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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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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Oct 30. 2022

2.

-삐이이이


귀에서 시끄러운 이명이 들렸다. 어둠과 반쯤 동화되어 있던 나는 신경을 긁는 소리에 강제적으로 현실세계로 불려나왔다. 마치 깊은 물에 있다가 한 줌 산소를 갈구하는 사람처럼 나는 ‘헉’ 소리를 냈다. 아니 내려고 했다. 여전히 코와 입에는 답답한 무엇인가가 물려있었고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밤인 것 같았다. 나는 또 다시 참을 수 없는 현실로 불려나온 것에 대해 알 수 없는 소리를 원망했다. 하지만 이내 원망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다시 어둠속으로 기어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벌써?


앳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의식이 있을때 들리는 소리는 정확한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이었다. 이토록 명확한 발음과 뜻을 전달하는 소리를 여태껏 들어본 일이 없었다. 나는 잠시 시간을 두고 지켜봤다.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목소리 하나만으로 이 상황이 타개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의식의 흐름을 끊기 위해 노력했다. 답답했던 호흡을 잊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벌써? ... 말이야.


그때 다시 들려온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이번에는 긴 문장이었다. 뒤에는 알아들을 수 없게 삐- 하는 고주파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를 놓아버리는 일을 잠시 멈추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여전히 병실은 고요했다. 분명히 밤인 것 같은데, 대체 그럼 누구의 목소리인가? 혹시 내 상태가 호전되어 다인실로 옮겨진 것인가? 나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염두해두며 마음 한 켠에서 피어나는 불안한 기대감을 다독이며 기다렸다.


-벌써? 페이즈2라니 진짜 운도 없지 말이야.


들렸다.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정확한 뜻이 전달되었다. '벌써? 페이즈2라니 진짜 운도 없지 말이야'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번 곱씹었다. 그러나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기에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그보다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신체에 의식을 집중하다보니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위급한 상황이다. 나는 호흡이 답답해짐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몸에 대한 좌절감이 발끝부터 서서히 잠식해오는 것을 느끼며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페이즈2라니 진짜 운도 없지 말이야. 내 말 들리지? 아 들리는 것 같네. 다행히 진행되기 직전에 연결되었나보네. 젠장. 자 이제 이쪽으로 건너와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또 다시 알 수 없는 말을 건넸다. 건너오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그것보다 당장 눈 앞에 나를 잠식하는 숨막히는 공포가 우선이었다. 나는 1초라도 빨리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나를 잊는 작업에 최선을 다했다.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답답했던 호흡도 차츰 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말을 걸던 목소리도 점차 희미해져갔다. 아니,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있었나? 그 전에 내가 들을 수나 있었던가? 나는 무엇이지?


생각에 끝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고요해졌다. 어둠. 새까만 어둠 속이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 여기라면 안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나를 괴롭히던 것들에서 벗어나 나는 영원한 안식을 취할 것이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삐이이이


알 수 없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소리는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점차 커져 머리가 깨질정도로 큰 소리로 변했다. 나는 또다시 어둠속에서 끌려나와 갑갑한 호흡을 마주해야했다. 몸 여기저기서 감각이 깨어나며 고통이 밀려왔다.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둬!’


나는 알 수 없는 소리에게 부탁하듯 소리쳤지만 소리는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계속해서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내 몸의 감각은 거의 다 살아났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전에도 땀을 흘렸는지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불쾌하게 달라붙는 옷의 촉감이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일깨웠다. 나는 정말이지 할 수 있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코와 입에 꽂혀있는 것들을 단숨에 뽑아내고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동안 단 한 번도 그럴수 없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당장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삐이이이이이!


아까보다 거세진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나는 이런 상태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신경을 날카롭게 긁던 소리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아까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정신차려! 이게 마지막 기회야. 억지로 통로를 넓혀놨으니 이제부터는 네가 해야해.


대체 뭘?


-시간이 없으니까 의문은 나중에 해소하고 내 말을 잘들어.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해. 네가 너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네 앞에 통로가 있다고 생각해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지?


-질문은 나중에라도 늦지 않다니까 제발 좀! 네 앞에 통로가 있다고 생각해. 이건 사람마다 달라서 내가 어떻게 해줄수가 없어. 나 같은 경우에는 내 머리에 거대한 플러그가 꽂혀있다는 상상을 했지만 그게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의문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리에 커다란 플러그를 꽂은 사람을 상상했다. 도대체 어떤 정신머리로 저런 생각을 했는지 헛웃음이 나올정도였다.


-그래. 비웃는 것은 나중에 마음껏해도 되니까 제발 집중좀 하라고! 뭐라도 생각을 해내란 말이야!


다그치는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좋아! 그렇게 의지를 보이란 말야!


나의 짜증담긴 신경질을 의문의 목소리는 반가운 친구를 보는 듯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저 속으로 생각했을뿐인데 미지의 누군가와 대화가 된다니, 드디어 내가 미쳐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미친거 아니니까 걱정말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진짜 미치거나 원래대로 돌아가거나 둘 중 하나니까 집중이나해. 아까처럼 의사표현을 좀 더 확실하게 해봐.


-뭘 어떻게 하라고?


-그래 그렇게 네 의사를 표현하라고 명확하게. 다행히 아까 너의 짜증으로 통로가 좀 더 안정화 됐으니까 이제는 상상하는 것을 해보자.


묘하게 설득력 있는 목소리에 나는 속는 셈 치고 순순히 따르기로 결정했다. 어느새 호흡이 답답하지 않고 정신이 또렷하게 살아났다. 육체의 감각은 희미해져갔지만 머릿속은 차분하고도 가벼웠다. 이대로라면 육체는 놔두고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벌써 레비테이트를? 굉장히 극단적인 친구네. 의외로 쉽게 풀릴수도 있겠어.


-레비테이트?


-나중에 설명해줄테니까. 자, 이제 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지지? 그 상태로 너를 응축시켜봐.


-응축?


-그래. 통로를 지나갈 수 있게 네 정신을 물체로 구현하는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물체의 형상을 상상해서 입히는거지.


-어떤 것으로?


-아무래도 단순한게 좋겠지. 동그란 구슬이라던지, 네모난 상자라던지. 네가 상상하기 편한 것으로 말야.


-너는 뭐였는데?


-종이비행기.


나는 확실히 의문의 목소리가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자신을 종이비행기로 치환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그런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안정화가 되어있다지만 강제로 연결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 불안정해질지 몰라. 빨리 응축시켜.


나는 내 자신이 동그란 구슬이 된 것을 상상했다. 아무래도 동그란 모습이 가장 익숙했다. 생각해보면 사람 머리도 동그란 모양이 아니던가.


나는 내가 커다란 구가 되었다고 상상했다. 사람만한 크기의 검정색 구. 겉은 맨질맨질한 재질로 먼지 한 티끌도 없었다. 먼지가 표면 위에 올라타도 그대로 중력의 힘을 받아 주르륵 미끌어질 정도로 광이나는 새카만 구. 아무래도 단단한 것이 좋겠다. 망치로 있는 힘껏 내리쳐도 '탱!'하는 청량한 소리만 날 뿐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는 단단한 구.


-좋아. 이제 통로를 찾아봐.


-통로?


-그래. 이미 너와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 자체가 연결되어있다는 말이니까 찾기만 하면 돼.


-어떻게?


-집중해. 네가 지금 너 자신을 구로 만든 것처럼 말이야.


나는 그제야 내 자신이 구로 변한 것을 실감했다. 내 몸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내가 아주 새카맣고 윤기가 나는 사람 크기의 검정색 구인 것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좋아,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이번에는 통로를 찾기 위해 집중했다.


-통로도 마찬가지야. 네가 상상하기 쉬운 것을 생각해봐. 네 자신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까보다 조금 어려울 수는 있어. 그렇지만 기억해. 원리는 항상 같다는 것을.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나와 연결된 통로의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연결 되어 있다'는 말에 너무 매몰되면 안돼. 나에게 통로라는 개념은 랜선처럼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지만 너는 다를 수 있잖아. 너에게 통로는 어떤 개념이지?


나는 그제야 그가 왜 플러그가 머리에 꽂힌 인간을 상상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머리에 달린 플러그를 통해 정신만 종이비행기가 되어 '통로'를 통과한 것인가?


-쓸데없이 남 생각하지 말고 너나 잘해.


어떻게 알았는지 핀잔을 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통로란 어떤 의미일까. 통로는 어떤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는 길이다. 하지만 그냥 길이라면 '통로'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통로는 뭔가 더 비밀스럽고 은밀하다. 그렇다면 터널은 어떨까? 그것도 산 중간을 뻥 뚫어버린 터널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가는 터널. 나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내 앞에 꼭 내 몸, 그러니까 검정색의 윤기나는 구가 들어갈만한 구덩이가 생겼다.


-좋아. 이제 그 터널로 들어가라고. 이제 슬슬 촉박해지니까 말야.


-어떻게?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달라고 하는군. 아까도 말했지? '원리는 같다'고.


나는 그의 말대로 내 몸(그러니까 구가)이 터널로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어느 새 내 몸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머리가 빙빙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무지 응용이라는 것을 모르는 친구네. 뭐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나는 잠시 뒤 목소리가 말한 바를 이해했다. 몸이 굴러가는 것이 느껴지더니 머리가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놀이동산에서 탄 커피잔 기구를 탄 것처럼 나는 정신없이 돌았다. 속으로 어어- 하는 소리를 내다가 조금 전 생긴 구덩이로 쏙 빠져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회전의 연속이었다. 시야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어지러움증은 더욱 배가 되었다. 내가 어디로 '굴러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방향마저도 잃은 채 나는 하염없이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봐!


나는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급하게 속으로 외쳤다.


-어떻게는 네가 해야지.


-말장난치지 말고!


-정말이야. 내가 하는 것보다 네가 하는 것이 빠를걸?


-어떻게!


내가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다고 절규하자 목소리는 웃으며 선심쓰듯 말했다.


-그래 좋아. 방법은 간단해. 출구를 상상해봐.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상상을 하라는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정말!


-아니면 간절히 믿는거야. 이 터널이 끝났다고 말이지. 탈출! 이라고 외치던가.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나를 놀리는 목소리에 화가 났다. 정말이지 눈 앞에 보이기만 한다면 얼굴을 한 대 갈겨주리라 다짐했다.


-얼마든지. 하지만 거기서 나와야 시도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빈정대는 목소리에 나는 화를 잠시 가라앉히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몸이 계속해서 360도 회전하는 와중에 출구를 상상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점점 속도 메스꺼워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토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봐. 집중하라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지마. 그럼 현실로 일어날 확률이 늘어나니까. 너 그 상태에서 토하다가는 기도가 막혀 죽을 걸.


나는 목소리의 말에 섬짓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여기는 현실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상상, 혹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세계, 아니면 정신의 방 같은 곳이었다. 실제로 살아 숨쉬는 육체가 경험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목소리의 말대로 나의 육체가 병실에 누워 코와 입에 호스피스 장치를 낀 채 토사물을 뱉어낸다면 꼼짝없이 죽고 말 것이다. 나는 메스꺼움을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우선적으로 내가 해야할 것은 하나, 출구를 상상하는 것. 나는 동그란 빛무리를 상상했다. 길고 긴 터널 끝을 알리는 눈이 시릴 정도의 흰 빛, 그 빛을 따라 머리칼을 뒤로 넘기는 거세면서도 부드러운 바람.


순간 끝을 모르고 회전하던 내 몸은 '퐁' 하는 소리와 함께 푹신한 곳에 안착했다.


'여긴 어디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작은 플라스틱 목마와 눈이 마주쳤다. 하얀 피부에 파란색 갈기를 가지고 있는 그 목마는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내가 있는 곳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다. 아이보리색 벽지가 깔끔하게 발려있었고 창문에는 바닥까지 내려오는 진회색의 암막커튼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선선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와 기분 좋은 눈 찌푸림을 만들었다. 창가 바로 옆에는 고동색의 책상이 있었는데, 화면에 무엇인가가 띄워진 모니터가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남의 방을 너무 관찰하는거 아니야?


나는 깜짝 놀라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여전히 나 밖에는 없었다. 나는 긴장하며 두 세번씩 방을 훑었다. 그러나 역시 방에는 나 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밖에서 들린 목소린가 해서 창가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창가에서는 여전히 선선한 바람과 눈을 부시게 하는 햇빛만 들어올 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생각처럼 잘 안되지? 그럴만하지. 네 모습을 봐봐 지금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몸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시선만 바뀔 뿐 내 몸을 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1인칭 게임을 하는 것처럼 시선만 여기저기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다 책상 옆에 사람 키 만한 전신거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리로 가서 나의 상태를 보기로 결정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짙은 갈색의 고급스러운 나무 바닥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터널에서 나와서 푹신하다고 느낀 곳이 침대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기 위해 나무바닥을 노려보며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좋아! 조금만 더 힘을 내!


목소리가 비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안간힘을 쓰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온 몸에 힘을 주다시피 정신을 집중하자 내 몸이 빙글 돌며 바닥으로 '쿵' 내려 앉았다. 그러더니 곧장 데굴데굴 굴러 창문이 있는 벽에 뒤통수를 들이 받았다.


-이봐 이러다 집을 다 부수겠어.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 보았던 흰 색 플라스틱 목마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그 목마가 이상했다. 아까까지는 좀 더 먼 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와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 놓여있었다. 기분탓인가, 하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목마가 말을 걸어왔다.


-기분탓아니야.


나는 깜짝놀라 제자리에서 굴렀다. 몸이 빙글하며 한바퀴 돌고나서야 제자리에 멈췄다.


-쯧쯧. 이번에도 꽝을 뽑은 듯하네. 정신차리고 네 모습을 봐 빙글빙글 돌지말고 정신사납게.


목마가 말을 끝내자마자 내 앞에 거울이 생겼다. 나는 그만 깜짝놀라 제자리에서 한 번 더 구르고 말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새까맣고 커다란 구였다. 내가 어쩔줄 몰라하며 호들갑을 떨자 목마는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휴. 일단 진정좀 해. 설명해줄테니까.


-너 같으면 진정이 되겠어? 여긴 뭐지? 꿈인가? 넌 누구지? 아니, 넌 뭐야?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여러개의 질문을 던졌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나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외부에 표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뿐이다. 나에게는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차례로 사건을 나열해봤다. 조금전까지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평소처럼 흘러만 가는 시간의 무게에 눌려 서서히 나를 잊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소리가 들렸고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내 몸을 거대한 검은 구체로 만들고 이상한 터널을 따라 이 방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어린애들이 타고 다니는 장난감 목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가 말을 건거야?


-그래.


-넌 뭔데?


-뭐냐니. 구해준 사람한테 하는 말 치고는 굉장히 무례하네.


-구해줘?


-그래. 내가 아니었으면 넌 시간에 휩쓸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겠지. 가족들은 그런줄도 모르고 너를 살리기 위해 애꿎은 병원비만 쏟아붓고 말이야. 그러다 결국 파산하고 병원에서 '힘드시겠지만 결정을 내려주십시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 끝에 안락사를 시켰겠지. 그럼 남아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네가 떠난 슬픔이야 처음에는 엄청 크게 다가오겠지만 어느 정도 무뎌지게 되어있어. 현실적인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 말이야. 네 병원비로 가산을 탕진한 가족들 앞에는 매일매일이 한 겨울과도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비아냥거리는 목마를 향해 돌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내 몸은 그대로 맹렬한 속도로 구르기 시작하더니 목마를 향해 '쾅'하고 부딪혔다. 얼마나 세게 굴러갔는지 내 몸은 목마의 목을 부러뜨리고도 멈추지 않아 반대편 벽에 박고나서야 멈추었다.


-와. 성질하고는. 도대체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구만. 다짜고짜 몸통 박치기를 하다니 말이야. 내 소중한 장난감도 박살을 내고.


내 뒤에서 예의 그 재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빙글 돌리자마자 깜짝놀라서 제자리에서 한바퀴 구르고 말았다. 방금 전 목이 부러진 목마가 멀쩡한 채로 내 뒤에 서있었던 것이다. 목마는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 한 장면이었다. 스크린에서는 동물들의 사람같은 표정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본 말의 미소는 굉장히 이질적이고 기괴해서 소름이 돋았다.


-워워 그만 그만 안 웃을게. 그렇다고 소름이 돋아버리면 곤란해. 난 환 공포증이 있다고.


목마의 뒤에 놓인 거울을 보니 표면에 우둘투둘한 혹들이 나 있는 검은 구체가 있었다. 인상을 확 구기자 거울에 있는 구체에도 주름이 졌다. 오돌도돌한 돌기가 빼곡히 들어선 채로 주름이 가자 구체는 더욱 흉측한 모양으로 변했다.


-그만 그만! 제발 더이상 보기 싫게 만들지 말아줄래? 그나마 재능은 있다만 보기 괴롭다고.


-어떻게?


-그냥 하던대로 해봐! 매끈해진다고 생각하라고!


나는 목마의 말에 따라 매끈해진 내 피부를 생각했다. 그러자 거울속에 비친 구체도 처음의 그 칠흑같은 검정색의 매끈한 구체로 변했다. 나는 다시 오돌토돌한 돌기를 상상했다. 구체 위로 제각각 다른 모양의 혹들이 돋아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번에는 삐죽삐죽한 바늘이 달린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자 뾰족한 침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마치 성게처럼 변해버렸다.


-그래. 한창 재밌을 때지. 정신사나우니까 이제 그만하고 얘기좀 듣지? 궁금한게 많을텐데.


나는 가시를 쭉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하다 목마의 말을 듣고는 다시 매끈한 구체로 돌아왔다. 목마의 말대로 궁금한 것이 많았다.


-여긴 어디야? 넌 누구지?


나는 맨 처음 목소리가 들렸을 때 했던 질문중 가장 궁금한 것을 골라 물었다. 목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는 내 머릿속. 나는 네 스승이 될 사람.


뜬구름 잡는 말에 나는 다시 가시를 빼곡히 채운 나를 상상했다. 가시가 목마의 얼굴을 찌를 듯이 솟아났다.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목마는 태연했다. 마치 해볼테면 해보라는 듯이 자신만만한 기세였다. 나는 조금 더 가시를 늘렸다. 거의 목마의 미간을 찌를 정도로 가까이 자란 가시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멈췄다.


-옛날 생각나네. 아무래도 서열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어.


목마가 말을 마치자 마자 내 몸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아래로 내리 꽂히는지 몸 전체가 중력에 반해 형태를 잃고 위로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주변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게 먼 곳에 있는 작은 불빛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TV에서만 보던 ‘우주에서 본 지구’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깨달았을 즈음에 나는 바다와 닿을락 말락할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었다.


-안돼!


내가 소리쳤지만 전혀 멈추지 않은 내 몸은 그대로 바다를 뚫고 내려갔다. 순식간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심해를 지나 단단한 땅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내 몸은 말 그대로 지면을 뚫어버렸다. 나는 '으악' 이라던지 '아악' 같은 뻔한 소리를 질렀지만 너무도 빠른 속도에 묻혀 그 외침이 밖으로 발현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속으로만 외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관계없다는 듯 내 몸은 계속해서 지면을 뚫고 나갔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나는 단단한 바위를 뚫고 나왔다. 나오자 마자 나를 반긴 것은 또 다시 물이었고 그것이 바다임을 자각할 때쯤 나는 이미 구름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나는 지구를 관통한 것이었다. 아래에는 내가 지나 온 길이 터널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자, 한 번 더 가볼까?


목마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나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소리를 냈지만 떨어지는 속도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왔던 터널을 그대로 들어가 심해를 지나 아마도 내핵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통과해 다시 심해를 지나 처음 들어왔던 곳으로 솟구쳤다. 숨이차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아팠지만 그 와중에도 캄캄한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지구는 생각보다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자 그럼 한 번 더.


-잠깐!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벌써? 아냐 좀 더 거만하게 굴어도 돼. 언제 또 네가 '지구탐험'을 하겠어.


-아냐! 충분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해!


나는 거의 울듯이 애원했다. 그러자 배경이 순식간에 아까의 방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나는 목마와 마주보고 있었고 목마의 뒤에 놓인 거울에는 검정색의 매끈한 구체가 놓여있었다.


-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목마에게 어떻게 물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아까보다 더 한 일을 겪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혹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


고민끝에 목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목마는 괴기스럽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이제야 좀 대화할 준비가 되었네. 좋아. 설명해줄게 잘 들어. 여기는 내 머릿속이야. 쉽게 말하면 아스트랄, 정신세계지. 내 정신세계에 네가 들어온거야. 정신 대 정신으로 이곳에서 만난거지.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런 것이 가능한거야.


목마가 말을 마치자마자 배경이 바뀌었다. 온통 하얀색 배경의 공간에 목마와 나만이 존재했다. 목마가 고개를 까딱이자 보라색의 소파가 나타났다. 그 위로 폴짝 뛰어오른 목마는 마치 고양이처럼 자기 발에 얼굴을 베고 기대어 앉았다.


-흠 좋군. 그래, 여기서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가능해.


-저기, 아직 내가 좀 정리가 안되어서 그런데 말이야.


내가 얼떨떨한 말투로 묻자 목마는 원래 처음에는 다 그렇다고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너와 같았지. 스승에게 대들고 혼쭐나고 이해를 못해서 어벙하게 서있고. 참 재미있어 사람이라는게. 그러니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같은 역사가 반복되는거겠지?


목마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 보였다. 나는 무슨 헛소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내뱉어서 아까같은 '지구체험'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 혹시 나도 생각하는대로 할 수 있는거야?


-물론.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다 그렇게 했던 거잖아? 나를 찌르려고 했던 건방진 가시를 만든 것도 그렇고 말이야.


나는 목마의 말에 움찔했다. 그가 또 다시 '지구체험'에 나를 보낼까하는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목마는 그럴 생각은 없는지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구체 모양에서 벗어날 수 없는거야? 불편하고 답답한데.


-그건 네가 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지. 말하자면 '의지'의 문제랄까.


-의지?


-그래. 내 목소리에 반응한 네가 페이즈2를 네 의지로 멈추고 여기 온 것처럼 말이야.


-페이즈2가 뭔데?


내가 묻자 목마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짜증이 난 것 같지는 않았고 뭐라고 이야기해야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목마의 생각은 꽤 길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아까는 목마의 '머릿속'에 대한 낯섦 때문에 흥분해서 다짜고짜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지만 지금은 많이 진정이 된 상태였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지루함은 이미 충분히 많이 겪었던 터라 이 정도 기다림은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눈도 보이고 몸도 움직일 수 있으니 이정도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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