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첫 출근 소감을 묻는 남편에게 나는 오늘 들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불쾌해하면서도 단편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며 나를 다독였다. 그래 우리나라 속담에 '대천바다도 건너봐야 안다'라고 실제로 그 사람을 사귀고 겪어봐야 알 수 있으니 너무 색안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면접날과 첫날의 이미지는 썩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이고 또 어쩌면 그분도 나에 대해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하니 잘 지내보기로 마음을 먹고 출근을 하였다. 그날따라 센터장님은 기분이 좋으신지 밝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고 그 미소에 나도 용기를 내어 반갑게 인사를 먼저 건넸다. 센터장님이 나에게 처음 준 업무는 당시 연구 중이던 이슈와 관련된 외국 논문의 일정 부분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주며 내가 어려워하지 않도록 많이 도와주었다. 처음 해보는 번역 업무에 전문용어도 많아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센터장님은 단 한 번도 독촉하거나 나를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부담 가지지 말고 하라며 응원해주셨고 나는 주어진 번역을 하나씩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나는 내가 너무 경계를 가지고 오해했구나라고 생각하며 센터장님의 업무 스타일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입사한 지 20일이 지났을 무렵, 센터장님이 바쁜지 나에게 업무를 배정해 주지 않았고 놀 수만 없었기에 센터 사업계획서를 보며 나 나름 센터 세부일정계획을 정리하였다. 기관 내 센터 자체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진행해야 하는 사업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금세 마무리되었다. 그 후에도 배정되는 일은 없었고 나는 예전에 번역했던 자료를 다시 보며 오번역을 점검하고 영어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센터장님의 연구는 1년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였고 자주 나오는 영어단어를 외우면 이후에 번역을 하는 데 있어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매일 3시간씩 영어단어와 문장을 외우고 정리했다. 그 덕분에 간간히 주어지는 번역 업무에서 확실히 속도가 붙었고 직업적 성향과 실제 업무가 달라도 나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음을 경험하며 회사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달이 바뀔 무렵 센터장님은 나에게 '나는 핸드폰 보고 뉴스 기사 찾아보고 노는걸 엄청 싫어하는데 너는 내가 시키지 않아도 일을 하고 있고 일이 아니면 공부라도 하고 있더라'라고 말하며 3GB가 넘는 파일을 나에게 주었다. '1년 전부터 하던 사업인데 네가 정리해봐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잘해봐' 격려의 말을 전하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때는 내가 인정받는 거 같았고 센터장님이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