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치 부처의 것과 닮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모습이 정말로 화가 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미소는 인자라기보다는 포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화도 나지 않게 돼."
반복되는 선문답에 나는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아 그래? 나는 너를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럼 내가 잘못된 걸까?"
날이 선 대답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방금 그거 질문이야?"
"응?"
"말했잖아.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씩. 방금 한 말이 질문이면 내가 대답을 하면 될까?"
내 벙찐 표정에 친절한 듯 친절하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작게 '핑퐁!'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멋대로 휘둘리는 경우는 또 처음이다. 무엇이든 간에 타인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면 강한 거부감이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사라에게는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커다란 눈망울이 호를 그리며 입술 끝으로 떨어질 때 목구멍으로 화가 솟구치기 직전이던 내 마음도 스르르 구부러지고 마는 것이다.
"후- 그래. 아까운 질문을 감정에 휘둘려 허비할 수는 없지."
"좋은 태도야."
여전히 웃고 있는 사라가 슬쩍 소주잔을 내밀었다. 소주 특유의 역한 알코올 향이 코 끝을 자극했다. 목을 꺾어 단숨에 들이켜니 처음 마실 때와 달리 단맛이 느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도대체 왜 우월감과 살아있음을 느끼는 거야? 그.. 혹시 취향이 그런 것이라던가.."
"변태적 취향이냐는 말이지?"
"아니 꼭 그게 변태적이라기보다는.. 각자 취향이 다른 거니까.."
술기운에 호기롭게 말을 꺼냈지만 막상 말을 하고 나니 부끄러워진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렇지만 사라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글쎄? 주도적과 비 주도적의 차이랄까? 자의냐 타의냐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르니까."
"그건 조금 이상한데. 섹.. 서로 좋으니까 관계를 맺는 거지 주도권이 어디 있어?"
나는 어쩐지 '섹스'라는 단어가 민망해서 급하게 관계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그녀의 말을 곱씹어봤다. '주도적과 비 주도적? 자의와 타의? 그런 게 어딨있나 좋으니까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사라의 말을 전부 듣기 전까지는.
"내가 원치 않는데 그 일을 당하는 상황을 말하는 거야."
여전히, 사라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뱉은 짧은 문장에서 과거의 어떤 상처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역린을 건드렸음을 알았을 때의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라를 보니 역설적이게도 상처의 깊이가 가늠하지 못할 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할 필요 없어. 잊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일이고, 내 방식대로 나름 극복하고 있으니까."
서로 무엇이 미안한지, 무엇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느낌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두세 방울의 눈물을 담고 있는 듯한 눈동자, 소주잔을 들어 올리는 가녀린 손가락, 살짝 기울인 고개, 힘들여 올려 보내는 입꼬리 같은 것들이 나를 미안하게 했고, 많은 것을 꾹꾹 눌러 담은 나의 세 글자는 충분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의미에 충실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리 옮길까?"
"그래, 그러자. 내가 잘 아는 바가 있는데 거기로 갈래?"
"좋아."
얼마 전에 시킨 소주가 반 병 이상 남았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짐을 챙겼다. 어떤 잘못을 들킨 사람들처럼 후다닥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지만 점원은 익숙한 듯 전혀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보기 싫은 흔적을 가게에 남겨두고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데, 점원은 영수증의 적힌 값어치를 받고는 아무렇지 않게 흔적을 쓸어 담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