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코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arka Oct 30. 2022

13.

편지 말미에는 일반적인 서명보다 더욱 크고 화려한 에밀리의 서명이 아름답게 휘갈겨 쓰여 있었다. 파비앙은 참으로 에밀리 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신부님은 자식같은 에밀리의 죽음에 ‘호소’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에밀리 방식의 ‘복수’였다. 편지를 받고 급히 알아본 신부님의 소식통에 의하면 에밀리는 곱게 보관해놓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가는 사람처럼 진한 화장을 한 후에 다락방으로 올라가 그대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에밀리가 발견된 것은 남편이 출근을 하기 위해 문 밖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정면에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피를 흘리는 에밀리의 눈과 마주친 순간 그대로 기절했다고 한다.


참 에밀리 다운 복수였다. 에밀리의 남편은 죽을때까지 에밀리의 눈빛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에밀리의 남편이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에밀리의 시어머니 또한 괴로움에 몸부리칠 것이다. 에밀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신부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실때면 에밀리는 ‘사랑할만해야 사랑하죠’라고 대꾸했다. 그때마다 신부님에게 벌을 받아 손을 들고 서있었지만 에밀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좀 더 과감하게 신부님의 말에 대꾸한 에밀리였지만 신부님이 에밀리에게 주는 벌의 강도는 늘 동일했다. 벽을 보고 두 손을 든 다음 5분 정도 생각에 잠기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때는 신부님의 벌이 늘 같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는 신부님이 왜 그랬는지 파비앙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신부님은 에밀리가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비앙과 에밀리보다 훨씬 더 오래 산 신부님이 모르실 리 없었다. 신부님은 신부님의 방식대로, 혹은 주님의 뜻대로 에밀리에게 조언을 한 셈이었다. 그 조언을 에밀리가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간에 선택의 책임은 에밀리가 지고 가는 것이었다. 얼마 후 치뤄진 에밀리의 장례식에서 신부님은 깊은 한숨을 뱉었다. 파비앙은 그 길고 긴 한숨에서 신부님의 자책감과 후회, 안타까움 같은 것을 느꼈다. 파비앙도 에밀리의 죽음이 슬펐다. 유일하게 파비앙에게만 도움을 주겠다고 말한 에밀리였다. 파비앙은 자신에게 이어진 또 하나의 유대가 끊어지는 것을 느끼며 무척이나 울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파비앙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죽음은 늘 언제나 그렇듯 슬프고 적응되지 않는다. 그럴때마다 파비앙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도 언젠가는 죽어. 그러니 괜찮아.’


파비앙이 줄리앙을 만난 것은 에밀리의 장례식이 있고 세 번의 가을이 지나고 나서였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전 날밤 비가 왔는지 짚 앞의 도로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파비앙은 힘을 주는대로 쭉쭉 미끌어지는 바닥을 보며 신고 있던 워커의 밑바닥을 살폈다.


밑창의 홈이 거의 다 사라져 매끈해져 있었다. 파비앙이 ‘하나 사야겠네’라고 생각하며 발을 내릴 때 뒤에서 ‘조심해요!’라는 외침이 들렸다. 파비앙이 고개를 돌려 무엇을 조심해야하는지에 대해 물으려고 했을 때 파비앙의 가슴께로 묵직한 무게의 어떤 것이 날아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순간 파비앙은 자신의 엉덩이가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서 축축해지는 것도 잊은 채 사랑에 빠진 것을 직감했다.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줄리앙이라고 말했다.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며 손을 건넸다. 줄리앙의 손을 잡고 일어난 파비앙은 그제서야 엉덩이가 축축해진 사실을 깨닫고 반대편 손으로 엉덩이를 털었다. 줄리앙은 연신 사과의 말을 전하며 지금은 자신이 출근을 해야하니 배상에 대해서는 따로 연락을 달라고 명함을 건네고는 고개를 숙이며 반대편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갔다. 방금 넘어진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조심성이 없는 뜀박질이었다. 그날 저녁 파비앙은 퇴근길에 줄리앙에게 연락해 배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줄리앙은 흔쾌히 파비앙과 배상에 대해 논의했고, 그들이 아침에 만난 곳 근처에 위치한 펍에서 맥주를 한 잔 대접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 다음은 흔히 겪는 이야기였다. 파비앙과 줄리앙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연인이 되었다. 다투고 화해하고를 반복했다. 5년 이라는 시간을 만나며 반대하는 줄리앙의 아버지를 간신히 설득해 결혼을 허락받은 파비앙은 그때부터 자신 안의 무엇인가가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줄리앙이 파비앙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만약에 우리가 같이 살다 한 명이 먼저 죽으면 되게 허전하겠다. 그럼 파비앙은 어떨 것 같아?”


파비앙은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니 슬프지만 받아들이며 살다가 가겠다고 대답했어야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파비앙의 인생이란 그런 것이었다. 태어나서 자신의 일을 하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원래 있던 미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모든 인간이 결국에는 가야만 하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파비앙이 생각하는 죽음이고 인생이었다. 그렇지만 파비앙은 줄리앙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파비앙은 그때 비로소 자신에게 무엇이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줄리앙의 죽음을 생각하면 파비앙은 배꼽 위쪽이 쓰라렸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한 번은 심각하게 좋지 않았다. 줄리앙과 와인을 마시며 대화하던 차였다. 둘 다 진지하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줄리앙이 불쑥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대화를 꺼냈다.


“둘이 살다가 내가 먼저 죽으면 어떡하지?”


파비앙은 줄리앙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배꼽 위쪽이 간질간질하더니 이내 쓰라림을 넘어 창자가 꼬이는 것 같은 복통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장난인줄 알던 줄리앙은 파비앙이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괴로워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비앙을 부축했다. 줄리앙은 파비앙을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파비앙의 귓가에는 줄리앙의 ‘괜찮아, 괜찮을거야’라는 말이 주문처럼 흘러들어왔다. 파비앙은 복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줄리앙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다음 날 의사를 찾아간 파비앙은 정체모를 복통에 대해 의사에게 털어놨다. 잠자리의 눈처럼 크고 둥그런 안경을 낀 의사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파비앙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파비앙은 의사가 머리를 쓸어넘길 때마다 보이는 이마의 검버섯이 무척이나 신경쓰였지만 이 동네에 병원이라고는 한 군데 뿐이므로 침착하게 자신의 증상을 말하는데 집중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군요. 자 여기 약을 처방해줄테니 3일 정도 먹어봐요.”


파비앙의 말이 끝나자 의사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같은 대답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형처럼 기계적인 처방을 내렸다. 파비앙이 술은 얼마 마시지 않았다고 따지듯이 항변하자 의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럼 스트레스일 수도 있겠군요.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나요? 곰곰이 잘 생각해보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도록 하세요’라며 간호사에게 ‘다음!’이라고 외쳤다. 쫓기듯 의사의 방을 나온 파비앙은 절대로 술 때문에 배가 아팠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미지의 고통이었다. 파비앙은 의사가 제시한 두 번째 가설을 떠올렸다.


‘스트레스’


파비앙에게는 차라리 이쪽이 설득력이 있었다. 줄리앙의 죽음이 불러온 극심한 스트레스가 파비앙의 내장을 뒤틀어버린 것이다. 파비앙은 마침내 금의 무게를 재는 방법을 떠올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호사에게 지갑에서 대충 꺼낸 돈을 건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을 나섰다.


파비앙은 그 날 이후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받아 들일 것인지 제거할 것인지 두 가지 선택지에서 파비앙은 고심했다. 줄리앙과 함께하는 동안에는 파비앙은 행복하지만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야한다. 줄리앙의 곁에서는 죽음에 대한 파비앙의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람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부정되기 때문에 파비앙은 줄리앙의 죽음을 항상 경계해야 했다.


반대로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하는 선택지에 대해서도 파비앙은 고민했다. 자연스러운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존재와 함께하기보다 줄리앙과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파비앙의 사고방식이 다시 원래대로 작동하지 않을까?


파비앙은 고심 끝에 세 번째 선택을 했다. 세 번째 선택지를 생각해낸 것은 줄리앙이 파비앙에게 던진 말 때문이었다.


‘파비앙,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돼. 나는 파비앙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그러니까 나와 행복하게 살다가 내가 죽고 나면 딱 하루만 더 살다가 죽어. 더 오래 살면 파비앙도 외롭잖아.’


줄리앙은 깔깔 웃으며 너무 이기적이라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파비앙은 조용히 그녀를 안았다. 파비앙은 그 날 이후 줄리앙보다 딱 하루만 더 살기 위해 삶의 방향을 재조정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