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가 나가고 나는 다시금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복기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책 없이 형사의 집을 찾은 것 같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찰서로 바로 출두하는 것은 더 좋지 않은 선택이 분명하다고 애써 자위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형사가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아마 1시간 안팎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나를 이송해야 하고 차를 타고 온다고 했으니 분명 경찰 한 두 명 정도를 데려올 것이 뻔했다. 형사가 말한 대로 우선 내가 선화의 죽음을 언급했으니 일단 수사는 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나는 두 개의 선택지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첫 번째는 여기서 형사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다. 형사가 정해준 의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형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형사가 부하들을 데리고 우당탕 거리며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형사는 '야 이 새끼들아 니네 집도 아닌데 좀 살살해라 살살!'이라고 호통을 치며 부하 1의 뒤통수를 찰싹 때린다. 그러면 부하 1은 멋쩍게 웃으며 '그래도 용의자 검거하는데 살살할 수 있나요'하며 배시시 웃는다. 형사는 '민증에 인주도 안 마른 애새끼 한 명인데 뭘!'이라며 핀잔을 준다. 나는 한 편의 콩트와도 같은 그들을 보면서 형사가 정해준 의자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부하 2가 의자에 앉은 내게 와서 손을 뒤로 하게 만든 뒤 수갑을 채운다. 수갑을 너무 꽉 조인 나머지 의자 등받이에 팔이 걸려 일어나질 못한다. 형사는 '이런 병신 새끼도 경찰 하라고 나라에서 허락해준 거야?'라며 부하 2의 뒤통수를 좀 전의 부하 1의 뒤통수보다 더 세게 후려갈긴다. 부하 2는 부하 1과는 달리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라 부하 1처럼 대꾸는 못하고 구레나룻만 만지작거린다. 형사는 그런 부하 2에게 '씨바 시간 남아도냐? 얼른 수갑 다시 안 채워? 이 새끼는 신발까지 처 신고 들어왔네 하'라고 말하며 부하 1을 째려본다. 부하 1은 '얼른 나갈게요 선배님'이라고 미안한 듯 웃는다. 부하 2가 수갑을 다시 풀고 채운은 과정에서 내 손목 살이 살짝 집혔다. 내가 '아!' 하고 침음 성을 흘리자 형사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부하 2의 뒤통수를 한 대 더 갈긴다. '야 인마 살살하라고 살살. 과잉진압으로 징계받고 싶어?' 부하 2는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다. 형사는 다시 나를 쳐다보고는 '순덕아, 너 뭐 불편한 것 없었지? 나는 최대한 배려해준 거야. 서에 가서 말 잘해 알았지?'라며 억지웃음을 짓는다.
나는 형사의 뻔한 속내를 알지만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로 다짐한다. 서에서 얌전히 조사를 받은 후 무죄가 입증되면 풀려날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말이다. 처음 가본 경찰서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깡패처럼 생긴 형사들은 없어도 표정은 그들과 같았다. 하나같이 냉혹한 살인마 같은 얼굴로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선화와 무슨 관계냐부터 시작해서 그 집에는 왜 갔냐, 칼은 왜 들고 있었냐 어머니 아버지는 직업이 무엇이냐 같은 질문을 하며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고 어떤 때는 가만히 손가락을 놀려 타이핑을 했다. 형사들은 선화를 죽이지 않았다는 나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이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서만 대답을 잘하면 된다고 계속해서 나를 타일렀다. 나는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자 불안한 마음이 들어 부모님과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변호사를 선입하겠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그러라고 했다. 지나가는 한 형사의 혼잣말이 내 귀에 날아들어 박혔다.
'씨발, 쉽게 쉽게 가지 좆만한 게 사람 귀찮게 하네.'
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에 헛구역질을 느끼며 서둘러 상상 속에서 빠져나왔다. 손바닥에 난 기분 나쁜 땀을 바지에 슥슥 닦고 두 번째 방법을 생각했다.
1. 형사가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2. 선화의 집으로 가서 현장을 살펴본다.
3. 범인을 찾는다.
첫 번째 상황보다 훨씬 명쾌했다. 도대체 어떻게 범인을 찾을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 따위는 없었지만 적어도 첫 번째 상황처럼 나를 숨 막히게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선화의 집에 간다면 진범을 찾을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까부터 머릿속에 맴돌았다.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선화의 집에 간다면 단박에 풀릴 것만 같았다. 형사의 말을 어기고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은 내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었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곰팡이 냄새 가득한 취조실에 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생각이 정리되자 방에서 나왔다. 현관으로 향하는데 문득 선화의 집에 가기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느닷없이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나더니 급격하게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실에 매달린 시계를 보고 형사가 나간 지 십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옆면에는 배달음식점 찌라시가 동그란 자석으로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단출하게 놓인 김치 몇 통과 달걀 한 줄, 겉에 이슬이 맺힌 맥주 3캔이 있었다. 나는 맥주 하나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쌀쌀했다. 입김조차 얼 것 같은 겨울의 온도가 맥주를 쥔 손을 하얗게 만들었다. 나는 아파트 현관을 벗어나기 전에 맥주캔을 땄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기포를 느끼며 허겁지겁 맥주를 마셨다. 빈속을 채우는 알싸한 알코올이 몸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머리도 살짝 띵 한 것이 괜히 마셨나 싶었지만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끝까지 비운 뒤 맥주캔을 우그러뜨렸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쓰레기통을 찾다가 이내 그만두고는 지하실에 휙 던져버렸다. 어두운 계단 밑으로 찌그러진 맥주캔이 깡- 깡-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거리로 나온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다 건너편에서 오는 택시를 불러 세워 탔다. 택시 기사에게 선화의 집 주변에 있는 스타벅스로 가달라고 말한 뒤 뒤통수를 시트에 대고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졸음이 쏟아져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길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웃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형사의 집에서 나와서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택시기사가 생각에 잠긴 나를 불렀다.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택시비를 지불했다. 지폐 사이로 선화와 갔던 술집의 영수증이 꾸깃꾸깃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문득 이 상황이 누군가의 치밀한 설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택시에서 내려서 본 선화의 집은 겉보기에 평소처럼 평온했다. 아니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나는 혹시 몰라 조금 더 관찰했다가 들어가기 위해 맞은편에 있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선화의 빌라 입구에는 다행히 아무런 조치도 되어있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선화의 시체를 보고 신고를 했다면 당장 북적북적하게 경찰관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서 무전기를 들고 떠들거나 노란색으로 된 경찰 테이프로 입구를 칭칭 감아 놓았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을 보니 다행히 아무도 선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마 조금 있으면 내가 사라진 것을 깨달은 형사가 부하 1, 2와 함께 선화의 집을 조회해 들이닥칠 것이다. 그전에 선화의 집에서 증거를 찾아내야만 한다. 반드시.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선화의 방 창문이 보이는 건물 외벽 쪽으로 이동했다. 선화의 집은 반지하라 얼굴을 가까이 대면 방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하지만 창이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쪽으로 나있기도 하고 선화가 집에 오랜 시간 있지 않은 탓인지 선화는 방이 들여다보이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은 듯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창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아직 해가 다 오지 않아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벽지에 묻은 피들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선화는 정수리 부분만 보였는데, 내가 나올 때 모습 그대로 인 듯했다. 나는 일어나서 다시 벤치로 돌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주택가 한복판에서 살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범인은 면식범인 것 같았다. 나를 방에 가두었던 형사와 같은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나도 그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선화의 방은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고, 짐을 뒤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탐정 만화나 소설에서는 보통 이런 경우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짓는다. 물론 주인공의 추리에 의해 그 결론은 산산조각이 나지만, 지금으로서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선화의 집에 침입해 선화를 죽이고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며칠 동안 선화의 주변을 맴돌며 살펴본 결과 선화에게 수상쩍은 사람이 얼씬 거린 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