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코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arka Oct 30. 2022

5.

언니가 그 날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그 남자가 내 옆에 앉은 후, 언니는 화장실에 갔다. 엊그제 먹은 곱창이 퍽 좋지 않았는지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마침 나도 염색약을 발라놓았으니 급한 것은 다 한 셈이고, 방금 온 잘생긴 남자 손님은 잠시 기다려도 되었다. 대부분의 남자 손님이 그렇듯, 그도 그다지 크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언니는 서둘러 화장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언니는 화장실에 앉아 은은한 통증을 주던 것들을 비워냈다. 한결 개운해진 배를 문지르며 언니는 나란히 앉아 있는 나와 매력적인 남자를 생각하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반박했지만, 언니의 눈에는 그 남자가 들어올 때부터 수줍어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보였다고 했다. 옆자리에 앉아 거울로 그 남자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볼 나를 생각하니 언니의 입에서 웃음이 쿡쿡 비져나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사이렌처럼 3초간 울리더니 뚝 그쳤다. 언니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음을 인지하고 서둘러 뒤처리를 하고 미용실로 뛰어들어왔다. 언니의 눈에 비친 것은 의자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나와 그런 나의 어깨를 받치고 당황한 채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언니가 황급히 내게 달려가며 말했다.


"아니, 학생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상태가 안좋아 보이길래 괜찮냐고 말을 걸었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어요."


남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서 남자가 나를 언니에게로 건네고 서둘러 119에 전화해 구급차를 요청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다행히 바로 옆블럭에 소방서가 있어서 10분도 안되어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구급차에서 날듯이 내려온 구급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내 눈동자에 펜등을 비추고 이리저리 내 상태를 확인한 다음 순식간에 들것에 실어 구급차로 옮겼다. 구급차 문을 닫기전 '혹시 원하는 병원이 있으세요?' 라고 묻는 구급대원의 질문에 수미 언니는 '제일 큰 병원으로 가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무슨 노인네처럼 제일 큰 병원이라고 말했냐'고 웃으며 타박하자 언니 역시 깔깔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급하니까 그렇게 말이 나왔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제일 큰 병원이 병은 제일 잘 고치지 않겠냐며 언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언니를 보며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다급하게 '제일 큰 병원이요!'라고 외치는 언니의 모습이 상상되며 언니가 얼마나 나를 걱정했는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 앞에 보이는 언니의 촉촉하게 젖은 눈가가 그것이 단순히 짐작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언니는 한참을 나와 이야기했다. 그 날 미용실을 찾은 매력적인 남자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내가 쓰러지고 난 뒤 미용실을 찾은 손님들의 뒷이야기를 지나 언니의 부모님이 선자리를 주선한 이야기까지 우리는 입이 닫혀있을 때보다 열려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언니는 병동의 면회객이 다 떠나고 나서야 입을 닫을 수 있었다.


"이제 그만 나가셔야 합니다."


어서 빨리 나가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간호사가 말하자 언니는 예에- 라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다음에 또 오겠다며 병실문을 나갔다. 하지만 언니를 병실에서 다시 만난 것은 한참이나 뒤의 일이었다. 미용실 사장님이 갑작스럽게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어 언니 혼자 미용실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원래부터 거의 혼자 일하다시피했지만 운영까지 혼자 도맡아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언니는 간간히 전화를 걸어 일이 너무 바쁘다고 조만간 시간이 나면 꼭 가겠다고 여러차례 전화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말라고 했지만 사실 언니가 찾아온다고 내가 언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언니가 병문안을 다녀간 후부터 하루에 몇차례씩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시작됐다. 미용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물이 제 모습을 잃고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하며 머리가 빙빙 돌았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코입이 뒤죽박죽 되며 도저히 쳐다보기 힘든 형상으로 변했다. 나는 그런 변화들을 괴롭게 받아들이며 어느 순간 머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처음 발작을 일으킨 것은 엄마가 옆에 있을때였다.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 엄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내게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엄마와 여느 때처럼 대화를 나누던 내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거품을 물며 쓰러져 몸을 베베 꼬았다는 것이다. 그관절이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뒤틀리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라 엄마도 많이 놀랐다고 했다. 말이 놀랐다는 것이지 아마 엄마도 무서웠을 것이다. 내가 쓰러진 뒤 병실을 찾은 담당 의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뇌염 후유증으로 간질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 가족에게 설명했다.



의사가 그 이야기를 한 뒤부터 간질은 나를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간질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나를 찾았다. 밥을 먹을때도, 병문안을 온 친구와 이야기를 할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나를 찾는 간질에 응답하여 발작을 일으켰다. 끔찍한 두통은 하루에 몇번씩이나 겪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나를 더 괴롭게 한 것은 끔찍한 두통이 그 이후에 내게 찾아올,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추한 모습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점이었다. 한번은 병문안을 온 친구들 앞에서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내가 학교에 나가지 못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같은 반 친구가 신나서 이야기해주고 있던 참이었다. 한참 신나게 이야기하던 친구가 장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같은 반 남자 아이의 이름을 말했다. '걔도 너 어떤지 궁금하대. 괜찮은지 물어봐 달래.'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친구가 말한 남자 아이는 우리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기로 손꼽히는 아이였다. 하도 인기가 많아 주변 학교에서도 그 아이를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얼굴이 잘생기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아이의 인기를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아이보다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아이들도 주변학교를 통틀어 열 손가락은 가볍게 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그 아이의 이름이 상위권에 위치했다. 그 아이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외모를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들 사이에서 마치 아이돌과 같은 존재가 나의 안부를 묻다니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번에 같은 반이 되어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매일 아침 일어날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친구는 내 얼굴을 보며 '얘봐, 얼굴 빨개졌어!'라고 놀렸지만 나는 그리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나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친구의 말에 응수했다.


"부럽지?"


친구들은 내 말에 깔깔거리고 웃으며 맞다고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나는 친구들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 이제 곧 나도 이 답답한 병실을 벗어나 이 아이들처럼 몸에 꼭 맞는 교복을 입고 옅은 화장도 하며 평범한 중학생으로 살아갈 것이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그 아이가 나를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하루라도 빨리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예의상 한 말이겠지만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아이가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만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그 아이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였다. 이상하게 그 아이의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아이를 생각하며 설레는 기분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얼굴을 찡그려가며 기억을 더듬었다. 친구들은 갑자기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아무말도 안하자 걱정이 되었는지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웃는듯 마는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어떻게 생겼더라. 나는 친구들을 앞에두고 머릿속으로 쉴새없이 얼굴들을 조합했다. 계란형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을 갖다 붙이기도 했고 산처럼 우뚝 솟은 콧날에 두툼한 입술을 붙여보기도 했다. 전부 다 누가봐도 빼어난 얼굴이었지만 그 아이의 얼굴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내 기억속의 그 아이는 얼굴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야기할 때 단어하나가 기억날 듯 말 듯 하면서 끝내 떠오르지 않는 상황처럼 기억력에 대한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 내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아무말도 하지 않자 친구들 중 한 명이 우리 이만 갈까? 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 아이의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아 답답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자 친구들은 다시 한 번 깔깔 거리고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한 친구가 그런 것이라면 진작 말을 하지- 라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 아이와 SNS 친구라며 자랑스럽게 말한 친구는 내게 자신의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화면 속에는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눈썹도 진하고 크지만 남자다운 눈망울에 굳게 다문 입술이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이렇게 생겼었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친구들은 내 반응을 보고 웃으며 사진을 더 보고 싶으면 옆으로 넘겨서 보면되지,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척 안해도 된다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친구들의 반응에 그런게 아니라 진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시끌벅적한 파티도 웨이터의 사소한 실수로 정적이 흐르곤 한다. 하물며 나를 위해 모인 친구들의  즐거운 분위기를 나의 문제 때문에 단번에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친구의 말대로 옆으로 넘겨서 다른 사진들을 살펴봤다. 여전히 오똑한 콧날에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러다 문득 사진의 남자가 낯이 익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눈을 찡그려가며 사진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드디어 본성에 솔직해졌다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는 그런 것 아니라고 적당히 손사래를 치면서도 사진을 집중해서 관찰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그렇지만 내가 알던 그 애의 얼굴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얼굴이다. 그 애의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제는 이 사진 속 남자가 그 애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누군지 알 것 같으면서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의 머릿속에서 이 남자에 대한 정보를 총 집합시켜 그 동안 내가 봐왔던 수많은 사람들과 대조하느라 분주했다. 뇌세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필요한 정보를 주고 받느라 머리가 간질간질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던 순간 세포 A가 기억의 저편에서 줏어온 정보가 휴대폰 속에 있는 남자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심히 머릿속 이곳저곳을 뒤지던 뇌세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A가 가져온 정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휴대폰 속 남자의 사진과 세포 A가 가져온 기억의 조각이 일치하는 것으로 판별한 세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세포들의 비명과 함께 나는 끔찍한 두통을 겪으며 입밖으로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들고 있던 휴대폰은 병실 구석으로 던져버린지 오래였다. 휴대폰 속 남자는 다름 아닌 내가 쓰러지던 날 미용실을 찾은 그 남자였다. 나는 형체가 뒤틀린 채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며 참을 수 없는 두통을 겪어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의식을 잃었다.


그 날 이후로 학교 친구들의 방문은 없었다. 몇 번이고 연락을 했었지만 내 메시지를 읽은 표시만 사라질 뿐 답장은 없었다. 나중에 내 병실 앞에서 저희들끼리 쑥덕대는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그 날의 실상을 알게 된 나는 더이상 그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엿들은 바에 의하면 그 날의 나는 호러 영화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처럼 굵직한 소리를 내며 괴성을 질러댔다. 그런 나를 진정시키려는 친구의 머리를 다 뽑아버릴 것 마냥 양손에 가득 쥐고 머리를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당황한 아이들이 나에게 달라붙어 말리려해도 역부족이었다. 나에게 머리털을 잡힌 친구는 소리를 지르며 괴로워했고 나는 그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르며 한참을 그 친구의 머리털을 잡고있다 갑자기 몸을 떨며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사건의 전말을 다 알게됐음에도 나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날, 미용실에서 형태가 뒤틀린 남자를 목격한 날, 이미 나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며칠 뒤 그 때 병문안을 온 친구중 한명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긴 장문의 메시지였다. 그 날 이후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한 메시지는 구구절절 나의 안부를 묻는 말과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상당부분 차지했다. 마치 꺼내야할 중요한 말을 차마 하지 못해 입에 뜬 말들을 계속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3분의 2쯤 읽다보니 내 생각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 날 병문안을 왔던 친구 중 한 명이 학교에 나에 대해 소문을 냈다는 것이었다. 재밌는 것은 내게 머리채를 잡힌 아이나 휴대폰이 박살난 친구가 아니라 그 옆에서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던 애가 소문을 냈다는 것이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나와 말도 별로 섞지 않았고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던 애였다. 그때는 그래도 병문안을 와준 것이 고마워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실 내 병문안을 와줄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학교에는 내가 완전히 정신이 돌아버린 미친여자로 소문이 나있다고 했다. 좋아하는 남자애 사진을 보고는 발작하며 친한 친구의 머리털을 죄다뽑아버리려고 했다, 괴성을 지르는 모습이 귀신이 들린 사람 같았다, 그 남자애도 조심해야한다,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등의 누구라도 호기심을 가질만한 가십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애초에 그 친구는 병문안이 아니라 나의 상태를 관찰하러 온 것일 수도 있겠다. 사람에게 응당 있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누가 미용실에서 쓰러졌다고? 어느 병원인데? 너도 걔 알아? 그럼 같이 가보자. 이런 대화의 흐름이 그 친구를 나에게로 인도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약간의 연민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단지 호기심의 대상이 나 였다는 것과 그것을 여과없이, 오히려 살을 덧붙여서 무용담을 늘어놓듯 친구들에게 이야기한 것이 잘못됐을 뿐이다.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의 내 처지와 그 아이에 대한 분노가 단순히 그 사건에 국한된 것만이 아닌 이 세계 자체를 향해 쏟아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매일 같이 수시로 발작을 일으켰고, 정신을 차릴 때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병원에서는 딱히 방법이 없다며 추이를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해줄 것이 없으니 이만 퇴원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엄마는 담당 의사를 붙잡고 어떻게 방법이 없냐고 물었지만 의사는 계속 입원을 해도 되지만 지금이랑 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입원비만 올라갈 것이다 라는 대답만 했다. 나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안경 너머의 눈빛은 시리도록 고요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엄마의 어깨를 토닥이며 아빠에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학교는 당분간 쉬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래도 학교는 가야하지 않겠냐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만 내가 학교에서까지 발작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더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병원을 떠나 오랜만에 찾은 집은 평화로웠다. 마치 마땅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듯이 모든 것이 익숙했다. 지긋지긋한 알콜냄새도, 쉴새 없이 돌아가는 가습기도 없었다. 침대에 몸을 던지니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기분 좋은 탄성과 함께 나를 반겼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법이다. 집으로 돌아온 날 밤부터 두 차례 발작을 일으킨 나는 병원에서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발작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함께 찾아왔다. 몇 십번의 반복에도 그 통증에는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끔찍한 두통이 찾아올때마다 울며 절규했다. 나중에는 소리지를 힘조차 없어서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채 눈을 질끈 감고 주저앉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럴때면 엄마도 같이 주저 앉아 내 등을 쓸어내리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괜찮아, 괜찮아 하는 소용없는 위로를 건넸다. 영상은 거기서 끝이났다. 영상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여전히 재생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나를 보기가 괴로웠다. 사실 그동안 잊고 살아왔다. 간직하고 삶을 이어나가기에는 너무도 괴로운 기억이었다. 내 머릿속 나조차 찾을 수 없도록 깊이 묻어둔 기억이었다. 내 눈 앞에서 과거의 내가 몸을 뒤틀며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두루뭉술하게 뭉툭해진 기억이 아니었다. 하루, 시간, 분, 초 단위로 세세하게 쪼개진 기억들이 선명하게 머릿속을 부유했다. 잘개 쪼개진 시간 단위로 느껴지는 기분과 통증, 시간이 흐를 수록 느껴지는 깊은 우울감이 온 정신을 사로잡았다. 방대한 기억은 거대한 강줄기처럼 느리지만 빠르게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기억의 용량을 한참을 초과한 것을 깨닫고 기억의 전이를 거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흐르는 강줄기를 조잡한 인간의 몸뚱이로 막을 수 없듯이 의미없느 저항이었다. 나는 기억의 과부하로 인해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그 시절 느꼈던 끔찍한 고통이 초 단위로 몸에 새겨지고 있었다. 내 작은 두개골을 열고 뇌에 직접 문신을 하면 이런 고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꺽꺽대는 신음소리가 삐져나왔다. 내 작은 머릿속을 한참을 가득채운 기억은 그것으로는 부족한 듯이 이제는 목을 넘어 온 몸을 채우기 시작했다. 흐르는 피대신 그 날의 기억이 혈관을 타고 흘렀고 나중에는 그 혈관 마저 기억의 줄기로 대체되었다. 뱃속은 이미 기억으로 채워진지 오래였다. 순식간에 내 몸을 장악한 기억들은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터져버리고 말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희미해져 간다는 것을 느꼈다. 의식을 잃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놓아버리면 편할 것이다. 입 밖으로 신음 대신 삐져나오는 기억의 조각들과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끔찍한 두통도 의식을 놔버리면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기억의 덩어리들로 가득한 몸이 어서 빨리 터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