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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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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Oct 30. 2022

6.

"잠을 자랬지 누가 보관소까지 오랬어?"


기시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목마의 '하여간 손이 많이 간다니까'라는 목마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점차 두통에서 해방됐다. 따스한 기운이 몸 전체를 감싸는 듯하더니 어디론가 쏙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이곳에 올때처럼 거칠고 투박하게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사람에게 폭 안긴 고양이처럼 나는 안전하게 옮겨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거기까지 간거야?"


다시 목마를 처음 마주한 방이었다. 목마는 소파에 기대어 나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배워야할게 많아서 충전좀 하라고 했더니 쓸데없는 일만해가지고 쯧쯧"


나는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의 경험이 너무도 강렬했던 탓인지 목마의 핀잔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진짜 손이 많이 가는 친구구만."


목마는  앞발을 들어 한 번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목마의 앞발로 붉은 빛의 가루들이 빨려들어가듯이 모였다. 빛의 가루들의 출처를 찾아보니 내 몸에서부터 나와 목마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목마의 앞발까지 날아간 빛의 가루들은 목마의 앞발을 따라 둥글게 회전하다 목마가 앞발을 휙 들자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제 정신좀 차려봐. 얘기좀 하자구."


나는 목마의 말과 동시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호흡을 크게 쉬며 목마에게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도대체 어떻게 거기에 간 건데?"


"무슨 소리야?"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하지만 누구도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목마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말을 건넸다.


"그래, 설명이 필요하겠지. 이런 식으로 보관소에 대해 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뭐. 커리큘럼이 조금 바뀌어도 해내는 게 올바른 선생의 역할이니까."


목마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내게 보관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가 간 곳은 보관소야. 거기서 뭘 봤지?"


"가까이 가면 기억이 재생되는 별 두 개."


"그래 그 별 두 개는 말 그대로 보관소야. 네가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모두 담겨있지. 밝은 색 쪽이 네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느낀 기억, 어두운쪽이 네가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느낀 기억을 각각 뭉쳐놓은 별이야."


"그럼 나머지 기억들은?"


나는 의문스러웠다. 세상에서 내가 느낀 기억들중에 오직 기쁨과 슬픔으로만 나뉜다면 그에 속하지 않는 기억들은 그냥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중간만큼의 기쁨, 중간보다 덜한 슬픔 같은 분류로 나뉘어 그 두가지 별에 속하게 되는 것일까? 목마는 곧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나머지 기억들도 물론 존재하지. 그 두 가지 감정이 유독 인간이 느끼는 것중에 강렬하기 때문에 제일 빛나는 것일 뿐이야. 네가 보관소에 갔을 때 주변에 희미하게 빛나는 다른 별들도 봤잖아?"


기억을 곰곰히 떠올리니 분명 그랬던 것 같았다. 광활한 우주에서 유독 그 두 개의 별이 빛났을 뿐 분명히 다른 별들도 희미하지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 여태까지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다 거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거야?"


"그렇지. 네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 모두가 담겨있지. 말하자면 데이터 저장소 같은 개념이야. 네가 태어났을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기록되어있지."


"내가 기억못하는 것들도?"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심지어 네가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나는 목마의 말이 어려웠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까지 보관된다는 것이 대체 무슨뜻일까?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은 또 무엇일까?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목마가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번에 받아들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 나조차 시간이 걸렸으니까. 의식과 무의식은 알지?"


나는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목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의식과 무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튀어나온 부분이 의식, 가라앉아 있는 부분이 무의식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전혀 틀렸어. 우리가 알고있는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부분을 통틀어서 튀어나온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빙산의 몸통이나 마찬가지고."


목마가 손을 휘저어 거대한 화이트보드를 만들어냈다. 화이트보드에 거대한 빙산이 물에 잠긴채 그려졌다. 목마는 손을 휘저어 물 밖으로 튀어나온 작은 부분을 가리켰다.


"우리들은 사실 이 조그만 부분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 설명하는거지. 인간은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그렇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큰 덩어리를 놓치고 있다는거지."


"무의식도 보이지 않잖아?"


"아니, 볼 수 있지. 느낄 수 있다고 하는게 맞겠지 아마. 어떤 행동의 결과를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통해 도출해냈다는 것을 스스로가 느낄 수 있으니까."


나는 딴 생각을 하며 걷다가 나도 모르게 엉뚱한 곳으로 도착한 경험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알바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야하는데 노래를 들으며 그대로 집까지 와서야 도서관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일이나 친구를 만나러 가야하는데 아무 생각없이 버스를 잡아타고 내려보니 학교에 와있었던 일 같은 것들 말이다. 목마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보통 그런 경우 '나도 모르게'라는 말을 제일 많이하지. 두 번째는 뭔지 알아?"


"무의식적으로 그랬다."


"그래.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의식에 의한 결과인지 무의식에 의한 결과인지 분석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어.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럼 바꿔말하면 '무의식을 의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무의식 역시 이 부분에 해당하는거야."


목마가 앞 발을 들어 물 밖으로 튀어나온 빙산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고 말하려고 하자 목마는 다른 쪽 발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어쨌든간에 의식이던 무의식이던 전부 정신세계를 겉핥기만 한 결과물이라는 거고, 중요한 것은 네가 경험하고 생각한 모든 것들은 정신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이것이 가장 핵심이지."


'모든 것을 정신이 기억하고 있다'는 목마의 말은 내게 섬뜩하게 다가왔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들을 나 자신이 기억하고 있다면 그 많은 기억들은 얼마나 방대한 양일까.


"엄청나게 많은 기억이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거지."


목마가 나의 생각을 읽고 말했다.


"페이즈2가 시작되면 정신이 무한히 확장되면서 '보관소'에 있던 것들이 같이 딸려나오지.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데자뷰 같은 것이나 갑자기 난데없이 소름이 돋는 일 같은 것이 이것에 영향을 받아 생기는 일이야."


"이것이라면?"


"누군가의 기억이 네 몸을 관통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말이지. 그게 누군가가 페이즈2를 일으켜서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어떤 기억하나가 튀어나와 너한테 닿은 것일 수도 있고."


"기억이 튀어나온다는 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튀어나오는 거지. 육체의 강인한 방벽을 뚫고 보관소의 기억이 새어나오는거야. 그만큼 육체가 약해졌을수도 있도 아니면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스스로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지. 물론 엄청나게 희박한 경우라서 대부분은 전자이겠지만 말야. 주로 나이 먹은 노인들에게서 있는 경우지. 그렇게 기억이 하나 둘 소실되면 치매라고 부르는 상태가 되는거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치매의 원인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요양병원을 떠올렸다. 요양병원에 있는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어서 가족들이 요양병원에 맡긴 것인데 1년에 한 번 올까말까 한 사이다. 사실상 요양병원에 버려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는  중증 치매를 앓고 있어서 성격이 괴팍하다. 요양병원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에게 베게를 집어던지기는 일쑤고, 어떤 간호사는 할아버지에게 억지로 밥을 먹이려하다 숟가락으로 이마를 세게 얻어맞고 울면서 그 이튿날 퇴사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에서 꼭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주인공이라는 캐릭터인데, 이 주인공 캐릭터는 할아버지(혹은 할머니)의 괴팍한 성격과 당당히 맞선다. 당당히 맞설 뿐만 아니라 열정과 헌신으로 그(혹은 그녀)를 정성껏 돌본다. 어느새 괴팍한 성격은 그 간호사에게만은 누그러든다. 그때 마법처럼 등장하는 할아버지(혹은 할머니)의 가족들. 그 가족들이 타고온 자동차는 죄다 검정색의 고급 외제차이다. 같이 온 수행비서가 병실문을 열자 가족들 중 제일 깐깐하게 생긴 아줌마가 다른 비서를 시켜 서류봉투를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서는 봉투 안에 서류와 인주를 꺼내 '아버님 고집부리시지 마시고 얼른 이거 찍으세요'라고 기계적으로 말한다.


그러면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는 역정을 내며 주인공이 떠먹여주던 숟가락을 잡아채 아줌마의 얼굴에 집어던진다. '이 망할년, 여기가 어디라고 와!'라는 대사와 함께 숟가락을 맞은 아줌마는 얼굴에 붙은 미역을 떼어내며 마주 화를 낸다. '아이 참, 옷 다버렸네 이게 얼마짜린데! 이놈의 노인네는 곱게 죽지 여즉 살아서 민폐야 진짜!'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획돌려 창 밖을 바라본다.  아줌마의 말을 들은 주인공은 옆에서 참지 못하고 화를 버럭내며 말한다. '아줌마, 할 말 못 할말이 있지 어디서 그런 말을 해요? 어르신 쉬셔야 하니까 당장 나가세요!' 정작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주인공이 더 난리다. 옆에 있던 수행비서와 소란을 듣고 따라온 간호사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줄을 모른다.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도 놀란 눈으로 주인공을 바라본다. 뜻밖의 고함소리를 맞닥뜨린 아줌마는 당황하여 주인공을 향해 삿대질을 날린다. '너는 뭔데 끼어들어! 노인네 수발이나 드는 주제에!' 주인공은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맞아요. 어르신 수발 들어야되니까 도움안되는 그쪽은 빠지시라구요' 아줌마는 뒷목을 잡으며 쓰러지는 시늉을 한다. 옆에 있던 수행비서들이 서둘러 아줌마의 팔을 붙잡는다. 막상 수행비서들이 팔을 잡자 아줌마는 팔을 뿌리친다. 그리고는 주인공에게 한 마디 쏘아붙인다. '너! 내가 이름 외웠어. 조심해 알았어?' 주인공은 역시나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아줌마나 조심하세요. 사람일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끝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주인공을 보며 아줌마는 혼자 궁시렁대며 할아버지(혹은 할머니)에게 '나중에 다시 올테니 그때는 도장 꼭 찍으세요'라고 말하며 병실문을 나선다. 마지막에 주인공을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줌마가 나가고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주인공에게 이리로 오라며 손짓한다. 주인공이 가까이 가니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는 제정신인 상태로 자신의 가족사를 늘어놓는다. 알고보니 할아버니(혹은 할머니)는 재벌가의 은퇴한 회장이었고, 남은 재산을 상속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요양원에 들어온 탓에 아들 딸과 며느리들이 돌아가며 찾아오는 중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너무도 뻔하다. 뻔한 것도 여러 갈래로 뻔할 수 있다. 할아버지(혹은 할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유산을 간호사에게 상속하고 갈 수도 있겠고, 할아버지(혹은 할머니)가 유일하게 아끼는 손자가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결혼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가 드라마에 나오는 치매 할아버지(혹은 할머니)를 떠올린 것은 그들이 겪는 갈등의 원인이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을 나 혼자만 알고 있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드라마 작가들이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치매 노인에 대한 뻔한 클리셰 대신 정신과 육체의 조화와 그 조화가 균형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 찾아오는 문제, 더 나아가 인간의 평생을 기록해 놓은 보관소와 같은 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을까? 나는 상념을 이어가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목마의 시선을 느끼고는 정신을 차렸다.


"네가 아무리 그런 것을 이야기한다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테니까 쓸데없는 수고는 하지 않도록해. 그리고 우선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이야기를 해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일단 집중할 곳에 집중하라고."


나 역시 목마의 말에 십분 동의했다.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미친 사람 취급당할 것이 뻔했다. 인간이 평생 동안 겪은 경험을 모두 기록해놓은 보관소니, 무한히 확장하는 정신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판타지나 SF장르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지 현실에 치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것이 실제한다고 말해봐야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볼 것이 뻔했다. 아니면 출근길에 오르며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 한 명은 고심 끝에 그럴 듯 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 그럼 그것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훨씬 생산적일 것 같은데'라고 조언하며 서둘러 만원 지하철을 타러 바삐 걸음을 옮길 수도 있겠다. 나는 쓸데없는 상상은 그만하자고 생각하다 서둘러 목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목마의 말에 신경쓰이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그럼 여기서 평생 살거야? 너로써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나는 너를 여기에 평생 데리고 있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목마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건데? 다시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거야?"


나는 절박한 나머지 목마의 신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을 재촉했다.


"뭐, 열심히 노력하면?"


나는 목마의 말을 듣고는 목마에게 바짝 다가가 나도 모르게 목마의 발을 덥썩 잡았다. 딱딱하지만 차갑지 않은 목마의 발굽이 손 안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제발 나 좀 다시 보내줘! 시키는 것은 모든지 할게!"


목마는 뜻밖의 모습이라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내 손에 잡힌 발굽을 빼며 조용히 말했다.


"안그래도 그럴생각이니까. 저쪽으로 좀 가서 앉지?"


목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부드러운 기운에 휩싸여 뒤쪽으로 날아갔다. 어느 새 놓여진 소파가 포근하게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일단 진정하고. 절박한 건 알겠는데 말야. 사실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문제라고. 네가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지만서도 말야."


목마가 아까와는 다르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마가 말한 재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문제라는 목마의 말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모든지 할 준비가 나는 되어 있었다.


“괜찮아 내가 되게 할게! 어떻게 하면 돼?”


목마는 나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나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아만 갈 수 있다면 말이다. 아직 해보고 싶은 일이 잔뜩 있는데 이대로 허무하게 인생을 마무리하기에는 나는 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무리 죽음이라는 것이 소리소문 없이 찾아온다고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내가 나이가 60이나 70만 되어도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창인 이십 대 초반에 식물인간이라니 이것은 나와 우리 가족을 모두 죽이는 처사인 것이다. 신이 있다면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 일을 저지르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의지를 불태우는 것은 좋지만 웃기는 소리하지마. 네 까짓게 뭐라고 신의 의지를 판단해?”


나는 아까부터 목마가 나의 생각을 정확히 읽는다는 것을 깨닫고고 깜짝 놀라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든. 건방지게 신에게 대들 생각하지 말고 얼른 네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술이나 배울 생각이나 해. 그게 여러모로 너에게 도움이 될 걸.”


목마는 내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았지만 딱히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는 법이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목마의 말대로 내 몸으로 돌아가기 위한 기술을 배우고 싶지만 어떻게 배워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르면 물어봐야지. 여기 나 말고 누가 있는데?”


이번에도 목마는 나의 생각을 읽었다. 나는 궁금했지만 이번에는 참기로 했다. 목마가 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다 내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목마는 볼 일이 없었다. 내가 본 기록보관소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공간 같은 것들도 내가 살던 곳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목마가 나의 생각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 지는 하등 쓸모 없는 지식이 될 것이 뻔했다.


“쯧쯧, 그렇게 생각이 짧아서야. 정신이 곧 너고 육체도 곧 너인 것을 어떻게 그렇게 분리해서만 생각을 하는지”


목마가 핀잔을 주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안쓰럽다는 말투였다. 어쩐지 나이든 사람을 따라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뭐 부터면 하면 될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목마는 나를 처음에는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제일 먼저 해야될 것을 알려주지. 자 지금 네 모습이 어떻지?”


목마의 말에 나는 내 몸을 위 아래로 훑었다.


“조금 어린 모습이네.”


목마는 나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해봐. 네가 처음에 여기에 왔을 때도 그 모습이었는지를 말이야.”


나는 목마의 말에 깜짝놀라 소리를 질렀다.


“맞아! 내가 왜 이 모습이지? 처음에는 공이었는데!”


“말했잖아. 여기는 네 의지가 중요하다고. 네가 가장 편한 모습이 그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게 변한거야. 다시 공으로 돌아가봐 한 번.”


“어떻게?”


“공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보여봐.”


애매모호한 목마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이 되려고 애를 썼다. 말 그대로 애를 썼다. 이마를 잔뜩 찡그린 채 공이 되려는 의지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시커멓고 단단한 공을 떠올려봐도 변하는 것이 없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래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생각을 집중하기 더 편한 법이다. 잠시 뒤 나는 실눈을 슬며시 뜨고 목마를 바라보았다. 목마의 표정을 보니 전혀 공으로 변하지 않은 듯 했다.


“생각처럼 잘 안되네.”


내가 멋쩍은 듯이 말하자 목마가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하지. 네가 제일 편한 모습으로 있는 거니깐. 게다가 넌 아스트랄에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이니 할 수 있을리가 없지.”


나는 그렇게 당연한 일이면 도대체 왜 내게 공으로 변해보라고 시켰는지 목마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공의 모습을 했을 때 목마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떠올라 입으로 내뱉지 않고 가슴 깊숙한 곳에 불만을 가둬 둔 채 다독였다.


“그럼 너는 그 모습이 가장 편한 모습이야?”


이번에는 역으로 목마에게 질문을 했다. 목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편한 모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지금도 갖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니까.”


“목마를?”


목마는 내가 의아해하자 덧붙여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다섯 살 생일 선물로 직접 만들어주셨어. 자글자글한 손으로 손수 나무를 깎고 다듬어서 말이야. 나와 할아버지만 아는 곳에 작게 메시지도 적어주셨지. 항상 일로 바쁜 부모님 대신에 손자와 놀아주는 할아버지는 내게 하나뿐인 친구이자 마음의 안식처였어. 그러니 이 목마는 절대로 버릴 수가 없었지.”


목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목마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열심히 움직이던 입도 일자로 꾹 다문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는 듯이 목마는 차렷자세를 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 이야기가 더 있겠지만 굳이 그것을 너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도 충분히 많이 이야기한 것 같으니까.”


목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목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낯선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그 남자의 머리색깔은 나와 같은 검은색이 아닌 금발이었다. 눈동자의 색깔 역시 나와 같은 검정이 아닌 시리도록 쨍한 초록색이었다. 내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관찰하며 어쩔줄 몰라하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왜, 사람 처음봐?”


“혹시…”


“맞아. 너와 지금까지 얘기한 게 바로 나야.”


목마, 아니 남자는 내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나는 목마와 처음 말을 나눴을때만큼 놀랐다.


“아니 어떻게…”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목마와 남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목마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남자쪽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이 세계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조금만 상황을 이해했다 싶으면 또 새롭게 이해해야할 상황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기분이었다. 내 앞에 자신을 목마라고 주장하는 금발의 남자는 내 또래처럼 보였다. 어쩌면 나보다 어릴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서양인은 조숙하니까 서너살 어리다고 해도 모를 일이다.


“굉장히 인종차별적인 생각인데 그건. 게다가 너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내 생각을 읽어버린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조금 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했던 것이 목마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낯설고 어색했다.


“이게 네 모습이야?”


“그래.”


“몇 살때의 모습인데?”


나는 내가 여섯살짜리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는 남자에게 물었다.


“지금.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 모습.”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내용은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죽은거야?”


나는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다. 죽은 사람에게 죽었냐고 물어보는 것은 금기라는 어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B급 영화에서 본 대사 한 줄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다행히 남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


“아직이라고?”


“그래 아직. 너무 그렇게 나를 불쌍한 눈으로 보지마. 어차피 너도 나와 별다를 바 없는 처지니까 말야.”


목마, 아니 금발의 남자는 비꼬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남자는 앞에서 몸을 뒤로 돌리더니 어느 새 손에 쟁반을 들고 있었다. 은색 쟁반 위에는 따뜻하게 김이 올라오는 커피가 두 잔 놓여 있었다.


“찬찬히 설명 해줄테니까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할까?”


나는 한시라도 빨리 내 몸으로 돌아가서 일상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남자였고,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면 내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이스로 부탁해도 될까?”


남자는 나의 소심한 반항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을 들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어느 새 내 앞에 생긴 티 테이블에는 표면에 서리가 서린 유리잔이 놓여있었다. 남자는 망설이는 나를 보며 얼른 마시라며 손짓했다. 손으로 유리컵을 잡으니 냉기가 등줄기까지 타고 내려와 팔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입가로 컵을 가져가니 진한 커피향이  기분좋게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맛이 기대가 되는 향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뒤 입안에서 살살 굴리며 코로 숨을 뱉었다. 나는 입에서 충분히 커피 향을 즐기다 목으로 넘겼다. 끝에 달콤한 초콜릿 맛이 느껴졌다.


“커피를 제대로 마실 줄 아네?”


남자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어렸을 때 아빠가 가르쳐주셨어. 꽤나 커피를 좋아하시거든.”


“훌륭한 아버지시네. 어때 맛있지? 내가 엄선한 원두로 만든 커피야.”


남자가 우쭐대며 말했다. 그 꼴이 얄미웠지만 진짜로 커피가 맛있었기 때문에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맛있네. 한 잔 더 줄 수 있어? 마침 목이 말랐는데.”


“그럼 물을 마셔야지.”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쟁반 위에 시원한 얼음물이 담긴 유리컵이 있었다. ‘짠’ 하고 물건이 갑자기 생겨났다기 보다는 원래 있는 것처럼 유리컵은 거기에 존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거지? 도대체 어떻게 한거야?”


“의지의 힘이지. 여기는 내가 생각한 것들은 100%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어.”


남자가 말했다. 나는 이번에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쩍 넘어갈 줄 알았으나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어디 가고 싶은데 있었나 평소에?”


“가고 싶은데라니?”


“뭐 어디든. 유럽의 고성이나 아니면 미국의 산타모니카 해변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곳들 말이야.”


나는 남자의 말에 오래전부터 가보기를 소망했던 나라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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