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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Oct 30. 2022

12.

“쾅!”


벌써 열 번이 넘는 소리였다. 나는 책상 밖으로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포식자가 끈질기게 따라붙은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여섯번째 굉음에서 멈추었다. 그때 남자는 이마의 땀을 훔치는 척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휴, 끈질긴 놈들 겨우 따돌렸네.”

남자는 태연한척 했지만 나는 그때 흐트러지는 정신력을 가까스로 잡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남자와 함께 딛고 있는 바닥과 주변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흐렸다 선명해졌다를 간헐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고 휙하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이 위태해보였다. 남자는 나의 걱정스러운 생각을 읽었는지 걱정하지 말라며 웃어주고는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남자는 내가 한참이나 거부를 사용하는 것을 실패하고 나서야 다시 나타났다. 약간은 피곤해보이는 얼굴의 남자는 겨우 회복이 되었다며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굉음이 그때보다 거의 두배는 넘게 지속되었다. 나는 사태가 심각함을 느꼈다. 머릿속으로 남자를 불러봤지만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독서실 책상 주변을 빙빙 돌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때였다.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틀렸어. 더 이상 숨을 수가 없어.”


남자의 등장과 함께 주변 풍경이 또다시 아지랑이처럼 흐릿해졌다. 내가 나온 독서실 방도 더 이상 방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남자의 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는 남자에게 아까부터 혼자 고민하던 것을 털어놓듯이 물었다.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 네가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해도 포식자가 따라붙을거야. 가장 최선은 곧바로 네가 육체로 돌아가는 일이지. 거기부터는 이제 온전한 인간의 영역이니까 포식자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을거야.”


“그럼 너는?”


“나는 끝났어. 이미 포식자들에게 꼬리를 잡혀버렸기 때문에 방법이 없어.”


“곧바로 도망치면?”


나는 ‘나를 버리고’라는 말을 생략한 채 남자에게 말했다.


“소용없어. 그렇게 되면 우리 둘다 포식자의 먹이가 되는 결말일 뿐이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이나마 시간을 끄는 것. 희망이 있다면 네가 육체로 돌아가서 너라도 살아남는 것이지.”


남자는 생략된 말에도 불구하고 찰떡같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 남자는 인생, 그러니까 자기가 살아온 삶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그 끝을 이야기하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했다.


“어떻게 그렇게 덤덤할 수 있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기 일보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남자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 남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나 자신도 이해되지 않았다.


“오래 살았으니까.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짧았을지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충분히 오래 살았어.”


남자는 흐릿해져가는 몸뚱이로 읊조리듯 내게 말했다.


“언제고 나 역시 ‘숭고한 여정’을 떠나게 될 처지였지. 이런 곳에서 거의 영원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적어도 마지막은 치열하게 살았으니까 말이야. 인간처럼.”


남자의 목소리는 자조적이었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런 남자의 눈빛을 보며 어쩌면 남자는 이 순간을 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치열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그런 욕망, 이쯤했으면 생을 마감해도 괜찮다는 스스로의 위로 같은 것이 남자의 눈에서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좀 더 치열하게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살아있고 싶었다. 이쯤하면 됐다가 아니라 나는 이쯤이면 아까웠다. 다시 남자에게 방법이 없겠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엄청난 굉음이 들리며 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삐-’


기분나쁜 소리가 귀에서 울리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되었다.


‘정신차려’


남자가 말했다. 귀에서는 여전히 이명이 들렸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머릿속에 각인되듯 똑똑히 들렸다. 아니, 인식할 수 있었다.


‘포식자가 내 세계로 들어왔어. 이제부터는 시간 문제야. 어쨌든 이 세계를 먹어치우려면 내 ‘프란시프’를 찾아야해.’


“프란시프?”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분명 목소리가 입을 떠나는 것을 느꼈지만 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근본’.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게 인식시키고 세계에 증명하는 총체. 포식자가 그것을 먹어치우면 그대로 끝이야. 너도 더이상 숨어있을 수 없겠지. 가장 찾기 어려운 곳에 두었으니까 너도 함께 있도록 해. 나는 어떻게든 포식자를 속여 시간을 끌어볼테니까-’


나는 남자의 말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남자의 위로 검은색의 무엇인가가 순식간에 떨어져내렸다. 깜짝 놀란 나는 그만 제자리에 주저 앉았다. 남자의 위에 떨어진 검은색의 형체는 꾸물대며 몸을 움직이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입’ 이었다. 상어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정삼각형의 이빨들이 무수히 달려있는 그 입은 남자의 허리를 물고 있었다.


‘이런, 거친 친구네.’


남자의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은 ‘입’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걱정하지마. 근본을 삼키는 것이 아니면 나는 없어지지 않으니까. 자, 숨바꼭질 준비는 끝났나?’


남자의 말과 동시에 ‘입’에 달려있던 남자의 다리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입’은 허전해진 공간을 ‘쾅!’ 소리나게 집어삼키며 무엇인가를 찾는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걱정마. 쟤들은 어차피 보지 못해. 네가 정신력을 사용하지 않는 한 눈치채지 못할거야.’


“그럼 여기 가만히 있으면 안돼? 어차피 못찾는다며!”


‘뭐, 그러면 쟤들 특성상 이 주변부터 내 세계를 먹어치울테니 가장 빨리 소멸하는 방법을 택하는 거겠지.’


나는 입으로 욕을 뱉으며 어디로 가야하냐고 남자에게 물었다.


‘기다려 우선 후속부대를 못들어오게 동선을 꼬아보고 있으니까. 거기 가만히 있으라… 잠깐! 언제 ‘거부’를 썼지?’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이 내 쪽으로 거대한 입을 벌리더니 곧장 내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입’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도망가기에는 ‘입’의 속도가 너무 빨랐고 무서웠다.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대로 포식자의 입에 먹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을 하던 차에 나는 내 몸이 빠르게 밑으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으악!”


나는 내 비명소리를 귀로 들으며 아래로 추락했다. 십초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털썩 소리를 내며 나뭇잎 같은 것을 모아 놓은 곳에 뒹굴듯이 떨어졌다.


‘아니, 도대체 언제 능력을 쓴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 위로 호롱불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침침한 불빛에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떨어진 곳은 나뭇잎이 아니라 건초더미였다. 수북히 쌓인 건초더미 양 옆으로는 칸막이로 분리된 공간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나는 내 귀로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새삼 낯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귀가 안들렸는데 이제야 들리네. 살 것 같아.”


‘귀가 안들렸다고? 언제부터?’


“아까 포식자가 나타나면서 큰 소리가 났잖아. 그게 고막을 다치게 한 건지 그때부터.”


‘고막이라니 정신차려 너는 정신체인데 고막이 있을리 없잖아.’


남자가 한숨을 쉬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현실에 가깝게 구현한 세계인데 고막도 있겠지!”


‘아니 고막은 없어. 내가 고막까지 설계하진 않았거든. 우리는 정신체라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감각들은 그저 신호를 반영할 뿐이야. 방금 귀가 안들린다고 느낀 것은 갑자기 포식자가 들이닥치면서 거대한 신호를 발산했기 때문이지. 그것을 너는 소리로 받아들여서 과부하가 걸리지 않게끔 거부한거고. 네가 거부를 사용하고 있으니 포식자는 네 정신력을 탐지해서 너한테 달려든거야.”


“어쨌든. 이제 들리니까 다행이야. 그래서 여기는 어디야? 지금 상황은 어떤데?”


‘좋지 않아. 우선 지금은 포식자 하나만 들어왔지만 곧이어 다른 포식자들도 들이닥칠거야. 그리고 아마… 재수가 없으면 ‘가장 나중에 사라지는 자’ 역시 볼 수 있겠지. 참 영광스럽군 전설의 포식자를 볼 수도 있다니. 이런 마지막도 나쁘지 않아.’


남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말투에 전혀 동요함이 없었다. 나는 느긋해보이는 그 말투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 헛간같은 곳에서 숨어있는 것 뿐이야?”


‘헛간이 맞긴 한데 그래도 나름 나에게 소중한 기억이 담긴 곳이라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보관한 장소기도 하고.’


남자의 말에 나는 조금 말이 심했나 싶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다고 자위했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데?”


‘내 근본을 숨겨놓은 곳이지. 저 건초더미를 봐.’


나는 남자의 말대로 건초더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건초더미 사이로 희미한 불빛같은 것이 보였다. 나는 건초더미로 가까이 다가갔다. 건초더미 아래에 무엇인가 있었다.


“건초더미 아래에 뭔가가 있어.”


‘분명히 그렇지.’


“파봐도 돼?”


‘원한다면.’


나는 남자의 허락을 듣고 곧바로 건초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초 하나하나가 가볍다고해서 건초더미를 걷어내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아래쪽 건초를 한 아름 들추면 기다렸다는 듯이 위쪽에 있는 건초가 다시 그 자리를 채웠다. 나는 몇 번의 실패끝에 건초더미 옆에 있는 갈퀴를 발견했다.


“진작 말을 해주면 좋았잖아!”


‘이봐. 나는 지금 포식자로부터 도망치는데 여념이 없다고. 지금도 바로 뒤쪽에서 포식자가 쫓아오고 있는 걸. 이렇게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


나는 실제로 남자가 숨을 헐떡이듯 급박하게 말하고 있었으므로 더이상 덧붙이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갈퀴를 붙잡고 아까보다 훨씬 많은 건초를 긁어냈다. 다행히 위쪽의 건초가 내려오는 속도보다 내가 갈퀴질을 하는 건초의 양이 더 많은 덕분에 건초더미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건초더미가 낮아지는 것과는 반대로 안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점점 밝아졌다. 건초더미를 반 정도 덜어내어 양 옆으로 동산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파내자 금빛으로 빛나는 상자가 놓여있었다.


“보물상자야?”


혼잣말 하듯 남자에게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갈퀴를 바닥에 내려놓고 상자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상자는 꼭 만화에서 나오는 해적들의 보물상자 같이 생겼다. 건초더미를 뚫고 나온 빛은 상자의 이음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상자의 입구 부분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두툼한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것을 열려면 그만한 크기의 열쇠가 필요해보였다.


“혹시 여유가 된다면 열쇠가 어딨는지 좀 알려줄래?”


장난스럽게 남자에게 말을 걸었지만 여전히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다 스스로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포식자가 남자와 나를 집어삼키려고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데 이런 농담이나 주고 받을 생각을 하다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아스트랄이라는 세계부터가 문제다. 정신력만 사용할 수 있다면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상자의 자물쇠를 살펴보았다. 자물쇠가 크다보니 안의 잠금장치가 훤히 보였다. 마치 누군가 열어주길 바라는 듯이 보일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나는 잠금장치의 모양을 살핀 뒤 머릿속으로 자물쇠에 꼭 들어갈 만한 열쇠를 떠올렸다. 색깔은 황금색으로 하기로 했다. 남자의 보물상자와 황금열쇠란 그보다 더 어울릴 수가 없는 한 쌍이었다. 머릿속에 넣은 황금색 열쇠를 불러오기 위해 나는 아까 치워두었던 건초를 한움큼 쥐었다. 건초더미에 정신력을 움직여 황금색 열쇠를 상상하자 손에 쥔 건초더미가 순식간에 황금열쇠로 바뀌었다. 나는 창조의 쾌감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자가 봤으면 혀를 차고 고개를 저을만한 행동이었다.


“제발 그런 것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애초에 매개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이라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세계를 창조하는 첫 걸음이라고 몇번을 말해. 네가 하는 것은 마술사나 연금술사가 하는 짓과 다를 바 없다니까?”


남자의 말처럼 내가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는 것은 매개가 있어야 정신력을 치환할 수 있다는 점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 정신력은 매개가 없으면 완벽한 형태를 갖출 수 없었다. 남자의 욕조에서 거대한 파도를 막을 때처럼 희미한 빛을 띄는 보호막으로써만 기능할 뿐 구체적인 형태를 만드는 것은 도무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반대로 매개가 있으면 지금처럼 손쉽게 열쇠를 만들 수 있었다. 남자는 내가 지금처럼 남자의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떼어 다른 것으로 치환할때마다 어떻게 된 것이 더 어려운 것을 해내면서 쉬운 것을 못하냐며 핀잔을 주었다. 왜 그렇느냐는 나의 질문에 따른 남자의 설명을 들으니 나 역시도 납득이 갔다. 정신력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행위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정신력에 상상력을 주입하여 형태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창조가 아닌 변형이다. 정신력의 무한함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어 내가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반면에  나처럼 매개를 이용해 변환하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법칙을 재배치해 내가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남자의 세계에 존재하는 돌이라는 법칙을 내 마음대로 나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남자 역시 이론상으로만 그렇게 짐작할 뿐이지 직접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남자는 내가 이것저것 만들어 놓은 것들을 보기 싫다며 치워버릴 뿐이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는 못했다. 어찌되었든 내게는 정신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능력이었다.


나는 건초더미로 만든 황금색 열쇠를 자물쇠에 끼워넣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에 열쇠가 단단히 맞물리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왼쪽으로 힘을 주자 다시 한 번 ‘찰칵’ 소리를 내며 열쇠가 돌아가고 자물쇠가 열렸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듯이 묵직하게 아래로 내려온 자물쇠 몸통은 말발굽 같은 머리에 의존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애처로운 몸뚱이를 잡고 상자에서 분리해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자물쇠를 제거하니 아까보다 더 벌어진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이 강해졌다.


상자를 덮개를 완전히 젖히자 상자 안쪽에서 눈이 부시도록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서 보이지 않았지만 상자에서 나온 빛이 내 몸 주변을 감싸는 것 같은 분명한 느낌이 들었다. 빛은 내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내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빛이 흡수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기억을 볼 수 있었다.


남자의 기억은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빠르지만 선명하게 흘러가는 남자의 기억을 보며 나는 남자가 왜 이 기억을 보물상자에 꽁꽁 감춰두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기억은 따뜻했다. 나는 남자의 기억에서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파비앙.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기억속의 남자는 지금 내게 보이고 있는 모습처럼 금발의 꽤나 잘생긴 미청년이었다. 파비앙은 줄리앙을 사랑했다. 줄리앙은 빨간빛이 도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여자인 내가 봐도 한 눈에 반할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특히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빨려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오묘했다. 파비앙은 줄리앙을 사랑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기억속에서 파비앙의 진심이 내게 전해졌다. 세상에 널린 시시껄렁한 말뿐인 사랑과는 달랐다. 파비앙은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다.


그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그 날은 결혼을 약속한 파비앙과 줄리앙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오후에는 비가 그칠 것이라는 예보를 보고 파비앙과 줄리앙은 어제 밤 렌트한 빨간색 미니쿠퍼에 짐을 실었다. 조금 연식이 오래되긴 했지만 미니쿠퍼는 줄리앙이 좋아하는 차이기 때문에 파비앙은 일부러 신경써서 제일 상태가 좋은 차량으로 렌트를 했다.


오전 7시30분. 와이퍼가 끼기긱하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불편하게 움직였지만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빠듯했으므로 파비앙과 줄리앙을 실은 미니쿠퍼는 목적지를 향해 급히 출발했다.


한시간쯤 달렸을까, 목적지까지 10km정도 남은 것을 확인한 파비앙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줄리앙은 이번 여행을 위해 전 날에서 늦게까지 야근을 했으므로 조수석 창가에 얼굴을 기대고 곯아 떨어져 있었다. 한사코 자지 않겠다는 그녀를 억지로 재운 파비앙이었다. 줄리앙은 다정하게 자신을 미는 파비앙의 손길에 무너지듯 잠에 들었다. 잠든 줄리앙의 얼굴을 흘끗 쳐다본 파비앙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줄리앙과의 결혼을 마지막까지 고심하던 그였다. 이제 갓 졸업해서 평범한 직장에 취직한 그의 재정상태는 과연 줄리앙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대단한 학벌을 가진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그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파비앙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파비앙이 자신의 삶에 대해 딱히 불만을 품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근근히 먹고 살아가는 집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병환으로 일찍 여의었고 17살부터 혼자 살아왔지만 파비앙의 눈에 비친 세상은 염세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철학에 심취한 아버지의 영향일 수도 있었고,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어머니의 영향일 수도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파비앙의 친척이 파비앙을 부탁한 신부님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어찌됐든 파비앙이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대충 알고 거기에 대해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것은 위의 열거한 것들과 알려지지 않은 세세한 경험들의 복합적인 작용이었을 것이다.


파비앙은 부모의 죽음을 ‘아쉽지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파비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달아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의 몸에서 이만큼의 수분이 나와도 살아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할 정도로 많이 울었다. 그렇지만 인간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자연에 속한 모든 생명체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찾아올 뿐이었다. ‘자연스러운 것’의 잣대에서 인간만이 특별한 대접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에게 가장 신세지는 동물이니까. 아쉽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받아들여야 했다.


줄리앙이 파비앙의 인생에 개입하기 전까지 파비앙은 자신의 인생관에 흔들림 없이 충성했다. 그것은 염세적이지도, 비판적이지도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인생관이었다. 파비앙의 인생관의 핵심은 ‘인간은 어차피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비앙이 염세적이거나 비판적인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파비앙은 어차피 죽음을 목전에 둔 하나의 인간으로써 좀 더 인간답게 사는 것에 가치를 두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뭔데?”


신부님의 집에서 함께 자란 에밀리가 물었다. 에밀리도 파비앙과 마찬가지로 고아였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에밀리는 부모님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글쎄. 최대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흥. 그딴게 무슨 소용이야. 돈이나 많이 벌어서 펑펑 쓰다 뒈지면 그만이지.”


“쉿. 신부님이 들이시면 어쩌려고 그래.”


파비앙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에밀리를 말렸다. 에밀리는 손을 허공에다 대고 휘저으며 말했다.


“들을테면 들으라지.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애초에 돈이 많았다면 이딴 곳에 있지 않았을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파비앙 잘들어. 나는 돈 많은 곳에 시집갈거야. 애초에 나는 너처럼 머리가 똑똑하지도 않고,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얼굴은 이쁘장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런 허무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줄래? 너처럼 재능있는 애가 그런 소리하면 나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재수없게 느끼니까. 꼭 잊지말고 기억해. 내 말 알았지?”


에밀리는 정말이지 악착같이 살았다. 배가 고파도 참았으며 남자애들보다도 더 운동을 많이해서 몸매를 가꿨다.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하러 오는 부잣집 아줌마들에게 상류층의 기본 예절과 말투, 인사법들을 배우는데 열중했다. 그리고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게되었다. 남편이 에밀리보다 스무살 가까이 나이가 많았지만 에밀리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다.


“파비앙. 내가 말했지?”


“그래.”


나는 에밀리의 결혼소식에 착잡하면서도 축하하는 모순된 감정을 느끼며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라고. 나는 지금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하니까. 너에게는 너의 인생이 있듯이, 나에게는 나의 인생이 있는거야. 뭐,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는 잊어버리라고. 그때는 악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다 이루었으니 그런 것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아.”


“그래. 다행이네 축하해.”


“잘 지내 파비앙. 나는 과거는 싹 묻어둔 채 앞으로만 갈거야. 그래도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한 번쯤은 부탁하면 도와줄게.”


파비앙은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에밀리는 파비앙의 표정을 보며 ‘뭐 네가 그럴일은 없겠지만 말이야’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밀리의 말대로 파비앙이 에밀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밀리가 파비앙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느 날 신부님은 파비앙을 비롯해 에밀리와 친했던(신부님은 친한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이들을 불렀다.


“에밀리가 죽었단다.”


신부님은 착잡한 목소리로 에밀리의 죽음을 전했다. 고집스럽던 신부님의 얼굴 주름은 에밀리의 죽음이 얹힌 듯 더욱 깊게 패였다. 신부님은 가지고 있던 편지를 보여주며 에밀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했다. 편지는 에밀리에게서 온 것이었다. 거기에는 교양 있는 집안의 여식이 쓴 것처럼 화려한 필체로 에밀리가 겪은 일에 대해 쓰여 있었다. 편지에는 신혼 첫날부터 시작된 남편의 폭력과 술주정, 변태적인 성적 취향, 그리고 그것을 감싸며 오히려 에밀리의 탓으로 몰아가는 남편의 어머니까지 에밀리는 이렇게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쓴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호소했겠니.”


신부님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었다. 에밀리가 보낸 단 한 장의 편지를 신부님은 몇 번이고 들여다 보았는지 종이가 반질반질하게 닳아있었다. 에밀리는 편지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따위 집구석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멋진 복수는 죽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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