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설날의 마지막 풍경은 할아버지 산소에서 모든 아버지 형제들이 절을 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집안 어르신들은 아들만 데려와 절을 함께 시켰지만 아들이 없었던 우리 집은 언니, 나, 여동생
모두를 데리고 올라갔고 아버지는 아들만 핏줄이냐며 우리에게 꼭 절을 시켰다.
그 해 명절도 어김없이 산소에 올라가 절을 하고 내려가려는데 아버지가 포도 1송이와
소주 1병을 꺼내며 포도주를 만들자고 권유했다. 아버지는 포도송이를 한알씩 떼어내어 소주병 안으로
넣으며 우리에게도 한알씩 주셨고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했다.
'이건 뭐 어떤 의식 같은 건가?'라고 생각하며 아버지께 포도주를 담그는 이유를 물었지만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실 뿐 이유를 알려주시진 않았다.
다만 '우리 큰 딸이 성인이 되는 내년 설에 함께 열어보자'라고 하시며 소주병을 할아버지 산소 옆에 묻어두셨다.
물론 포도주의 존재는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내 머릿속에서 잊혔고 그렇게 물 흐르듯 순식간에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포도주를 담은 그 다음 해 설의 우리 집 분위는 매우 우울했다.
전교 1~2등을 자랑하던 언니가 원하던 대학에서 낙방하면서 재수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워낙 공부를 잘했기에 언니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엄마, 아빠 또한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어하셨다. 언니가 너무 힘들어했기에 '이번 설에는 할아버지 산소를 가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약간(?) 좋아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설 연휴 마지막 날 언니와 나만 데리고 할아버지 산소로 향했다.
늘 그랬든 할아버지에게 절을 하고 내려가려는데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산소 옆 포도주를 꺼내며 해맑게 말씀하셨다.
'딸들아 한잔하자.'
소주잔 가득 부어져 있는 포도주를 아버지를 따라 언니와 나는 원샷했다.
진짜 살면서 그렇게 쓰디쓴 음식은 처음 먹어보았다.
쓴맛의 강도를 1에서 10까지 표현할 수 있다면 이 포도주의 맛은 10을 뚫고 나갈 정도였지만
아버지는 웃으며 '아~ 달다!'를 외치셨다. 그리고는 지긋이 언니와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빠가 짧은 삶을 살아보니 이 포도주보다 쓰디쓴 순간이 매우 많았단다. 내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보기도 하고 어떻게든 부도만 막아보려 했던 회사는 지키지 못했고 내가 존경했던 아버지는 한순간에 오토바이로 사고로 돌아가셨지 그때 알았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 딸아, 지금 이 포도주가 쓰다고 느꼈다면 네가 지금 느끼는 모든 것들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 중에 하나란다. 이제 그만 슬퍼했으면 좋겠어'
라고 말씀하셨다. 당연히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지만
언니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모든 것을 토해내듯 펑펑 울었다.
그 일이 있고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그때 아버지가 말한 '아! 달다.'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퇴근하고 와서 먹는 맥주 한잔이 그렇게 달았고,
상사와 싸운 날 친구들과 먹는 소주 한 잔은 꿀물이었다.
아버지가 말한 술의 달다는 이런 의미였을까?
그렇게 나는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아버지가 겪은 쓰디쓴 순간들을 나도 하나둘씩 경험하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몇 해 전 종영되었던 도깨비라는 드라마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술은 원래 써, 하지만 달게 느껴지는 순간, 그때부터 어른이 되는 거야'
난 진짜 어른이 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일까?
2021년 12월 31일 남편과 함께 국밥에 소주 한잔을 하며 낭만과 허세 가득 찬 눈으로 나는 말했다.
'술이 참 달아~ 그지? 이제 나도 찐 어른(* 진짜 어른의 줄임말) 인가 봐
내 말을 들은 뼛 속까지 이과생이 었던 우리 남편은 '장사가 잘되는 집인가 보지'
라고 말하며 진지하게 나에게 설명했다
'여보 잘 들어봐, 소주에는 스테비오사이드라는 감미료가 들어가, 그런데 이 녀석은 시간이 오래 지나면
분해가 되면서 쓴 맛을 유발해 즉 다시 말해서 장사가 잘되는 집은 스테비오사이드가 분해되기 전에 소주가 다 팔리고 신선한 술이 매일 입고되겠지?그런데 장사가 안 되는 집은 소주의 스테비오사이드가 분해가 되다 못해 바스러지겠지? 그럼 술에서 매우 쓴 맛이 나는 거지, 그러니 어른이 되어가서, 인생의 평지풍파를 다 겪어서 소주가 단것이 아니라 그냥 장사가 잘되는 집에 와서 소주가 단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