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장은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동안 나에게 화를 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있으면 함께 산책할 것을 권유하거나 다른 팀 동료에게 '얘 좀 데리고 나가' 라며 쉬기를 권유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일을 하는 시간보다 센터장이랑 수다를 나누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처음에는 직업의 안정을 얻었으니 자기 계발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대화의 끝은 '그래서 너네 학사가 무엇을 할 줄 아니? 연구원에서 학사출신 무기계약직 뽑는 것을 내가 정말 많이 반대했어 네가 생각해도 좀 아니지 않니?'라고 끝났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물론 초기에는 '저도 연구원에서 자격기준이 학사라서 신기했어요.'라고 대답했지만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이 지나는 동안 모든 대화의 끝은 '학사출신'이라는 단어로 끝났다.
더욱이 신기한 것은 무기계약직 직원이 9명이나 되는 만큼 이제는 무기계약직들끼리 뭉쳐서 회사에 부조리함에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오전에 웃으면서 나에게 말해놓고 오후에 협업 진행 중인 팀 직원이랑 출장을 가는 차 안에서는 물론 출장지 직원 그러니까 타회사 직원에게도 '우리 연구원에서 이번에 학사출신 무기계약직을 뽑았는데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내가 정말 반대했는데 정말...'라며 대화를 갑자기 혼자 시작했다.
센터장과 함께 출장을 나갔던 동료는 '센터장님 왜 그래?? 대체 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거야?'라고 화가 난 상태로 나에게 물어보지만 나도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학사출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지만 학사출신인 직원들에게 작게는 행정업무부터 많게는 정책과제의 기본 베이스가 되는 중요한 일까지 업무지시를 하면서 왜 자꾸 저렇게 말하는 걸까?
'너는 학사출신이니까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나도 말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직장생활을 해 경력을 쌓았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입 밖으로 말 한마디 꺼낼 수가 없었다.
초기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두 달 동안 나는 정말 능력이 없나?라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고 석사학위 취득 후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동료와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나는 철저히 무너져 갔다.
회사를 퇴근한 후 집에서 멍하니 있는 날이 많아졌고 아침 출근길에는 가슴이 답답하여 거친 호흡만 내쉬었다. 입사 첫날 나에게 '학벌로 차별을 많이 받을 거예요'라고 말했던 동료는 지친 나를 보며 '그 센터장님, 가스 라이팅 장난 아니에요. 저도 그랬어요. 작은 일에 서운해지고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분은 본인이 무엇을 잘 못했는지 모르거든요. 우리는 신고할 곳도 없고요.' 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연구원 내 노사위원회가 있지만 사측위원회 위원이 직속 상사들이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고 거기에 기관의 크기가 너무작아 1개의 사무실에 3개 부서가 함께 일하고 있어 부서이동이 되어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리 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소문이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문제로 관할 시청에 신고가 들어가 감사과에서 조사를 나왔던 적이 있지만 해당 직원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과 친분관계가 있어 그 어떤 제재도 없이 조용히 빠르게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아마 그들에게 이 사건은 그저 처리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부당한 일들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워낙 지역사회가 작고 석사와 박사를 준비한다면 관련 학회, 세미나 등에서 만날 확률이 너무 높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가 당연하게 되었다.
결국 이곳에는 우리를 지켜줄 시스템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20년도에 직장갑질 상담기록과 여러자기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직장 갑질 신고센터가 회사 내부에 있는 점, 직접적인 신체적 학대, 업무적 보복이 아닌 단순히 '감정이 상할 수 있는 주관적인 말'은 되려 신고자가 역풍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망설이게 했고 결국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곳을 벗어날 준비를 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