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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Sep 20. 2022

누가 알았을까
내가 은행원이 될 거라는 걸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03

사실 현서는 처음부터 은행원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채용공고가 뜬 대기업들의 마케팅 부서나 경영지원부서로 원서를 냈다. 경영학도가 갈 만한 곳은 뻔했으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대기업을 가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니까. 하지만 서류 탈락의 고배를 여러 번 마시고 광탈에 광탈을 겪다 보니 점점 멘탈이 나가기 시작했다. 


인서울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래도 우리 지역에선 괜찮은 곳인데.

토익점수가 낮아서? 하긴 난 원래부터 영어를 싫어하긴 했는데. 

인턴경험이 없어서? 수상경력이 없어서? 


지난날이 후회가 되었다. 취업시장이 쉽지 않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받아줄 만한 곳이 없다니.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아니, 현서는 세상을 너무 몰랐다.


현서는 돋보이는 외모 덕에 대학생활을 상당히 편하게 했다. 조별 과제를 할 때에도 학우들은 현서와 함께 하기를 원했고, 특히 남학우들이나 남자 선배들이 현서에게 유독 친절했다. 조원들의 도움으로 조별과제는 늘 점수가 좋았고, 친절한 같은 과 학우들이 빌려준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 덕분에 시험 성적도 꽤 괜찮았다. 시험기간엔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밥을 사주겠다는 선배들도 많았고, 주변엔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난 참 인복이 많고, 운이 좋아.


딱히 큰 노력을 하지 않고도 평탄하고 ‘슬기로운’ 대학시절을 보냈고, 높은 학점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졸업 후에도 핑크빛 미래만 있으리라 착각했다. 당연히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문을 나온 직후, 취업시장은 냉정했다. 아무리 지역에서는 인지도 있는 곳이라 해도 ‘지방대’에 지나지 않았다. 영어 꽤 한다는 선배의 족집게 과외로 받은 인생 최고의 토익점수는 벌써 유효기간이 끝났고, 선배는 졸업 후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인턴이라도 해볼걸. 방학에는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쇼핑을 하느라 바빴지.

이러다 쭉 별 볼일 없는 백수로 살게 되는 것 아닐까. 능력 있는 남자와의 결혼은 고사하고 어느 누군가와 연애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엄마가 나한테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써 줬는데 이대로 백수로 빌붙어 살다 죽으면 너무 면목없는데. 평생 알바만 전전긍긍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동안 딱히 치열하게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껴본 적 없는 현서는 이 상황이 많이 당황스러웠다. 자신감이 점점 떨어져서 주변인들과 연락도 끊었다.


“어, 지혜 엄마, 나야. 별일 없지. 혹시 우리 현서한테 소개시킬만한 사람 없을까? 취업은 아직. 요즘 한창 준비 중이지 뭐. 응응, 알았어. 연락 좀 부탁해.”


엄마는 지혜 엄마에게 현서의 사진을 몇 장 보냈다.

엄마는 대학 졸업 후 취업준비를 한답시고 방에 틀어박혀 점점 폐인이 되어가는 듯한 딸을 보면서 주변에 선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가꾼 ‘꽃’인데. 시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취업, 그게 뭐라고. 여자는 결국 결혼만 잘하면 돼.


직업은 없어도 어린 나이와 빼어난 외모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 분명 좋은 사윗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후 지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 지혜 엄마. 치과의사? 너무 괜찮다. 나이는? 서른다섯? 우리 현서가 스물여섯인데 좀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 정도면 괜찮지.”


역시. 우리 현서의 사진을 보고 마다할 남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치과의사라니. 사윗감 직업으로 완벽하게 맘에 든다. 요즘은 띠동갑도 많은데 9살 차이면 양호하지 뭐. 아, 현서 아빠 임플란트 하나 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사위가 치과의사면 그냥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단숨에 남편의 임플란트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뭐야? 지혜 엄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아?”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돌싱은 아니잖아.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무하네 정말. 아무리 서류상 깨끗하다 해도 그렇지. 이건 그냥 없던 일로 할게. 그래, 요즘 직업이 없으면 결혼도 힘든가 보네. 아니야, 지혜 엄마 그래도 알아봐 줘서 고마워. 또 연락할게.”


엄마는 많이 당혹스러운 듯했다. 지금은 엄마가 취업하고 결혼하던 시기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취업시장은 녹록지 않았고, 아무리 예쁘고 어려도 대학 졸업 후 백수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남자는 찾기 힘들었다. 


사실 엄마는 현서의 취업준비기간이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대기업까지는 무리여도 적당히 괜찮은 중견기업에는 곧장 취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구멍가게에 취직하기엔 우리 딸이 아깝고.


혹시나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이 통화를 엿듣던 현서는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그동안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은 없었는데. 눈물이 났다. 


큰일이다. 어디든 빨리 들어가서 일을 하긴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아무도 모르는 아무 회사나 들어가서 일하기는 자존심이 상해.


소위 ‘잘 나가던’ 대학시절의 현서를 시기 질투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학우 무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 중 몇 명은 이미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SNS를 통해 알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찍어 올린 책상 위의 사원증 사진을 염탐하다 실수로 ‘좋아요’를 눌렀다가 바로 취소할 때는 얼마나 비참하던지. 


내가 이름 없는 아무 곳이나 가서 일한다는 걸 알면 아마 고소해하겠지. 일단 가리지 말고 중견기업 이상의 모든 회사에 원서를 넣어보자. 문과생이 갈 수 있는 모든 부서에는 다 넣어보는 거야.


현서는 채용공고가 나기만 하면 아무 회사나 닥치는 대로 원서를 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본 가장 처절한 시기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취업준비에 매달렸을까. 높은 점수는 아니어도 토익도 갱신하고, 자소서도 일명 ‘칼질’ 첨삭도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늘 서류 탈락.


자소서가 문제일까 아니면 내 스펙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일까.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더 보완해야 하는 것일까. 


취업카페를 뒤지며 고민하던 현서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 서울로 가 봐야겠다. 서울엔 스터디 모임도 많던데, 여기에만 있다간 발전이 없을 것 같아.


현서는 서울 종로에서 한다는 한 취업스터디에 참여의사를 밝히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현서는 스터디에 참여한 지 하루 만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현서가 눈에 띄게 예쁜 편이기는 했어도 서울엔 예쁘고 잘 생긴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스펙까지 훨씬 좋았다. 다들 엄청나게 열정적이었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취업준비를 착착 해 온 이야기를 듣고는 이런 사람들이 대기업에 취업하는구나 싶어 자신감이 또 떨어졌다.


“현서 씨, 은행에 원서 써봤어요?”


함께 취업스터디를 하며 면접 연습을 하던 스터디원 한 명이 현서에게 툭 던졌다. 그의 이름은 이준호라고 했고, 현서보다 세 살이 많았다.


“은행이요? 아뇨. 전 금융권은 생각을 안 해봐서요. 경쟁 엄청 세잖아요. 스펙도 안될 것 같고. 안 뽑힐 것 같은데요. 하하”


현서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은행은 많은 문과생들이 꿈의 직장이라고 부르는 곳이었기에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고 들었다. 안정적인 데다가 꽤 괜찮은 연봉에 여직원들에게는 2년간의 육아휴직이라는 복지가 있는 곳. 그래서 특히 여자 취준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 바로 은행이었다. 하지만 경제동아리나 금융 스터디에 별 관심이 없었던 현서는 금융권은 일단 제쳐놓고 있었다. 고 스펙자들이 몰리는 곳이라 당연히 엄두도 안 났고, 자신도 없었다. 경영학과를 나오긴 했지만 금융업 쪽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경영관리파트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문과니까 한번 써 봐요. 대졸 공채 일반직군이 제일 좋긴 한데, 안 되면 텔러직군도 있으니.”

“텔러직군이요?”

“네. 은행은 일반직군이랑 텔러직군으로 나뉘어져있더라구요. 대학 동기가 작년에 은행 들어가서 물어봤었거든요. 텔러직군은 업무강도는 낮고 승진체계가 일반직군이랑 달라서 연봉이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복지는 같대요. 그리고 아무래도 여직원들을 주로 뽑으니 일반직군보다 경쟁률이 낮은 편이고 채용 절차도 더 심플하대요. 그만큼 스펙에서 힘을 좀 빼도 될걸요.”


은행? 나와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곳인데.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배제해놓고 있었는데. 혹시 모르니 한번 써 봐? 그래. 자소서를 은행에 맞춰서 수정하고 새로이 준비를 하긴 해야 하지만, 한번 써 보자. 써 본다고 손해 볼 건 없지. 언제까지 광탈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


현서는 그 길로 은행 취업스터디를 들어갔다. 자소서도 고치고 새로 첨삭도 받았다. 은행 취업스터디에서는 매주 그 주의 경제뉴스나 금융상식을 공부하고 토론을 하며 면접 준비를 했다. 그렇게 현서는 대학 졸업 후 가장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하반기 취업시장이 열리고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떴다. 현서는 국내의 모든 은행을 포함하여 이름을 들어본 모든 회사에 원서를 넣었다. 방향을 살짝 틀어보았으니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중견기업인 ㅊ제과에서 서류합격 연락을 받은 것 말고 다른 곳에서는 전부 탈락했다. ㅊ제과에서는 실무자 면접에서 탈락했다.


‘귀하의 자질은 충분하오나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각 회사 인사팀에서는 어쩜 저렇게 입을 맞춘 듯 똑같은 멘트로 이메일을 보내는 걸까. 자질이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안 충분하니까 안 뽑았겠지.


이제 각종 회사 인사부에서 보내는 송구한 이메일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메일을 클릭할 때 혹시나 하는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쓰라린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구나, 내년 상반기를 준비해야 하나 싶었던 그때, 현서의 눈에 들어온 공고가 있었다.


<P은행 신입 텔러 모집>


전에 준호가 말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래. 텔러직군에 도전해보자. 지금 물 불 가릴 때가 아니잖아. 이 쪽에선 승산이 있을지도 몰라.


현서는 P은행 텔러직군에 원서를 냈다. 그리고 서류합격의 연락을 받았다. 취업준비를 한 이래로 ㅊ제과에 이어 두 번째로 받아본 서류합격 연락이 은행에서 온 것이라니. 


오? 나 어쩌면 은행원이 될 운명일지도?

현서의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얼른 취업카페에서 P은행 신입 텔러 서류 합격자 면접 스터디를 검색해 연락을 취했고, 총 6명의 스터디원이 모였다. 전부 현서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로 보였고, 당장 다음날 강남의 한 스터디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현서가 스터디룸에 들어가며 인사를 건네자 먼저 와 있던 4명의 스터디원들이 일제히 현서를 바라보며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스캔했다.


뭐지 이 스캐닝은? 경쟁자라 이건가?


묘한 눈빛을 느끼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빈자리에 앉았다. 마지막 스터디원이 도착하자 또다시 스캐닝이 벌어졌다. 이 때는 현서도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스캐닝을 했다.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면접 스터디가 시작되었다. 각자의 스펙과 자소서를 공개하고 세 명식 면접관과 지원자가 되어 모의면접을 진행했다. 면접 후에는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P은행이라는 같은 목표를 갖고 한 배를 탔다는 동질감과 더불어 은근한 견제와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 전부 다 최종 합격해서 동기로 만났으면 좋겠어요.”


모임을 모집했던 모임장이 스터디를 마치며 말했다.


“그러게요.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 좋은 소식으로 다시 만나요.”


전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포커페이스도 대단했다. 과연 우리가 전부 최종 합격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전부 합격하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할까? 우리 중 일부만 합격하게 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하는데. 6명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지만 어쨌거나 웃으며 인사를 하고 스터디를 마무리했다.


 벼락치기로 은행 취업스터디를 한 것 치고는 면접이 꽤 순조로웠다. 현서는 면접관의 질문을 많이 받았고, 거울을 보고 연습한 대로 차근차근 대답을 했다. 대답이 끝나면 항상 엄마가 예쁘다고 칭찬했던 왼쪽 뺨의 보조개를 보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최종 결과 발표날. 오후 5시가 되고,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최종면접까지 간 것은 처음이라 마우스를 잡은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엄마도 덩달아 긴장한 채 거실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처음 보는 합격 화면이었다. 현서는 믿을 수가 없어서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달려 나갔다.


“엄마! 나 합격했어! 나 은행에 취업했어!”

“우리 딸! 장하다! 잘했어! 축하해!”


엄마는 현서를 끌어안았다. 현서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떠올라 눈물이 살짝 고였다. 이제 됐다. 드디어 다 끝났어. 앞으론 꽃길을 걸을 일만 남았어.


인생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은행원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있어서 인생이 더 재밌는 것일까. 현서는 기쁜 마음으로 다음날 예정되어 있었던 취업스터디 모임에는 이제 취업을 했으니 더 이상 못 간다는 소식을 전하고 오랜만에 다리를 쭉 뻗고 설레면서도 편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드디어 취업했다.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은행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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