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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Sep 29. 2022

넌 꿈이 있구나
내가 꾸지 못하는 종류의 꿈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06 




키 큰 외국인 남자 고객이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객장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눈이 쏠렸다. 한국에 아무리 외국인이 흔해졌다 해도 여전히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다.


“저 외국인 고객 민경 계장이 좀 처리해 줘.”

“네, 알겠습니다.”


정 과장과 민경의 대화가 들렸다. 그리곤 이내 민경이 외국인 고객을 자신의 창구로 부르더니 상담을 시작했다. 5번 창구에서 유창한 영어가 들렸다. 상담을 하는 중간에 농담을 주고받는지 간간히 웃음소리까지 들렸다. 민경이가 영어를 저렇게 잘했었나? 새삼 놀라웠다.


점심시간. 현서는 민경과 근처 고등어구이 백반집을 찾았다.


“민경아, 너 영어 되게 잘하더라. 그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네.”

“원래 언어 공부하는걸 좀 좋아했어.”

“멋진데. 아까 그 외국인은 뭐 하러 온 거였어?”

“싱가포르 회사의 국내 지사 지사장으로 온다고, 국내에 법인 설립 절차를 문의하러 왔더라고. 아마 몇 번 더 올 것 같아.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니.”


별 거 아니라는 듯 시크하게 말하며 고등어 살을 발라내는 민경이 달리 보였다.


“아, 여행 가고 싶다. 아까 그 손님이랑 얘기하다 보니 작년 휴가 때 싱가포르 다녀온 생각이 나더라. 올 해는 어디를 갈까나.”

“싱가포르 어때? 좋았어?”

“응, 좀 덥긴 한데 음식도 맛있고 깨끗하고 좋더라. 그리 멀지도 않은 데다 나라 자체가 작아서 3박이나 4박 정도로 여행 가기 딱 좋은 곳 같아.”

“누구랑 다녀왔어?”

“나 혼자.”

“혼자? 혼자 가면 좀 무섭지 않아? 심심하기도 하고. 난 혼자 여행은 못 가겠던데. 더군다나 해외여행은.”

“난 혼자 여행 다니는 거 좋아해. 누구랑 같이 가도 좋지만 혼자 가면 휴가 일정 맞추고 예약하고 할 필요 없이 가고 싶을 때 갑자기 떠날 수 있잖아. 여행지 가서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기도 하고.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랑 만나서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하는 것도 재밌어. 작년에 싱가포르 갔을 땐 유명한 대게요리를 먹으러 갔는데, 1인분을 안 파는 곳인 거야. 식당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보니까 나랑 비슷한 상황인 듯한 프랑스 여자가 한 명 있더라고? 딱 봐도 혼자 여행 온 사람이었어.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었거든. 혹시나 하고 말 걸어봤는데 자기도 혼자라 포기할지 말지 고민이었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너무 잘 됐다고 둘이 엄청 기뻐하면서 대게 2인분 시켜서 같이 먹었어. 너무 웃기지? 진짜 재밌었어.”

“모르는 사람이랑, 그것도 외국인이랑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대단하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뭐. 그날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하다 보니 다음날 일정이 겹쳐서 같이 다녔어. 요즘도 가끔 페이스북으로 연락해.”


민경은 생각보다도 더 용감한 스타일 같았다. 난 절대 저렇게 못 할 것 같은데. 일단 언어가 문제이니 혼자 해외로 간다는 것 자체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모르는 사람, 그것도 외국인이랑 대체 무슨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같이 밥을 먹지?


“나 그때 여행하다가 은행 싱가포르 지점도 갔었던 거 알아?”


민경이 큭큭대며 말을 이어갔다.


“야, 여행 갔으면 관광이나 하지 거길 왜 갔어.”

“난 나중에 해외지점으로 나가서 일하고 싶거든. 싱가포르가 될지 어디가 될지는 몰라도 답사 차원에서 궁금해서 한번 가 봤어.”

“가 보니까 어땠어? 한국이랑 비슷해?”

“나름 중심가에 위치해 있더라고? 근데 아무래도 현지에선 인지도가 낮은 편이고 기업금융 위주로 해서 그런지 한국 지점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더라. 과장이나 차장급 정도 되면 주재원으로 나가고 싶어.”


과장이나 차장.

텔러직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직급은 선임 텔러이니 일반직군으로 전환되지 않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직급인데. 그래서 사실 크게 바라는 것 없이 욕 안 먹을 만큼 적당히 일 하고 적당히 돈 벌면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리고 어쩌면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면 은행을 그만둘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민경이는 꿈이 있구나. 그것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종류의 꿈.


현서는 직장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크게 느꼈다. 고향에서 학교를 다닐 때나 인기 있고 주목받는 입장이었지, 서울에 오니 자신은 그냥 지방대 출신의 은행원, 그것도 누군가는 (난 괜찮은데 본인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쉽다고 느끼는 은행 텔러였다.

그동안 현서를 빛나게 해 주었던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들은 서울에도 많았다. 심지어 더 좋은 스펙까지 갖추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예쁨을 넘어선 멋진 여자들.


점심을 먹고 들어온 현서는 인사부 게시판을 들어가 텔러직의 일반직 전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텔러직으로 입행한 직원이 일반직으로 직군 전환이 되려면 입행 후 최소 5년 이상이 지나야 했고, 1년에 한 번 있는 전환시험에 합격한 후 면접과 그동안의 인사고과에 따라 전환이 가능하다고 나와있었다. 전환이 되면 그 해에 입행한 신입행원 일반직과 같은 연차로 바뀌는 동시에 과거 경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서 연봉도 상향 조정이 된다고 했다. 같이 입행한 텔러 동기만 해도 80명 가까이 되고 먼저 들어온 선배들도 있는데 1년에 50명 정도가 일반직으로 전환된다고 하니 경쟁률이 상당할 것 같았다.


어차피 난 입행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직 대상이 아니긴 하네. 

휴. 그렇지만 스물여덟에 남자 친구도 없는데 능력 있는 남자 만나 결혼을 할 수나 있겠어? 결혼을 해야 은행을 그만둘 수도 있을 텐데.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이 지현서가 왜 이렇게 됐지? 남자 친구 없이 2년이나 지내다니.

나 혹시 평생 은행 다녀야 하는 거 아냐? 생각만으로도 끔찍한데. 휴, 그럼 전환시험에 도전이나 해볼까? 아, 지난달에 떨어진 펀드 투자상담사 자격증 시험도 다시 준비해야 하는데. 그래, 이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보자. 당장은 자격증이 급하니까.


펀드 투자상담사 자격증은 은행원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펀드를 판매할 수 있는데, 현재 현서가 자격증이 없어서 판매를 못 하고 있다 보니 한차장이 눈치를 주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떨어지면 한차장이 직원들 앞에서 망신을 줄 게 뻔했다.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다.

이번엔 반드시 붙어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객장으로 손님이 들어와서 번호표를 뽑았다.


“딩동”


현서가 호출을 했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서 오세요. 어떤 업무세요?”

“아, 저 OTP카드 재발급받고 싶어서요. 어? 현서 씨 아니에요?”


누구지? 기억이 날 듯 말 듯해서 현서가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눈앞의 남자를 기억하려 애썼다.


“저 이준호예요. 기억 안 나세요? 예전에 같이 취업스터디했었잖아요.”


아, 기억났다. 그게 벌써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아주 잠깐 나갔던 취업스터디에서 만났던 사람. 세 번 정도 나갔었나? 너무 짧은 기간이라 기억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 기억나요. 오랜만이네요.”

“결국 은행에 취업하셨군요. 현서 씨 왠지 은행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맞다. 매일같이 광탈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은행에도 지원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해줬던 사람이다. 준호는 K전자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K전자 사옥이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준호 씨는 K전자 들어가셨나 봐요.”

“스터디하던 그 해 하반기에 붙어서 다니고 있어요. 현서 씨 이렇게 가까운 데에서 일하고 계신 줄 몰랐네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밥이나 한 끼 먹어요.”

“네, 그래요.”


번호를 교환했다. 요즘 한창 마음이 심란했는데 취준생 때 알고 지냈던 사람을 만나니 왠지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비록 얼굴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어도.


퇴근하고 난 어느 날 저녁, 준호가 근처에 맛있는 데를 안다며 퇴근 후 지점 앞으로 현서를 데리러 왔다. 준호가 현서를 데려간 곳은 꽤 고급스러운 중국음식점이었다.


“이런 데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팀 회식 때 몇 번 와봤는데 괜찮더라고요. 여기는 어향가지가 시그니처 메뉴예요.”


준호가 메뉴 두세 가지를 시켰다.


“현서 씨가 은행원이라니 잘 어울려요. 뽑힐 줄 알았어요.”

“일반직 아니고 텔러예요. 저 원래 은행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사실 준호 씨가 처음 얘기해주셔서 그때부터 은행 취업스터디 들어가서 준비했어요.”


은행에는 일반직과 텔러직이 있다고 알려준 사람도 준호였기에 직군에 대해 편하게 얘기를 꺼냈다. 아주 잠깐 지난번에 소개팅했던 국어교사가 떠올라 말하면서도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아, 그래서 그때 같이 하던 스터디 못 나온다고 했었던 거였구나. 제가 한 주 못 나갔는데 모임장이 현서 씨 이제 안 나온다고 했었거든요. 궁금했는데 잘 되셔서 너무 좋네요.”

“회사는 어떠세요? 할 만하세요?”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요. 확실히 회사생활이라는 건 짬이 차야 하나 봐요. 현서 씨는요?”

“첫 해 보단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공부할 것도 많고. 그나저나 어향가지 진짜 맛있네요.”


정말이었다. 가지가 맛있다고 느껴본 적은 처음이다. 가지의 재발견이랄까.


“괜찮죠? 여기 오면 어향가지는 꼭 먹어야 해요.”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대화를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서울에 친구도 거의 없어서 만나는 사람이라곤 은행 사람들뿐이었는데.


“현서 씨 되게 잘 드시네요. 보기 좋아요.”

“오늘 맛집을 한 군데 알았네요. 서울에 살기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된 데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 매일 가던 데만 갔었거든요.”

“주말에 심심하거나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얘기해요. 제가 맛집은 많이 알아요.”

“그럴게요.”


대화가 무르익고, 둘은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다. 현서보다 세 살이 많은 준호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며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스타일이었다. 리액션도 좋았고, 대화를 잘 이끌었다. 이에 현서는 왠지 의지할 수 있는 오빠가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취업준비를 하며 광탈에 자신감 하락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때 준호의 제안에 은행 취업을 생각하게 되었듯이, 힘들거나 고민이 생기면 왠지 준호에게 조언을 구하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현서보다 겨우 세 살 많았지만 훨씬 성숙한 어른같이 느껴졌다. 둘은 회사도 가까우니 종종 만나 밥이나 먹기로 하고 그날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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