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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Sep 29. 2022

파스타는 물려도 계속 먹을 수 있다

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01

왠지 이번엔 잘 될 것 같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취준생 때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신의 직장 S공기업에 다니는 남자. 나보다 한 살 많고, 학벌도 H대학교면 훌륭하다. 외모는 뭐..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봤을 때 딱히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다른 스펙이 훌륭하니까 무조건 만나보기로 한다. 사진발이 안 받는 스타일일 수도 있잖아.


소개팅남을 만나기로 한 토요일, 옷은 무엇을 입을지 미리 정해두었고, 민경은 침대에 누워 평소 즐겨 보는 뷰티 유튜버의 새로 나온 화장품 리뷰를 보고 있었다.


“성분도 순하고, 성난 피부를 즉각적으로 진정시켜줘요. 저는 화장품 잘못 쓰면 확 뒤집어지는 초민감성 피부 갖고 있는 거 다들 아시죠? 지금 제 얼굴 보시면 울긋불긋 난리가 났는데요. 한쪽에는 평소에 제가 쓰는 토너를 화장솜에 묻혀서 올리고, 반대편에는 오늘 리뷰할 “착한 토너 패드”를 붙여볼게요. 5분 후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드릴게요.”


유튜버의 리뷰를 보니 당장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화해” 앱을 켠다. 성분표를 보니 민감성 피부에 탁월하다는 온통 파란색 성분뿐이다. 빨간색 성분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안심하며 바로 네이버로 들어가 검색하고는 주문 버튼을 누른다.

무료배송이 아니네?

배송료를 내면서 이 화장품 하나를 사는 게 맞는지 잠시 고민하다 민경은 올리브영 앱을 켠다.

화장품은 사놓으면 어차피 쓰니까 이왕 살 때 같이 사서 무료배송 조건을 채우자. 나란 여자, 참 알뜰해.

뿌듯해하며 폼 클렌저 하나를 담는다. 주말 한정 20% 할인쿠폰도 다운받으니 더없이 현명한 소비를 한 듯한 기분에 날아갈 것만 같다.


슬슬 준비를 해 볼까.

지금은 오후 4시. 소개팅남과는 종각역 앞에서 6시에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앱으로 보니 딱 30분 걸리는 거리다. 그럼 5시 반에 나가면 되니 아주 여유롭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민경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말아 올린 채 화장을 시작한다. 머리를 먼저 말리게 되면 드라이기 바람 때문에 피부가 건조해져서 반드시 화장을 마무리한 후 머리를 조심스레 말린다. 피부 건조는 피부 노화의 지름길이다.

파운데이션은 잘 먹었는데 오늘따라 눈썹이 잘 안 그려진다. 항상 오른쪽은 잘 그리는데, 왼쪽이 문제다. 왼쪽 눈썹 모양이 자꾸만 엇나가서 면봉으로 지우고 다시 그리길 반복한다.

어느덧 시계는 5시를 알린다.


아직 30분이나 남았네. 충분히 여유 있어.

눈썹이 완성되고 아이쉐도우를 단계별로 바르며 그라데이션을 만든다. 부드러운 인상을 주기 위해 블랙 아이라이너 대신 브라운을 택했다. 평소 출근할 때는 귀찮아서 잘하지 않던 속눈썹도 바짝 올리고 마스카라까지 바르니 인형 눈이 따로 없었다.

좋아.

블러셔를 양 볼에 톡톡 바르고 메이크업 픽서를 착착 뿌려 화장을 고정시켰다.


5시 15분.

머리만 말리면 된다. 민경은 수건을 풀고 어깨 조금 넘는 길이의 머리를 정성스레 말리기 시작했다. 미용실 언니가 알려준 대로 70%의 수분을 날린 후 양쪽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아 돌리면서 말려야 자연스러운 컬이 생긴다.


5시 25분.

머리를 세팅하고, 귀걸이를 하고, 전날 옷걸이에 걸어둔 원피스를 입고 핸드백을 챙겼다.

완벽하다.

샌들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왼쪽 샌들 끈이 하나 툭 끊어졌다.


어? 패닉이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하는데.


민경은 급히 신발장을 뒤져보지만 어울리는 마땅한 신발이 없다. 어떡하지?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아.. 왜 하필 끈이 떨어진 걸까. 역시, 지난번에 그 샌들을 사놓는 거였는데. 그럼 그거 신고 가면 됐잖아.

2주 전쯤, 백화점 행사 코너에서 신어보았던 샌들이 생각났다. 비슷한 디자인이 있으니 내려놓았던 그 샌들, 역시 샀어야 했다.


5시 32분.

지금 나가도 뛰어가면 시간을 맞출 수는 있다. 초면인데 늦는 건 예의가 아니니 시간만큼은 꼭 지키고 싶다. 그렇지만 옷을 갈아입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다른 원피스는 구겨져서 다림질을 해야 하고,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자니 어울리는지 매칭 해 보고 스타일링을 해 볼 여유가 없다.

할 수 없다. 발이 좀 아프지만 하이힐을 신기로 했다. 이걸 신고 달릴 생각을 하니 아찔했지만, 오늘 저녁 몇 시간만 버텨주면 된다.


5시 35분.

힐을 신고 지하철 역을 향해 달렸다. 지하철을 타기만 하면 그때부터 숨 고르고 내 발에도 잠시 평화가 찾아오니 지하철만 잘 타면 된다.


5시 50분.

'어디쯤 오고 계세요? 저는 도착했어요.'

'아, 저 시간을 착각해서.. 5분 정도 늦을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용 ㅠ'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살짝 애교를 넣어 톡을 보내본다.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전 근처에 있을게요~ ㅎㅎ'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스타일일까 아니면 짜증을 감추는 “ㅎㅎ”일까.

어찌 되었든 '천천히 오라'는 소개팅남의 말에 민경은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머리와 화장을 점검하는 여유도 생겼다.


6시 10분.

“혹시.. 최민경 씨.. “

“안녕하세요~”


소개팅남의 첫인상은 카톡 사진과 다르지 않았다. 평범 of 평범. 하지만 어깨가 좁은 편인지, 머리가 큰 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세로로 된 직사각형에 갇힌 느낌이었다.

소개팅남은 미리 알아본 파스타 집으로 가자고 했다.


올 해에만 대체 몇 번째 파스타인가.

민경은 파스타가 지긋지긋했다. 왜 소개팅을 하면 열에 아홉은 파스타집일까. 색다른 곳, 더 괜찮은 곳은 없는 걸까. 고민해봐도 사실 민경에게도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다.

한정식은 왠지 젊은 청춘 남녀의 소개팅에 어울리지 않았다. 일식집은 사회 초년생들에게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중식은 요리 한 두 개 시키면 둘이 먹기엔 양이 너무 많고 쓸데없이 비쌌다. 그렇다고 짜장면을 먹을 수도 없다. 역시 제일 만만한 게 이탈리안이라는 결론이 난다.


“와~ 맛있겠다~”


처음 만난 소개팅남과 할 말도 없고 어색하니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메뉴를 고른다.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 인 셈이다.


소개팅남과의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20대 후반의 직장인 남녀가 소개팅에서 하는 이야기는 뻔하다. 주선자를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부터 회사 얘기, 일 얘기, 취미는 무엇인지, 퇴근은 몇 시인지, 주말에는 보통 무엇을 하는지…


민경은 소개팅남의 회사가 궁금했다. 취준생 시절, 취업카페의 글을 종합해보자면 모두가 가고 싶어 했던 신의 직장 S공기업. 대체 무슨 일을 하면서 연봉이 높은 것인지,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가 더 궁금했던 것 같다.


“일 되게 편해요. 오전이면 그날 해야 할 일 다 끝나고, 오후에는 설렁설렁 놀다가 칼퇴해요.”


소개팅남이 이런 질문은 많이 들었다는 뉘앙스로 약간의 거드름과 함께 웃으며 자랑스레 말했으나, 민경은 약간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워라밸 좋고 연봉이 높다고는 들었지만, 어쩐지 본인 일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S공기업에 들어갈 정도면 굉장히 똑똑하고 일과 인생에 열정 넘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존경하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적당히 리액션하고, 적당히 대화하며 시간이 흘렀다.

소개팅남이 밥을 사서 민경이 커피값을 냈다.


소개팅남은 민경에게 다음 주 수요일 퇴근 후 저녁을 먹자고 애프터를 했다. 수요일은 가정의 날이라 칼퇴가 거의 보장되는 날이라 일단 알았다고 했다. 굉장히 기대되는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번만에 사람을 판단할 순 없으니 만나기로 했다.


소개팅남은 두 번째 만남에서 민경의 생년월일을 물어봤다. 그리고는 다음번 만남 때 사주를 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사주?

민경도 재미 삼아 인터넷에 떠도는 토정비결을 보기도 하고 타로점도 본 적이 있지만 누군가와 사주를 본 적은 없었다.

뭐지? 사주가 좋으면 계속 만나고, 아니면 그만 둘 셈인가? 나에 대한 감정이나 확신보다는 사주를 믿겠다는 얘긴가?


적당한 리액션과 적당한 웃음으로 뒤덮인 대화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민경이 밥을 사고 소개팅남이 커피를 샀다.

소개팅남과의 만남은 두 번째로 끝이 났다.


다음 날,

“잘 만났어? 어땠어?”

소개팅을 주선해준 회사 선배가 민경이 출근하자마자 궁금한 듯 다가왔다.

“괜찮은 분이긴 한데, 저랑은 인연이 아닌 것 같아요~ ^^”

“아 그래..? 아쉽네~ 다음에 다른 좋은 사람 있으면 또 해줄게~”

“네~ 감사해요, 대리님.”


수많은 소개팅의 경험 덕분에 한두 번 만나고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에 더 익숙해졌다. 취업만 하면 바로 남자 친구가 생길 줄 알았는데, 가장 멀리 나간 게 썸이다.

내가 욕심이 많은 걸까? 아니면 주제도 모르고 쓸데없이 눈이 높은 걸까?

이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맘에 안 드는 사람과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하지도 못 할뿐더러, 하고 싶지도 않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민경은 적당한 인 서울 대학교를 나와 시중은행에 취업했다. 문돌이 문순이가 갈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이라는 바로 그 은행.


사실 처음부터 은행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취준생들이 그러했듯 문과생이 갈 수 있는 모든 회사에 지원해보았으나 민경을 선택해 준 딱 한 곳이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물론 합격했을 때에는 꿈만 같았다.

내가 은행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합격 통지를 받고 나니 얼떨떨했지만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며 축하인사도 많이 받고, 부모님도 우리 딸 은행 들어갔다며 자랑스레 주변에 알렸다. “훌륭한 자녀분을 저희 은행으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꽃바구니가 집으로 도착했을 때에는 엄마 아빠와 부둥켜안고 눈물까지 슬쩍 흘렸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러하듯 민경도 대학생활 내내 취업을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해 왔다. 토익과 토익스피킹은 물론, 국내 대기업에서 인턴에 어학연수까지 다녀왔다. 각종 취업스터디는 기본이요, 시사토론 동아리를 들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원래도 인생을 열심히 살고 매사에 최선을 다해왔던 민경은, 회사라는 타이틀이 생기니 더욱 자신감이 넘쳤다. 더군다나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아는 은행에 취업하고 나니 어깨에 뽕이 들어갔다. 마음먹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누구를 만나도 당당했다. 회사라는 커다란 울타리가 나의 새로운 보호막이자 방패이자 나의 이름을 빛나게 해주는 보석 같았다.


이런 내가 딱히 맘에 들지도 않는 아무와 사귈 수는 없다. 나는 반드시 멋진 남자를 만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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