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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Sep 22. 2022

방광염 조심!
날아오는 통장 조심!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04

객장의 대기인원이 5명을 넘어가자 뒤에 앉아있던 한차장이 일어났다. 현서가 속한 빠른 창구는 두 개로, 현서와 다른 직원이 각각 1번, 2번 창구를 맡고 있었는데, 한차장이 창구 바로 뒤로 걸어 나와서 직원들의 모니터와 업무처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현서는 중년 여성 고객의 아파트 관리비 자동이체 등록을 위해 서류 작성 안내를 하고 있었고, 2번 창구에서는 적립식 펀드에 대해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탁탁”


한차장이 아무 말없이 현서의 의자 뒤편을 손가락으로 두 번 쳤다. 아무래도 펀드 가입은 지점 실적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시간도 꽤 걸리는 업무이다 보니 현서 보고 자동이체 등록 같은 실적과 상관없고 간단한 업무는 얼른 끝내고 빨리빨리 ‘고객을 빼라는’ 뜻이었다. 창구에 앉은 고객은 아직 서류 작성 중인데, 뒤에서는 한차장이 레이저 눈빛을 쏘고, 객장의 고객들은 전부 나만 바라보고 앉아있다. 아, 숨 막힌다. 아까부터 소변이 너무 마려워서 이것만 처리하고 바로 화장실 좀 다녀올 참이었는데 이번에도 화장실 가기는 글렀다. 선배들이 방광염 안 걸리게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니 바로 이 말이었다. 화장실을 못 가는 상황이 많이 생기자 일부러 물을 안 마셨더니 이젠 변비로 고생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 힘들다. 이게 대체 뭐지. 화장실은 가고 싶고, 뒤통수는 따갑고.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졌다. 실수라도 하면 안 되는데.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면서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자동이체 등록 완료되었습니다.”


간신히 업무를 처리하고 확인증을 교부했다. 중년의 여성이 자리를 뜨자마자 한차장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현서의 책상 왼 편에 놓인 순번 호출기 버튼을 눌렀다.


“딩동”


 “57번 고객님, 이 쪽으로 오세요.”


본인이 말하지 않아도 스피커에서 57번 고객을 부를 텐데. 한차장은 스피커에게도 현서에게도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고객을 호출해서 현서의 자리로 안내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원망스럽다.


“어서 오세요. 어떤 업무를 처리해드릴까요?”


한차장에 대한 분노를 숨기고 미소를 지으며 고객을 맞았다. 7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고객 한 명이 한 손에는 통장을, 다른 한 손에는 주먹에 분노를 쥔 채 현서의 자리로 씩씩거리며 걸어왔다.


“내가 지난달에 이 자리에 와서 정기예금 해지를 하고 원금이랑 이자를 받았어야 했는데, 원금만 받았어! 이자가 없어! 네가 내 이자 꿀꺽했지! 도둑년! 도둑년!”


그는 통장을 든 손을 현서의 얼굴 앞에 흔들며 소리를 쳤다. 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머리가 띵 하고 아팠다. 큰소리가 나자 객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지점의 모든 눈이 현서에게 쏠렸다.


“고객님, 제가 한번 확인해볼게요. 통장과 신분증 주시겠어요?”

“무슨 신분증이야! 나 기억 안 나? 지난달에 여기서 해지했잖아! 내 신원이 불분명하다 이거야? 신분증이 왜 필요해!”


하루에도 몇 번씩 계좌를 개설하고 해지하는데 이 고객이라고 특별히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귀가 따갑고 심장이 벌렁벌렁 했지만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고객님, 저는 고객님의 정보를 알 수가 없고, 예금주와 일치하는지 확인이 필요해서 신분증을 주셔야 조회가 가능합니다.”


현서는 남성이 창구로 던져 책상으로 날아든 신분증과 통장을 주워서 전산에 고객 정보를 입력하여 해지된 정기예금 계좌의 기록을 확인했다. 만기 해지된 정기예금 천만 원과 이자 약 삼십팔만 원. 원금은 고객의 입출금 통장으로 입금되었고, 이자는 다른 은행으로 이체된 기록이 보였다.


“고객님, 계좌 해지하시고 이자만 따로 J은행으로 이체하지 않으셨어요?”

“무슨 소리야! 이자를 내가 왜 이체해! 누구한테 이체한단 말이야. 내 돈인데! 도둑년이 무슨 소리야!”

“원금과 이자 따로 분리해서 각각 다른 계좌로 넣으신 것 같은데. 여기 보시면 이자를 J은행으로 이체 요청하신 전표가 있어요. 기억 안 나세요?”


남성은 현서가 내민 전표를 유심히 보았다. 계좌번호와 금액, 그리고 수취인명을 살피더니 이내 기억이 난 모양인지 창구를 감싸던 분노의 기운이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아, 이거 이거 내가 이자만 마누라 계좌로 보냈구먼. 내가 분명히 정기예금을 해지했는데 내 통장엔 천만 원만 들어와서 뭔가 잘못되었다 싶었지. 흠흠.”


남성이 헛기침을 했고, 또다시 객장이 웅성거렸다.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되었는데 현서는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저희 직원한테 함부로 얘기하신 거 정식으로 사과하세요.”


큰 소리를 듣고 어느새 현서의 옆으로 나온 지점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남성에게 말했다.


“내가 잘못 봤네. 미안하게 됐어요. 마누라는 왜 나한테 말을 안 해가지고 사람 헷갈리게 하고 난리야!”


애꿎은 마누라를 탓하며 남성이 짐을 챙겨 재빠르게 퇴장했다.


“현서 계장, 놀랐겠네. 고생했어.”

“아닙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화장실이 더 급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앉으니 그제야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며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 삿대질하면서 면전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모르는 사람에게 많은 이들 앞에서 욕을 먹다니. 웅성거리며 바라보던 객장 내 고객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무리 내 잘못이 없었다 해도 그 분위기 자체가 싫었다. 아, 들어가기 싫다. 화장실에 영원히 앉아있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현서는 빨개진 눈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 같이 먹자.’


자리로 돌아오니 메신저가 와 있었다. 현서와 비슷한 시기에 일반직군으로 입행한 동갑내기 직원인 민경이었다. 둘은 나이가 동갑인 것을 알고 말을 편하게 하며 친구로 지내기로 했었다.

12시가 되고, 1차 식사교대가 이뤄졌다. 현서와 민경은 자주 가는 근처의 돈가스 집으로 향했다.


“아까 그 고객 정말 너무했어. 알아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욕을 하고 난리야. 너 그래도 또박또박 응대 잘하더라.”


민경이 돈가스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으며 현서를 바라보았다.


“아까 통장 던지는 거 봤어? 나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되었는데, 정신줄 붙잡고 있느라 힘들었어. 안 그래도 한 차장님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었는데.”

“한 차장님? 왜?”

“빨리 손님 빼라고 내 뒤에 서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더라고. 어찌나 압박이 느껴지던지. 누가 보고 있으면 엄청 부담스럽잖아. 그러다가 아까 그 할아버지가 소리치면서 통장 던질 땐 자기 자리에 앉아있더라. 지점장님 나오시니까 그제야 허둥지둥 내 옆으로 나온 거야.”

“차장님도 참. 안 그래도 객장의 고객들 보면 부담스러워서 빨리 처리하는데 꼭 우리 뒤에 서서 모니터를 보고 있어야 할까? 우리가 창구에서 노냐고.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든데. 그리고 민원성 고객이 왔는데 책임자가 나 몰라라 하는 건 좀 아니지.”

“정말 너무하시다 싶었어. 지점장님께 너무 감사하더라고.”

“고생 많았어. 은행에서 있다 보니 참 별 일을 다 겪는다. 우리 밥 먹고 카페 가서 케이크나 한 조각 먹을래? 힘들 땐 단 거 좀 먹어줘야 해.”

“좋은 생각이야. 갑자기 엄청 당긴다.”


고객 욕도 하고, 상사 욕도 하고, 초콜릿 케이크도 먹었다.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또다시, 내가 은행을 왜 들어왔을까 후회가 되었다. 이제 겨우 2년 차인데 앞으로 계속 다닐 수 있을까? 취업을 위해 처절하게 달렸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합격했을 때 엄마를 끌어안고 소리 지르며 기뻐했던 날은 이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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