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란한 여자

by starka

6.


툭툭, 티릭!


병 목돌아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며 내 잔에 술이 채워졌다.

팔꿈치로 소주병 밑바닥을 치고는 손을 가위 모양으로 만들어 반 잔을 덜어낸 그녀를 기괴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시선을 느꼈음에도 사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초생강에 락교를 감싸논 후 건배를 종용했다.

'소주에는 나가사키 짬뽕탕'이라는 지론을 펼치며 일본식 선술집으로 끌려오다시피 한 나는 그녀의 앞접시에 놓인 락교를 보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뭐야 안 마셔?"


"어, 아니 마셔야지."


식사를 하면서 이미 혼자서 '끝'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술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어색했다. 얼떨떨한 기분은 알싸한 소주를 한 잔 털어 넣고서도 어쩔 줄 모르고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소개팅, 몇 번이나 해봤어?"


"응?"


" 그냥, 난 소개팅은 별로라서. 아니 소개팅이 아니라 의무감이 섞인 것들은 전부 싫어. 학교든 뭐든. 아 그렇다고 네가 싫다는 건 아니야."


얘기를 마친 그녀는 소주병을 들어 빈 잔을 콜콜 채웠고, '마실래?'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떨결에 잔을 받은 나는 얼떨떨한 상황이 어떤 식으로 당황스럽게 변하는지를 오롯이 체험했다. 맨 정신에(그녀는 내 주량이 두 병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여자라니. 나는 아까부터 솔직과 뻔뻔의 경계를 허무는 그녀만의 화법에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양쪽 뺨을 다 내어줄 정도의 인간이 못 되었기 때문에 끓어오르는 오기를 담아 맞서기 시작했다.


"소개팅도 학교도 싫은 것은 나도 동의하지만 의무감은 글쎄. 본인 선택으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잖아? 아니면 그럴만한 용기가 없거나."


일부러 '용기'라는 날이 선 단어를 골라 그녀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는 의기양양한 마음이 드는 순간,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무슨 의미야?"


"요즘 시대에 용기라는 구닥다리 단어를 쓰는 애도 있나 싶어서. 그런 진지한 얼굴로"


"왜지? 용기라는 말이 어때서?"


"촌스럽잖아. 하긴 그래서 낭만적이기도 해."


선문답 같은 대답에 화가 났다. 하지만 '뭐 이 딴 게 다 있어!' 같은 말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로 가게를 나갈 경우, 가게 주인부터 시작해서 아까부터 우리 쪽을 쳐다보며 속닥이는 커플이 신경 쓰였다. 또 사라를 소개 아닌 소개를 해준 친구들의 뒷이야기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했다. 게다가 당사자는 나를 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무리 화를 돋웠다고 해도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은 도저히 내 상식선에선 무리다. 덧붙이자면 그녀가 궁금했다. 어떤 생각으로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인지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다.


"나가사키 짬뽕 나왔습니다."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점원이 냄비를 성의 없이 내려놓았다. 가기 전에 타이트한 레깅스로 감싼 사라의 허벅지와 Y자 계곡을 훔쳐보고는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버려둬."


"응?"


"냅두라구. 한두번도 아닌데 뭘."


"뭘?"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말아줄래?"


확실히 '지금 저 남자가 네 몸을 훑고 지나갔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그게 뭐가 대수라고'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내뱉은 말은 괜히 나로 하여금 해서는 안 되는 잘못을 한 것처럼 느끼게 했다.


"어차피 남자들은 다 그렇잖아. 머릿속에 섹스만 가득 차서는. 아 물론 비난하는 건 아니야.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게 본능인걸 어떡해. 그리고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내가 이렇게 입고 다니지 않았겠지."


남자가 '성'이라는 부분에 예민하다는 사실에 일부 동의할 수는 있었으나 모든 남자가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었기에(나는 99.8%라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하는 말에 반박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그녀의 말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반쯤 씹다만 락교를 통째로 목구멍으로 넘겨버리고 말았다.


"너도 그렇지 않아?"


"뭘?"


"아까부터 되게 얌생이 인척 하네. 너도 섹스 좋아하지 않냐고."


나는 지금, 소개팅으로 만난 초면의 여자와 난데없이 '섹스'를 주제로 이야기해야만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많은 해를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항상 내 쪽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래 왔던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잘했던 나에게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고민을 가진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을 자리를 항상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고민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서 크게 거부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짐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에게는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들이 짐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잠시간 하는 푸념을 들어주기만 하면 알아서 다시 짐을 지고는 혼자만의 싸움터로 떠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고민하는 자'들이 나를 잠시 휴식처 삼아 쉬었다 가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은 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짐덩이 들은 각 기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꽤나 흥미로웠던 것이 사실이고 더군다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것으로도 내게 감사의 인사를 삯으로 건넸기 때문에 약간의 보람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모든 것이 지겨워져 버렸다. 적당한 항구를 찾아 떠도는 배와 같은 그들에게 당연한 항구가 되는 것이 싫증이 나버렸고 괘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들에게 주는 나의 시간 중의 일부가(커피 쿠키를 포장지에서 꺼낼 때 깨지는 작은 조각과도 같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찾아오는 객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냉정한 칼 끝을 앞세워서.


내가 고민자들을 돌려보내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이 짐을 내려놓을 장소를 찾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쭈뼛쭈뼛 주위를 살펴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무겁다고 하는 짐의 정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돼지고기의 비계를 도려내는 정육점 주인의 칼처럼 공감을 완벽하게 배제한 채, 그들이 들고 온 커다란 보따리를 순식간에 시시한 크기의 조약돌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첫 번째 방식은 두 번째 방식에 비해 그나마 신사적이었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약간의 이해마저 바랄 수 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방식은 달랐다. 가끔은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했으며 무자비했다. 그러한 방식으로 내쳐진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이 한 마디를 남기고는 분노에 차서 떠나갔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났는데?'


그때는 그들의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귀찮은 손님을 쫓아낸 후련함에 기분이 좋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어떤 심경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들이 꼭 이 한마디를 하고 떠났는지 약간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두 번째 방식으로 대했을 때 굉장한 무례와 수모를 당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서도 억지로 억지로 쥐어짜 내어 내게 저주와도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 안하무인의 여자에게 굉장한 모욕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자연스레 내가 평소 있던 곳에서 아득히 먼발치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을 느끼며, 이번에는 그녀를 상대로 아까부터 벼르던 칼을 꺼냈다.


"그러는 너는?"


"어?"


"그러는 너는 어떠냐고. 섹스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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