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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Oct 30. 2022

14.

‘끼익, 끼익’


미니에서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가 들렸다. 와이퍼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파비앙은 도착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날 주변의 정비소에서 차를 손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혹시나 차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줄리앙이 잠을 깨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파비앙은 옆을 힐끗 쳐다봤다. 다행히 줄리앙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파비앙은 그런 줄리앙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줄리앙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것이 파비앙의 결심이었다. 그 결심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지만 한 번 결정을 내린 파비앙으로서는 갈팡질팡하지 않고 앞으로 해야할 일만 남은 셈이라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빗줄기를 뚫고 맞은편에서 헤드라이트가 반짝반짝거렸다. 지금 지나는 도로가 차 두대가 지나가기는 좁은 외길이라 먼저 지나가겠다는 표시인 듯했다.


굵직한 빗방울에 와이퍼가 쉬지않고 움직였다. 제한된 시야에서 파비앙이 조심스럽게 오른쪽으로 비키기 위해 핸들을 틀었다. 작은 돌부리를 밟았는지 차가 덜컹하고 흔들렸다. 그에 맞춰 줄리앙도 몸을 뒤척였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헤드라이트는 이제 눈 앞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조수석을 보니 줄리앙은 다행히 잠에서 깨지 않은 채 여전히 고개를 꺾고 잠을 자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비켜선 채 맞은편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파비앙은 ‘빠아앙’ 하는 클락션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 파비앙은 당황하며 서둘러 사이드브레이크를 풀었다. 마주오는 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표정을 본 것이다. 운전자는 창문을 내려 고개를 빼고는 파비앙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파비앙이 창문을 내리자 운전자의 목소리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피해요! 운전대와 브레이크가 잠겨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


운전자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파비앙은 뒤로 후진해서 마주오는 차의 속도보다 빨리 길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외길로 들어선 지는 얼마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후진하면 삼거리가 나올 것이다. 그것이 파비앙이 생각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왼쪽이나 오른쪽을 선택하면 마주오는 차는 피할 수 있어도 파비앙과 줄리앙을 태운 쿠퍼는 도랑 밑으로 굴러떨어져 전복할 것이다. 파비앙은 기어를 후진으로 바꾸고 고개를 돌려 뒤에 오는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액셀을 밟았다. 파비앙이 액셀을 꽤 깊게 밟았으므로 차가 힘차게 뒤로 밀려나며 어쩌면 줄리앙이 깰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다가오는 위험을 피해야했다. 그렇지만 쿠퍼는 ‘우우웅’하는 엔진 회전음만 들린채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파비앙이 기어봉을 보자 후진으로 넣어뒀던 기어가 중립으로 빠져있었다. 파비앙은 황급히 클러치를 밟고 다시 후진기어를 넣은 후 엑셀을 밟았다. 마주오는 차의 운전자가 지르는 고함이 이제는 더욱 커졌다. 운전자는 턱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살집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지저분한 하얀색 트럭은 조금이라도 멈출 기색이 없이 파비앙과 줄리앙이 타고 있는 쿠퍼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파비앙은 다급하게 클러치를 밟고 다시 후진기어를 넣고 엑셀을 밟았다. 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발끝으로 슬며시 엑셀을 밟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 엔진음만 들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기어봉은 역시나 중립으로 빠져있었다. 이제는 운전자의 표정까지 보일 정도로 차가 가까워졌다. 한 손으로 클락션을 누르고 창 밖으로 고개를 빼고 다른 손을 흔드는 운전자는 이제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파비앙은 숨을 들이켰다. 결단을 내릴 때였다. 조수석에 앉은 줄리앙은 여전히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시끄러운 와중에 잠에서 깨지 않는 그녀를 보며 파비앙은 차라리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게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비앙은 몸을 묶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고 재빨리 허리를 숙여 줄리앙의 볼에 입을 맞췄다. 줄리앙은 ‘으음’하며 몸을 뒤척였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파비앙은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와 호흡을 내뱉으며 기어를 1단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엑셀을 밟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발 밑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며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파비앙은 다시 줄리앙을 한 번 쳐다보고는 핸들을 최대한 왼쪽으로 꺾으며 엑셀을 힘차게 밟았다.


“빠아아아앙!”


굉장한 경적소리와 함께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파비앙의 오른쪽 몸을 집어삼키듯이 덮친 것과 파비앙이 줄리앙 쪽으로 몸을 던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파비앙은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줄리앙이 괜찮은지 살폈다. 그녀의 발갛게 물든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파비앙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기분 좋은 샴푸냄새가 파비앙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천둥이 치는 밤에 파비앙이 무서워하면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엄마의 손길 같았다. 아니, 정말로 엄마의 손길인가? 파비앙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파비앙은 병원에서 눈을 떴다. 파비앙 자신은 눈을 떴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은 여전히 캄캄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전자음과 특유의 알콜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병원인 것 같았다.


‘살았구나’


파비앙은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파비앙은 줄리앙을 찾았다.


파비앙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처음에는 병원 측에서 무의식중에 뒤척이지 않게 몸을 고정시켜놓은 줄만 알았다. 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파비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몸의 어떤 부분도 파비앙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비앙은 그제야 주변이 어두운 것이 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눈꺼풀이 떠지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참을 수 없는 좌절감이 파비앙의 정신을 감쌌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물 밀듯이 올라오는 절망은 단숨에 파비앙을 집어 삼켰다.


-그만 나오라고.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나는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몸이 쑥 빨려 나가는 듯하는 느낌을 받으며 정신을 차렸다. 눈 앞에는 남자가 보물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전히 좌우로 갈라진 건초더미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양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안,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


나는 왠지 남자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남자가 ‘근본’이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보물상자에 담겨 있던 것은 단순히 남자의 기억 같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 아득한 정신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놓치지 않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남자가 이야기한 ‘근본’이었다.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아니, 일부러 그런 것인가?”


남자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농담을 던졌지만 시선은 내가 아닌 보물상자에 가 있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느꼈던 남자의 끔찍한 절망을 생각하며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위로는 됐다고. 너도 했던 경험이잖아. 이 세계에 그런 경험 없는 영혼 없으니까 됐다고.”


남자의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정말로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단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보물상자가 열리지 않게 잘 밀봉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피로에 절은 얼굴을 한 남자는 피곤하다는 듯 손을 휘저어 의자를 만들어냈다. 그 위에 걸터 앉아 남자는 ‘근본’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지?”


“응?”


갑작스러운 남자의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잘 생각해봐.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됐는지 말이야.”


나는 남자의 말에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처럼 잘 기억나지 않지?”


“어…”


남자의 말대로였다. 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있다가 남자를 만난 것 까지는 제법 분명했다. 그렇지만 사고 이전의 기억들은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럴수밖에 없어. 여기 정신의 세계에서는 말이야.”

“무슨 이유 때문이야?”


“말 그대로 정신의 세계이기 때문이지. 우리가 평생 간직하는 기억은 정신과 육체가 나누어서 가져. 너 그때 잠이 들었다가 간 기억의 방 기억해?”


“응. 별처럼 많은 기억이 보관된 곳.”


“맞아. 정신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것, 무의식적으로 느낀 것들을 모두 기록해. 기억이 아니라 기록. 그건 하나의 역사거든. 그것을 기억으로 끌어오는 역할은 육체가 하지. 살면서 필요한 기억들을 기록에서 불러오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들도 있고,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생기지. 육체가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를 판단해서 기억을 보존할 지 아니면 빨리 삭제해서 공백을 만들지를 결정하는거야. 인간의 뇌가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니까. 기록을 전부 기억으로 치환하게 되면 곧바로 뇌가 터져버릴걸.”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이 정신의 세계에는 오로지 너의 정신만이 존재해. 물론 네가 육체와의 끈이 이어져 있지만 어쨌든 그건 연결이 되어있다 뿐이지 여기에 온전히 육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네 기억들은 기록으로는 존재할 수는 있어도 기억으로 불러오는 것은 힘든거야.”


“기억을 불러내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불러올 수 없는거야.”


“그럼 어떻게 해?”


“그래서 이렇게 ‘근본’을 만들어 두는거야. 내가 어떤 존재였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이정표 같은거지.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일일히 기억의 방에 가서 찾을수는 없잖아? 그래서는 그 많은 기억들을 다 살펴봐야하니까 찾을 수도 없기도 하고. 그래서 더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하나의 가장 중요한 기억을 보관하는거지.”


“그럼 그냥 기억의 방에 표시를 해놓으면 안돼?”


“표시?”


“응.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그 기억을 볼 수 있게 표시를 해놓으면 되잖아.”


“그 무수히 많은 별에 표시를 해놓게?”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남자의 대답을 듣고 비로소 내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무의식까지 저장해버리는 거대한 기억의 우주에서 내가 남긴 표식은 해변의 모래 알갱이 하나에 표시를 한 다음 툭 던져놓는 것 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표식은 의미가 없어. 설령 할 수 있더라도 매번 길이 바뀌니까. 기억의 방은 혼돈의 질서거든.”


“혼돈의 질서?”


“그래. 네가 수집한 모든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나름의 질서가 있다고. 그렇지만 그 질서를 파악하기는 무리야. 최적화를 위해 매번 바뀌는 규칙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그래서 그 기억에 접근하기 위한 코드가 필요해. 일종의 열쇠같은거지.”


“그래서 ‘근본’이 그 열쇠 역할을 하는 건가?”


“그렇지. ‘근본’을 가지고 있어야 네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있어. 그렇지 않고 기억의 방에 가게 되면 끊임없이 몰려드는 기억들에 의해 영영 기억의 우주를 떠돌고 말거야. 그 때 내가 꺼내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기억의 방에 있을걸.”


남자의 말에 나는 소행성을 타고 기억의 우주를 여행했던 것을 떠올렸다. 내가 원치 않는 기억들이 끊임없이 재생되며 기억에 파묻히는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찌됐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야.”


“얼마나?”


“글쎄. 아마 곧이지 않을까. 포식자들이 따라붙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으니까. 보여줄까?”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이 투명해지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배경이 순식간에 넘어가는 것이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남자는 끊임없이 장소를 움직이고 있었지만 남자가 장소를 바꿀때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포식자가 보였다.


“내가 ‘근본’ 이야기를 너에게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야.”


남자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결심한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제 진짜로 시간이 없어. 얼마 안 있어서 포식자는 우리 위치를 찾을테고, 우리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잡아먹혀.”


“무조건?”


“무조건. 너랑 나랑은 아주 맛있는 먹이니까. 이렇게 오래되고 거대한 정신세계를 갖추고 있는 나와 거부 사용자인 너는 정말 매력적인 양분이거든.”


“그것 참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네. 매력적이니 고마워해야하는 건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남자는 내 말에 크게 웃으며 그래도 맛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평소라면 나도 한 마디 더 거들었을테지만 남자가 시간이 없다고 말한 것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으므로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간에 곧 포식자가 우리를 찾을거야. 그럼 우리에게 있는 선택지는 2개야.”


“두 개나 돼?”


“그래. 첫 번째는 둘 다 잡혀서 먹히는 것.”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니네.”


“그렇지.”


“그럼 두 번째는?”


“내가 잡히고 너를 탈출시키는거야. 그럼 포식자들의 시선은 나에게로 쏠릴 것이고 너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


“잠깐, 선택지가 그럼 하나 더 있잖아.”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차마 내 입으로 ‘내가 잡히고 네가 사는 방법’을 말할 수 없었다. 남자는 내 망설임을 눈치라도 챘는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야. 네가 미끼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미끼가 된다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왜?”


“너는 나처럼 시간을 끌어주지 못해. 거부능력이 완전히 발현되었으면 모를까, 아직 세계를 만들지 못하는 너는 한 순간에 잡아먹히고 말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도망치기도 전에 포식자가 따라 붙겠지. 한 번 꼬리가 잡히면 벗어나기 힘들어. 아니, 거의 도망만 치다 결국에는 잡아먹히는 결말이 맞겠지. 게다가 행여 너를 먹은 포식자가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는 자’에게 먹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거야.”


“그래봤자 결국 당신은 이 세계에 없는 이야기잖아.”


“그렇지. 그래도 상관없어.”


“어째서?”


“살 만큼 살았으니까.”


“뭐?”


남자는 우리 할머니에게서 듣던 이야기를 말했다. 내가 황당함에 아무말도 하지 않자 남자는 그렇지 않느냐는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육체적인 나이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나보다 오래 산 사람은 이 곳에서도 손에 꼽을거야. 진리탐구가, 끊임없이 노는 자, 유치원을 빼면 내가 네 번째네. 이런 젠장.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남자가 말을 하다 말고 욕을 뱉으며 소리를 질렀다.


“왜 무슨 일인데?”


“진작 진리탐구가한테 너에 대해서 물어보면 될 것을 한참을 돌아갔네 바보같이.”


“진리탐구가?”


“아스트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정신중 하나지. 세상의 진리를 전부 알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미친 늙은이.”


“근데 이름이 다 왜 그 모양이야? 애들도 아니고…”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것이 중요한 문제냐는 듯한 인상이었다.


“아니 그래도 이름이 너무 그렇잖아.”


내가 조심스럽게 반박하자 남자는 정신계 언어로 작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스트랄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름이라고 말했다. 나는 남자의 정신계 이름이 궁금했지만 민망하기도 하고 남자의 근본을 본 일 때문에 괜히 미안해져서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 늙은이에게 물어보면 바로 답을 알려줬을텐데. 정말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어.”


“그럼 지금이라도 물어보면 안돼?”


“이미 늦었어. 그 늙은이 찾으려면 한참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우리는 잡아먹히기 직전이니까 말이야.”


남자가 말했다. 덤덤한 말투와 다르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 선택을 해야해. 어차피 이제와서 네가 세계를 만들고 능력이 갑자기 뛰어나 져서 우리 둘 다 살 수 있으면 모를까 불필요한 희생은 피해야지.”


“그래도…”


나는 남자의 ‘불필요한 희생’이라는 말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이 과연 최적의 선택인 것일까, 과연 남자의 희생은 필요한 희생이고 나의 희생은 불필요한 희생인 것일까. 나는 남자가 제시한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끊임없이 굴렸다. 남자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상관없다는 듯 눈을 감고 말했다.


“이제 곧이야. 준비해.”


남자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쾅’하는 굉음이 들렸다. 소리가 들린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헛간 오른쪽 귀퉁이를 뚫고 흉측한 ‘입’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까보다 먼거리에서 자세히 관찰하니 ‘입’은 정말이지 끔찍하게 생겼다. 저런것에 먹히는 상상을 하니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입’은 어떻게든 헛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발악했다. 그때마다 ‘입’이 들어온 입구가 조금씩 부서지며 넓어졌다. 하지만 ‘입’이 넓어진 통로로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입구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며 좁아졌다. 다시 좁아진 통로에 갇힌 ‘입’은 몸부림쳤고 그때마다 입구가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했다.


“어서 준비해.”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마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남자가 겨우 입을 열어 말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남자는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세계를 늘 실제와 비슷한 싱크로율로 유지했지만 스스로는 그것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불편했기 때문이다. 실제와 싱크로율이 맞춰지게되면 육체의 활동도 고스란히 정신계에서 발현될 수 밖에 없다. 땀을 흘리거나, 추위를 느끼거나, 잠을 자거나 배설을 하거나 하는 일련의 활동들은 정신계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이었다. 남자는 구태여 그런 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경우는 육체가 지속적으로 움직여야하는 상태기 때문에 생리 활동을 해야만 했다. 남자는 그것때문에 훈련이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나에게 볼멘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봐, 너 때문에 나도 갑갑하게 싱크로율이 높은 세계에 살아야 한다고. 물론 세계의 마스터라 어느 정도 조율을 할 수는 있지만 꽤 에너지가 드는 일이야 이건.”


그럼 생리활동을 하면 되지 않냐는 나의 말에 남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절대로 생리활동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질색하던 남자가 지금은 이마의 흐르는 땀조차 제어하지 못하고 집중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도무지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남자를 다그쳤다.


“그래서 내가 뭘하면 되는데?”


“내가 신호를 하면.”


남자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은 이제 여러 줄기가 되어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열리는 구멍으로 도망쳐. 능력은 쓰지말고 최대한 멀리 달아나. 그동안 내가 포식자들을 잡고 있을테니까.”


“그럼…”


나는 ‘그럼 너는 어떡해’라는 뒷말을 삼켰다. 남자의 말대로 나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무력했지만 살고 싶은 마음도 사실이었다. 남자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조용히 남자가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렸다.


“쾅!”


거대한 굉음이 들리며 또 다른 ‘입’이 헛간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입’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공간을 넓히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로테스크한 그 모습에 질려 뒷걸음 쳤다. 다시 ‘쾅’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남자의 머리 위쪽에서 ‘입’이 나타났다. ‘입’은 바로 밑에 있는 남자를 발견했는지 계속해서 상하로 머리를 휘두르며 자신의 입이 남자의 머리에 닿기를 바라는 것처럼 움직였다.


“피해!”


나는 남자에게 소리쳤지만 남자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채 아무말이 없었다.


남자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 ‘입’을 필두로 연속해서 거대한 굉음들이 들리며 곳곳에서 ‘입’이 나타났다. 마치 위벽을 뚫고 들어오는 기생충들처럼 ‘입’들은 헛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머리를 움직이며 애를쓰고 있었다. 발 밑, 천장, 벽면 할 것 없이 셀 수 없는 ‘입’들이 헛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남자의 입이 열렸다.


“이제 문을 열거야.”


남자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신호하면 바로 뛰어들어가 뒤 돌아보지 말고.”


남자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들은 어떻게든 헛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발버둥을 치며 공간을 벌렸다. 조금씩 조금씩 몸을 밀어넣는 몇몇 입들은 이제 조금만 더 들어오면 남자와 나를 한 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였다.


“자 이제 내가 신호하면 저기로 뛰어가면 돼.”


남자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남자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에는 ‘입’들이 전혀 나와 있지 않은 깨끗한 헛간 벽이 있었다.


“자, 지금이야!”


남자가 눈을 뜨며 소리쳤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들이 공간을 찢고 헛간으로 침범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먹이에 달려드는 파리떼처럼 소란스러우면서도 일사분란했다. 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남자가 가리킨 벽으로 뛰어갔다. 어느새 생긴 동그란 홀이 벽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서 저리로 들어가!”


뒤에서 남자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벽에 뚫린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몸이 구멍을 통과할 때, 나는 처음 남자의 방으로 초대 됐을 때처럼 공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내 몸이 하나하나 분해되면서 재조립되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구멍안의 긴 터널을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우주. 예전 기억의 방에서 본 것 과 비슷했지만 크기는 차원을 달리했다. 절대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에 놓인 별들이 티끌같은 크기로 군데 군데 박혀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 삐- 하는 소리가 귀를 울릴 정도였다. 중간 중간 천천히 흘러가는 소행성과 바위 부스러기들이 아니었으면 시간이 멈춘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고요한 우주였다. 나는 천천히 부유하는 몸을 뒤집어 내가 나왔던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구체가 군데 군데 뜯겨져 나간 채로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파비앙!”


나는 처음으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만 내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기 전, 고요한 우주에 갇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자의 세계는 여전히 파괴당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끊임없이 남자의 세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입’들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남자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내게 탈출 이후의 플랜을 말해주지 않았다. 이 넓은 고요한 우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 바위 부스러기들처럼 천천히 떠다니는 것 뿐이었다. 아마 남자는 내가 탈출하더라도 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말을 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남자의 세계가 ‘입’들에게 유린되는 것을 보면서 떠다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현실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세계는 이제 거의 반 이상이 ‘입’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대로 남자의 세계가 사라진다면 나는 이 넓은 정신의 우주에서 혼자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입’들을 피해 도망다녀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럴바에 남자와 같이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말 그대로 그 생각은 ‘스쳐지나갔다’. 아직까지 나는 죽고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 쭉 뻗어 있는 선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찡그리고 바라보니 빨간 색의 가느다란 실은 남자의 세계를 향해 쭉 뻗어있었다. 나는 몸을 뒤집어 선 쪽을 향해 조금 이동했다. 그러자 선이 순간 느슨하게 당겨졌다가 다시 팽팽해졌다. 내가 다시 몸을 움직이자 이번에도 역시 선이 내가 움직일 때 같이 움직였다. 선을 쭉 따라가니 한 쪽 끝은 저 멀리 파괴되고 있는 남자의 별에, 다른 한 쪽 끝은 내 등 뒤에 매달려 있었다.


‘붉은 실’


파비앙이 말한 육체와 나의 끈이었다. 한 번 밖에 보지 못했지만 오묘한 붉은 빛의 이 레이저 빛 같은 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처음 발을 디디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놓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파비앙이 아무리 말을 걸고 안심을 시켜주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공황이 찾아온 사람처럼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파비앙은 그런 나를 보며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내 손을 잡았다.


‘자, 한 번만 보여줄테니까 잘 봐봐. 이 끈 보이지? 이게 바로 너와 육체를 잇는 선이야. 네가 온전히 정신체로만 존재한다면 이 끈이 있을수가 없다고. 네가 완전한 정신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 끈은 너한테는 보이지 않는거야. 나처럼 정신체들만 볼 수 있지. 네 스스로 내장이나 뇌 따위를 볼 수 없잖아?’

파비앙의 눈을 통해 본 끈은 신비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끈은 무엇에도 끊기지 않을 것 같이 내 몸에 달려있었다.


‘한 쪽은 어디에 있어?’


내가 묻자 파비앙은 ‘네 몸’이라고 대답했다. 끈의 반대쪽은 발 밑으로 이어져 있었으나 땅을 뚫고 사라져 끝을 볼 수 없었다.


‘어찌됐든 이 끈만 이어져 있으면 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다만 시간이 더 흘러버리면 끈이 사라질거야. 그러니까 얼른 정신력을 각성하자고. 알았지?’


나는 파비앙의 말을 떠올리며 끈을 따라 파괴되고 있는 파비앙의 별을 향해 힘차게 유영했다. 파비앙이 열어준 통로로 이 세계에 진입했기 때문에 아마도 육체를 잇는 끈은 파비앙의 세계를 통해 내 몸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직감 같은 것이었다. 틀릴 수 없는 직감. 그러나 내가 파괴되고 있는 파비앙의 별로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우선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지금이 그런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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