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동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이것이 꿈인 것을 자각했다. 목마의 정신 속에서 내 정신이 잠을 자고 꿈도 꾸다니 별 일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나는 우주를 떠다녔다. 어렸을 때 장난치다 쏟은 설탕그릇의 설탕처럼 무수히 많은 별들이 주변을 떠다니며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공기도 없는 우주에서 여유롭게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다. 저 멀리에는 북두칠성도 있었고, 아르테미스를 사랑한 오리온자리도 보였다. 북두칠성 반대편에는 딸 자랑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던 카시오페아 자리도 있었다.
나는 이런 저런 별자리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우주 먼지처럼 부유하는 내 몸 주변으로 이따금씩 크고 작은 소행성들이 빛무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지나가곤 했다. 나는 그럴때마다 제자리에 멈춰서서 소행성이 시야밖으로 사라질때까지 빛무리를 눈으로 쫓았다. 혼자서 보기에는 아까운, 말그대로 장관이었다. 그렇게 소행성을 대여섯개쯤 보냈을까,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꽤 큰 소행성이 바로 옆으로 지나갔는데 그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은 광경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기묘한 느낌이 들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빛무리가 만들어낸 착시 효과인 것일까? 아니면 외계인들인가? 나는 다음 소행성이 지나갈때는 눈을 크게뜨고 자세히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한참을 돌아다녀도 소행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이 멀리서 반짝이는 별들도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고 주변에는 우주 먼지와 같은 것들만 떠다녔다. 슬슬 지루함이 느껴지려던 찰나 나는 새삼 여기가 꿈속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소위 말하는 자각몽이라면 내가 생각하는대로 꿈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아까 지나갔던 이상한 소행성이 다시 날아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눈 앞에 거대한 소행성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행성은 점점 커지더니 예의 그 빛무리를 뿌리며 내 옆을 지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나는 제대로 소행성을 관찰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소행성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속도를 최대한 천천히해서 내 바로 옆을 지나가는 것으로 상황을 재설정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소행성이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번에는 제대로 봐야겠다고 다짐한 터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눈을 깜빡인 적이 있었나? 꿈이니까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가?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소행성이 꽤 근처까지 다가왔다. 소행성 표면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을만큼 거리가 가까워졌을때, 나는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소행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소행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표면에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영상이었다. 픽셀 하나하나가 모여서 거대한 화면을 만드는 것처럼 제 각각의 픽셀들은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여러 픽셀들이 합쳐져서 '소행성'이라고 착각할 만큼 커다란 덩어리가 된 것이었다. 게다가 픽셀속 영상에 등장하는 것은 전부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엄마와 아빠도 있었고,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도 있었다. 지나가다 만난 머리가 유달리 큰 우체부 아저씨도 있었고,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크게 울던 아이도 엄마를 기다리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소행성을 여기저기 시간가는줄 모르고 뜯어보는데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 소행성처럼 보이는 것이 나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가 응집된 것이라면, 저 무수하게 떠 있는 별들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행성은 갑자기 빨라지며 빛무리를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빛무리가 소행성이 타면서 나는 불빛이 아니라 영상들이 빠른 속도에 못이겨 잔상을 남기고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소행성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사라져버렸지만 나의 관심은 더이상 '소행성'에 있지 않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 떠다녀도 닿지 않던 저 별들, 가까이 가면 엄청나게 거대할 것 같은 저들에게 나와 관련된 어떤 비밀이 있을까 하는 부푼 기대감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나는 별들 중 가장 반짝이는 것 같은 하나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그 별이 내 바로 앞에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과 나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몇 번을 다시 시도해서 여전히 별은 저 멀리서 밝은 빛을 뿜을 뿐 전혀 가까워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시 몇 번을 시도해도 여전히 나는 제자리에 있었고, 별은 닿지 않는 가지에 있는 포도처럼 탐스럽게 빛났다. 나는 혹시 다른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까 하던대로 머릿속에서 소행성을 불러냈다. 그러자 곧바로 바로 옆에 소행성이 나타났다가 이내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내 생각대로 꿈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렇다면 집중력의 문제인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난 나는 다시 한 번 집중해서 소행성을 불러냈다. 내 옆에 나타난 소행성이 빛무리를 남기며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그 위에 올라탔다. 내가 올라타자마자 소행성은 별의 반대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놀이공원에 있는 60M 높이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탄 것만 같은 속도감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집중해서 소행성을 멈춰 세웠다. 다행히 소행성은 내 생각과 동시에 멈췄다. 나는 소행성의 머리를 돌려 아까 별이 있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까보다 더 작아진 별이지만 주변의 별들이 빛을 잃고 사라진 반면 내가 고른 그 별은 여전히 밝은 빛을 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소행성에 걸터 앉아 말고삐를 쥐듯 손을 들었다. 그러자 손에 딱 맞는 끈이 쥐어졌다. 어떤 동물의 가죽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질기고 단단했다. 나는 끈을 억세게 쥔다음 마음속으로 셋까지 세었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소행성은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별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내 몸은 순간적으로 뒤로 젖혀졌지만 소행성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끈을 쥐고 있는 덕분에 다시 자세를 고쳐잡을 수 있었다. 지상과 하늘을 포함해 지구에 있는 어떤 교통수단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소행성에 올라탄 나는 점점 크기가 커져가는 별을 보며 나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이러했다. 우주 공간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별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상상’이 나로서는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처음의 가설이었다. 그렇다면 낯선 환경을 익숙한 무엇으로 바꾼다면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에 충분히 이 ‘상상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소행성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말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 따위를 생각하다가 더 빠른 것이 없나 하고 보니 조금 전 사라진 소행성이 생각이 난 것이다. 어느 새 코 앞까지 사람만한 크기로 변한 별을 보며 나는 긴장했다. 막상 가까이서 보니 별의 크기가 실감이 났다. 별이 사람 크기에서 동네 뒷산, 설악산 크기를 거쳐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크기가 되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우주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행성 앞에 먼지보다 작은 인간 하나. 나는 신비하고도 압도적인 광경에 잔뜩 위축되었다. 푸른 빛을 내뿜는 별의 바로 옆에는 똑같은 크기의 별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별은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나는 소행성을 움직여 푸른 별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내 예상대로 푸른 별 역시 영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우연히 지나가는 소행성보다 훨씬 더 빽빽한 영상들이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선명하고 빛이 나는 영상들이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영상들은 모두가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선명히 재생되고 있는 영상 하나쪽으로 소행성을 더욱 접근시켰다. 그 순간이었다. 소행성이 별이 도달할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푸른 별을 향해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에 나는 소행성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 불룩 솟아나온 돌부리에 부딪혀 겨우 멈췄다. 소행성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푸른 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소행성 표면의 돌들이 부르르 떨리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돌들은 공중에서 '파삭' 소리를 내며 불꽃을 튀겼다. 뒤이어 내 몸 만한 바위들도 들려 올라가더니 공중에서 여러 갈래로 부서지며 타올랐다. 곧 소행성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듯한 모양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지구에 닿기 전에 소멸하는 운석들처럼 나 역시 잿더미가 될 상황이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재빨리 머리를 굴려봤다. 급박한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타고 있는 소행성은 이제 처음에 내가 불러냈을 때보다 확연히 작아져 있었다. 지금도 내 눈 앞에서 돌 하나가 떠올라 파스스 소리를 내며 한 줌 불꽃으로 변해버렸다.
이대로가면 나 역시 한줌 잿더미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속으로 '제발 좀 멈춰!'라고 외쳤다. 가히 단발마와 같은 외침이었다. 순간 거짓말처럼 속도가 사라졌다. '속도가 사라졌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서서히 멈추는 것도 아니고 소행성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별 코 앞에서 멈춰섰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새침을 떼는 아이처럼 조용히 부유하는 소행성을 보고 나는 기가찼다. 나는 식은땀을 쭉 흘린 기분이어서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실제로 축축한 땀이 묻어나왔다. 그러고보니 나는 더이상 칙칙한 공이 아니었다. 내 몸을 여기저기 훑어보니 분명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작았다. 체형으로 보니 5살 정도 아기의 몸이었다. 작은 고사리 손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몸은 피부색과 똑같은 하얀색 나시 원피스를 입고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아쉽게도 거울이 없어서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가만, 거울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아닌가?
나는 손에 들만한 작은 거울을 생각했다. 그러자 오른손에 딱 맞는 크기의 거울이 쥐어져 있었다. 거울로 들여다 본 내 얼굴은 다행히 내 모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6살의 내 모습이었다. 몇 달전 방 정리를 하면서 꺼낸 옛날 앨범에서 본 사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여섯 살의 나는 하얀 나시 원피스와 새빨간 구두를 신고 유치원 체험학습을 갔었다. 어린이 대공원에 간 날이었는데, 그 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자아이와 다투었다. 서로 먼저 놀이기구를 타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몸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성질이 대단하여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쟁취하려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누가 놀이기구를 먼저 탈 차례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가 먼저 그 남자애를 밀친 것은 분명이 기억이 난다. 남자애는 내가 있는 힘껏 밀어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변의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여자애한테 졌다고 그 남자애를 놀렸다. 나는 의기양양하여 그 남자애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애는 분한듯 구슬같은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내게 달려들어 손톱으로 내 얼굴을 쭉 그어놓았다.
아직도 그때의 아픔이 생생하다. 그 남자애의 손이 훑고간 왼쪽 뺨이 처음에는 따갑다가 이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나는 아픔보다도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이 분해서 씩씩거리며 그 남자애를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내 옆에 있던 친구가 나의 팔을 붙잡고는 소리쳤다.
"선생님 얘 얼굴에서 피나요!"
친구의 말에 나는 자유로운 반대편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촉촉한 것이 손에 만져졌다. 손을 아래로 내려보니 친구의 말대로 손가락에 묻은 것은 붉은 색의 피였다. 아빠의 자전거 자물쇠에서 맡은 비릿한 쇠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남자아이들은 나를 할퀸 범인의 주변을 벽처럼 둘러쌓았다. 여자애들은 내 옆으로 다가와 어떡해, 피가 많이 나 라며 나를 다독였다. 저 멀리서 선생님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볼에서부터 뜨거운 피가 간지럽게 타고 내려와 턱 끝에서 톡,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울지도 않고 피도 닦지 않은 채 피 묻은 손을 어정쩡하게 든 자세로 굳어버렸다. 선생님의 괜찮냐는 말에도,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남자아이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쇠 비릿내 속에서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날 우리 엄마와 아빠는 그 남자애를 탓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에 흉터가 남으면 보기 좋지 않다며 서둘러 피부과로 나를 데려갔다. 흉터는 생각보다 커서 몇 달에 걸쳐 피부과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때의 일이 어린 나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내가 타인에게 가한 폭력이 나에게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교과서적인 내용보다도 좀 더 원초적인 것이었다. 타인이 내게 폭력을 행사할 때 내 몸안에 있는 피가 밖으로 나올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내 몸의 피를 밖으로 다 빼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가져오는 공포가 한동안 나를 악몽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6살의 나는 일찍부터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손거울을 보니 왼쪽 뺨에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흉터자국이 보였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흉터는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기억과 함께 봉합되었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던 나쁜 기억이던 간에.
거울을 내려놓고 나는 소행성을 움직여 별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푸른 빛깔의 흑백영상들이 불꽃처럼 너울거렸다. 마치 SF 영화에나 나오는 홀로그램처럼 입체적인 모습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나는 좀 더 자세히 볼 요량으로 소행성을 가까이 붙였다. 영상의 끝자락이 일렁이며 코 앞까지 다가왔다. 여러가지 영상들이 정신없이 재생되고 있는 가운데 한 영상이 눈에 띄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이었는데, 4학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때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꼭 갖고 싶은 책가방이 있었다. 엄마와 백화점을 갔다가 우연히 본 가방이었는데, 보자마자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태어나서 그때가 처음이었다. 빨간색 가죽으로 된 백팩이었는데, 마네킹이 매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얼굴 없는 마네킹이었지만 그 가방하나로 예쁜 얼굴이 상상될 정도였다. 엄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달라고 졸라보았지만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보니 성인 여성 브랜드의 가방이었다. 성인 여성 브랜드라고 꼭 성인만 사용해야 된다는 규칙은 없지만 그때 당시 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가방 보다 두 배 정도 비쌌고, 너무 노숙해보인다는 것이 엄마의 반대 이유였다. 어린이는 어린이 다워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생각이었다. 그 날 백화점을 나갈때까지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눈치를 봤지만 엄마의 철학은 두터운 성벽과도 같아 도무지 넘어갈 방법이 없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좌절과 절망감이었다. 6살에 느낀 공포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그 때 당시의 나는 좌절과 무력, 절망, 엄마에 대한 실망 따위가 엉켜 저녁도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그때는 엄마보다 얼굴 없는 마네킹이 매고 있는 새빨간 가방이 더 간절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꾸짖지 않고 아무런 말 없이 내버려두었다. 나는 몇 시간을 눈이 부르트도록 울다가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산타가 다녀갔었지’
나는 다음 날에 기뻐서 뛰어다니는 나의 모습을 생각했다. 지금 영상 속의 나는 울다 지쳐 잠이들었지만 해가 뜨고 아침이 오면 뜻밖의 선물에 기분이 날아갈 듯 할 것이다. 나는 기억을 떠올리며 어린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영상의 실오라기 하나가 내 얼굴쪽으로 닿을 듯이 다가오더니 내 몸을 확 잡아챘다. 나는 ‘어어’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어디론가 빨려들어갔다. 처음 목마의 정신세계에 들어올 때처럼 온몸이 뱅글뱅글 돌며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마침내 회전이 멈추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어지럼증이 멈추고 나자 나는 시야가 이상하게 파랗다는 느낌을 받았다. 온통 푸른빛깔의 음영만이 가득한 풍경이었다. 너무 많이 돌아서 그런가 싶어 눈을 부볐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이 손가락을 빗질하듯 쓸었다.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어 얼른 책상 옆에 놓인 거울을 손에 쥐었다. 그 곳에는 조금 전까지 내가 소행성을 타고 관찰했던 어린 나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퉁퉁부은 눈을 보니 확실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방금까지 보고 있덛ㄴ 영상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온통 푸른 빛으로 물들인 배경도 이해가 갔다. 아까보다 더 커진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가볼까 했지만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나는 의식만 남은채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의식은 깨어있었지만 육체는 수면을 취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것에 일일히 크게 놀라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다. 나는 굳이 벗어나려하지 않고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비디오를 빨리감기하는 것처럼 창문 너머로 구름이 지나갔고 달이 움직였으며 내 몸도 쉴새 없이 뒤척였다. 새벽 4시 쯤 아빠가 몰래 가방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빠는 빠르게 내 의자에 가방을 걸어놓고는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나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나는 10년 만에 아빠가 언제 내 방에 들어왔는지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자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동안 어느 새 내 몸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퉁퉁 부은 눈으로 빨간 가방을 발견한 나는 활짝 웃으며 달려가 방문을 열고 소리쳤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그 순간 나는 처음에 영상에 들어왔을때와 같은 방식으로 바깥쪽으로 빠져나왔다. 몸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이번에는 안쪽에서 뱉어내듯이 영상 속에서 튀어나온 나는 어느새 소행성 위에 앉아있었다. 푸른 빛의 영상은 내가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가는 장면을 재생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기가 영상의 처음 부분이고, 아침에 가방을 발견한 시점이 마지막 부분인 듯 했다. 나는 신기한 눈으로 푸른 별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간혹가다 기억이 잘 안나는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영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어김없이 몸이 뱅글뱅글 돌며 영상 속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영상이 끝까지 재생이되면 마찬가지로 뱅글뱅글 돌며 다시 소행성 위로 튀어나왔다. 나는 몇 번의 경험 끝에 이 별에 재생되는 영상들은 나의 기억의 편린들임을 확신했다. 아마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은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할 뿐, 분명히 내가 경험한 일들임은 분명했다. 이 별은 마치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세숫대야처럼 나의 모든 삶의 경험이 응축된 일종의 저장소인 셈이다. 한참을 푸른 별 이곳저곳을 탐색하다 나의 시야는 마침내 건너편의 보라별에 닿았다. 푸른 별이 기억의 저장소라면 보라별은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소행성을 움직여 푸른 별 건너편에 있는 보라별로 가까이 갔다. 보라별에 가까워 질수록 무엇인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영상을 너무 많이 왔다갔다 한 관계로 '뱅글뱅글'에 의한 여파라고만 생각했다. 얼마 안 있어 보라별에 도착한 나는 보라별도 푸른별과 마찬가지로 온갖 영상으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다. 다만 푸른 별과 다른 점이 있었다. 푸른별보다 크기가 훨씬 작았으며 영상의 모든 인물들의 표정들이 보기 괴로울 정도로 참혹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우는 얼굴도 있었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얼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대부분이 나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찬찬히 영상들을 들여다봤다. 푸른 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내 기억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보랏빛이 강하게 나는 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여느 날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전날과 똑같이 늦잠을 자고 학교에 늦을까봐 부리나케 준비를 했다. 지각 5분 전에 교실에 들어와 오늘도 늦게 왔냐는 짝꿍의 핀잔에 '지각은 아니다'라고 받아쳤다. 3교시까지는 비몽사몽으로 수업을 듣고 4교시는 조금 집중해서 들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친구들과 모여 요즘 관심있는 연예인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하루 중 가장 컨디션이 괜찮은 시간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5교시와 6교시를 보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교문 밖을 나섰다. 그 날이 다른 날과 달랐던 것 하나를 꼽자면 드디어 엄마의 허락을 받아 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간 것이었다. 내가 '롤모델'로 삼는 여배우가 있었는데, 그 배우가 이번에 나온 영화에서 염색한 머리가 너무 예뻤다. 누군가의 패션을 따라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촌스러운 것이지만 그 시절에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빠는 흔쾌히 허락했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학생이 무슨 염색이냐며 학생은 학생다울 때 가장 예쁘고 지금 아니면 나중에는 어차피 느낄 수 없을테니 학생이 주는 앳된 매력을 즐기라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었다. 4학년의 나였다면 입을 삐쭉 내밀고 방에 틀어박혀 울다 잠들었겠지만 사춘기가 온 나에게 엄마의 반대는 단지 넘어야할 높은 산일 뿐이었다. 몇날 며칠동안 땡깡도 부려보고 화도 내고 울기도 하면서 엄마를 졸랐다. 그래도 엄마는 요지부동이었지만 내가 염색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자 듣다 못한 아빠가 내 편을 들어줬다.
"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한 번 허락해줘. 너무 튀는 색깔도 아니던데 뭘."
그랬다. 다행히 나의 워너비의 머리색은 빨갛고 파란, 누가 봐도 튀는 그런 색이 아닌 고급스러운 갈색이었다. 엄마는 그 점은 인정을 했는지 '지금 머리색깔이랑 크게 차이나지 않는데 그럴거면 돈 아깝게 뭐하러 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히 해도 괜찮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는 사냥꾼처럼 엄마의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 총 공세를 펼쳤다. 마침내 엄마의 입에서 '그래, 대신 너무 밝지는 않게'라는 대답을 들은 나는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쳐 다음 날 지각을 할 뻔한 것이다.
학교가 끝나고 나는 부리나케 짐을 챙겨 교문 밖을 나섰다. 카페에 가서 놀자는 친구들의 유혹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내 머릿속은 TV속 연예인과 같은 머리색을 하고 학교 아이들의 선망이 대상이 된 자신을 상상하느라 빈자리가 없었다. 어딜 그리 급히가냐며 같이 가자는 친구들도 거짓말을 해가며 떼어놨다. 변화의 과정은 오로지 나 혼자만이 느끼고 싶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될 때처럼 지켜보는 이 없이 온전한 탈피를 느끼고 싶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에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빠른 걸음과는 반대로 집 근처 미용실이 그 날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가까스로 미용실에 도착한 나는 자리에 앉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언니'를 불렀다. 허리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허락 받았어?'라고 묻는 언니는 이 미용실에서 원장님 다음으로 높은 직원이었다. 원장님은 출근하는 날이 거의 없으니 사실상 이 미용실의 대장이나 다름 없었다. '디자이너 soo mi'라고 적힌 금색 명찰을 차고 있는 언니를 처음 본 것은 반년 전이었다. 미용실 원장님이 2호점을 차리면서 기존의 미용실을 맡아줄 직원을 데리고 왔는데, 그게 수미 언니였다. 수미 언니는 청담동에 있는 유명 헤어샵에서 8년을 근무했다고 원장님이 손님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사람들은 '어쩐지 응대가 다르더라'라며 수미 언니를 대단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나 역시 수미 언니가 대단한 사람으로 느껴져 선뜻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어쩐지 부자만 응대하던 사람이 우리 동네에 와서 평범한 사람들의 머리를 손질해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다르게 수미 언니는 나를 편하게 대했다. 처음 언니에게 머리를 맡겼을 때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을 수미 언니는 '쪼끄만게 무슨 선생님이야, 그냥 언니라고 불러'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언니는 내가 머뭇거리자 가벼운 농담과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머리를 자르면서 수미 언니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수미 언니는 사천이 고향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다 중국인 줄 안다고 투정섞인 말을 뱉었다. 그렇지만 사천은 엄연히 경상남도이고 작지만 꽤나 매력적인 도시라며 방학하면 한 번 재워줄테니 놀러오라고 말했다.
또 언니는 위로 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자기와는 다르게 공부를 잘해서 미국에 유학을 갔다고 했다. 그 밖에 지금 사는 동네는 신림인데 죄다 고시공부하는 애들만 있어서 숨이 막힌다는 것과, 조금 이따 저녁에 파마 예약이 있는데 파마약이 떨어져 직접 사러가야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술술 늘어놓자 나로서도 내 이야기를 안할 수 없었다.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머리를 다 하고 난 뒤에 나는 그녀에게 언니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래, 어떻게 허락을 받았어? 엄마가 계속 반대하신다더니."
"식음을 전폐했죠. 일주일 내내 졸랐어요 진짜 어휴."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언니는 아마 엄마도 그렇게 고개를 저으셨을꺼라며 깔깔깔 웃었다. 나도 언니를 따라 웃으며 '자식 이기는 부모 없죠!'라고 의기양양하게 받아쳤다. 언니는 내 등을 찰싹 때리더니 자리에 앉혔다. 작은 미용실 가운 위에 커다란 가운을 또 씌우더니 목 부분에 받침을 끼웠다. 염색약이 떨어지지 않게 받치는 용도인 것 같은데 내가 바나나를 목에 끼운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니 언니가 또 한 번 깔깔 웃으며 내 등을 찰싹 때렸다. 셋팅이 끝나고 언니는 특별히 나를 위해 개인적으로 명품 염색약으로 해주겠다고 말했다.
"원래 여기는 그 염색약 쓰지 않아요?"
"쪼끄만게. 어른이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하고 말아야지 꼬치꼬치 캐묻는거 아냐."
말은 그렇게 해도 우리 둘은 서로를 보며 실실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염색약을 다 발랐을 때쯤 미용실 문에 달린 종이 '짤랑'하고 울리더니 손님이 들어왔다. 키가 180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였는데, 눈코입이 선명하게 큰 미남이었다. 나이는 우리 학교 체육선생님과 비슷해보였다. 나와 언니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순식간에 모종의 의견을 교환했다. 가끔은 눈빛만으로도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다. '잘생겼다'는 나의 의견에 동의한 것 같은 언니는 예의 그 사람 좋아보이는 평소 웃음보다 더 짙은 미소를 띄우며 남자를 내 옆자리에 앉혔다. 나는 질색하며 언니에게 또 한 번 눈으로 내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언니는 아랑곳않고 카운터로 휙 가버렸다. 나는 거울로 내 모습을 살폈다. 염색약에 잔뜩 절여져 물미역같이 흐물거리는 머리카락들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수분기가 부족한 얼굴은 자세히 보니 눈썹 가운데 쪽이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더이상 내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 눈을 아래로 떨궜다. 언니는 하필이면 왜 이렇게 매력적인 남자를 내 옆에 앉힌걸까 원망했지만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마도 속으로 낄낄거리며 나와 단둘이 있을때 오늘의 일을 두고두고 놀릴 속셈이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남자의 얼굴이나 한 번 더 자세히 보기로 했다. 슬쩍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잘생겼다. 야트막한 동네 뒷산이 아니라 교과서에서 읽은 아팔레치아 산맥처럼 높고 웅장한 코가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 잡았다. 그 위로 크지만 순박함보다는 강인함을 담은 눈이 새까만 눈썹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은 슬며시 미소 비슷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전체적인 인상이 너무 사납지 않게하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피부도 적당한 흰색과 적당한 구릿빛이 어우러져 너무 연약해 보이지도, 너무 강해보이지도 않았다. 어쩜 이렇게 여자들이 좋아하는 적당한 부분을 한데 모아놓았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남자가 갑자기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남자가 얼굴을 돌리는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자신을 훑어보는 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인가? 나는 다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를 강렬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적나라하게 느낀다면 좀 전에 내가 그 남자를 보지 않은 척 했던 행동들도 큰 의미가 없겠다 싶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며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얼굴쪽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피가 등을 따라 쭉 내려가며 송골송골 땀방울을 만들어냈다. 나는 언제까지고 목이 아프게 고개를 숙일 수 없었기에 체념한 듯 고개를 들었다. 대신 시선은 거울의 정면에 고정했다.
주변 시야로 남자의 얼굴이 눈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얼굴의 각도가 내 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호흡했다. 남자 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도록 부던히 노력했다. 인간이 다 그렇듯 하지 말라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에 더 끌리는 법이다. 나는 눈동자만 1cm 정도 돌려 그의 얼굴을 보려다 그만 '헉' 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매력적이었던 얼굴에 사람 주먹만한 크기의 동공이 눈이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깜짝놀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남자는 얼굴이 뚫린채 서서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찌나 느릿하게 움직이는지 비가 온 뒤 지렁이가 흙을 뚫고 올라와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가면 이 남자는 나를 절대로 쫓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내 몸은 마비가 된 것처럼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눈도 깜빡하지 못한 채로 그 남자가 기괴한 몰골로 내게 다가오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남자의 얼굴은 점점 더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입술이 있던 자리에는 빨간 소용돌이가 생겼고 코는 아래에서 위로 뒤집혀 천장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 한 모양이었다. 나는 머리털이 쭈삣쭈삣 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지만 혀 끝에서 막혀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느릿하게 움직이던 남자는 어느 새 내 눈 앞까지 가까이 왔다. 가까이서 보니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얼굴이 더욱 더 나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수미 언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남자는 이제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러더니 소용돌이치고 있는 입 같은 무엇인가를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무엇인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남자가 내게 말을 거는 모습을 할 때마다 나는 머리를 누가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껴야 했다.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손으로 머리를 쥐어감싸고 싶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럴수록 두통은 더 심해졌다. 남자는 내 앞에서서 입을 벌렸다 말았다 하더니 어느 순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정수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은 사라지질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진 통증은 눈알까지 번져 이제는 코 위쪽에 위치한 부분들은 전부다 통증의 범위였다. 나는 점점 더 범위를 넓혀가는 통증과 눈 앞에 괴기한 몰골로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미치기 일보 직전의 심경이었다. 아무리 명령을 해도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 없었다. 자포자기한 심정과 함께 속으로 한숨을 내쉰 순간, 남자의 얼굴이 급속도로 내 얼굴에 가까이 왔다. 남자의 소용돌이 치는 입에서 혀로 추정되는 길쭉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며 내 입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지금까지 태어난 것중에 가장 크게 소리를 질렀고 일생일대의 위기를 느낀 탓인지 성대는 내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아아아악' 하는 나조차도 듣기 괴로음 고음의 비명이 미용실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나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정상으로 돌아온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엄마는 병상 옆에서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그림자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주홍빛인 것을 보니 아마도 오후인 것 같았다. 병실에 침상은 내가 누워있는 것 밖에 없었다. 새근새근 하는 엄마의 숨소리와 위잉 하는 가습기의 소음만이 존재하는 조용한 병실이었다.
내가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도 눈을 떴다. 엄마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연신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꺼낸 한마디는 '물' 이었다. 일어난 직후 타는 목마름이 식도를 끝에서 끝까지 가뭄처럼 메마르게 하고 있었다. 엄마는 서둘러 간호사를 불렀고 뒤이어 따라온 의사 선생님이 내 상태를 진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내 병명은 '세균성 뇌염'이었다. 의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세균이 뇌에 침투에 염증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내가 걸린 병이었다. '두통과 오심, 구토가 일어나며 열이 발생할 수 있다. 또 발작이나 경련이 나타날 수 있으며 치매나 실어증, 간질이 후유증으로 남을 수 있다. 검사를 몇 번 더 해봐야하겠지만 염증 위치가 좋지 않아 예후가 좋지 않을 수 있다.'
이후 며칠에 걸친 검사는 나를 힘들게 했다. MRI와 CT를 찍고, 척추천자 검사를 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검사였다. 머리와 무릎을 잔뜩 구부리고 태아처럼 시술대에 누운 다음 마취주사를 맞고 척추 사이에 기다란 바늘을 집어넣어 흘러나오는 척수액을 받았다. 의사가 바늘을 찔러넣었을 때 끔찍한 통증과 함께 몸 이곳 저곳이 전기가 통하듯 찌릿한 느낌이 들어 외마디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의사는 척추천자를 실시하는 부위에 신경이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침착하게 설명하며 다른 곳을 찔렀다. 몇 번의 실패와 몇 번의 비명 후 드디어 성공적으로 나의 척수액을 받아든 의사는 후유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3시간 동안은 꼼짝없이 천장을 보고 누워있으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끔찍한 검사들이 다 끝나고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던 차에 수미 언니가 병원을 방문했다. 언니는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괜찮냐고 물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괜찮은 것 같지 않다고 받아치자 언니는 '이 지지배가 이 꼴이 되어서도 농담이 나오냐'며 손을 들어 한 대 쥐어박는 모션을 취했다. 나는 깔깔거리며 웃었고, 언니도 눈물을 매달고 비실비실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