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서의 창구에서 중년의 남성이 스무 명에게 자금을 이체하는 전표와 통장을 내밀었다. 받는 사람 메모란에는 ‘급여’라고 적혀있다.
은행원이 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똥오줌 못 가린다’는 3개월의 수습기간을 무사히 마쳤지만 아직도 가끔 똥오줌을 못 가릴 때가 많다. 기본적인 업무는 손에 익었지만 여전히, 당연히 갈 길이 멀다 보니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업무처리를 할 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히 금액이다. 혹여나 직원의 실수로 잘못된 금액이 처리되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다.
타이핑 실수로 0이 하나라도 더 들어간다면, 혹은 덜 들어간다면. 혹은 아예 다른 숫자가 들어간다면.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백만 원, 이백만 원 같은 금액은 숫자가 심플하기라도 하지. 억대 금액에 끝전까지 여러 가지 숫자가 섞여 있으면 혹여나 실수할까 봐 완료 버튼을 누르기 전에 눈이 빠져라 보고, 또 본다. 이렇게 금액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가 간혹 고객이 요청한 ‘메모’ 입력을 잊어버리면 아주 곤란하고 죄송한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붙잡아야만 한다.
‘금액 스무 개 전부 다 맞고, 계좌번호 맞고, 수취인명 정확하고, 메모도 빠짐없이 넣었고, 스무 개의 합산 금액과 고객이 요청한 출금 금액도 일치한다. 그럼 완료!'
한 번 완료 버튼을 누르면 계좌에서 자금이 출금되고, 각 수취인에게 이체가 된다. 완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돌이킬 수 없기에 누르기 전까지 신중할 수밖에 없다. 현서는 아직 신입이라면 신입인지라 완료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혹여나 실수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완료를 누르자 화면에 ‘정상처리’ 글씨가 뜨면서 왼쪽에 있는 통장 프린터기에서 경쾌하게 지직지직 소리가 들린다. 통장이 정리되고, 이체확인증까지 나오면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이체 처리 완료되었습니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웃으며 인사하는 현서를 보고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남성은 짐을 챙겨 떠났다.
현서는 은행 영업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일명 ‘빠른 창구’의 맨 첫 번째 창구에서 일하고 있었다.
밝은 성격에 호감형 외모까지 장착한 현서는 영업점을 방문하는 모든 고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며 인사했고, 고객들도 동료 직원들도 모두 현서를 좋아했다.
“현서 계장, 할 만해요?”
지점장이 창구로 나와서 현서에게 말을 걸었다.
“네, 지점장님. 아직 배울 게 많지만, 괜찮습니다.”
“공부할 것들이 많을 거야. 연수도 꾸준히 듣고 규정도 확실하게 익혀야 해요. 아리송한 것이 있거나 모르겠다 싶으면 혼자서 판단하지 말고 선배들이나 책임자들에게 물어보고.”
“네, 알겠습니다.”
공부에 큰 흥미나 욕심이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늘 보통은 해왔던 현서였다. 아무리 엄마가 공부 압박을 안 하는 스타일이었어도 고등학생 때 받았던 공부 스트레스는 어느 누구와 다를 바 없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내 인생에 더 이상의 공부는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은행에 들어오니 온갖 공부할 것들과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첫 번째로는 업무 규정을 익혀야 했다. 수많은 규정들을 전부 외울 순 없어도 자주 일어나는 일들과 관련된 규정은 외우는 것이 당연했다.
처음 근무를 시작했을 때 현서의 멘토로 지정된 (무서운) 대리님은 규정집 한 권을 현서에게 주며 매일 익혀야 할 분량을 알려주고 외워오라고 했다. 연습게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며, 곧바로 실전에 투입된 현서가 실수 없이 고객 상담을 정확히 해야 한다고 아침마다 간단하게 테스트를 했는데, 혹시나 현서가 답을 하지 못하면 대리님은 ‘이 정도도 못 하냐’는 눈빛으로 현서를 쏘아보았다.
아무리 신입이라도 성인인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선배에게 찍히고 싶지 않았던 현서는 매일 출퇴근길에 지하철에 앉아 형광펜으로 표시까지 하면서 규정집을 읽곤 했다. 하지만 생소한 용어들과 읽고 또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말들로 가득 찬 규정집을 보고 있자면 대체 이것이 한글이 맞는지 궁금해지곤 했다. 하마터면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규정집 위에 토할 뻔했다.
나, 난독증이 있나? 한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은행 규정집은 모국어에 대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로는 상품에 대한 공부였다. 이미 나와있는 수많은 금융상품들, 그리고 각종 정책에 따라 새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금융상품들. 고객에게 설명하고 판매해야 하는 입장에서 상품에 대한 정확한 숙지는 기본이었다.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면 영업점에서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여 아침 회의시간에 상품에 대한 공부를 했다. 직원과 손님 역할을 맡아 상품을 판매하는 롤플레잉을 하며 시뮬레이션도 돌려보았다. 신상품이 나온 다음날부터는 누가 얼마나 많이 판매했는지 매일 실적 체크를 했는데, 아침부터 실적 체크를 당하며 다른 직원들과 비교가 되는 날이면, 특히 나의 실적이 하나도 없는 날이면 전날 밤부터 엄청난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출근길 아침에 부디 경미한 교통사고가 나서 이틀 정도만 입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적도 있었다. 물론 생명에 지장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또한, 업무 하는 중간중간 혹은 마감하면서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지는 공문을 읽고 숙지해야 했다. 공문의 내용은 대개 금리의 변동이나 신상품 안내문을 포함하여 새로운 정책, 바뀐 규정, 연수 프로그램 안내, 특정 금융상품과 관련된 법률의 해석 등 중요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기에 빠짐없이 읽어봐야 한다.
혹여나 너무 바빠서 읽지 못하게 되면 정보력에서 뒤떨어지니 나중에 뒷북을 치는 경우가 많고, ‘공문 안 봤어?’라는 상사의 가시 돋친 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에 현서는 최대한 짬을 내어 공문을 읽어보려 했다.
게다가 본점의 온갖 부서며 지역본부에서 오는 이메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이번 달에는 청약에 집중해보아요>, <우리 본부의 이번 주 펀드 왕은 누구?>와 같은 제목의 특정 상품을 집중적으로 판매해보자는 프로모션 메일, 즉 실적 압박의 메일과 각종 업무 관련 이메일들로 메일함이 꽉 차는데, 휴가라도 가는 바람에 하루라도 메일함을 체크하지 않으면 세 페이지로 넘어갈 때까지 읽지 않은 메일들이 클릭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취득해야 하는 금융 자격증들이 (많이) 있었다. 은행원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자격증들.
주중에는 퇴근 후 도저히 공부할 에너지가 없어 주말에 근처 독서실을 찾아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문제집을 풀었다.
햇볕도 따스하고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 날씨에 사방이 막힌 책상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는 처지라니.
고3 이후 처음이었다.
이게 뭐야. 학교 다닐 때보다 더 힘들잖아. 학생 때는 그저 학교랑 학원만 다니면서 공부만 하고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고 주말에는 좀 놀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주중에는 손님한테 치이고 상사한테 치이고 실적 쪼임 당하고 퇴근시간까지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면서 정신없이 일 하고 나서 저녁마저 기숙사 근처 식당에서 대충 때우는데 주말까지 인강을 들으며 공부를 해야 하다니.
취업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서는 본인의 처지가 짜증 나서 눈물이 났다. 공부가 하기 싫어 펜을 던져버리고 잠시 독서실 밖으로 나와 음료수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연인들, 한 손에는 캐릭터 모양 솜사탕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양털구름도 가을 하늘을 멋지게 수놓았다.
아, 공부하기 싫다. 이런 날 무슨 공부야. 다른 회사도 다 이런가? 아니면 은행이 유독 심한 걸까? 다른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네. 내가 은행을 왜 들어왔을까.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1년 전만 해도 취업준비를 하며 제발 어느 곳이든 나를 받아주기만 해 달라며 독서실에서 인적성 문제집을 풀거나 자소서를 쓰곤 했었는데. 1년 전의 내가 간절히 원했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벌써 과거의 처절함은 잊고 현재의 모습에서 불만을 찾아낸다.
‘능력 있는’ 애인도 없다. 그렇다고 ‘능력 없는’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취업하고 나면 곧바로 멋진 남자 친구를 사귀며 함께 행복한 미래를 꿈꿀 줄 알았는데, 현실은 생각지도 못한 수험생 모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