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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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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Oct 30. 2022

9.

“준비됐어?”


“응.”


나는 남자의 말에 짧게 심호흡을 하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최대한 집중해봐. 네가 처음에 널 공으로 만들었을 때를 생각하라고.”


“도대체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했지?”


남자의 조언에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며 어리광을 피우듯 말했다.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그치만 한 가지 네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한 번 갔던 길이라는 거야. 한 번 갔던 길은 두 번도 갈 수 있지.”


남자가 오른 손을 들어 내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천천히 아래로 하강했다. 남자와의 ‘의견 교환’ 이후 이전과는 다르게 남자는 나를 내동댕이 치듯 떨어뜨리지 않았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덜 공포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쏜살 같은 속도로 거대한 바다에 처박히는 것은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아마 듣기만해도 괴로울 것이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듣는 것보다 겪는 것이 1000배 쯤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어쨌든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입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서히 바다와 가까워지면서 나는 다시 짧게 심호흡을 했다. 찰랑거리는 파도가 발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반기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파도의 장난이 내가 정신체로서의 능력을 각성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내 몸을 채워 나를 익사의 고통에 빠지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달갑지 않았다.


“자, 얼른 집중하라고!”


머리 위에서 남자의 고함이 들렸다. 그 이후로 남자는 사라지지 않고 매번 훈련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사실 이것이 공포를 많이 떨칠 수 있었던 더 큰 요인이다. 지켜보는 코치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든든했다. 남자가 위에서  하는 것은 별 것이 없었다. ‘조금 더 집중해!’ 라던지 ‘주변 환경을 네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같은 응원섞인 메시지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남자의 응원 섞인 메시지들이 거대한 바다에 집어삼켜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남자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쉴새 없이 귀를 때려댔다.


파도가 넘실대면서 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파도의 움직임은 규칙이 있어보이게 내 몸을 띄웠다 내려놨다를 반복했다. 반복된 실패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파도의 움직임에서 규칙을 찾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규칙이 있어보이는 움직임이 사실은 불규칙에 가까운, 도저히 내 머릿속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불가해한 패턴임을 인식할 때 엄청난 공포가 나를 바닷속으로 끌고 내려갔다.


나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파도의 움직임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번에도 바다에 집어삼켜지게 되면 남자와 ‘의견 교환’을 한 후로 세 번째 실패다. 남자는 실패를 바탕삼아 하나씩 깨달아가면 된다고 위로섞인 말을 건넸다. 남자의 위로가 불행히도 나에게 강박으로 다가왔다. 남자의 말에 느껴지는 묘한 불안감이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정신체로서 정신계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넘어서면 적응을 넘어 정신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하고 나도 남자처럼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능력을 길러야했다. 세 발 자전거에서 두 발 자전거로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정작 세 발 자전거도 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괜찮아. 원래 하나가 안되면 정말 죽을때까지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 정말 이것만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안되겠다 하는 그런 것. 정말 뭐에 씌인 것 같이 간단해보이는 건데도 이상하게 감이 안올때가 있단 말야. 그게 참 골치 아픈게 사람마다 안되는게 다 다르단 말이지. 그렇지만 포기만 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는 시점이 있어. 그때가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어? 이걸 내가 그동안 왜 못했지?’”


남자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중학교 수학시간이었다. 처음으로 사칙연산을 벗어나서 함수를 배우는데 나는 도저히 그래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의 설명을 따라 착착 이해가 진행되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데 나는 도무지 칠판에 그려진 십자선의 그래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나의 뇌는 ‘이것이 약속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의 뇌는 아무것도 이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깐깐한 기숙사 사감선생이 외출시간을 초과한 학생의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으며 듣다가 ‘역시, 안되겠어 이유가 부족해’라며 벌점을 매기는 것과 새로 배우는 것들에 대해 내가 하는 태도는 별로 다를바가 없었다.


나는 나의 상태가 그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말하는 ‘정신체에 적응하는 것’이 그토록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은 아마도 내 의식 깊은 곳 어느 한켠에서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어떤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작은 레지스탕스들은 내가 정신체에 적응해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왜?’라는 무기를 들고 끊임없이 사투를 벌인다. 정신체에 적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로 인해 태평양에서 계속해서 익사하는 경험을 하는 것에 대해, 그걸 통해서 이뤄내야 할,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 돌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끊임없이 ‘왜?”라는 총탄을 갈기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입장에서는 난처할 뿐이다. 레지스탕스들을 소탕할 무기도 내게 없거니와 그들은 도무지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이해할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끊임없는 저항을 지속할 뿐이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때, 해결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내, 그리고 기다림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다보면 어떤 기가막힌 타이밍에 그들의 총탄이 다 떨어진다. 총알이 다 떨어진 탄창을 재장전하려고 할 때 그들의 총에는 총탄 대신 어떤 계기가 가득 들어찬다. 그것은 누가, 어떤 형식으로 제공하는지는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떤 계기는 내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동안 언제고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때가 되어서야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고는 머쓱하게 서로를 쳐다보다 각 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언제 그렇게 성난 군중이었냐는 식으로 말이다. 그들이 돌아가고 남은 자리에는 풀리지 않던 자물쇠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며 거대한 문이 열린다. 마침내 꽉 막혔던 수문이 열리는 순간인 것이다.


중학교 때 수학이 내게 그랬다. 그날은 특별한 날도, 그 시간이 수학시간도 아니었다. 체육선생님이 ‘자, 다음 수행평가는 뜀틀넘기다! 다음주에 시험을 볼테니 다들 연습하도록!’이라며 각 자 자율연습시간을 주었을 때였다. 체육선생님의 말에 모두들 궁시렁거리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주에 당장 수행평가를 본다는 촉박한 시간탓도 있었지만 뜀틀을 연습할 곳은 체육시간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체육시간에 제대로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다들 하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뜀틀을 넘기 시작했다. 1번부터 차례대로 뜀틀을 넘었다. 개중에는 곧잘 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뜀틀모서리에 허벅지를 찔려 고통을 호소하며 매트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넘어진 친구들 모두 아픈 허벅지를 부여잡으면서도 어기적 어기적 걸어와 맨 뒷줄에 섰다. 한 쪽은 남자만, 한쪽은 여자만 쓸 수 있게 나누어서 연습을 했는데 남자애들이 있는 곳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남자애들은 뜀틀에서 내려와 줄을 서면서 우리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다. 그러면 기가 센 여자애들이 ‘쳐다보지 말라고 변태들아!’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내 차례가 도래했을때도 남자애들 중 몇몇이 눈을 돌리다 한소리를 듣고 낄낄거리며 고개를 돌리던 참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뜀틀의 정면에 서서 도움닫기를 준비했다.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발을 떼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뭔가 일어날 조짐을 발견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있는 힘껏 발을 박차고 뜀틀에 손을 짚으며 가볍게 뜀틀의 등허리를 넘었다. 그대로 정자세로 바닥에 착지한 나는 주변에서 들리는 환호성을 뒤로 한 채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조했다. 그리고는 비실비실 웃으며 맨 뒤로 가서 줄을 섰다. 그 날이 내가 처음으로 함수와 이차방정식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한 날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중학교 수학시간을 떠올리며 남자의 말에 맞장구쳤다. 남자는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기분이 좋았는지 ‘할 수 있다!’고 외쳤다.


나는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려고 노력했다. 파도는 예의 그 불규칙한 리듬을 이루며 내 머리위를 넘었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거대한 파도가 머리를 넘어갈 때마다 호흡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아야했다. 불규칙한 리듬 탓에 숨을 내쉬어야할 때 파도가 큰 너울을 만들어 다가오면 다시 숨을 참았다. 지금까지 그 불규칙한 리듬때문에 호흡이 가빠지고 호흡이 가빠지다보니 이대로는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스믈스믈 올라오다 기어코 나를 저 깊은 심연의 바다까지 끌고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좀 더 침착하게 호흡을 조절했다. 내 몸상태와 바다의 상태에 집중했다. 호흡을 할때도 항상 곧바로 파도가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대비를 했다. 그 덕에 호흡이 가쁘지만 턱끝까지 찰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 집중력을 유지한다면 30분은 더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지금 상황에 어떻게 하면 적응할 수 있는지 나는 호흡의 짬이 나면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헤집으며 고민했다.


‘네가 정신체라는 사실을 기억해.’


‘여기는 정신세계야.’


‘당연히 힘들지. 여기는 현실과 100% 가깝게 설계되었으니까.’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몇가지만 빼고.’


나는 그동안 남자가 말했던 것들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린들을 하나 둘 모았다. 정신체, 정신세계, 현실과 거의 비슷한 공간, 원하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곳.


남자는 몇가지 빼고는 자신이 공간의 주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자가 말한 몇가지 중 하나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남자가 만든 이 공간에서 생명체는 남자와 나, 단 둘이었다. 남자는 공간을 만든 주체기 때문에 당연히 있어야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남자가 만든 존재도 아니고 여기에 있어야할 이유도 없는 존재였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남자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남자와 나는 동일한 정신체다. 여기가 남자의 공간이지만 나 역시 정신체이다. 손님의 집주인의 공간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자신과 관련된 것은 변화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집주인이 대접한 커피를 주스로 바꿀수는 없지만 커피를 마시고 안마시고는 손님이 할 일이었다.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 거대한 바다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이것은 바다가 아니다. 아니, 바다지만 나는 이것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와 상관이없다. 남자가 만들어 낸 결과일 뿐이다. 그 결과가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절대적인 법칙은 없다. 나는 나만의 법칙이 있다.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붐비고 있을 때, 내가 더이상 바닷속에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몸은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있었고, 파도는 내 머리를 넘었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내 몸 밖으로 얇은 막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얇은 막은 마치 내 몸을 보호하는 것처럼 나를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 막 덕분인지 내 몸은 파도의 리듬에 휩쓸리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간혹 내 머리위로 넘어가는 파도들도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드디어 성공했구나! 믿고 있었다고!”


남자의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왔지만 어느새 남자는 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남자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이런, 고작해야 ‘프로텍시온’일줄 알았는데 ‘흐퓨’라니.”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몸을 둘러싼 보호막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남자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몰라 가만히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그동안에도 바다는 열심히 파도를 만들어내며 나를 집어삼키려고 했지만 나는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안되겠어. 일단 풀어봐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뭘?”


남자의 말에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네 몸을 두르고 있는 막, 그거 일단 풀어보라고.”


“어떻게?”


나는 정말로 방법을 몰라 남자에게 말했다. 사실 ‘뭘 풀라는거야?’ ‘어떻게 풀어야 하는데?’라고 물어보려했지만 이상하게도 단편적인 대답만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신호등의 빨간불 파란불처럼 내 의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느낌일 뿐 내 의사를 ‘말’을 통해 전달하는 기능을 상실한 기분이었다.


“나한테 통제권을 넘긴다고 생각해.”


나는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쓸데없이 이해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통제권을 넘긴다’라는 생각을 떠올려봐. 지금은 그 정도만 해도 되니까.”


나는 남자의 말대로 남자에게 ‘통제권을 넘긴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생각과 동시에 나는 내 몸 바깥의 두꺼운 막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곧이어 빈자리를 찾은 바닷물이 탐욕스럽게 막이 있던 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콜록, 콜록”


나는 기침을 하며 기도까지 들어갔던 소금물을 바닥에 뱉어냈다. 익숙한 패턴의 무늬가 있는 바닥을 보니 역시나 남자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슨 짓이야?”


나는 따지듯이 남자에게 물었다.


“진정해. 그렇게 안했으면 위험했어. 방법이 없었다고.”


“그냥 바다를 없애버리면 됐잖아? 아니면 나만 빼내어 여기로 돌아오든가.”


나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가 편해진 탓도 있었지만 정말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바다에 익사하기 직전까지 몰리는 경험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럴수가 없었어. 네가 ‘흐퓨’를 쓸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


나는 남자가 머리 위에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남자는 ‘흐퓨’라는 말을 했고 그 이후에 통제권을 넘기라고 했다.


“도대체 ‘흐퓨’가 뭔데 그래?”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문채 고심하는 것을 보니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정리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연 남자는 ‘흐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까같은 상황에서 ‘프로텍시온’을 쓴단 말이야. 물론 나도 영감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거의 대부분이 ‘프로텍시온’를 써. 나도 그랬고. 자, 눈보라가 치는 겨울이야. 그런데 너는 반팔만 입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하겠어?”


“집에 들어가서 옷을 껴입고 나오겠지.”


“그래. 그게 바로 ‘프로텍시온’이야. 어떻게 보면 너를 보호하면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노력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 반면에 ‘흐퓨’는 말 그대로 법칙을 거부하는 거야. 아까의 예로 설명하자면 ‘날씨가 왜 추운데? 누가 정했어? 난 그 법칙 따르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그거랑 내가 바다에 빠진게 무슨 상관이지?”


나는 간신히 잡은 정신체 능력을 남자가 와해시켜버린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겨우 익사의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됐는데 남자의 말로 인해 한순간에 다시 물을 토하는 끔찍한 상황을 되풀이 하게 한 것에 대해 남자는 책임을 져야했다. 게다가 ‘프로텍시온’이니 ‘흐퓨’니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니 나로서는 짜증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쏘아보자 남자는 양 손을 앞으로 내밀며 진정하라고 말했다. 남자 역시 내 기분을 모르는 것이 아닌지 당황스런 표정이다. 남자는 나와 ‘의견교환’을 한 후 부터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오히려 낯설정도로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처음의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모습하고는 딴 판이었다. 그간의 자신의 무례를 사과라도 하는 듯 남자는 내 말에 쩔절매고 있었다.


“자자, 내가 설명해줄게 봐봐. 네가 ‘프로텍시온’이 아니라 ‘흐퓨’를 택한 순간 기존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충돌게 되는셈이야. 서로를 굴복시키려고 법칙과 법칙이 맞서는 순간이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너의 ‘흐퓨’는 기존에 흘러가는 질서를 송두리채 부인하는 거라고. 마치 강물의 흐름의 반대쪽을 가리키며 ‘강물이 왜 이쪽으로 흐르지?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반대로 흐를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거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 강물이 ‘어 그래, 그럼 반대로 가자’ 하고 흐름을 바꾸겠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겠지.”


“그래. 흐르는 방향대로 흐르겠지. 자연이라면 그냥 무시한 채 흐를거야. 그저 작은 조약돌에 불과한 존재는 거대한 강물의 흐름에 조만간 묻히고 말거니까. 하지만 여기서 너라는 존재는 조약돌이 아니야. 내가 정신은 무슨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무한히 확장하는 성질?”


“그래. 어찌보면 정신 세계에서 너는 겉보기에 조약돌 같을 수 있겠지. 하지만 무한히 확장하는 정신의 성질때문에 이 세계만큼 커질 수 있는거야. 모습만 조약돌일 뿐이고. 그런 존재는 이 세계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고. 너 같으면 너의 세계를 통째로 지워버릴 수 있는 존재를 어떻게 하겠어?”


“제거하겠지.”


“그래 맞아. 근데 어떻게 보면 동등할수도 있는 두 정신인데, 한 쪽이 한 쪽을 제거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


“전쟁?”


“그래 전쟁이 일어나겠지. 서로의 생존을 걸고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거야. 유리한 것은 당연히 기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쪽이지.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그 세계가 알아서 움직일 수 있는 법칙을 만든다는 것이니까. 다른 곳에서 불쑥 끼어든 불순물 같은 존재보다 훨씬 유리하지. 법칙이 알아서 불순물을 제거하려고 밤낮으로 노력할테니까.”


“법칙이 알아서 움직인다고?”


“그래. 지구에서 일어나는 물리법칙 같은거지. 사과를 건물 옥상에서 떨어뜨리면 땅으로 떨어지듯이, 세계를 만든 정신체가 관여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법칙이 작용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는거야.”


“그럼 다른 곳에서 온 정신체는 기존의 정신체가 만든 세계에서 무조건 복종해야겠네?”


“대부분이 그렇지. 예외가 있다면 법칙에 일일이 대응할 수 있는 집중력을 그 세계를 부술 때까지 유지할 수 있거나, 그 세계보다 확장성이 더 빠른 정신력을 갖고 있거나지. 두 부류다 초인에 속하지만.”


“그럼 나도 초인이 될 수 있는거야?”


나는 신이 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아직까지 이 정신체의 힘이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남들과는 다른 기전으로 정신력이 발휘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나와 같이 정신력을 사용하는 부류중에 초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남이 만든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들뜨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럴일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어. 영감님이 말하기를 초인은 자기도 단 한 번 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거든. 그리고 그 초인도 자신같은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다고 말했고. 어떻게 보면 너한테는 좀 더 어려운 길이지. 정신력을 발휘하는 기전이 남들과는 다른 ‘흐퓨’인 탓에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신력을 다뤄야하니까 말이야. 초인이 아닌 이상 무턱대고 ‘흐퓨’를 사용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거라고. 흔적도 없이.”


“흔적도 없이.”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의 마지막 말을 따라 읊조렸다. 남자는 내가 자신의 말을 따라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다소 맥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겨우 정신력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했는데 남들보다 훨씬 어렵게 사용해야하는 능력이라니. 마치 추첨에 당첨됐는데 상품으로 받은 것이 쓰기는 써야하는데 무척이나 불편한 물건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나의 반응을 살피더니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라고 말하며 내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남자는 자신이 방법을 찾을 동안 내가 얻은 ‘흐퓨’의 능력을 사용하는 연습을 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내가 위험한 능력인데 굳이 연습할 필요가 있냐고 묻자 남자는 ‘이제와서 능력의 기전을 바꿀수는 없는 노릇이니 제어에 초점을 맞춰서 연습하고 있어’라고 조언했다. 남자는 혼자서 생각이 필요한 상황이니 안전하게 연습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들어준다며 손가락을 튕겼다.


남자가 만들어낸 공간은 사람 두 명이 들어갈 만한 욕조가 있는 욕실이었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에 세면대가 두 개, 한쪽 벽면이 통 거울로 이뤄진 욕실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저택에 있는 욕실이었다.


“자, 여기서 바다에서 했던 연습을 하는거야.”


남자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욕조에 물이 가득찼다. 욕조에 담긴 물은 잔잔한 파동을 이루다 이내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파도의 크기였다. 족히 1m는 넘는 크기의 파도가 쉴새없이 솟았다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욕조를 훌쩍 넘길만한 크기였지만 욕조 밖으로는 한 방울도 물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듯 파도는 딱 욕조의 경계를 때리고는 하얗게 부서지며 사라졌다.


“여기 앉아서 ‘흐퓨’ 연습을 하는거야. 이 욕조는 내가 독립된 세계로 만들었기 때문에 안심해도 좋아. 물론 이 욕조도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네가 ‘흐퓨’를 사용한다면 질서를 지키기 위해 너를 제거하려고 할거야. 하지만 너보다 약한 정신력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네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거야. 이 욕조를 ‘흐퓨’하는데 성공하면 다음 단계로 저절로 넘어갈테니 계속 연습하고 있어.”


남자는 ‘그럼 화이팅!’이라는 말을 남긴 채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쉴 새 없이 파도치는 욕조를 보며 옷을 벗고 들어가야하나 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태평양의 거대한 파도에서도 ‘흐퓨’를 통해 보호했는데 이까짓 욕조쯤이야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강한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머릿속으로 바다에서 만들었던 보호막을 생각하며 욕조 안으로 ‘풍덩’ 소리를 내며 몸을 던졌다.


욕조에 들어와서도 나는 옷이 젖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까보다는 옅지만 몸 주변으로는 옅은 푸른색의 보호막이 둘러쌓여 있었다. 나는 옷이 젖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곧 이어 다가오는 파도를 보고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기 급급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욕조 밖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바닥으로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내 몸이 다 젖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양 손으로 팔과 다리, 몸통을 차례로 훑었다.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옷이 반항하듯이 몸에 붙었다가 불쾌한 기분을 남기며 떨어졌다. 나는 시간을 들여 물기를 털어내며 생각을 정리했다. 욕조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남자가 말한 ‘흐퓨’라는 능력이 몸 바깥으로 옅은 막을 생성하며 내 몸이 남자가 만든 물에 젖지 않도록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겉보기에는 작은 욕조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와 연습했던 태평양 같은 깊이와 높은 하늘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욕조에서 기껏해야 목까지 닿는 물을 상상했던 것과 거대한 괴리가 발생하자 나는 당황했고, 내 ‘흐퓨’를 인지한 남자의 세계는 고층 빌딩만한 파도를 만들어 말그대로 나를 쓸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의식을 잃은 것과 동시에 욕조 바깥에서 정신을 차렸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남자가 내가 욕조 안에서 ‘흐퓨’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자연스럽게 욕조 바깥으로 이동하게끔 조치를 취해놓은 것 같았다.


몸의 물기를 어느 정도 털어낸 나는 욕조를 두고 잠시 고민하다 다시 욕조 안으로 발을 담궜다. 애초에 지금까지 와서 포기를 논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남자와 함께 그 고생을 하고 여기서 주저 앉아버린다면 내 삶은 남들과 다르게 아스트랄을 경험했다는 희귀한 이벤트를 남긴채 종료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사건을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한 채 내 삶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의지가 나를 다시 욕조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욕조 안으로 어깨까지 담그고 나자 예의 그 거대한 바다가 나를 반겼다. 여전히 파도는 내 키보다 높았고 당장에 나를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는데에 집중했다. 남자의 설명에 의하면 집중하는데에서 그치면 안됐다. 정신력이라는 것은 기존에 알고 있던 감각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력을 느끼는 감각을 깨워야 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력을 느끼는데 성공했기 때문에(비록 그것이 ‘흐퓨’일 지라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했다. 마치 사람이 숨쉬는 것을 자각하지 않듯이, 자연스럽게 유지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까처럼 예기치 못하게 파도가 덮쳐도 나의 ‘흐퓨’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파도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아파트 7층 높이는 되어보였다. 뒤로는 꾸역꾸역 바닷물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파도의 높이는 더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대신 파도는 몸뚱이를 불리고 있었다. 아마도 남자의 세계는 나를 제거하기 위해 아까와는 다른 전략을 취한듯 했다. 몸집을 불릴대로 불린 파도는 이제 곧 느리지만 빠른 속도로 나를 덮치러 올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눈을 질끈 감는 대신에 정신을 느끼는 감각에 집중했다.


이제는 눈 앞까지 온 파도가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주위를 어둡게 만들었다. 파도 안의 세세한 물줄기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파도가 나를 덮치기 찰나의 순간에 손을 내밀었다.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손을 뻗은 것이었다. 여전히 얇은 보호막에 둘러 쌓인 나의 손이 파도에 닿자마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내 손에 닿은(정확히는 손 바깥에 있는 보호막에 닿은)파도는 그 부분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졌다. 다시 손을 떼자 언제 그랬냐는 듯 파도는 빈자리를 바닷물로 꽉 채워 견고한 물의 벽을 만들어냈다.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파도는 내 손이 닿은 자리만 사라졌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손을 떼자 역시나 빠르게 빈 곳이 채워졌다. 나는 비로소 남자가 말한 ‘흐퓨’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흐퓨라는 것은 말 그대로 법칙의 존재를 부정하는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파도가 내 몸을 부술 기세로 나를 덮쳤다. 나는 아까처럼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대신 나를 덮쳐오는 파도를 가만히 바라봤다. 더이상 이까짓 파도가 두렵지 않았다. 나의 그런 태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파도는 무서운 기세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 앞까지 바닷물이 다가오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도가 내 몸에 닿는 순간 그대로 사라지며 반대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콰아악’ 소리가 귀 옆으로 크게 들렸다. 딱 내가 서 있는 자리 말고는 여전히 존재하는 파도가 가만히 있는 바닷물을 때린 소리였다.


“됐어!”


나는 신이 나서 혼잣말로 외쳤다. 드디어 ‘흐퓨’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단 생각에 나는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였다. 눈 앞에서 다시 거대한 파도가 꾸물꾸물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크고 두껍게 만들어진 파도는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남자가 파도를 ‘흐퓨’할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진행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까의 반복이었다. 파도가 눈 앞까지 다가왔지만 나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생생하게 깨어난 정신력에 대한 감각은 눈 앞의 파도를 명확히 ‘흐퓨’하고 있었다. 또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를 지나치며 떨어지는 파도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 위쪽에서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열 번의 천둥을 하나로 합쳐 놓은 소리같았다.


나는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내 주변 바다는 잔잔했고 저 멀리서 다시 한 번 나를 ‘제거’하기 위해 파도가 응축되고 있었다. 하늘도 역시 쨍하니 밝았다. 이따금 돌아다니는 갈매기만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꽝!”


나는 다시 한 번 들린 거대한 굉음에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닷속으로 빠져들었다. 말 그대로 물밀듯이 들어오는 바닷물에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정신을 잃은 나는 다시 욕조 바깥으로 나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는 상태로 돌아와버렸다.


“뭐지?”


나는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을 기대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난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내 질문에 대답을 했다.


“잠시만 바깥에서 기다려.”


“무슨 소리야 이게?”


나의 물음에 남자는 오른손 검지를 입에 갖다대었다. 나는 말을 멈추고 가만히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남자는 다시 오른손을 들어 내게 뻗었다. 기다리라는 신호다. 이어 손가락을 튕긴 남자는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번의 굉음이 더 들렸다. 소리는 왼쪽에서도 나고 오른쪽에서도 났다. 심지어 발 밑에서도 울렸다. 마치 무엇인가를 찾아 다니는 것처럼 이곳 저곳 돌아다니던 굉음은 네 번째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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