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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Oct 30. 2022

7.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남자가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왜 하필 아이슬란드지?”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는 척박한 환경 탓에 인구대비 저술가의 비율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뱃속에 자신만의 책을 갖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나는 언젠가 읽었던 아이슬란드에 관한 기사를 남자에게 읊어주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뱃속에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나는 기사를 읽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각 자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이 시작된다. 그러한 인생을 하나의 책으로 출판하여 저마다 족적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라니 한번쯤 그 나라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그들이 어떤 것을 먹고 마시며 어떤 날씨에서 살아가는지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아이슬란드는…”


남자가 조금 난처한 듯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잠시 기다려.”


남자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내가 커피를 두 세모금 정도 더 마실만큼의 시간 정도 침묵을 지킨 남자는 혼자서 무엇인가 중얼거리더니 ‘찾았다!’는 외마디 말과 동시에 손뼉을 부딪혔다.


‘짝!’ 하는 남자의 손뼉소리와 동시에 나는 극심한 추위를 느꼈다. 어느새 주변은 온통 눈으로 둘러 쌓인 산이었다. 하얗게 뒤덮인 산은 마치 손으로 눈을 털어낸 자국처럼 군데 군데 바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눈 위로는 노란 해가 쨍하게 빛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눈을 찡그리며 밑을 내려다보니 성냥갑 같이 작은 크기의 집들이 일정한 비율로 박혀있었다. 그 성냥갑 같은 집에서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각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개미같이 하찮게 느껴지는 찰나 나는 발끝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비로소 내가 맨발로 눈 덮인 산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자, 이거 신으라고.”


남자가 털신을 내밀며 말했다. 남자는 티비에서만 본 에스키모와 같은 차림새였다. 어떤 동물의 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얗고 빼곡한 털이 둥그렇게 달린 후드와 단단해보이는 가죽으로 기운 옷을 입고 발에는 마찬가지로 털이 달린 장화를 신고 있었다. 남자가 내민 털신 역시 같은 모양이었다. 털신을 들고 있는 남자의 손은 벙어리 장갑으로 따듯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두 손으로 털신을 집어들고 발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털이 포근하게 발을 감싸주며 한기를 내몰았다.


“따듯하지? 북극 여우 털로 만든 신발이야.”


“여기는 아이슬란드라며?”


“아이슬란드에는 북극 여우가 없나?”


남자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되물었다.


“북극 여우니까 북극에 있겠지.”


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대답하자 남자는 큼큼하고 헛기침을 하며 아무튼- 이라고 입을 열었다.


“다행히 내가 다큐에서 아이슬란드를 본 기억이 있었지. 여기는 스카프타펠이야. 가장 유명한 관광지중 하나지. 스나비펠스요쿨 빙하트래킹을 하기도 하는데 어때 한 번 둘러보겠어?”


남자가 어디서 본 것을 그대로 따라 이야기하듯이 설명했다. 그러더니 ‘이대로는 안되겠다 준비를 더 해야지’라며 손가락을 퉁겼다. 남자의 손가락이 ‘딱’ 소리를 내자 나는 발이 꼭 죄는 것을 느꼈다. 발을 내려다보니 세 줄의 버클이 발에 채워져 있었다. 버클이 연결된 밑창은 뾰족한 쇠가 그득히 박혀있었다.


“트래킹화를 신지 않으면 저 빙하들을 건널 수 없다고. 자, 가자. 가면서 이야기해줄게.”


남자는 신이 난 얼굴이었다. 나는 남자의 표정이 꼭 산책을 나가는 강아지와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얼른 지워버렸다. 남자가 생각을 읽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다르게 남자는 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어느새 손에 산악지팡이까지 손에 든 남자는 트래킹화의 밑창을 빙하에 쿡쿡 박아 넣으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얼른 오라고! 아 맞다 자 지팡이 짚고 내가 걷는 길을 따라서 와.”


남자가 생각난 듯이 내게 지팡이를 짚고 오라고 말했다. 나는 손에 갑작스럽게 들려진 지팡이를 가지고 남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꽤 먼 거리를 걸었다. 남자는 나보다 열걸음 정도 먼저 앞서서 미끄럽지 않은 부분을 지팡이로 콕 찍어 표시했다. 이따금 내가 잘 쫓아오고 있는지 한번씩 뒤를 돌아볼 뿐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을 찾아내겠다는 사람처럼 빙하에 흔적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자와 대화는 없었지만 나는 딱히 답답함이나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 보이는 풍경들을 눈으로 주워담기 바빴다. 둥그런 빙하들이 하얗고 때로는 파랗게 빛나며 고고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린 한기가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은 이 아름다운 땅에 발을 디딘 이가 누구인지 관찰하는 시선처럼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우리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양 옆이 일정한 패턴으로 음각된 절벽틈새를 지나기도 했다.(남자가 말하기를 몇 세기를 걸쳐 형성된 자연스러운 모양이라고 했다)


얼마를 걸었는지, 다리가 살짝 아파오기 시작했다. 남자가 준 외투와 신발의 보온성이 탁월한지 등에는 축축하게 땀이 맺혔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생각, 그러니까 상상으로 만들어낸 세계잖아?”


나는 말해놓고 나의 바보같음을 탓했다. 남자는 이미 저 멀리에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내 조곤거리며 묻는 꼴이 마치 혼잣말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빨리 남자를 쫓아가서 말하기 위해 몇 걸음 속도를 높였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신발 밑바닥에 뾰족한 쇠부분이 단단한 빙하에 흠짐을 내지 못하고 그만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기 때문이다. 내가 휘청이며 다시 자세를 잡는 동안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조심좀 하지? 상상이긴 해도 현실감 90%는 되니까.”


나는 남자가 다가왔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여전히 10m정도는 떨어져서 묵묵히 바닥에 지팡이를 푹푹 찍고 있었다.


“내 말이 들리는거야?”


나는 다시 한 번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그럼 안들리는데 대답할까? 멍청한 질문좀 그만해줄래?”


남자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이 세계가 남자가 만든 상상속의 현실이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그렇다면 처음에 품었던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근데 상상속의 세계인데 내가 왜 땀을 흘리고 피로를 느껴?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내 정신 뿐이잖아.”


“저기 저 앞에 가면 동굴이 있으니 저기서 좀 쉬다가지.”


이번에도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여전히 남자는 내 앞에서 걷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뒤통수에다 대고 욕을 한바탕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 생각도 읽히는 마당에 얌전히 따라가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남자의 뒤를 쫓아 걷다보니 사람이 위로 두명 들어갈 수 있을만한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자 들어가자고.”


동굴 입구에서 나를 기다린 남자는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입구 안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남자의 뒤를 따라 입구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동굴 안쪽은 어둡지 않았다. 어디서 채광이 들어오는지 군데 군데 밝은 햇빛이 얼음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동굴 내부는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면이 반들반들하게 다듬어져 있는 곳도 있었고 물결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는 면도 있었다. 온통 검은 색도 있었고 바닷물처럼 푸른 색도 있었으며 눈처럼 하얀색의 얼음도 존재했다.


“어때, 장관이지?”


남자의 말대로 장관이었다. 물결무늬로 파여있는 벽을 만졌다. 차가운 촉감이 손끝을 타고 몸 안쪽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벽은 수 만년전부터 얼어온 벽이야.”


수 만년전부터 얼어온 벽이라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는 지금 당장 며칠이 지난 시간이 이토록 답답한데 이 얼음은 수 만년전부터 지금까지 이 자리에서 줄 곧 얼어있는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에 대한 댓가가 이렇게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손바닥을 느끼는 것인가. 그것이 수 만년전부터 얼어온 것에 대한 존재의 의의인 것일까?


“오래 될 수록 색깔은 더 푸르스름해지지.”


남자의 말처럼 내가 만지고 있는 얼음벽은 시리도록 파랬다.


파랗고 어두운 벽을 쭉 따라가다보니 동굴 안쪽에 넓은 공간이 나왔다. 가운데에는 얕은 호수가 앙증맞게 자리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시리도록 투명한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동굴 천장에 거대하게 생긴 종유석 모양의 얼음끝에서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면서 호수에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저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이 호수를 만든 듯 싶었다. 나는 장갑을 벗어 한 쪽 겨드랑이에 끼고는 손을 바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호수에 담갔다. 손안에 담긴 순수한 차가움에 정화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이 물을 마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눈쌀을 찌푸리며 굳이 그래야겠냐고 말했지만 나는 확고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고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이내 위아래로 끄덕였다. 손바닥을 입가에 가져가니 콧속으로 차가운 기운이 기분좋게 스며들었다. 나는 입안 가득 호수의 물을 머금고 시원함을 즐겼다. 몇 번을 연거푸 손바닥 바가지로 호수의 물을 퍼마신 나는 후- 하는 한숨과 함께 쪼그려 있던 자세를 풀고 남자를 쳐다봤다.


“너도 참 별나다. 다 끝났어?”


“마침 목이 말랐거든.”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땀이 식어서 그런지 이제 좀 추운데…”


“찬 물을 그렇게 퍼마시니까 춥지.”


남자는 핀잔을 주며 손으로 호수 옆을 가리켰다. 남자의 손끝에는 어느새 발갛게 타오르는 모닥불이 따스한 온기를 뿜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리로 가서 앉자.”


“저기에 불피우면 여기 다 녹는거 아니야?”


“제발 그런 이상한 걱정은 하지말고.”


남자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모닥불 근처에 앉자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모닥불 주위의 바닥은 하나도 녹지 않은 채 단단한 얼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남자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인 듯 했다.


“아까 전에도 이야기했다시피 여기는 아스트랄, 정신의 공간이야. 내가 원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할 수 있지.”


“대부분이라면?”


“맞아. 100%는 아니라는 거지. 어쨌든, 그것은 차차 알려줄게. 네가 아까 왜 생각의 공간인데 땀이나고 힘이드냐고 물었지?”



“맞아. 온전히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잖아.”


“아니 그건 틀린말이야.”


남자가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아까 내가 뭐라고 말했지?”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렇지. 그런데 여기는 정신의 공간, 내 의지로 만든 공간이라고 말했지? 그럼 네 말은 어폐가 있어.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면 엄밀히 말해서.”


“육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


내가 남자의 말을 가로챘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남자의 말대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육체 역시 힘든 것이 맞는 말이었다. 이미지 트레이닝만 했는데 근육량이 늘었다는 실험결과나 크게 넘어지는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실제로 다리가 아프다던가 하는 사례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사람들이 정신만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육체도 연관된 영역이라는 것이 남자의 설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졌던 의문은 말이 되는 것 같은데…”


“그래 맞아. 사실 네가 처음에 했던 질문은 맞는 말이지. 육체의 영역을 떠난 곳인데 왜 힘듬을 느끼는지 말이야.”


남자가 정확하게 내가 궁금했던 것을 짚어 말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때문이야. 하나는 내가 말했듯이 현실과 거의 흡사한 환경을 내가 만들었기 때문이지. 말 그대로 현실과 거의 같다고 보면 돼. 즉 여기서 네가 다치면 실제로 다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야.”


“그럼 현실과 같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나는 남자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미리 그렇게 말을 해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아이슬란드 같이 가보고 싶지만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는 지역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내가 현실과 최대한 동떨어지게 공간을 기획해도 너는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


남자가 나를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너의 정신이 아직 육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이지. 몇 가닥 남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탄탄한 케이블이 너의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고 있어.”


내가 흥분한 나머지 남자의 말을 끊고 입을 열려고 하자 이번에는 남자가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그러니까 네가 힘든게 당연한거지. 아무리 정신의 세계에 와 있다지만 그 끝에는 육체가 있으니까.”


나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냈다.

“그럼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야? 네 말대로 육체가 영향을 받는다면 여기 있으면 위험한 것 아니야? 너도 마찬가지로 영향이 있는거 아니야?”


“그래 아까 말했듯이 다시 돌아갈 수 있어. 물론 100% 확실한 것은 아니야. 내가 신이 아닌 이상 그럴수는 없지. 위험하지. 위험하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과 흡사하게 만들어놓은거야. 나는 위험하지 않아.”


남자는 이번에는 딱히 나를 책망하지 않고 차근차근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다만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사실 정신체에 가까운 상태기 때문에 딱히 위험하지 않지. 내가 만든 공간이기도 하고. 아무튼, 네가 할 일은 먼저 정신체에 적응하는 일이야. 아무리 육체와 연결된 상태더라도 아스트랄에 있는 것은 네 정신이기 때문에 정신체에 익숙해져야하겠지? 정신체 상태를 적응하고 난 후에는 아스트랄에서 정신력을 구현하는 연습을 할거야. 네가 너만의 정신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때야 육체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최대치로 높아질거니까. 물론 쉽진 않겠지만 말이야.”



남자의 말이 끝난 뒤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남자와 대화를 하고 나면 의문이 해소되는 부분보다 이해를 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남자의 말에서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남자가 나와는 다르게 육체로 돌아가기 힘든상태인 것 같다는 부분이다.


“정신체에 적응하고 정신력을 구현해서 나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지?”



“그렇지. 네가 지금 정신체에 적응하지 못하는데도 이렇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건 아스트랄 안에 있는 나의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니까, 홀로 설 수 있어야 돌아가기도 편하겠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거야 네가 노력하는 것과 재능, 운에 따라 다르겠지. 하지만 가능한 빨리해야겠지 육체와 연결된 케이블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질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현실세계와 비슷하게 공간을 구성한거야 네가 육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게.”


나는 남자의 말에 겁이 덜컥났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적으로 말로 전해듣는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빨리 돌아갈 수 있을까?”

“하루라도 빨리 정신체에 적응할 것, 정신력을 구현하는데 노력할 것, 너만의 정신세계를 창조할 능력을 얻을 것. 수련 외의 시간에는 이렇게 현실세계와 거의 비슷한 공간에서 생활할 것.”


남자가 말을 멈추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처음 남자의 방으로 돌아온 나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목마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최대한 낯선 상황을 연출해야해. 네가 일상생활하듯 편하게 있으면 육체는 이걸 정상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정신과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거야. 반면 지금처럼 이 곳에서도 네가 땀이나고 긴장하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반복하면 육체와 정신의 연결고리는 보다 단단해지지. 게다가 이렇게하면 네가 일어났을때 후유증도 덜할거고. 어찌되었든 육체가 계속해서 일을하는 것이니까. 지금쯤 네 병실에서는 간호사가 네 땀을 닦느라 분주할걸?”


남자는 키득키득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육체와의 연결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느냐는 나의 질문에 남자는 육체는 우리가 말하는 죽음을 맞이한다고 말했다. 육체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정신은 무한히 확장하는 속성 탓에 끊임없이 확장하다 결국에는 자연에 녹아든다고 이야기했다.  


“자연에 녹아든다고?”


“그래. 아주 아주 작은 알갱이가 되어 자연에 흡수되는거지. 영화에서 봤던 연출처럼 네 몸이 바람에 날려 부스스 흩어진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군.”


남자의 설명이 나에게는 전혀 웃기지 않은 이야기였다. 자신의 존재가 육체와 정신으로 분리되어있는 상태에서 육체는 죽고 정신은 소멸하며 자연에 녹아든다는 설명을 어느 누가 유쾌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원래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거니까. 언젠가는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필멸자들의 운명인거지. 그나마 자연의 일부로 존속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결말 아니겠어? 물론 아스트랄에서는 예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고심하는 표정으로 대답이 없자 남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꺼 상관없지 않느냐는 논리는 어차피 배가 고플거 밥을 먹어서 뭐하냐는 논리와 마찬가지다. 궤변이라는 말이다. 남자의 말처럼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비관하며 어차피 죽을꺼 아무렇게나 살자하는 사람은 몇 없다. 그 증거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가? 만약 오늘만 산다는 듯이 하루빨리 죽음을 기다리며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대부분의 삶이라면, 인간 사회는 진작에 없어졌을 것이다. 내가 고심하는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어찌됐든, 너는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라고.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야 모든 것을 걸고 부딪혀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어?”


남자의 말에 나는 웃었다. 그렇다 남자가 말한 ‘일말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부딪히는 자세’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나는 얼마 살지 않았지만 이렇게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보니 그것이야 말로 인간 삶의 본질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생을 향한 강한 욕구,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돌파하려는 의지,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는 인내, 이런 것들이 결국 인간 존엄의 이유가 아닐까? 나의 웃음을 본 남자는 자신의 위로가 먹혔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럼 뭐부터 시작하면 될까?”


“좋아. 의지가 넘치는 군. 우선 정신체에 적응하는 연습부터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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