날 숙취 심하고! 그래야 소주지!"


"그건... 그냥 몸에 안 좋은 것 아니야?"


"그러니까 낭만이 있는 거지! 멋있지 않아? 딱 우리 같은 사람들 같잖아."


"나도?"


"너도 오늘부터 ‘낭만 소주파’해."


"이렇게 쉽게 받아줘도 되는 건가?"


"당연하지. 건배!"


선화는 내 손에 쥔 잔에 힘껏 자기 잔을 부딪히더니 단숨에 목을 젖혀 소주를 털어 넣었다. 느닷없는 소주 예찬에 선화의 목소리가 커진 탓인지 몇몇 테이블에서 눈총을 주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일일이 맞추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선화는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빈 잔에 소주를 채워 넣었다. 나도 빈 잔을 선화에게 내밀었다. 선화는 쨍- 소리가 나도록 병목을 부딪히더니 병을 한껏 위로 들어 소주를 채웠다.


"난 이렇게 따르는 게 좋더라. 쪼르르 소리가 귀엽지 않아?"


"근데 잔이 작아서 소리가 얼마 안 나는데."


"그 맛이지. 원래 아쉬움이 남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음식이든 사람이든."


"사람도?"


"그래야 매력 있잖아?"


선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잔에 잔을 부딪혔다. 우리는 함께 원샷을 하고 동시에 크- 하는 소리를 뱉었다. 선화는 깔깔깔 웃더니 이제 어엿한 ‘낭만 소주파’가 됐다고 말했다. 나는 고작 두 잔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시켜줘서 고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두 어잔쯤 더 비웠을 때 새로운 메뉴가 나왔다. 닭다리살을 오븐에 구운 꼬치와 닭껍질 튀김, 은행과 버섯이 번갈아 끼워진 꼬치가 한 접시에 나왔다. 선화는 영락없는 소주 안주라며 박수를 쳤다. 우리는 안주가 나온 기념으로 한 잔 하기로 하고 서로의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소주 특유의 알싸한 향이 코를 타고 목으로 넘어갔다. 미쳐 넘어가지 않은 알코올 향이 다시 코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역시 소주는 역하다는 생각을 하며 안주로 뭘 먹을지 고민하다 닭다리가 꽂힌 꼬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연분홍색의 닭다리살이 번들거리는 기름을 두르고 먹음직스럽게 나무꼬치에 꽂혀 있었다. 꼬치용 포크로 조심스럽게 한 덩이를 빼내 후추가 섞인 소금을 찍어 입 안에 넣었다. 기름 가득한 닭다리살이 짭조름한 소금과 함께 입에서 사르르 녹듯이 부서졌다.


"와, 더 맛있는데?"


"여기 진짜 최고다. 나 피곤이 싹 가셨어."


선화가 닭고기를 입 안에 넣은 채 우물거리며 소주병을 내밀었다. 우리는 연거푸 석 잔을 마시며 접시를 비웠다. 세 번째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추가로 시켰다. 선화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입안에 맴도는 감칠맛 덕분에 피로를 잊었는지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다. 나도 선화의 속도에 맞추어 잔을 비우느라 금방 얼굴이 화끈거리며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다.


"아 안주가 맛있으니까 술이 다네 달아. 소주가 달면 취하는데 오늘 취하겠다."


"낭만 소주파가 이 정도로 취해서 되겠어?"


"물론 아니지. 제법 우리 파 다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순덕이?"


"가입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열심히 활동해야지."


"아주 좋은 자세야. 자 한 잔 더하자고!"


선화가 기세 좋게 잔을 내밀었다. 우리가 다시 한번 동시에 목을 꺾어 잔을 비웠을 때 세 번째 요리가 나왔다. 알맞게 익힌 날개살로 만든 꼬치와 구운 채소꼬치였다. 날개살에는 껍질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채 붙어있어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선화는 채소를, 나는 닭날개 꼬치를 잡고 한입씩 베어 물었다. 우리 둘 다 맛있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은 채 약속한 듯이 조용히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혀를 감싸는 감칠맛이 달아나기 전에 빈 잔을 채워 소주를 부어 넣었다. 안주를 먹고 잔을 비우고의 연속이었다.


호기롭게 잔을 치켜든 낭만 소주파는 주문한 소주가 채 3병이 되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나는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선화는 말끝마다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자연스레 술잔을 집어 드는 빈도수보다 안주를 입에 넣는 횟수가 잦아졌고, 다섯 번째 메뉴 가지 나온 시점에선 배가 불러 그마저도 하지 않고 간간히 차만 여러 번 시켜 홀짝였다. 유명한 술집에 와서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선화의 기분 좋게 취한 모습도 선선한 가게 안의 공기도, 알딸딸하게 머리를 어지럽히는 취기마저 사랑스러운 밤이었다. 선화의 입에서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그늘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전까지는 너무 행복해서 오래도록 곱씹고 싶은 밤이었다.


"... 었으면 좋겠어."


선화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턱을 괴고 테이블 한쪽 구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혼잣말을 하는 선화를 보며 나는 쎄한 기분을 느꼈다. 예쁘게만 보이던 눈이 초점이 사라지자 마네킹을 보는 듯한 오싹함마저 느껴졌다.


"뭐라구?"


내가 되물었지만 선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선화의 대답을 기다렸다. 몇 초, 몇십 초, 몇 분이 지나가기까지 선화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답답한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나는 기다렸다. 본능적으로 선화가 가진, 그리고 내가 그토록 알기를 갈망했던 그늘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머리를 지그시 누르던 취기가 선화의 대답을 갈망하는 목소리에 점차 밀려났다. 조급함을 누르고 선화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식사가 끝난 테이블이 하나 둘 일어나 홀 안의 테이블이 듬성듬성 비었다. 디저트를 내와야 하는지 고민하는 서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소주가 반 정도 남았지만 새로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직원이 빈병을 치우고 새 소주를 가져오고 나서야 선화는 입을 열었다.


"죽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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