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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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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ka Oct 30. 2022

15.

파비앙의 별은 처참한 상태였다. 맛있는 사과를 먹어치우는 구데기들처럼 도처에 깔린 ‘입’들은 게걸스럽게 파비앙의 세계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입’들이 세계의 조각들을 씹어 삼킬때마다 공간이 바뀌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낮에서 밤으로, 더위에서 추위로, 화창한 날씨에서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로. 마치 파비앙의 기억이 하나둘 먹혀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공간은 바뀌어갔다. 나는 ‘입’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끈을 따라 이동했다. 얼마쯤 이동했을까, 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쭉 직선으로 이어졌던 끈이 아래로 향해있었다. 발 밑에는 좀 전에 내가 통과한 벽에 생긴 구멍처럼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이 구멍 안에 파비앙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찌됐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선 파비앙을 만나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해줄 것이다. 나를 저 너머로 도망치는 일이 실패했을 경우 생각해둔 방법이 그에게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구덩이로 몸을 던졌다. 빠르게 떨어질 것을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내 몸은 구덩이 앞부분에서 둥실하고 떠올랐다. 파비앙이 만들어 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을 때의 느낌이었다. 나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바닥을 향한 끈을 따라 힘차게 헤엄쳤다.


구덩이 속에는 다행히 ‘입’들이 없었다. 처음에는 어두컴컴했던 구덩이가 안으로 들어가자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면서 주위가 조금 밝아졌다. 나는 깜빡거리는 불빛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터널의 양 옆으로 흑백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나온 빛이 마치 불을 끄고 티비만 켠 것처럼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기억의 별에 갔던 것을 떠올렸다. 기억의 별에서 갖가지 재생되는 기억들처럼 구덩이의 양 옆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은 아마도 파비앙의 기억인 것 같았다. 곳곳에서 재생되는 파비앙의 모습은 희한하게도 모두가 다 커버린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한 가지 영상이 여러곳에서 똑같이 재생되고 있었다. 파비앙이 한 여자와 만나 넘어지고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연인이 되어 지내다가 미니쿠퍼를 빌려 비오는 날 여행을 떠나다 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에 나오는 빨간 머리칼의 여자는 파비앙의 ‘근본’에서 본 줄리앙이 분명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구덩이 안쪽으로 더 들어가기 시작했다. 끈의 양 옆으로 반복 재생되는 파비앙의 기억이 목 뒤쪽을 쭈뼛거리게 만들정도로 소름이 끼쳤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파비앙이 ‘근본’이라고 말하며 꽁꽁 숨겨뒀던 기억들이 이렇게 함부로 보여진다는 것은 파비앙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 팔과 다리를 휘젓는 속도를 높였다.


한동안 진이 빠지게 구덩이 안쪽을 향해 헤엄치던 나는 잠시 멈춰섰다. 조금만 더 가면 구덩이의 끝인 것 같았지만 나는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안돼 오지마!’


다급한 파비앙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파비앙! 무슨 일이야?”


내가 소리쳤지만 파비앙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구덩이 안쪽으로 울려퍼지는 소리만 메아리치며 내게로 되돌아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구덩이의 끝을 향해 다시 힘차게 발을 굴렀다. 파비앙에게 위험이 생겼으면 내가 도와야한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위험에 빠진 파비앙을 모른채 할 수 없다. 그런 생각들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파비앙이 이대로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 없었다. 죽음, 파비앙의 세계를 멀리서 보았을 때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은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와 다른 것은 어떤 저항감이었다. 죽음이 마음대로 찾아오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행동해야겠다는 어떤 의지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구덩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동력원이 되었다.


“파비앙!”


구덩이에서 나온 직후 보이는 풍경에 나는 반사적으로 파비앙의 이름을 외쳤다. 파비앙 앞에는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서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정도로 큰 키를 가진 그림자는 얼굴에 있어야할 눈코입이 없었다. 그림자의 오른손은 파비앙의 얼굴을 향해 뻗어 있었는데, 파비앙의 육체는 조금씩 부서지며 그림자의 오른손을 향해 부스러진 파편이 흘러가고 있었다.


“왜 왔어!”

파비앙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파비앙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있었다.


“어차피 당신 다음은 내 차례잖아.”


내가 말하자 파비앙은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 실날같은 웃음을 보였다.


“진짜 말 안듣는 제자라니까.”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돼?”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파비앙에게 물었다. 그러자 파비앙은 ‘할 수 있는 건 모든지 해봐’라고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파비앙의 몸은 이제는 너무 많이 부스러져 점점 희미해졌다. 파비앙의 몸이 희미해져감에 따라 그림자의 손으로 들어가는 파비앙의 파편은 점점 더 많아졌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바닥에 부서진 돌덩이를 들어 그림자에게 힘껏 던졌다. 애초에 힘없이 날아간 돌덩이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림자를 그대로 통과하여 바닥에 떨어지며 ‘쿵’ 소리를 내었다. 그림자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파비앙의 파편을 흡수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돌덩이를 주워 아까보다 더 센 힘으로 던졌지만 결과는 같았다. 파비앙이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내게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젠장, 정신력은 뒀다 뭐하고 물리력을 행사하고 있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파비앙의 몸은 급격히 희미해져 이제는 파비앙이 있던 자리를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해졌다. 나는 파비앙의 말에 바보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럼을 느끼기도 전에 손에 힘을 가득 모아 돌덩이를 던지듯이 그림자를 향해 던졌다. 야구공처럼 동그랗게 말린 내 에너지는 그림자에게 닿자 파지직- 하는 파열음을 내며 그림자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는 돌덩이때와는 다르게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지만 나는 그림자가 분명하게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손에 정신력을 집중했다. 그림자는 그런 나를 보고 그대로 오른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파비앙의 모습이 가루 처럼 작은 입자로 변해 그림자의 오른손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지막 한 줌의 파편까지 그림자의 오른손으로 삼켜지자 이제 그 곳에 더이상 파비앙의 모습을 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파비앙!”


나는 소리를 지르며 손에 모은 에너지를 그림자에게 던졌다. 파비앙이 사라진 자리를 그대로 통과한 동그란 에너지는 빠르게 그림자에게로 날아갔다. 그림자는 무심하게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에너지 덩어리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마치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라는 태도처럼 말이다. 그러나 날아간 에너지 덩어리는 돌덩이처럼 허무하게 그림자를 통과하지 않았다.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에너지의 크기만한 구멍을 그림자에게 뚫어놓고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림자의 몸통 한 가운데 뚫린 구멍은 곧바로 메꿔졌다. 물가에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고 곧바로 아무일도 없이 잠잠해지는 것처럼 구멍은 곧바로 수복되었다. 그리고 그림자의 얼굴 부분에서 그에 상응하듯이 다른 구멍이 열렸다.


“흐퓨.”


그림자의 얼굴에서 새로 생긴 입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림자의 정신이 온전히 나에게 직접 전해지는 느낌에 나는 그림자의 말을 들으며 팔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림자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은 명백한 탐욕이었다. 나를 집어삼키기를 원하는 강력한 시선을 느끼며 나는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그림자의 얼굴에는 눈알이 생기고 코와 귀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성인체격의 그림자에서 눈코입이 돋아나는 것은 실로 기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어느새 뒤에 있는 벽에 막혀 더이상 갈 수 없었다. 그쯤 그림자는 온전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눈을 떴다.


“함께하자.”


그림자는 익숙하지 않은 듯 말을 조각조각 나누어 내뱉었다. 오랜시간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연 사람처럼 건조하고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였다.


“넌 누구지? 목적이 뭐야?”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말을 걸어서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파비앙까지 사라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번 시간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뿐이었다. 다행히 그림자는(이제는 얼굴만 간신히 사람의 형상을 갖추게 된) 내 질문에 대답을 했다.


“나는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는 자.”


그림자는 건조한 목소리로 여전히 끊어서 말했다.


“나도 한 때는 흐퓨를 사용하는 자.”


그림자는 손을 천천히 들어 나를 가리켰다.


“너도, 나와 함께 해야한다.”

나를 가리키는 그림자의 손은 어느새 사람의 그것처럼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유난히 긴 검지 손가락을 길게 뻗은 그림자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는 듯이, 나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대체 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데?”


나는 다시 한 번 그림자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림자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켰던 검지 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차례대로 편 뒤 그대로 손바닥을 뒤집어 오므렸다. 그러자 내 몸은 중력을 거스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뭐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당장 내려놔!”


나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내 몸을 꽉 잡고 있는 것처럼 나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내 몸을 훑어보니 그림자의 것처럼 진한 검정색의 밧줄같은 연기가 내 몸 구석구석을 동여매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려고 했다. 내 몸 전체를 감싸는 푸른 빛을 상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낸 에너지는 검은 밧줄에 흡수되 듯 사라졌다. 다급하게 다시 한 번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몸에서 푸른 빛이 잠시 번쩍했을 뿐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검은색의 밧줄만 더욱 단단하게 나를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자는 그런 나를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촛점없는 검은색 눈동자는 마치 나를 사람이 아닌 사물로 보는 기분이었다. 살아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나나나 돌덩이, 태블릿 알약 같은 것들을 쳐다보는 사람처럼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자는 나를 향해 쥔 주먹을 자신의 몸 쪽으로 서서히 당겼다. 그러자 내 몸도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가까워졌다. 나는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안돼!’라고 소리쳤지만 내 몸이 그림자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그림자에게 가게되면 나는 흡수될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파비앙처럼 나 역시 한 톨의 먼지도 남기지 못한 채 그림자에게 흡수될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할 때 머릿속으로 파비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정신차려! 나 아직 안죽었다고!’


‘파비앙?’


‘그래. 우선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해’


‘그래봤자 내 능력은 안통한다고! 아까도 해봤지만 소용없었어!’


‘당연하지 저 자식도 흐퓨 사용자였으니까. 너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세계를 거부했으니까 네 능력은 통하지 않지.’


‘그럼 어떻게 해! 이대로 끌려가면 나도 흡수되는거잖아!’


‘진정해. 아직 나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해서 너까지 당장 흡수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그래서 네가 아직까지 그렇게 매달린채로 살아있는거고.’


‘아직 흡수되지 않았어? 아까 분명 사라지는 것을 내가 봤는데’  


‘그랬다면 너랑 이렇게 대화하지도 못하겠지. 아니 그 전에 내가 완전히 흡수되면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어. 이 세계가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거지’


‘그치만 지금 네 세계는 부서지고 있는걸’


‘흡수당하고 있으니까. 뻔한 질문좀 하지 말아줄래? 안그래도 내 기억들이 하나씩 사라져서 열받는 참이니까. 내가 한 번 기회를 만들테니까 그 틈에 아까 내가 내보내줬던 통로로 뛰어가’


‘거기로 나갔는데 그냥 망망대해였어!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럼 여기서 그냥 사이좋게 쟤한테 흡수당할래? 일단 밖으로 나가야 뭘 하던지 말던지 할 것 아냐!’


나는 파비앙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파비앙의 말처럼 지금은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설령 저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는 자’가 쫓아오더라도 그것은 그때 가서 또 생각할 문제였다. 나는 병원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의식의 한 켠에서만 살아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순간을 벗어나려면 파비앙의 말을 따라야했고, 그때의 나는 파비앙의 말을 듣고 몸을 구체로 만들어 정신의 세계로 입성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파비앙에게 말했다.


‘알았어! 신호를 줘. 바로 뛰어갈게’


‘좋아. 잠시만 기다리라고’


파비앙과 내가 작전을 주고 받는 사이 그림자의 시선은 여전히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내가 아닌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파비앙의 말처럼 파비앙을 흡수하는데에 신경이 가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새 주변까지 몰려온 ‘입’들이 파비앙의 세계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채로 행여 ‘입’들이 내게로 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림자의 존재 때문인지 ‘입’들은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게걸스럽게 주변 풍경들을 먹어치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자, 준비됐어?’


‘그래!’


‘10초로 하자. 10초 뒤에 기회가 있을거니까 바로 뛰어가. 잘들어 내가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은 짧아. 망설이면 안돼.’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이곳저곳을 살폈다. 파비앙이 열어둔 통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몸을 꼼짝할 수 없어서 어디로 뛰어가야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나는 통로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어디든지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곧 파비앙이 말한 10초가 다 되어갔다.


3


2


1


순간 내 몸을 묶고 있던 검은 끈들이 사라지며 내 몸은 아래로 추락했다.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 나는 서둘러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풍경이 빠르게 흩어지며 그림자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입’들이 게걸스럽게 먹던 세계의 조각들도 부스스 흩어지며 가루가 되어 그림자에게로 흘러들어갔다. 풍경이 사라진 자리는 그야말로 순백, 하얀색의 텅빈 공간만 남았다. 그림자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뒤를 향했다. 직감적으로 내 바로 뒷편에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조금 전에 통과했던 벽이 보였다. 벽까지 향하는 길만 일부러 남겨놓은 듯 주변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그저 단순한 하얀색 벽지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는 느낌의 눈이 부신 흰색은 고요한 공포마저 느끼게 할 만큼 눈부시게 하얀 빛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길 옆의 흰 공간을 디디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림자는 이제 괴로운 듯한 신음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행여나 그림자가 나를 쫓아올까하는 생각을 부여잡은채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단숨에 달려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쾅!”


그것은 엄청난 소리였다. 가까스로 통로 밖으로 빠져 나온 나는 아까와 같이 먼 곳에서 파비앙의 별을 볼 수 있었다. 순백의 섬광,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온 세계를 집어삼켰다. 엄청난 빛의 산란에 나는 눈을 감는 것으로도 모자라 양 손으로 눈을 가려야만 했다. 다급하게 파비앙의 이름을 소리쳤지만 폭발음에 묻혀 내 목소리는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흩어졌다.


파비앙의 세계는, 파비앙의 별은 폭발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과학 시간에 이론으로만 배우던 빅뱅을 눈 앞에서 보면 이런 느낌일까. 거대한 세계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그토록 강렬하면서도 찰나에 불과했다. 남아있던 빛이 사라지고 파비앙의 별이 있던 자리는 거대한 먼지구름이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먼지구름은 생각보다 빨리 걷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파비앙의 별도,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고 작고 각기 모양이 다르게 부스러진 세계의 파편들이 미처 사라지지 못하고 떠다닐 뿐이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파비앙의 별이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여전히 내 몸에는 빨간색 실이 있었지만 파비앙의 별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끝이 보일 정도로 짧게 끊어져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빨간색 실을 잡아당기고 다른 한 손과 두 다리로는 파비앙의 별을 향해 헤엄쳤다.


열심히 팔을 휘저어 도착한 곳에는 빨간 색 구슬이 있었다. 불그스르한 빛깔의 구슬은 주변 먼지부스러기들과는 다르게 스스로 빛을 뿜어냈다. 나는 손을 뻗어 구슬을 움켜쥐려고 했다. 딱 손아귀에 들어오는 사과 한 알 크기의 구슬이었다.


-그만.


나는 멀리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구슬로 뻗던 손을 거둬들였다.


“휴, 다행이군 오염되기 전에 발견해서 말이야.”


눈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누가봐도 마법사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상반신 길이 만큼이나 높은 고깔모자를 쓰고 배꼽까지 흰색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 사람은 보랏빛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누구세요?”


내가 묻자 마법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만나고 싶어할 사람.”


그러더니 마법사는 붉은 구슬을 조심스럽게 집어 품안에서 꺼낸 어항 모양의 유리병에 집어넣었다.


“휴, 좋아. 됐어 나쁘지 않군.”


마법사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이 행동했다.

“자, 내가 필요한 것은 챙겼고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을 줘볼까.”


마법사는 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마법사의 손으로 이번에는 푸른 색 구슬이 천천히 다가왔다. 먼지더미를 뚫고 천천히 다가오는 푸른 색 구슬은 한 눈에 보기에도 붉은 구슬과 색깔만 다를 뿐 비슷했다.


“이건…”


“자, 손을 이리 내봐.”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드러운 기운이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자연스럽게 뻗어진 손은 마법사의 손이 있는 푸른 구슬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호흡을 들이마시고, 받아들이라고.”


“무슨..”


나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몸 전체가 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에 숨을 참아야했다. 기억의 별에서 체험했던 것처럼 나는 빠르게 재생되는 기억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파비앙을 볼 수 있었다.


-그 늙은이가 움직일지 알 수 없지만 늙은이의 탐욕에 한 번 모험을 걸어보지.


파비앙은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수를 생각해냈다. 둘 중 하나는 살 수 있는 방법, 그것은 파비앙이 희생하는 것이었다. 파비앙은 기억의 별에서 자신의 모든 기억을 한번에 끌어오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는 자’라도 한 번에 이 기억의 총체를 먹어치우지는 못할거다.


파비앙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나에게 말한 10초가 지나고 파비앙이 모든 기억의 총체를 그림자에게 던져넣었을 때, 그림자는 기억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통째로 터져버렸다.


파비앙의 기억 속에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통로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순간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파비앙의 기억은 더 남아있었다. 폭발속에서 파비앙은 끝을 알 수 없는 기억의 파편들 사이에서 자신의 영혼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파비앙은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영감이 때가 되면 알 수 있다는 것이 이것이었어.


파비앙은 영영 소멸할 줄 알았던 자신의 선택이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 매우 흥미로움을 느꼈다.


-그래, 이게 끝이 아니란 말이지.


파비앙은 영혼이 다른 곳으로 전부 빨려들어가기 전에 온 힘을 다해 기억의 조각을 만들었다. 마법사의 손에서 본 그 푸른 구슬이었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현자 양반. 이걸로 참아줘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됐으니. 그 아이를 보내달라고.


파비앙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파비앙의 영혼은 잔잔한 감정의 파편을 남긴 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감정의 파편을 손에 쥔 나는 파비앙이 마지막에 남긴 감정을 조심스럽게 읽었다. 그것은 ‘줄리앙’에 대한 깊고 끝이 없는 그리움이었다.


“흥, 약속도 제대로 못지키는군.


마법사의 말이 들림과 동시에 나는 파비앙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마법사는 한 손에 푸른 구슬을 쥔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나는 파비앙의 감정이 지나간 뒤 먹먹한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어. ‘길’을 열 방법을 하나 알았으니까 말이야. 쓸만한 구슬도 얻었고.”


마법사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푸른 구슬을 또 다른 유리병을 꺼내 담으며 말했다.


“어쨌든 나도 받은게 있으니 주는게 있어야지.”


“파비앙은 어떻게 된거죠?”


나는 마법사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마법사는 그게 왜 궁금하냐는 표정이었다.


“다른 곳으로 갔지.”


“다른 곳이요?”


나는 파비앙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갔다는 마법사의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내가 가고싶지만 가지 못하는 곳에 먼저 가버렸지. 이제 그 녀석이 남긴 기억과 이 핵을 토대로 ‘문’을 열 방법을 찾아야지. 그래도 막상 사라지고 나니 아쉽기는 하구만. 인간성을 가진 몇 안 남은 존재였는데 말이야.”


“인간성이요?”


내가 되묻자 마법사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럼, 이 세계에 와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놈들이 몇이나 있겠냐? 다 정신 놓고 ‘입’이 되어 게걸스럽게 남의 정신이나 파먹고 다니거나 자살하거나 둘 중 하나지. 이 세계의 끝을 찾으러 가다는 헛소리를 해대며 위대한 여정을 떠나는 모험가 행세를 하는데, 그건 그냥 자살이야.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멍청이들의 자살방법이지.”


마법사는 같잖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나처럼 고매한 정신을 가진 인격체도 이렇게 눈에 보이도록 꾸며놓지 않으면 정신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해는 해. 그래도 그 녀석이 먼저 떠난 것은 아쉽군. 멍청하긴 해도 가끔 말동무 삼기는 좋았는데 말야. 뭐, 때가 되면 또 만나겠지.”


나는 마법사가 말한 ‘가끔’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가끔’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비앙과 나눴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 사람은 정상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나도 이제 연구를 하러 빨리 가봐야하니까, 그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도록하지. 자, 그 끈을 내놔봐.”


마법사는 내가 쥐고 있는 붉은 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 마법사에게 끈을 내밀었다. 주저하다가는 변덕스러운 마법사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휙 가버릴 것만 같았다.


“흠, 다행히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도착했군. 천천히 왔는데 어떻게 타이밍이 맞았어. 자, 이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마법사는 경멸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하긴 뭘 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해.”


나는 마법사의 말에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저 심기를 건드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거의 마지막까지 남은 시간을 썼군. 아마 ‘부작용’이 조금 있을 수 있다. 괜히 표적이 되고 싶지 않으면 모르는 채 그냥 살아.”


“잠시만요! 부작용이라니요?”


“그럼 이렇게 오랜 시간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다가 다시 합쳐지는 건데 부작용이 없을거라고 생각한거냐? 참 한심하긴.”


마법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다고 신체의 어디를 못쓴다던지, 몇개월만 살고 죽는다는지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니까… 꼭 부작용이라고 하면 인간들은 심각한 것만 생각하는데 부작용은 말 그대로 부차적인 작용이라고. 좋지 않을 수도, 반대로 플러스 알파가 될 수도 있는건데 무지한 것들은 항상 부작용이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죽는줄로만 알지.”


나는 마법사의 말에 더욱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나는 머릿속으로 끔찍한 부작용들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눈치를 보고 아무말도 하지 않자 마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이었다.


“좋아. 간만에 인간을 만난 김에 선심 쓰도록하지. 자, 먼저 네가 얼마나 멍청한지 확인해보도록 하지. 정신과 육체가 지금처럼 각기 다른 환경에 놓여있어. 그렇다면 그 둘의 성질은 어떻게 될까?”


“각기 처한 환경의 영향을 더 받지 않을까요…”


“좋아. 아주 멍청이는 아니군.”


자신없이 대답한 나의 말에 마법사는 그래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과 육체의 차이, 그 녀석이 설명해주던가?”


“정신은 무한한 확장성, 육체는 안으로 끌어들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서로의 상호보완작용으로 한데 합쳐져 있는거라고…”


“그래 좋아. 지금 이 세계는 정신의 무한한 확장성을 발휘하기 적합한 환경이지. ‘우리’ 역시 강력한 의지가 아니라면 벌써 무한으로 흩어졌을테니까. 반대로 네가 온 세계는 육체에게 적합한 환경이야. 모든 것이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환경이지. 그렇다면 지금 네 상태는 어떨까? 정신은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영역에 와 있고, 육체는 끌어당기는 것에 최적화 된 환경에 있다면?”


나는 마법사의 설명에 설마하는 표정과 함께 다급하게 되물었다.


“저 돌아갈 수 있는건가요?”


마법사의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심각한 상태였다. 육체는 육체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성질에 맞게 최적화된 환경이라면 나는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당연하지. 그게 불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지. 이것 참 똑똑한 건지 멍청한건지 알 수가 없군.”


마법사는 혀를 쯧쯧차며 말했다.


“그래서, 네 정신은 지금 원래 세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팽창한 상태고, 육체도 마찬가지지. 원래 있을 때보다 더 그릇이 작아진 상태야. 작은 그릇에 큰 내용물을 넣으면 어떻게 되겠어.”


“아마, 깨지겠죠…”


“아마가 아니라 100% 깨지지. 내용물은 흘러넘칠테고. 그래서 내가 조정을 할거야. 조금 복잡한 절차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무상으로 도와주도록 하지.”


“파비앙에게 받은 것 때문에 도와주시는 것 아니었어요?”


나의 말에 마법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흥, 내 쪽이 조금 손해지만 그 값만 받고 해준다는 말이야.”


나는 괜히 마법사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아 어깨를 움츠린 채 잔뜩 위축된 자세로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마법사는 금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우선은 네 팽창한 정신을 어느 정도 축소를 시킬거야. 그 다음 이 끈을 네 육체에 연결한 다음 위축된 그릇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그 끈을 따라 수축된 정신이 육체로 들어가면 끝.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거지. 어때, 쉽지?”


“그럼 부작용은…”


“항상성이라고 아나?”


“물체가 원래 자신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성질 말인가요?”


“그래. 그 항상성이 문제가 되는 부분이야. 네가 육체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항상성 때문이지만 부작용이 생기는 것도 항상성 때문이거든.”


“조금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자, 원래 네 육체와 정신은 한데 섞여 있었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의 깊은 기억에는 너라는 존재가 육체와 정신의 혼합이라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성질이 완전히 반대인 둘이 섞일 수 있고 네가 다시 돌아갈 수 있는거야. 그런데 이 항상성이라는 것이 웃긴게, 조금만 환경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재정립이 되거든. A환경에서 평생을 살아왔어도 B환경에 몇 개월 있다보면 B환경에 대한 항상성이 생기지. 그러니까 지금 네 상태는 정신과 육체가 5:5로 균형을 이뤘던 것에 대한 항상성과 정신과 육체가 따로 존재했던 것의 항상성이 공존하게 된 상황인거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일은 내가 다 하니까. 그냥 넌 눈만 감고 있으면 돼.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자면 그 항상성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는거지. 문제는 그 간극 말인데, 너도 짐작할 수 있듯이 0으로 만들 수는 없어. 애초에 네가 원래 가지고 있던 항상성만 남길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네 정신과 육체에 미세하게 균열이 생기는거지. 정신은 정신대로 원래보다 커진 상태고 육체는 육체대로 그릇이 작아진 상태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언뜻 언뜻 정신이 육체를 떠날 수 있다는 말이야. 육체가 기능을 정지하는 순간에 특히 더 심하겠지. 예를 들어 잠을 자거나 가위에 눌린다거나 할 때 말이야. 그렇지만 네가 선을 넘지만 않으면 상관없어. 잠시 부유하다 다시 육체로 돌아올테니까. 유체이탈, 알지? 문제는 그게 아니야.”


마법사가 이번에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체이탈이나 타인의 꿈에 들어가는 그런 정신적인 활동은 크게 무리가 되지 않아. 말했듯이 내가 조치를 취해놓을테니 네가 무리만 하지 않으면 돼. 그렇지만 네가 정신의 영역에 들어서면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도 너를 인식하게 돼.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너를 들여다본다는 말 혹시 아나?”


“니체 말인가요?”


“아주 바보는 아니군. 네 정신과 육체의 미세한 균열 때문에 너는 항상 심연과 맞닿아 있는 상태야. 그러니까 넌 그 심연을 모른 척해야해.”


“어떻게요?”


“그냥 무시해. 알아도 모르는 척,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그게 다인가요?”


“그래. 그게 다야. 뭐, 인간을 초월하지 않는 이상 판도라의 상자를 영영 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열기 전까지는 무탈할테니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지. 어차피 너는 지금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잖아?”


마법사의 말에 나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파비앙이 아니었으면 병실에 누워있는 육체속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소멸했을 것이다. 아니면 파비앙의 세계를 흉측하게 뜯어먹던 입이 되던가, 아니면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는 자’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자, 그럼 이제 갈 시간이다. 나도 해야할 일이 많거든 간만에 좋은 재료들도 얻었고.”


마법사가 손으로 자신의 품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현기증이 날 수도 있으니 눈을 감고 있어라.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나는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을 감았다. 마법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왠지 현기증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눈을 감자 마법사는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잘가라!’라는 말과 함께 침묵했다.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마법사는 온데간데 없었다. 부서진 파비앙의 세계의 파편들만 고요히 떠다니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는 판도라의 상자를 빨리 열 것 같군.”


어디선가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마법사를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마법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 삼아 조금이라도 상자를 여는 시기를 늦출 수 있도록 해. 내가 주는 교훈이야.”


마법사의 말이 끝나며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끝나자마자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눈을 감으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사가 말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마법사가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내 앞에는 사람 두 명이 들어갈 정도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원래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내 몸은 그 구멍쪽으로 천천히 끌려갔다. 거부할 수 없는 물살에 몸을 내맡긴 듯이 나는 어느새 구멍 앞까지 다다랐다. 구멍 속을 들여다 본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치 폭포처럼 어둠이 어디론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구멍을 따라 어둠과 함께 어디론가 처박혔다.


“이런 젠장!”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지렁이 여러마리가 기어다닌 것 같은 천장 텍스였다. 실제로 지렁이들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가운데로 모여 한 덩어리를 이뤘다. 꿈틀거리는 거대한 덩어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입 안에 모든 것을 게워냈다. 한참을 토하고 난 후에 나는 바닥에 깔린 토사물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거기에는 산소호흡기와 기다란 호스, 언제고 술을 잔뜩 먹고 토한 날 보았던 노란 액체가 한데 섞여있었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니 왼쪽 팔이 쓰라렸다. 일어나면서 주사바늘이 뽑힌 탓인지 팔에서는 꽤 많은 피가 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피를 닦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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