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03
연말이 훌쩍 다가왔음을 알 수 있는 신호는 바로 달력이다.
달력 때문에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살아야 하는 12월이 왔다.
12월이 되면 마치 달력이 엄청나게 고귀한 물건인양 고객과 은행원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1월 중순만 되어도 달력을 주고받기 위해 씨름했던 순간은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말이다.
요즘 달력을 직접 보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모두 스마트폰으로 날짜와 스케줄을 확인하지 않나?
옛날부터 해 왔던 관행이니까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민경은 왜 은행에서 달력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확실히 시대를 반영한 듯 본점에서는 각 지점별로 배분해주는 달력 수를 매년 줄이고 있다. 전년도보다 수량이 반 정도가 줄어든 달력이 지점으로 도착했는데, 이는 또 이대로 골치다.
개인고객은 보통 선착순으로 1인 1개씩 배부하고, 기업고객은 적절히 나누어 배부하는데, 작년에는 두 개씩 줬는데 올 해에는 왜 이리 박하냐부터 시작해서 달력 때문에 빈정 상한다는 고객들도 생긴다.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많다.
“집에도 놓고, 가게에도 걸어야 하니 세 개만 줘요.”
“고객님, 죄송해요. 올 해에는 달력 수량이 너무 적어서 한 분당 한 개씩만 드리고 있습니다.”
“아니, 내가 여길 몇십 년을 거래했는데 달력도 원하는 만큼 못 받아요?”
“요즘 달력을 많이 안 쓰셔서 저희가 받은 수량이 굉장히 적습니다. 탁상 달력 한 개, 벽걸이 달력 한 개 챙겨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연말이 되면 블라인드 앱의 금융 라운지는 달력 스트레스로 인한 호소글이 도배를 한다. 각 금융기관별 달력을 모아 중고나라에서 파는 달력 줄다리기에서 이긴 사람들에 대한 제보도 잇따른다.
무엇이든 돈이 되는 세상인 것 같다.
업무 시작 전, 벽걸이 달력을 돌돌 말아 포장하며 직원들끼리 담소를 나누었다.
“민경씨는 크리스마스 때 계획 있어?”
“글쎄요. 남자 친구가 있다면 만나겠지만.. 아직은 계획이 없어요.”
“지난번 소개팅 잘 안 됐어?”
“네.. 하하. 2개팅 하고 끝났어요.”
요즘 용어로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날을 1개팅, 두 번째 만남을 2개팅, 세 번째 만남을 3개팅이라고 한다. 보통 3개팅쯤 되면 사귈지 말지 결정이 나는데 지난달에 했던 소개팅은 2개팅에서 끝나고 말았다.
4시가 되고, 은행 셔터문이 닫혔다. 셔터를 내렸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고객응대와 외환 송금, 대출심사, 재무제표 분석 등을 번갈아 가면서 하다가 업무가 하나 줄어드니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6시에 퇴근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초 집중을 해야만 한다. 서랍 속 시재를 맞추어 금고로 옮기고, 남은 통장 개수도 확인하고, 오늘 처리해야 하는 외환 송금들을 보낸다. 까다로운 업무는 혹여나 실수할까 규정을 찾아가며 확인, 또 확인한다. 오늘 대출을 상담해 온 업체의 재무제표를 받아 건전성을 체크하고, 책임자와 상의도 한다. 바뀐 규정에 대해서는 본점의 부서로 전화를 걸어 더블체크도 해야 한다.
다행히 오늘은 야근 없이 6시에 퇴근했다.
민경은 지하철 속 사람들 사이에 끼어 한 손에는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을 켰다. 겨울이라 다들 포동포동한 패딩을 입고 있어서 더욱 꽉 끼는 느낌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급정거를 하더라도 넘어질 염려가 없어 보였다.
그때, 입행 동기인 호준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민경~ 퇴근했어?'
'응 했지. 지금 지하철.'
'요즘 연애하고 있어?'
'아니.. ㅋㅋ 왜 소개팅해주게?'
'할래 소개팅? 너보다 두 살 많고, L전자 다녀. 대학 동기.'
'콜.'
이 정도면 충분하다.
수많은 소개팅을 하다 보니, 이 정도 정보만 있어도 일단 콜이다. 호준이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는 기억이 안 났지만, 동기가 해준 소개팅이면 일단 믿을 만하다.
당장 돌아오는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또 뻔한 파스타집일까 싶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소개팅남은 이태원의 핫한 퓨전 막걸리집을 제안해왔다.
오, 여기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센스 있네?
술을 잘 못하는 민경이지만, 막걸리는 맥주처럼 쓰지도 않고 구수하고 달달해서 좋아하는데 어쩜 취향을 이렇게 잘 알았을까. 왠지 느낌이 좋았다.
토요일이 기대가 되었다.
토요일 저녁의 이태원은 늘 그랬듯 지하철 역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내국인, 외국인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소개팅남의 카톡 프로필에는 사진이 없어서 얼굴을 모른 채 만났는데, 일단 외모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착해 보였지만 하얗고 살집이 있는 백곰 같은 스타일에 결정적으로 머리숱이 상당히 적어서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두피가 하얗게 보였다. 원래 곱슬인지 아니면 휑한 머리를 채워보고자 파마를 한 것인지 소개팅남의 머리카락은 둥글게 말려 있었지만 큰 의미는 없어 보였다.
아.. 내가 머리숱에 딱히 신경 쓰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 분은 머리카락이 너무 없네.
오늘은 1개팅에서 끝나겠구나.
계속 머리에 시선이 가는 자신을 다잡으며 그래도 장소를 잡은 센스를 믿어보자는 심정으로 막걸리 집으로 향했다.
이 날, 민경은 자신의 내면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다니.
좋아하는 영화 취향, 미래에 대한 계획, 인생에 대한 가치관. 신기하리만큼 비슷했다.
대화가 너무 즐거웠다. 더 이상 이 남자의 머리숱은 중요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특제 막걸리도 그날의 분위기처럼 달달했다.
2개팅을 나갔다.
앗, 머리가 너무 듬성듬성해. 그렇지만 대화가 이 정도로 잘 통하는 사람은 오랜만인걸.
일주일 만에 만나니 또다시 머리에 눈길이 갔지만, 이 남자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헤어질 때 즈음엔 아쉽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3개팅을 나갔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오히려 점점 호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지만), 민경의 스타일이 아닌 이 남자의 외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하지만 본인이 원해서 탈모가 생긴 것도 아닐 텐데, 더군다나 이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외모를 뛰어넘는 매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민경이기에 만약 사귀자고 하면 사귀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보통 3개팅이면 사귀냐 아니냐가 결정이 나기 때문이다.
화기애애한 대화 끝에 3개팅을 마치고 소개팅남은 또 연락하겠다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어? 뭐지? 오늘 분위기도 괜찮았는데.
집으로 돌아와서도 소개팅남과의 카톡은 계속되었다. 아마 4개팅 때 사귀자고 할 것 같았다.
그리고 4개팅을 하기 바로 전날, 소개팅남은 잠수를 탔다. 슬슬 답장 오는 빈도수가 줄어들더니 카톡의 1이 없어지지 않았다.
뭐야?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데?
자신도 모르게 안달이 났다.
이 정도로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닌데... 이 사람도 분명 나한테 마음이 있어 보였는데. 혹시 바쁜 것일 수도 있으니 한 시간 후에도 답이 없으며 전화를 해봐야겠다.
신호음이 여러 번 울렸는데 응답은 없었다.
내 스타일이 아님에도 큰맘 먹고 사귀어 보겠다고 결정도 내렸는데. 자존심이 몹시 상해서 눈물까지 찔끔 났다. 탈모가 있고, 퉁퉁한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상당한 고민을 했는데 이렇게 잠수를 타다니. 사귄 것도 아닌데 왠지 차인 것만 같아서 짜증이 났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대체 김칫국을 몇 사발을 드링킹 한 것일까. 무슨 자신감으로 이 남자가 나에게 고백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일까. 차라리 거절 의사를 똑바로 밝히지 잠수는 또 뭔가. 옹졸하다.
아니야. 이렇게 끝내줘서 다행이지 뭐. 외모는 예선인데, 예선 통과도 하지 못한 사람을 본선으로 끌고 가 봤자 금방 탈락할 테니 차라리 잘 됐어.
쓰라린 마음을 안고 정신승리를 했다.
소개팅이야 또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