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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Oct 30. 2022

8.

며칠이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남자의 말에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며 정신체 적응 연습에 돌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열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지리한 시간이 차지했다. 남자는 정신체 적응을 위해서는 육체의 감각을 잊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육체에 속해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정신체 상태에서 육체의 감각을 느끼려고 하는 습관을 없애야 비로소 정신체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기초라고 말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되지?”


“죽지.”


“왜?”


“그야 물에서는 숨을 쉴 수 없으니까.”


나는 당연한 것을 묻는 남자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도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 지금 숨 쉬냐?”


남자의 말에 나는 ‘당연하지!’라고 소리치려다 말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엄청난 공포와 함께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새빨개지며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쉬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입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남자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남자는 여전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신차려. 네가 왜 숨을 쉬어야한다고 생각하지?”


남자가 대답을 종용했지만 나는 산소가 점점 더 부족해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피가 머리끝까지 몰려 이러다가는 머리통이 터져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고통스러워만 하자 남자는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하아!”


나는 갑자기 입안으로 산소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헉헉, 뭐지 방금?”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한심하긴. 너 지금 상태를 봐봐.”


남자의 말에 나는 내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가느다랗고 하얀 종아리 위로 원피스 자락이 나폴거리고 있었다. 발에는 여전히 남자가 아이슬란드에서 만들어준 털신을 신고 있었다.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슬며시 발을 뺐다. 그러자 털신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쓸데없는 것 생각하지말고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고.”


남자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사람마냥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진짜 멍청한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아니면 둘 다 인건지.”


남자는 계속해서 핀잔을 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앞에 전신거울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원피스를 입은 작은 계집아이 하나가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남자가 말한 내 상태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지금 숨을 쉴 필요가 없구나?”


남자는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처음에 여기 왔을 때를 생각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이고 그것을 관철하는 것은 의지와 믿음이야. 나중이 될수록 의지보다 믿음의 영역이 더 커지지만 일단은 의지로 인식을 유지하는 것부터 시작해.”


그때부터 나의 고난이 시작됐다. 남자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나를 망망대해로 데려갔다.


“태평양이야.”


하늘 위에서 바라본 태평양은 정말이지 거대했다. 검푸른바다가 쉬지않고 넘실대며 파도를 만들어내는 광경은 나를 압도해서, 당장이라도 바다에 잡아먹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만드는 것 같았다.


“겁먹지마. 인식과 의지. 그 두가지만 있으면 돼.”


남자는 내 속을 읽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남자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적중했다.


“자, 가보자.”


남자가 내 등을 떠밀자 나는 하늘에서부터 바다 아래로 순식간에 추락했다. 눈깜빡할 사이에 코 앞으로 다가온 바다는 내가 준비할겨를도 없이 무자비하게 내 몸을 집어삼켰다. 나는 큰 충격과 함께 물 안에서 머리와 다리 위치를 몇 번을 바꿨다. 눈코입으로 짠물이 가득들어왔다. 나는 가까스로 숨을 참으며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서 밝은 부분을 찾았다. 그리고는 그 위로 있는 힘을 다해 팔다리를 휘저었다.


“푸하!”


가까스로 물위로 올라온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자, 인식과 의지. 이 두개만 기억하라고. 그럼 때가되면 오도록하지.”


남자는 얄밉게 웃으며 그대로 사라졌다. 나는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게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여야했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생각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일까. 조금 큰 파도가 넘실거리며 내 몸을 붕 띄웠다가 가라앉았다. 짠물이 입안으로 한가득 들어왔다. 수온이 생각보다 낮아서 나는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고 있지만 몸 안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남자가 이번에도 현실과 가까울 정도로 바다를 구성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자의 ‘때가 되면 돌아온다’는 말은 내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돌아온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남자가 말한 키워드를 생각해야했다. 인식과 의지. 도대체 뭘 인식하고 어떤 의지를 관철시키라는 것일까?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릿속에 차오르는 것은 시린 바닷물이었다. 씁쓸할 정도로 짠 바닷물이 입안 가득 느껴질때 쯤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그대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푸하!”


내가 허우적대며 눈을 뜨자 남자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십분도 못버티다니, 너는 조난당하면 제일 먼저 죽을거야 아마.”


남자의 핀잔에도 나는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 입안에는 여전히 짠내가 한가득이었고 몸은 흠뻑젖어 물이 뚝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곧바로 몸에 있던 수분이 날아갔다. 옷 역시 바싹 말라 뽀송뽀송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 남자를 만난 방이었다. 목마는 여전히 초점없는 눈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자, 정신차려 다시 가야지?”


남자가 손가락을 튕길 준비를 하자 나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남자를 말렸다.


“자, 잠깐만!”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려던 자세 그대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나는 잠시라도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아니, 말없이 그렇게 사람을 바다에 던져두는게 어딨어!”


내가 발끈하며 외치자 남자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말했다.


“인식과 의지. 말해줬잖아?”


남자가 당연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선문답이야!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줘야지!”


내가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문답, 오랜만에 듣는 말이야. 영감이 생각나는 걸.”


알수없는 소리를 혼자 중얼거린 남자는 손바닥을 치며 내게 다시 말했다.


“어쨌든, 나는 필요한 걸 말해줬다고. 그리고 이건 선문답이 아니야. 네가 진짜 선문답식으로 교육을 받았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여기서 적응하지 못할거야. 정말로 나는 필요한 것을 다 줬다고.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너의 의지, 너의 노력, 너의 재능. 즉, 너의 몫이라는 소리지. 첫번째 단계도 통과하지 못할바에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어. 그렇게 천천히 무저갱 같은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택한다면 말리지 않겠어. 그게 너가 원하는 것이라면 말야.”


남자가 말을 마치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선택을 종용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원하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현실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듯 했다. 남자가 손가락만 한 번 튕기면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갈 것이다. 대신 남자의 말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서서히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떠한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은 깜깜한 어둠속에서 나는 절망하고 절망할 것이다. 나는 무한한 가위눌림과 같은 그 시간을 생각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할게.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잖아.”


“그렇게 체념하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정말로 필요한 것은 다 알려줬어. 너를 약올리거나 골탕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너 스스로 답을 찾아야해.”


남자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직도 나는 ‘인식과 의지’라는 단어만 가지고 어떻게 해답을 찾을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지만 남자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조금은 믿음이 생겼다.


“알았어. 될 때까지 한 번 해보지 뭐. 어쨌든 하다보면 되겠지.”


나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가능한 빨리 해야겠지만 말야.”


남자는 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다시 바다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발을 휘저으며 가라앉지 않기 위해 분투중이다. 이번에도 익사를 경험한다면(정확히 말하면 익사 직전의 상태다. 항상 남자는 내가 죽음을 겪기 직전까지 지켜보다가 나를 건져올리고는 했다) 열 한 번째다. 열 번째 남자에게 건져졌을 때 시간이 꽤 흐르지 않았냐고 묻자 남자는 ‘아직 반나절 밖에 안 지났어’라고 말했다. 나름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짓을 해야 ‘정신체’라는 것에 적응을 할 수 있을지 가슴이 답답해져만 갔다.


서서히 다리에 힘이 풀려갔다. 나는 조금 있으면 거대한 바다의 품안에 거칠게 삼켜질 것이라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짠물의 무자비한 공격에 내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속수무책으로 습격당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남자가 나를 방으로 데려가 물을 토하게 하고 몸을 건조시킨 다음 손가락을 튕겨 다시 이 바다로 빠트릴 것이다.


 다리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을때, 내 몸은 전과 같이 까마득한 바다 아래로 삼켜졌다. 짠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참고 있던 숨이 뱉어지자 무지막지한 기세로 내 몸으로 들어온 바닷물은 순식간에 산소를 차단하고 의식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웠던 호흡곤란이 곧 기분좋은 몽롱함을 선사했다. 차라리 이대로 다 놓아버리고 평안한 안식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멀어져가는 의식 끝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의식이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나는 의식의 끝에서 남자의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들었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남자의 방에서 눈을 뜬 나는 쉴 새 없이 기침을 했다.


“정말이야?”


남자가 내게 물었다.


“뭐가?”


나는 남자를 올려다보지 않고 주저앉아 기침을 하며 되물었다.


“이대로 끝내고 싶다는 생각 말이야. 정말이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이상 기침이 나오질 않았지만 억지로 잔기침을 짜내며 남자를 외면했다.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난 강요하지 않아. 이대로 원래 상태로 돌려줄 수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남자의 말에 나는 화가 났다.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방법도 모르고 남자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단지 인식과 의지라는 선무당 같은 소리만 남긴 채 자기 할 일은 끝났다니, 직장 상사였으면 업무태만이라고 말해도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협박을 도대체 왜 하는거야?”


“뭐?”


“그렇잖아. 도대체 네가 원하는건 뭔데? 내가 의식을 잃은 상태라는 것은 어떻게 알고, 또 나를 어떻게 여기 데려온거지? 그리고 내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을 왜 돕는거야?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나는 그동안 쌓아왔던 의문들을 울분을 담아 남자에게 쏟아냈다. 머리에서는 짠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바닷물 중 일부가 눈으로 들어가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렇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남자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어떤 의무같은거야.”


“의무?”


“선배로서의 의무라고 해야할까. 일단은.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야. 네가 여기와서 적응하는 것이 어렵듯이, 나도 네가 여기 온 것이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같은 입장이라고.”


나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남자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옆 얼굴에서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네 말대로 정신체에 적응해서 원래 몸으로 돌아가면, 너는 무엇을 얻게 되는거야?”


내 질문에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건…”


“비밀이야?”


내가 재촉하자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위로 가는 티켓을 얻어.”


“위?”


“그래. 나도 사실 이렇게 제자를 받아 본 것이 처음이라 어디까지 말해야할지 모르겠네. 노인네가 버릇처럼 너무 많이 아는 것은 오히려 독이라는 소리를 해대서 말이야. 그래도 어쨌든 네가 그만두는 것보다 궁금증이 해소되어 더 열심히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렇지?”


남자가 마치 동의를 구하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빙긋 웃으며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락없이 처음의 장난기 많은 소년의 표정을 한 남자는 그때부터 쉴새없이 말을 내뱉었다.


“사실 말이야, 나도 얼마나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했는줄 알아? 이 무한에 가까운 공간에서 몇십년 만에 다른 사람을 만난거라고! 뭐 사실 바깥에서는 몇십년이나 흐르지 않았지만 여기 시간의 흐름은 그렇다는 이야기야. 그러다보니 나도 까칠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워낙 오랜만이다 보니 나도 낯설어서 그랬지 뭐야.”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호흡을 골랐다.


“그래, 노인네에게는 노인네의 방식이 있듯이 나에게도 나의 방식이 있는거지.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고 가르친게 노인네 당신이었으니까, 나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겠지. 안그래? 이건 나의 교육 방식이라고. 자, 네가 원래대로 돌아가면 내가 무엇을 얻느냐고 물었지? 위로 가는 티켓을 얻어. 한명의 인생을 구원한 보상, 혹은 대가라고 해야하나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거지.”


말하는 남자의 표정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있었다. 정말로 남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사람같아 보였다.


“다른 곳?”


“그래. 전에 이야기했듯이 나는 이미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어. 굳이 말하자면 지금 네 상태보다 더 가망이 없지. 확률로 따지자면 0.00001%정도랄까, 그래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지. 그건 나를 가르친 영감도 마찬가지였어. 나는 처음에는 너보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너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말도 아니고 육체든 정신이든 어느 한 쪽이 에너지를 다하기까지 이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는 설명을 들었으니까. 그래도 다시 그 미치도록 갑갑한 몸 안에 갇혀있기는 더 싫었지. 그래서 더 빨리 여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어. 어느 한 쪽이라도 자유로운 상태인 것이 훨씬 낫잖아?”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는 남자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이해가 갔다. 남자는 거의 30여 년을 홀로 이 세계에 존재했다고 말했다. 스무 살에 이 세계로 처음 들어왔다는 남자의 말을 생각해보면 육체에서 머문 시간보다 정신체로 살아온 시간이 더 많은셈이었다. 물론 이 곳에서의 30년이 육체에서의 30년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남자는 말했다.


“정확한 시간은 나도 잘 몰라. 영감님한테 모든 것을 전수 받을때쯤 영감님의 말로는 현실에서 1년 정도 지났다고 했지. 영감님이 나를 처음 만났을때만 해도 현실이랑 비슷하게 시간을 설정해서 빨리 지나간거지 이후에는 내가 10배 느리게 설정해서 이정도야.”


“시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


“내가 말했잖아 여기는 정신체의 영역이라고. 네 능력이 닿는 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어. 하지만 아마 지금 수치가 인간의 한계까지 늦춘 것일걸.”


남자는 자신이니까 이정도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바닷가에서 멋진 모래성을 만들고 뿌듯해하는 것과 같았다.


“그럼 안되는 것은 뭔데?”


나는 남자에게 이 공간에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남자의 설명에서 ‘능력이 닿는 한’이라는 말이 귀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까 말했듯이 시간을 조절하는 것. 얼마나 정신체의 능력을 이끌어내고 정신력이 강한지에 따라 달라. 그리고 두번째는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


“그래. 여기서는 아무리 내가 만든 세계라고 해도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들수는 없어.”


“어째서? 어차피 여기는 네 정신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잖아.”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거든. 꿈을 생각하면 간단해. 꿈에서 너와 상호 대화가 되는 존재를 만난 적이 있어?”


남자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꿈속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기억은 분명히 없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돌아가신 분이 나와서 후손들에게 위험을 경고하거나 선물을 주기도 하잖아. 복권 당첨번호라던지 하는…”


“그것은 정신체가 당사자의 꿈에 접속한 결과지 네가 스스로 창조해낸 것이 아니잖아.   생명체를 만들어 낸 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야.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수십년을 혼자 여기서 생활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그렇게 순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정신체들은 어떻게든 패널티를 적용받기 마련이야. 법칙이라는 것이 허술한 것 같다도 촘촘히 짜여진 그물 같거든. 벗어난 것 같아도 어느새 묶여 있는 것이 법칙이야. 사실 시간도 마찬가지로 신의 영역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서 내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속임수야.”


“속임수?”


“그래. 정신체로서의 능력과 육체의 능력을 이용한 트릭이지. 어쨌든 육체에 속한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기술이기도해. 정신세계에서의 시간을 느리게 만들면 반대로 육체의 에너지는 빠르게 사용되는거지.”


“그럼 결과적으로 육체에 부담이 되는 것 아니야?”


“그렇지. 아주 정확히 짚었어. 정신체로서의 시간이 10배 느리게 흘러가게 만들면 육체는 반대로 10배 빠른 시간에서 생활하는 것과 다름없이 에너지가 필요한거지. 비유하자면 정신체에서 10배 느린 시간에서 100m를 가게된다면 육체는 1km 가는 정도의 에너지를 쓰게 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한 셈이지. 그래서 최적화가 중요한거야. 정신체로서의 에너지와 육체의 에너지의 비율을 조절해 평상시 에너지로 시간을 느리게 구성하는거지. 그게 바로 노하우고, 네가 앞으로 배워야할 것들이지.”


“그럼 너는 지금 육체의 에너지도 계속 쓰는 상태야?”


“그래. 너처럼 나도 병원에 누워서 영양분을 공급받는 처지지. 그러니까 너를 가르칠 명분도, 실력도 충분하다고.”


남자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 말았다. 어째서 남자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것인지, 나 역시 시간이 지나면 남자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몇 번이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남자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대답을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적절치 않은 것 같았다.


남자와 한 차례 의견을 주고 받은 후(남자는 내가 화를 낸 것을 ‘의견을 주고 받았다’고 표현했다) 정신체에 적응하는 훈련이 계속되었다. 이전처럼 공중에서 태평양 한 가운데로 떨어지는 동일한 방식이었지만 나는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남자 역시 이것말고는 딱히 뚜렷한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남자의 스승이라는 사람은 이 방법이 먹히지 않자 남자를 용암이 부글거리는 활화산으로 데려가 빠뜨렸다고 말했다.


“정말 무식한 영감이라고 생각했지. 그거 알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중에 가장 큰 고통이 불에 타는 통증이라고해. 영감은 나한테 그걸 설명하면서 살고 싶으면 정신체에 적응하라는 말과 함께 용암으로 빠트렸다니까?”


남자의 말을 듣고 나는 용암에 빠지는 것보다 태평양에 빠지는 것이 좀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용암속으로 몸이 잠기면서 엄지손가락을 편 손을 치켜든 채 사라지는 것은 내가 터미네이터가 아닌 한 전혀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자의 스승인 ‘영감’은 남자가 가까스로 정신체에 적응하자 ‘위기가 정신체 발현에 큰 효과를 줄 것’이라는 자신의 가설이 맞았다며 기뻐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태평양에서 한가로이 수련하는 것보다 10배는 시간을 앞당겼다며 기뻐했다고 말했다.


“학자 기질이 다분한 영감이었어. 아마 나보다 더 오래 혼자 있었으니 미치지 않으려면 그 수 밖에 없었을거야.”


남자는 자신의 스승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의 스승은 정신의 세계에서 40여년을 홀로 있다가 죽음을 맞이 하기 위해 현실 세계와 싱크를 맞춘 직후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


“나도 십 년정도만 지나서 너를 만났다면 곧바로 용암으로 직행했을걸?”


남자는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리면서 말했지만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나는 남자와 함께 서 있는 하늘에서 발 아래 있는 거대한 바다를 내려다 봤다. 아직도 낯설고 무섭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얼마나 뜨거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암에 들어가는 것보다 이것이 백배 낫다. 그것이 공포를 극복하게 해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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