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찹쌀경단 Sep 27. 2022

나 은행원 맞는데,
왜 네가 아쉽지?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05

“현서야, 우리 딸. 잘 지내고 있어? 별일 없지?”

“응, 엄마 별일 없지.”

“일은 좀 어때? 안 힘들어?”

“힘들어.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힘들어.”

“아유, 어떡해. 주말에 집에 올래?”
“그럴까? 알았어. 버스 예매할게.”


집밥이 그리웠다. 힐링의 시간이 필요했다. 

현서는 주말에 집으로 내려가 오랜만에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많이 힘드니? 퇴근은 몇 시에 해?”

“안 바쁜 날은 6시에 퇴근하는데 일 많은 날은 더 늦기도 하지 뭐.”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

“기숙사 근처에서 사 먹거나 배달해먹거나 그래. 사 먹는 음식도 지겨워.”

“그래 맞아. 밖에서 먹는 음식은 금방 질려. 집에 왔을 때 엄마가 해준 거 많이 먹고 가. 주말엔 뭐 하구?”

“엄마 나 지난달까지 시험공부하느라 주말 내내 독서실 다녔어.”

“시험? 무슨 시험?”

“자격증 따야 하는 것이 있어서 공부하느라. 자격증 아니어도 은행 내부 연수랑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 엄마 나 이렇게 시험 스트레스받는 거 오랜만이야. 학생때로 돌아간 것 같아. 힘들어 죽겠어.”

“어머 회사에서도 시험을 보니?”

“장난 아니야. 퇴근하고 나면 피곤에 절어서 강의 듣자니 너무 지치고, 주말에 듣자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기분이야. 더 짜증 나는 건, 시험에 떨어졌단 사실이야.”

“어이구, 쉽지 않네.”

“4개월 후에 시험이 한번 더 있는데, 그때 다시 볼지 아니면 내년으로 미룰지 고민 중이야. 너무 힘들어서.”

“고생이 많네, 우리 딸. 학교 다닐 때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누구 만나는 사람은 없고?”

“만날 시간과 여유가 없었어. 연애도 못하고 일만 하고 있었다니까. 청춘이 이렇게 흘러가나 싶어. 벌써 스물 여덣인데.”
“이제부터 만나면 되지. 능력 있는 좋은 사람 만나면 엄마한테도 얘기해 주고. 알았지?”


사실 현서는 2주 전쯤 고등학교 친구 새봄이 주선한 소개팅을 했었다.


“대학 동기인데, 네 사진 보더니 꼭 소개해 달라고 하도 얘기를 해서. 어때, 만나볼래?”

“뭐 하는 사람인데?”

“중학교 국어교사야. 여기, 사진 있어.”


국어교사? 왠지 모르게 고리타분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직업도 딱히 맘에 들진 않아. 능력 있는 남자와는 거리가 좀 멀지 않나?

근데 꽤 잘 생겼네? 몸도 좋은 것 같고. 운동 열심히 하나보다.

취업하고 제대로 연애도 못 했는데 한번 만나나 볼까?


“나랑 엄청 친하진 않은데 학교 다닐 때 인기 많았어.”

“그래, 만나볼게.”


그렇게 퇴근하고 난 어느 날 저녁, 강남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국어교사와 소개팅을 했다.


“사진도 너무 예쁘셨는데, 실제로 뵈니 더 미인이시네요. 은행에만 계시기 아까운데요.”

“아,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호호”


그의 이름은 윤호영이라고 했다. 호영은 학교에서 여학생들한테 인기 많을 법한 훈남이었다.

편견인지 몰라도 이런 외모에 중학교 국어교사라니?

왠지 안 어울리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 같기도 했다.


“카톡 프사 보니까 바디 프로필 사진이 있던데.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네. 원래 운동에 취미는 딱히 없었는데 PT 받으니까 하게 되더라고요. 돈 쓴 효과가 있었어요.”


응? 이 남자 방금 ‘효꽈’ 가 아니라 ‘효과’라고 발음했다. 보통 많이들 ‘효꽈’라고 하지 않나? 아나운서나 기자 말고는 ‘효과’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국어선생이다 이건가.


“현서 씨는 은행에 근무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이제 2년 차예요.”

“퇴근은 일찍 하세요? 아는 형이 은행에서 대출 보고 있는데 거의 매일 야근한다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저희 지점도 대부계는 야근이 많아요. 저는 텔러라 대출을 안 보고 예금계에서 일하고 있어요. 야근은 어쩌다 한두 번 있지만 특별한 일 없으면 보통 칼퇴예요.”

“아, 텔러세요? 대졸 공채 일반직이 아니고요?”

“네. 전 텔러직이에요.”


현서는 호영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 그러시구나. 은행원이라길래 대졸 공채 일반직이신 줄 알았어요.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H대학교 나왔어요. 고향이 그쪽이에요.”

“아, 지방에서 오셨구나. 거기는 4년제 대학교 맞죠? 저는 D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했어요. 텔러직은 일반직보다 연봉이 좀 낮은 편이죠?”

“네, 아무래도 그렇죠. 업무도 차이가 있고요.”

“좀 아쉽긴 하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현서 씨는 예쁘시니까요. 예쁘면 다 용서가 되죠. 저는 박봉이지만 퇴직 후 연금 생각하면서 버텨요. 하하”


뭐가 아쉽고 뭐가 괜찮다는 걸까. 내가 일반직 은행원인 줄 알았는데 텔러여서 아쉽다는 걸까?

본인이 왜? 게다가 만나자마자 연봉 이야기라니?


“텔러여도 똑같이 육아휴직 기간은 2년인가요?”

“네, 맞아요.”

“잘 됐네요. 여교사는 육아휴직을 3년 쓸 수 있어서 훨씬 좋긴 한데 2년간 휴직할 수 있는 직장도 흔치 않죠. 2년이면 자녀를 어느 정도 키워 놓고 복직할 수 있는 기간이니까요. 월급이 좀 아쉽겠지만 맞벌이를 안 할 수도 없고. 저는 일반 회사원들에게 없는 방학을 이용해서 아이를 돌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교사의 가장 큰 장점은 방학 아니겠어요?”


갑자기 호영의 말이 많아졌다. 본인이 방학 동안 본인 아이 돌본다는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현서는 자리가 불편해져서 빨리 밥만 먹고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스파게티를 흡입했다.


“식사 다 하셨으면 근처 카페 갈까요? 공채 일반직이시면 저보다 연봉 높으실 테니 오늘 밥 사달라고 하려 했는데, 오늘은 그냥 제가 살게요. 다음엔 맛난 거 사주세요.”


호영이 능글맞게 웃으며 지갑을 꺼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지금, 나 텔러라고 무시하는 건가?


“네? 아니에요. 그냥 각자 내죠.”

“에이~ 농담이에요. 뭘 정색까지 하고 그러세요~ 다음에 또 맛난 거 먹으러 가요.”


저건 백 프로 진심이다. 진심이라 해도, 말을 왜 저렇게 하지? 너하고는 더 이상 만날 일 없어.


“그냥 각자 계산하는 게 깔끔할 것 같아요. 사실 내일 시험이 있어서 좀 일찍 들어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시험이요? 무슨 시험이요?”

“회사에서 시험 보는 게 있어서요. 오늘 즐거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호영을 뒤로한 채 기숙사로 가는 지하철을 타러 갔다.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내가 지방 출신에 텔러라는 것을 알고나서부터는 갑자기 말을 함부로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 학교가 4년제인지 모를 정도로 인지도가 낮은 곳은 아닌데!


분명히 4년제인 거 알면서 일부러 물은 것이 상당히 불쾌했고, 자기가 더 잘났음을 표출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자기에게 목맬 것처럼 확신한 듯한 앞서 나간 화법도 맘에 안 들었다. 육아휴직이 어쩌고 방학이 어쩌고. 그리고 연봉이 어떻고 이런 얘기를 어떻게 첫 만남부터 하지? 무례하기 짝이 없다. 내가 연봉이 더 높았으면 첫 만남에 밥을 사달라고 하려 했다고? 저런 남자는 태어나서 처음 만나본다.


그동안 예쁜 외모로 많은 남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온 현서였다. 남자들이 늘 먼저 다가와서 데이트 신청을 하거나 밥 사주겠다는 남자 선배들이 수두룩 빽빽이었던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뭐가 달라졌지? 나이? 아니면 학생과 직장인의 차이? 갑자기 좀 서글퍼졌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다 보면 머릿속에 계산기를 두드려볼 수밖에 없는 걸까?

나도 사실은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한다는 계산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오늘 만난 국어교사는 선을 넘었다. 저렇게 필터링 없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무슨 교사?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데.


이런 대우는 정말이지 난생처음이라 곱씹어볼수록 화가 났다. 새봄에게 전화해서 하소연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새봄은 현서를 은행 다니는 고등학교 친구라고 소개했을 것이다.


새봄에게 내가 텔러직이라고 꼭 집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하지만 내 직군을 디테일하게 말할 일이 없었는데. 이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고. 난 대형은행에 취업했고, 사실 회사 네임밸류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는데. 앞으로 누구를 만날 때는 처음에 미리 알려주고 소개를 받아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서는 자신감이 조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조금이 아니고 많이 떨어졌다.


이전 07화 머리를 뛰어넘는 매력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